10. Bookmaker ( 7 )
다나가 제일 먼저 한 일은 신분을 밝히는 것이었다.
"정식으로 소개해 드리죠. 제 이름은 다나 아니스. 무법과 압제에 신음하는 이 땅의 민중을 구하는 고행을 명받고 제도에서 파견된 초출의 순회 율사입니다."
고행, 그리고 순회 율사. 그 말을 들은 드미트리는 눈살을 찌푸렸다. 라달라리아 내부의 사정을 잘 아는 그였기에, 그는 다나가 말하지 않은 것까지 넘겨짚을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는 것은 추천장을 받은 우등 졸업자라는 것이고, 판관 후보생이라는 뜻인데. 그럼 뒤에도 상당한 배경이 있겠군.
다나가 원한 방향 그대로였다. 그는 마음 한구석에 쟁여두고 있던, 살인멸구의 계획을 그 때문에 깔끔히 포기했다. 그리고 빙긋이 웃으며 말을 이어갔다.
"이야, 이거 이 먼 만리타향에서 후배를 만나게 될 줄은 몰랐군요. 몇 기인가요?"
"닥치세요! 키는 쪼끄매가지고 무슨 후배!"
드미트리는 여러 마술의 부작용으로 성장이 멈춰 있었다. 그걸 지적하는 건 그가 가장 싫어하는 일 중 하나였다. 아주 잠시 미세하게 눈꼬리를 떨던 그는, 다시 가식적인 미소를 만면에 띄웠다. 다나는 그 얼굴을 노려보며 말을 잇는다.
"제국 내에서 당신들은 모두의 미움을 사는 공적이나 다름없죠. 배웠어요. 당신들의 재산을 압류하기 위해, 지방에서 만들어진 재산 압류에 관한 특별법이 17건이고 중앙에서 만든 게 14건. 그거 전부 외우느라 머리 박박 긁어서 탈모가 올 지경이었으니 똑똑히 기억하고 있죠."
"이런, 이거 안 됐군요. 내 때는 합계 27건이었는데."
"그리고 당신 때문에 저는 후배들의 모발 건강에 못할 짓을 하게 될 것 같은데요. 만약 내가 이 기소문을 완결해서, 제도에 이게 전송된다면, 제 후배들이 배워야 할 특별 입법 사례가 하나 더 늘어나게 되지 않을까요?"
또 재산 압류를 당하고 싶으냐, 그런 협박이었다.
사소필렌은 자신들의 신도를 침묵하고 방임할 뿐 적극적인 정치적 보호까지는 해주지 않는다. 그래서 탄압당할 정당한 이유와 돈을 동시에 가지고 있는 조디악은, 심심하면 두들겨 패서 돈을 뜯어갈 수 있는 돈주머니 취급이었다.
다나의 말대로, 율사를 포함한 사람들을 학살하려 했다는 증거가 제도에 전송된다면, 옳다꾸나 정치적 의제로 설정해서 사업체를 압류할 준비를 시작할 게 뻔했다. 드미트리는 머릿속으로 주판을 두들기기를 마친 후, 한숨을 내쉬며 말을 꺼냈다.
"좋아요. 요구할 게 있으면 하십시오."
"예?"
"즉시 기소문을 완성하지 않고, 이렇게 중지 가능한 상태로 놔둔 건 뭔가 요구를 하고 싶어서겠죠. 뭘 원합니까? 우선 이놈 목이라도 따 드릴까요?"
지배인을 뻥 걷어차는 드미트리. 지배인은 데굴데굴 굴러 다나의 앞에 철푸덕 엎어졌다. 다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런 건 됐습니다."
"그럼 돈인가요? 10만 루덴. 어떻습니까? 추적당할 염려가 없는 깨끗한 돈으로 10만 루덴을 바로 준비해서 품에 안겨드리죠."
"진짜요? 와!"
함박웃음을 지으며, 반사적으로 반응해버린 다나. 주변의 황당하다는 이목이 다나에게 확 꽂혔다. 그 시선 중에는 드미트리도 있었다. 다나는 큼큼 헛기침을 하곤, 다시 눈매를 가다듬고 말을 이어갔다.
"농, 농담이에요. 그런 돈은 필요 없습니다. 제가 원하는 건 세 개! 세 개를 전부 수용하셔야만 이 기소를 중지해 드리겠어요."
"세 개라, 말해보시죠."
"우선 첫 번째! 이 델로른에서 도박장을 비롯 유흥 시설을 전부! 완전히 번복의 여지 없이 무조건 철수할 것을 요구합니다."
잠시 턱을 매만지며 생각하는 드미트리. 어차피 이 도박장은 파산했다. 추태도 보였다. 구경꾼이 이렇게 많고 이야기로 퍼질 소지가 이렇게 많은데, 그 추태가 퍼지지 않기를 바라는 것은 말이 안 되었다. 명성이 바닥까지 떨어진 도박장을 유지하느니, 차라리 지배인 개인의 일탈로 돌리고 조디악은 깔끔하게 철수하는 것이 나을 것이다. 드미트리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그럼 두 번째는?"
"당신들이 매입한 델로른의 사과 농장을 돌려주세요."
이건 받아들이기 힘든 요구였다. 드미트리는 잠시 금안을 드러내고 눈을 부릅떴다가, 간신히 평정을 유지하고 웃으며 말했다.
"이런, 그건 안 될 일이지요. 소작료 9할 보증, 쟁의권 몰수에 의해 이미 이 분들의 사과 농장은..."
"무슨 소리를 하는 겁니까? 그건 당신들한테 소작을 받을 때나 하는 소리잖아요. 제 말은 그게 아닙니다."
다나는 뢰프를, 이리나를 돌아보며 분명하게 선언했다.
"그냥 이 사람들에게, 당신들이 매입한 사과 농장을 전부 불하해주세요. 이 사람들은 이제부터, 자작농이 될 겁니다."
"예?"
"자작농이요. 그럼 소작을 받는 것도 아니고 쟁의를 하는 것도 아니니까 당신이 징수를 했든 뭘 했든 좆도 상관 없잖아요?"
간단하지만 명쾌한 해답이었다. 사람들 사이에서 탄성이 터져 나온다. 명답이었다. 어떻게 뜯어보아도 답이 없어보였던 법리 속에, 내재되어있던 단 하나의 해답. 다나는 그걸 찾아낸 것이다.
드미트리의 한숨. 짙은 한숨. 그는 혼잣말을 하며, 빙글빙글 제자리걸음을 하기 시작했다. 중간에 지배인이 걸려 거치적거리자 화풀이로 걷어차면서.
"아니, 델로른의 입지는... 장기 계획에..."
"아닌가, 괜찮은가? 그 자와는 계약을... 준비..."
"실패한다면... 아니, 예비안은 있고..."
한참이나 그렇게 맴돌던 그는, 마침내 계산을 마쳤다. 델로른에 대한 권리를 완전히 포기하는 것이, 재산을 압류당해 다른 학파들에게 뜯어먹히는 것보다는 낫겠다는 계산을.
"좋습니다. 받아들이겠습니다."
"좀 더 확실하게 언질을 주시죠."
"매입한 토지를, 전부 균분해서 무상으로 불하하겠습니다. 이 농민들에게."
"우와아아아아아!"
열화와 같은 함성. 이게 꿈인지 생시인지 분간 못해서 눈을 껌뻑이던 사람들은, 아까 아이가 승리할 때 이미 쉬어버린 목을 다시 쥐어짜내 함성을 내질렀다. 이건 사전에 계획하지도 않은 소득이었다.
어제 세 사람이 함께 모여 계획할 때에도 이런 시나리오는 준비되어 있지 않았다. 전부 다나의 임기응변으로 관철한 것이었다. 꿈만 같은 소식을 들은 농민들은, 다나를 에워싸듯 감싸고 방언이 터진 듯 감사의 말을 토해내기 시작했다. 드미트리는 힘없이 선언한다.
"자, 그럼 세번째 요구를 해 주십시오. 이미 저울은 많이 균형을 찾았습니다. 두 번째, 첫 번째 수준의 요구를 한다면 천칭이 기울어 처음부터 다시 검토해야 함을 명심하십시오."
이미 인내심이 한계에 달했다, 큰 요구는 하지 마라. 그런 소리였다. 다나는 두 손을 들어 그들을 진정시키고, 마지막 요구를 시작했다.
"그럼 마지막 요구입니다. 사과하세요."
"예?"
"이리나의 아버지를 모욕한 것, 진심으로 사과하십시오."
잠시 어리둥절한 듯 고개를 갸웃거리던 드미트리는 빙긋이 재수 없는 웃음을 지으며 혓바닥을 놀리기 시작했다.
"그게 조건입니까? 알겠습니다. 정말로 죄송합니다. 제가 한순간의 감정을 이기지 못해 부끄러운 모습을 보였군요. 죄송합니다."
이리나에게 뺀질뺀질 악수를 청하는 드미트리. 다나는 피식 웃으며 말을 이어갔다.
"진심으로 하는 사과라는 건 그렇게 하는 게 아닌데요?"
"예?"
"이렇게 해야죠."
휙휙, 주먹을 내지르는 흉내를 내는 다나. 그 말뜻을 알아들은 이리나는, 씨익 웃으며 주먹을 쥐고 드미트리의 뺨을 후려쳤다.
"윽!"
드미트리는 불의의 일격을 얻어맞고 볼품없이 바닥에 쓰러졌다. 사춘기의 여자아이라고 하나, 농사일을 거들며 단련된 이리나의 근력은 무시할 것이 아니었다. 여자아이에게 얻어맞고 우스꽝스럽게 쓰러진 드미트리를 보고 왁자한 웃음이 터졌다. 도박꾼, 농민을 가리지 않고서였다.
드미트리는 굴욕으로 눈을 치켜뜬 채 부르르 떨었다. 그러나, 그건 아주 잠시였다. 다시 가면 같은 웃음을 뒤집어쓴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선언했다.
"어린 아가씨답지 않게 아주 손이 매섭군요. 미래의 남편이 참 고생할 것 같습니다. 자, 그럼 후처리를 시작할까요?"
후처리란, 가미온의 게임의 형식을 빌려 심장을 건 보증을 성사시키는 것이었다. 동전던지기를 그 유희의 내용으로 빌려 내기가 시작되었다.
동전을 던져서, 동전이 앞면이나 뒷면이 나오면 다나의 승리. 내기의 대가로 다나의 두 가지 요구를 조디악이 받아들여야 하고, 옆으로 서면 드미트리의 승리. 대가는 다나가 물 한 잔을 준다. 그런 조건이었다. 다나가 이길 확률 99.9%. 사실상 계약의 보증만을 위한 형식적 내기다.
"그럼 던집니다!"
휙. 동전은 앞면이 나왔다. 그 순간 계약은 성립되었다. 이것을 어기려 하면, 드미트리를 비롯 이 도박장에 있는 조디악의 관계자 전원의 심장이 터지게 될 것이다. 다시 한 번 열화와 같은 성원이 터지고, 사람들은 모여들어 다나를 헹가래치기 시작했다.
그 소동에서 드미트리만이 소외되어 있었다. 가면 같은 웃음을 지으며 심지어 박수까지 몇 번 친 드미트리는, 새빨갛게 손자국이 남은 얼굴로 옷자락을 휘날리며 휘적휘적 도박장 바깥으로 빠져나갔다. 초라한 모습이었다.
그 초라한 모습을 뚫어져라 응시하고 있는 눈이 있었다. 아이였다.
"자, 그럼 우리 성녀 다나 아니스님의 헹가래는 이쯤 하고, 아름답고 천사처럼 용맹하신 집행관님! 어디 계십니까!"
어지러울 정도로 다나를 내던지고 나서, 아이를 찾는 사람들. 그러나 아이는 이미 도박장에서 사라져 있었다. 사람들은 어리둥절해서 눈을 껌뻑였다.
*
아이는 드미트리를 뒤쫓고 있었다.
호위도 잃어버리고 휘적휘적 어두운 골목으로 스스로 향한 드미트리. 그는 빙긋 웃으며 뒤를 돌아보고 외쳤다.
"이제 그쯤하고 나오시지요. 당신에게는 암살자의 흉내는 어울리지 않는 것 같습니다."
다음 순간, 드미트리는 목을 붙잡혀 뒤로 한껏 꺾인 채로 두 팔에 구속되어 있었다. 아이의 팔이었다. 그 목 끝에서는, 방금 두냐의 암살자를 처치하고 만들어낸 십자 형태의 송곳검이 빛난다.
"그래요? 어울리나, 어울리지 않나 한 번 확인해 볼까요?"
싸늘하게 말하는 아이. 미제리코드의 시커먼 칼날이 번뜩인다. 그러나 드미트리는 예상했다는 듯 평정을 잃지 않고, 여전히 웃으며 아이를 쳐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당신은 법을 준수하고 수호해야 할 율사의 의무를 저버리고 한낱 도박장의 개로나 전락했습니다. 그리고 법의 정신 대신 궤변하는 법이나 배워서, 서민의 고혈을 빨아먹는 데에나 그 재주를 쓰고 있죠."
"그러려고 글을 배웠습니까? 그따위로 글을 배워 사용하느니, 이름자 쓰는 법만 배움보다 못하죠."
"제가 볼 땐, 당신이 죽을 이유는 그걸로 족한 것 같은데요."
그 목소리는 이미 결심이 선 듯 흔들림이 없었다. 착한 마술사는 가급적이면 죽이지 않겠다고 맹세한 아이였지만, 드미트리처럼 명백한 악을 보고도 망설여 자비를 베풀 생각은 없었다. 드미트리는 자신의 목숨이 경각에 달린 상황에서도 조용한 어조로 청원했다. 변호의 기회를.
"지금 성급하게 저를 죽이시면 아주 후회하게 될 겁니다. 그 이유를 말씀드려도 되겠습니까?"
"그것 정도는 허락해드리죠. 해 보세요."
"법, 법이라, 도박장의 개라고 하셨습니까."
몸을 비틀어 아이의 품에서 빠져나가는 드미트리. 그리고 벽에 기대듯 주저앉아, 하늘을 바라보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내게는 사법 또 입법보다 카드와 주사위, 도박과 기복이 뭇 생령을 대함에 더 진실로 정직한 것처럼 보입니다."
"예?"
천천히 눈을 뜨는 드미트리. 황금을 녹여 주조한 듯한 그 금색의 눈동자는, 지금까지의 가식적이고 비인간적인 웃음과 다른 것을 품고 있었다. 감정이었다. 자신으로부터 흘러넘친 감정.
"세계에 대해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하고 그저 내일은 날씨가 맑기를, 나팔꽃이 피기를 고대하고 나풀나풀 날아가는 나비. 아무리 인간의 이성이 핍진토록 진력한들 사람은 그 이상이 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할 수 있는 최대의 진지한 일이라고는, 복을 비는 것뿐이겠지요."
"공정한 판결을 입에 담으셨습니까? 법 앞에 선 대부분의 생령은, 그저 그 나비처럼, 자신은 이해할 수 없는 법문의 나열이 부디 자신에게 자비롭기를, 자신의 손을 들어주기를 기원할 뿐 아무것도 결정할 수 없습니다. 그 인위의 허울 같은 법리의 의율이 어떤 추악한 힘과 힘의 투쟁에 의해 일어나고 사그라들며 마침내 무언가를 불사르는지, 아무것도 모른 채 그저 나풀거릴 뿐이란 말입니다. 당신은 나에게 왜 위선하지 않았느냐고 책망하는 겁니까?"
잠시 복잡한 표정을 짓던 아이는, 다시 드미트리의 멱살을 붙잡고 미제리코드를 들이대며 씹어뱉듯 말했다.
"요설로 내 귀를 홀리려 해봤자 허사입니다. 자랑은 아니지만 난 무식해서 말이에요, 당신의 그 궤변을 알아먹고 홀릴 만한 지능도 없습니다. 간명하게 말하십시오."
드미트리는 그 말을 듣더니, 갑자기 배를 붙잡고 웃기 시작했다.
"아니요, 아니오. 그건 현명한 겁니다. 그래요, 자기가 무식하다는 걸 인정하는 게 얼마나 대단한 지혜를 필요로 하는 것인지, 모르기에 세상은 이 꼬라지인 거지요."
그리고 뇌까린다.
"어떤 민족이 있었습니다."
"기본권, 자유권, 행복 추구권, 모든 민초에게 허여된 그 권리가, 그 민족에겐 허락되지 않았습니다. 아무리 법전에 명시되어 있다 한들, 그 민족에겐 그 모든 것이 존재하지 아니함만 못했습니다."
"제 이름은 드미트리 즈다예비치, 본디 주어졌어야 할 이름은, 드미츄어 즈다키렌."
"우리의 선조는 키레넨의 일원입니다."
아이는 눈을 부릅떴다. 키레넨이라면, 마레에게 들었던 그 집 없는 민족이었다. 그들은 공통적으로 짙은 갈색 톤의 피부를 하고 있다고 들었다. 그러나 눈 앞의 드미트리는 어떻게 보아도 그들과는 공통점이 없어 보였다. 그 의문의 시선을 눈치챘는지 드미트리는 곧바로 그것을 해소해주었다.
"하얀 돼지새끼들과 피를 섞고 섞으며 마술로 혈통을 세탁해 이렇게 비겁하게 살아남았지만, 그 고향 잃은 자들의 혼은 아무리 문질러 닦아내도 지워지지 않고 내 안에서 맥동하고 있습니다. 나는 그 혼이 뜻하는 바를 행할 뿐입니다."
"조디악은 천 년이 다시 또 천 년을 헤매도록 기댈 곳 없이 방황한 우리 겨레가 얻은, 최초의 둥지입니다. 그것을 키우고 가꾸어 우리 모두를 보듬을 수 있는 국가를 세우는 것, 우리에게도 긍휼한 법전을 만드는 것, 그게 어떤 악을 딛고서라도 이뤄야 할 나의 사명입니다."
즉, 이렇게라도 돈을 벌고 세력을 불려 국가를 세우기 위한 초석을 만드는 것이 자신에게는 가장 지고한 목적이기에, 수단에서의 악덕은 용인하겠다. 그런 변명이었다. 혐오감이 치솟았다. 아이는 한 손으로 드미트리의 멱살을 붙잡고, 벽에 쾅 짓찧었다.
"변명은 그게 다입니까? 당신들의 그 잘난 국가를 세우기 위해서라면, 다른 사람들은 팔병신이 되든 망령이 되든 개의치 않는다는 게 변명이에요? 고해가 아니라?"
드미트리는 황금색 눈을 치켜뜨고 빈정거리듯 말한다.
"당신은 식사로 돼지의 고기를 먹었겠지요. 아무 죄의식 없이 돼지의 고기를 먹으셨겠지요? 그것도 고통을 느끼고 더운 피를 가진 생물인데 왜 그랬습니까. 그것에 공감하지 않기 때문 아니겠습니까."
"이천 년의 세월을 견디면서, 우리 민족은 우리 민족을 제외한 모든 것에 대하여, 공감하는 법을 잊어버렸습니다. 아니, 박탈당했습니다. 우리를 이렇게 만든 건 우리 자신이 아닙니다. 당신들이 몰아세웠습니다. 어떻게 보면 당신들이 선택한 길이지요."
"나에게는 우리 민족을 제외한 모든 것이 그 돼지와 같습니다."
몇 번을 벽에 부딪히면서, 흘러내린 하늘색 앞머리가 요사스런 금안을 어지러운 수양버들처럼 감싼다. 민족만을 위해, 지위와 명예가 보장된 율사의 자리까지 내던지고 파계 율사가 된 건가. 그 모습은 일견 처연해 보였다. 하지만 아이는 입술을 짓씹고, 최후 판결을 내렸다.
"닥쳐요! 당신은 똑똑한 척하지만 멍청이군요. 이리나랑 뢰프 아저씨가 당신 민족한테 대체 뭘 했는데요? 사람하고 집단도 구분을 못 해요? 그게 변호의 전부라면, 제가 지금껏 들었던 어떤 자기변호보다도 멍청한 변호입니다. 그럼 평안하시길."
결심을 마치고 미제리코드를 집어 드는 아이. 하지만 드미트리는 크게 웃으며 선언했다.
"아니요? 당신은 저를 죽이지 못합니다. 사실 저는 당신이 이렇게 나올 거라는 걸 예상했단 말입니다. 그래서 굳이 힘을 써서 제 마술로 그 아가씨와의 계약의 보증을 청했던 거죠."
"예?"
"그 보증은 제 마술에 의해 유지됩니다. 제가 죽으면, 그 보증의 마술도 깨집니다. 당신들이 이 땅에서 사라진 뒤에, 조디악이 다시 이 땅을 집어먹어도 아무 말도 할 수 없다 이 말입니다."
"그, 그런... 거짓말하지 마세요!"
"거짓말? 거짓말이 아닙니다. 곧 알게 될 겁니다. 어차피 당신들의 행동은 이 땅의 대세에는 아무런 영향이 없었습니다. 몇 명의 소영웅을 만들어 미담의 동화책을 만들고 진통제를 놔줬을 뿐, 그 진통제조차 몸을 좀먹는 독약일 뿐인데. 뭐, 그래도 그 진통제를 놓는 게 당신들에게 허락된 최대한의 역할이겠지요."
도발이었다. 오히려 드미트리가 그런 식으로 나와버리는 바람에, 아이는 함부로 손을 쓰기 힘들어졌다.
"어때요, 죽여보시겠습니까?"
목을 쭉 내뻗는 드미트리. 아이는 부들부들 손을 떨다가, 드미트리를 바닥에 쾅 내던졌다.
"이래서 나는 마술사라는 족속이, 싫어. 꺼지세요."
그러나 드미트리는 빙글빙글 웃으며 전혀 예상하지 못한 말을 꺼냈다.
"아, 그렇습니까? 이것 참 안타깝군요. 나는 당신이 아주 좋은데 말입니다."
"예?"
"어떻게 표현해야 할까, 그래, 진부하지만 첫눈에 반했다고도 할 수 있겠죠."
어이가 없어서 눈을 껌뻑거리는 아이. 자신의 옷차림을 내려다보고 안색을 딱딱하게 굳힌다. 설마 이 자는 자신을 여자로 생각하고 있는 건가? 그런 기색이 보이자, 드미트리는 배를 붙잡고 웃어젖혔다.
"아니, 여염집에서 흔히 일어나는 것 같은 번식을 위한 애정, 그런 공서적 합일에 관한 염정이 아닙니다. 당신이라는 인물의 뒤에서 선연히 반짝이는 광휘에 반했다 이 말입니다."
그는 아이에게 다가와서는, 아이의 뺨을 툭툭 어루만지며 선언했다.
"당신에게는 우상이 될 수 있는 자질이 있습니다."
"우,상?"
그 손길은, 마치 조각상을 매만지는 듯한 손길이었다. 예술품을 만지는 듯한 행위.
"아름다운 미색, 진심이 전해지는 미성, 강인한 힘, 종파가 없다는 비천한 출신. 전부 영웅설화에나 등장하는 영웅의 것입니다. 솔직히 반영웅주의자인 저조차 그 장엄함에 잠시 홀릴 정도니 그 위력은 두말할 나위가 없지요."
"돈과 황금으로 온몸을 처발라야 얻을 수 있는 것, 아니, 그래도 얻을 수 없는 위대한 자질을 당신은 아주 당연하게 가지고 태어나 지켜내고 있습니다."
"갑자기 무슨 역겨운 칭찬입니까? 치우세요!"
드미트리의 손을 쳐내는 아이. 드미트리는 그러나 빙긋빙긋 웃으며, 지금까지 중 제일 흥분한 표정으로 말을 이어갔다.
"마술사가 아니면서도 가장 강한 여덟 성좌들. 그들을 물론 알고 계시겠죠."
아이는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드미트리는 점점 더 진한 웃음을 지으며 말한다.
"삿된 존재의 땅으로 십자군이 일어서는 날이 온다면, 그 선봉에 나서겠노라고 서약하고, 여덟 개의 성유물을 나눠받은 마술사 아닌 여덟 강자들."
"성도 8궁."
"6위계에 달하는 힘을 가지고, 전부 어느 학파나 세력의 빈객 노릇을 하고 있는 강자들이지요. 그들은 하나같이 마술사로 신앙의 힘을 받은 것이 아니라, 이름 없는 민초 사이에서 일어났습니다. 그렇기에 민중들은 그들을 자신에 속한 자로 여기고 사랑하며 애정합니다."
"애정...우리가 절대로 얻을 수 없는 애정을."
아이는 그 순간 드미트리가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인지, 그 윤곽을 대충 이해할 수 있었다. 이들은 워낙 입지와 이미지가 좋지 않기 때문에, 그 이미지를 개선해줄 우상을 원하고 있는 것 같았다. 드미트리는 그 낌새를 눈치채고 고개를 꺾으며 말한다.
"우리도 한 번 돈을 잔뜩 싸들고 그들을 초빙하려 시도했으나 매몰차게 거절당했습니다. 뭐, 당연하겠죠. 그래서 방침을 바꾸기로 했단 말입니다."
"성도 8궁이 될만한 자를, 내부에서 길러 육성하기로 말입니다."
"저는... 그 인재를 채용하는 역할도 겸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당신은 제가 보았던 어떤 사람보다도 더 성좌가 될 자질이 충분해 보이는군요."
"이 세상의 모든 부와 명예를 약속합니다. 우리의 동료가 되는 건 어떻습니까?"
"역시 마술사답게, 안전할 것 같으니 바로 혓바닥을 놀려 기만을 시작합니까? 헛소리 한 번 길게 하시는군요. 저리 가세요."
발로 드미트리의 배를 뻥 걷어차는 아이. 드미트리는 배를 부여잡고 뒤로 물러서더니, 하늘을 보고 웃어젖혔다.
"아, 이게 짝사랑인가. 정말 애달프군요."
"소름 끼치니까 꺼지라구요! 한 번만 더 그렇게 접근하면 죽여 버릴 겁니다!"
"알았어요, 알았어요. 하지만 명심해두시길 바랍니다."
드미트리는 생전 처음 겪는 폭력으로 만신창이가 된 몸을 이끌며, 골목길을 빠져나간다. 그리고 사라지기 직전 뒤를 돌아보고 선언했다.
"우리는 동료가 될 겁니다. 반드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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