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증명 ( 4 )
오래된 유령 저택.
법정에서 빠져나간 1위계 율사가 도망친 곳은 그곳이었다. 제 딴에는 나름 근거를 가지고 한 행동이다.
"이, 이곳에는, 함정도 있고, 안전해."
부패한 율사가 뒤 구린 거래를 할 때마다 접선 장소로 사용했던 곳이 이곳이기 때문이었다. 그 저택의 2층, 먼지가 쌓인 벽에 손을 대고 기대 헉헉대며, 스스로를 위안하려는 듯 독백하는 율사. 그러나 그 보잘것없는 위안은 아래층에서 문이 덜컹 열리자마자 깨졌다.
"히이이익!"
림의 힘을 빌어 율사를 뒤쫓아온 아이가, 안도할 틈조차 주지 않고 저택에 들이닥친 것이었다. 율사가 내지른 비명은 그가 어디에 있는지조차 알려주어 버렸다. 거침없이 계단을 타고 올라오는 발소리.
"윽?"
그리고 아이가 율사가 숨어 있는 방에 들이닥치려는 순간, 갑자기 발 밑이 움푹 파이며 깊은 구멍이 드러났다. 함정이었다. 독이 발린 창이 바닥에 잔뜩 꽂혀 있는 함정.
"걸렸구나! 죽어! 죽어버려라!"
이 율사가 쥐고 있던 실낱같은 희망이 바로 그 함정이었다. 득의에 찬 미소를 지으며, 아이가 쇠꼬챙이에 꿰뚫린 소시지 꼴이 되어있기를 바라고 구멍으로 머리를 들이미는 율사. 그리고 표정이 일그러졌다. 구멍 안에는 아무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뭐야!"
"뭐긴, 등신아. 그 정도의 실력자가 이따위 조잡한 함정에 넘어갈 거라고 생각했냐?"
열여섯쯤 되었을까, 앳된 소녀의 앙칼진 목소리. 그 목소리는 율사의 등 뒤에서부터 울려퍼졌다. 아까 아이를 뒤따라 법정을 빠져나왔던, 검은 후드를 뒤집어쓴 어두운 톤의 은발 소녀. 그 소녀의 목소리였다.
"으아악!"
그리고 율사는 함정으로 떨어졌다. 그 소녀에게 등을 걷어차였기 때문이었다. 푹! 듣기에도 끔찍한 관통음이 울린다.
"어때, 괜한 참견이었냐? 그래도 나도 조금쯤은 나서고 싶어서 말이지."
소녀는 아이를 보고 장난스러운 어조로 말한다. 그녀는 아이를 공주처럼 두 손으로 받쳐 안고 있었다. 아이가 함정에 떨어지려는 순간, 그녀는 신속하게 뛰어나와 아이를 안아들고 도약해 율사의 뒤에 착지했던 것이다. 정말로 괴물 같은 속도였다.
감탄이 나오는 솜씨. 하지만, 지금은 그 속도에 감탄할 틈이 없었다.
"림, 클리브 솔리스!"
율사가 사망하자, 그 살인범을 고발하는 금색의 법문이 함정에서 줄기줄기 솟구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저게 완성되어버리면, 요 며칠간 아이가 라달라리아를 적대하지 않기 위해 쌓아놨던 모든 것이 물거품이 되어버릴 것이었다.
"흡!"
도약해 클리브 솔리스를 횡으로 크게 휘두르는 아이. 다행히도, 이 유리의 검은 금색의 법문을 생선살처럼 쉽게 베어 넘겼다. 깨져 흩어지는 법문. 착지한 아이는, 그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안심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고통에 찬 신음을 흘렸다.
"저기 말야, 아까부터 궁금했는데 그 검 뭐야? 구경 좀 하자."
"윽!"
후드를 내리고 얼굴을 드러낸 그 은발의 소녀가, 정말로 궁금해 죽겠다는 듯한 표정으로 달려들어 아이의 손에서 억지로 클리브 솔리스를 빼앗았기 때문이었다. 어지간한 힘이었다면, 괴력을 가진 아이가 칼을 빼앗길 리가 없다.
하지만 빼앗기고 말았다. 아이조차 그 아귀힘에 신음을 할 정도로 엄청난 힘이 손을 비틀었기 때문이었다.
"뭐야 이거, 날이 하나도 안 서 있네? 이거 장난감 아니야? 이걸로 어떻게 그렇게 싸운 거야? 응?"
겁도 없이 클리브 솔리스의 검날을 손가락으로 슥 훑어보더니, 탄사를 내지르는 소녀. 방금 처음 본 사이인데도, 무슨 십 년은 된 친구처럼 허물없는 행동이었다. 아이는 잠깐 이 소녀가 내가 알던 사람인가, 진지하게 고민을 했을 정도였다.
"어!"
아이는 클리브 솔리스를 거두어들였다. 소녀의 손에 들려 있다가, 안개처럼 흩어져 사라지는 정명의 검. 소녀는 놀라 탄식한다. 그리고, 고개를 돌리자마자 검 끝을 보았다. 레바테인의 검 끝이었다. 아이가 소녀의 목에 들이댄 것이었다.
"그런 얘기를 할 때가 아닌 것 같은데. 넌 누구지? 왜 멋대로 나한테 아는 척을 하는 거야? 대답해."
싸움을 거는 것과 같은 행동. 하지만 소녀는 여전히 씨익 웃을 뿐이었다.
"내 이름은 에바 후이눔. 의적이다."
"뭐?"
그 황당한 자기소개에 놀라 검끝을 느슨하게 늘어뜨리는 아이. 그러나 그녀는 당당하게 가슴을 피더니 말을 이어갔다.
"의적이다! 그리고 비밀 조직의 일원이기도 하지. 나도 그 재판에서 저 재수 없는 콧수염쟁이 놈들을 쳐죽이고 아이들을 구하기 위해 대기하고 있었다!"
아이가 대충 예상하던 답안들을 아득히 초월하는 답안이었다. 아이는 조금 다른 대답을 예상하고 있었다. 자신을 추적해왔다거나, 복수하러 왔다거나. 그 이유는 간단했다.
'어린 순례자야, 속지 말거라. 저 여자는.'
"알고 있어."
그 기운으로 보았을 때, 이 여자는 어떻게 보아도 두냐의 암살자가 분명했기 때문이었다.
그것도, 저번에 보았던 4위계의 암살자보다 강한.
"어디, 그럼 나도 네 얼굴 좀 보자. 와!"
그 대답에 어이가 없어진 아이가 멍하니 서 있는 동안, 에바는 또 달려들어 멋대로 아이의 가면을 벗겼다. 그리고 드러난 얼굴을 보고 탄성을 질렀다.
"뭐야, 너 여자였어? 아, 아니겠구나. 목젖이 있네. 미안해. 앉을래? 여기 먼지 없고 깨끗하다."
그리고는 아이의 주변을 빙글빙글 돌며 두서없이 조잘댄다.
마치 주인을 귀찮게 하는 강아지 같은 행동이었다.
*
루나틱 커넥션.
에바는 자신이 그런 이름의 비밀결사의 일원이라고 소개했다. 자랑스럽게.
"비밀 결사라, 그런데 그렇게 함부로 말해도 되는 거야?"
의심스럽다는 듯 눈썹을 들어 올리며 반문하는 아이. 당연한 의심이었다. 세상천지 어떤 비밀 결사의 조직원이 이렇게 쉽게 자기 정체를 드러낸단 말인가? 에바의 행동은 그런 진중한 조직원의 행동이라기보다는, 어린아이가 소꿉장난을 치며 보이는 행동에 가까웠다.
"괜찮아! 마음에 맞는 동지를 포섭하고 싶을 땐 얼마든지 말해도 괜찮다고 그랬어."
아직 통성명밖에 나누지 않았는데도, 이 고양이 같은 눈을 한 소녀의 마음속에서 벌써 아이는 상당히 가까운 사람이 되어 있는 모양이었다. 생긴 것은 고양이를 연상시키는 얼굴상이면서도, 하는 짓은 굉장히 강아지 같은 사람이었다.
"너도 알지? 이 도시를 비롯해서, 이 일대의 도시 몇 개가 반역향으로 찍혀 있다는 거."
알고 있었다. 몇백 년 전, 제국이 혼란에 빠진 틈을 타 그 도시들은 연대하고 독립을 선언했다. 그리고 그 혼란이 가라앉기까지 백여 년 간이나, 그 독립을 유지하고 번성했었다. 그리고 제국의 혼란이 가라앉은 지금. 다시는 그런 성공 사례를 만들지 않겠다는 의도의 보복을 받아 이렇게 무법지대가 된 것이다.
"그 독립! 자유의 투쟁을 뒤에서 조장한 결사, 그게 바로 우리 루나틱 커넥션이야!"
으스대듯 가슴을 펴며 말하는 에바. 하지만 아이는 여전히 의심스럽다는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런 거대한 일을 저질렀다기엔, 정말로 처음 들어보는 조직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런 시선을 아는지 모르는지 에바는 들떠서 말을 이어간다.
"이 일대는 그 하레하둔 산맥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그래도 신기가 풍부해. 그래서 괴물도 많고 흡혈귀나 변신인간 같은 아종도 많지. 그 학대받고 소외받던 사람들이, 독립을 염원해서 하나의 조직을 만들었어."
루나틱 커넥션은 그런 이들이 만들었기에, 비밀스럽게 만들어지고 또 유지될 수밖에 없는 조직이라고 했다. 그들의 표어 역시, 이 도시의 어귀에 놓여 있던 표지석에 적힌 문구. 그것과 같다고 했다. 신이 없는 세상에서는 모든 것이 허용된다는 문구.
"제국은 제국의 국민 모두의 것인 척 위장하고 있지만, 사실 모두의 것이 아니야! 오직 섬길 신을 가진 마술사들의 것이지. 우리는 그런 제국의 일부를 덜어내서, 섬길 신이 없는 사람들한테도 있을 곳을 주려는 조직인 거야. 알겠어?"
에바는 장난감을 자랑하는 어린아이처럼 눈을 반짝이며 아이에게 얼굴을 들이댔다. 그 근거 없는 친밀감이 부담스러워서 아이는 고개를 돌렸다.
"글쎄, 잘 모르겠어."
"왜 몰라! 너라면 알 수 있잖아. 왜냐면..."
에바는 심호흡을 하더니 씩 웃으며 말한다.
"너도 인간이 아니니까!"
그리고는 아이의 손을 집어 들더니, 코를 들이대고 냄새를 맡는다. 그리고 다시 고개를 주억거린다.
"나도 마찬가지야. 나는 옅지만 늑대 인간의 피가 섞인 혼혈이야. 그래서 냄새로 알 수 있어. 네 살에서는 인간의 냄새가 아닌 냄새가 섞여 풍기는걸."
아, 그래서였나. 아이는 그제서야 이 소녀가 왜 그렇게 처음부터 자신을 동지처럼 대한 것인지를 이해했다. 루나틱 커넥션인가 하는, 그 이상한 인간 아종들의 조직으로 끌어들이려는 이유도. 그 이유를 이해하자마자, 마음이 아주 차갑게 가라앉는다. 아이는 싸늘하게 잘라 말했다.
"난 인간이야."
"응? 거짓말 하지 마."
"그렇다면 그런 줄 알아. 넌 참 무례하구나."
"어... 난 그냥, 친해지고 싶어서."
싸늘한 아이의 목소리. 에바는 그제서야 자신이 말실수를 했다는 것을 깨닫고, 고개를 푹 숙였다. 혼난 강아지가 귀를 접는 것 같은 동작이었다. 그 동작에는 힘이 있었다. 모질게 대하기 힘들게 만드는 힘. 아이는 한숨을 내쉬고 묻는다.
"애당초 네 말만 믿고 그런 영문도 알 수 없는 조직에 가입하는 게 말이 안 되잖아. 우선 네가 그 율사를 죽이려고 거기 숨어 있었다는 것도 의심스러운데. 뒷수습은 어떻게 할 예정이었어?"
아이의 추궁에 에바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묻는다.
"뒷수습?"
"모든 율사는 그 심장에 고발의 법문을 새겨넣게 되어 있어. 심장이 작동을 정지하면, 그 법문은 그 육체에 가장 마지막에 해를 끼친 사람의 이름을 적고 제도로 전송된다고. 그리고 피의 보복이 시작되지. 방금도 내가 그 법문을 깨부수지 않았더라면, 나나 너는 지금쯤 라달라리아의 적으로 찍혀 있었을 거야."
생전 처음 듣는 소리라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뜨고 아이의 말을 듣는 에바. 아이는 어이없다는 듯 덧붙였다.
"그 뒤처리 수단이 있었을 거 아니야? 동료라든지, 계획이라든지..."
"없었어!"
"뭐?"
"그냥 죽인다. 그리고 라달 뭐시기에서 암살자가 오면, 그 놈도 죽인다! 그게 내 방식이야."
제 딴에는 제법 멋진 말을 했다는 듯이 또 가슴을 펴고 으스대는 에바. 하지만 그 말 때문에, 아이의 마음속에선 드디어 하나의 그럴듯한 의심이 싹트고 말았다.
이 여자애, 혹시.
"바보 아니야?"
"아니야!"
자신도 그런 측면으로 신경을 쓰고 있었는지, 무의식적으로 바보라는 말이 나오자마자 격렬하게 반응하는 에바. 아이는 계속해서 몇 가지 질문을 더했다.
"그럼 그 조직이라는 건 그렇게 허술한 곳이야? 잘못 걸리면 조직 전체가 와해될 수도 있는데, 정의감 때문에 그따위 바보같은 계획을 허용할 정도로?"
"저, 그게, 어..."
우물쭈물대는 에바. 아이는 또 한숨을 내쉬었다.
"단독행동이었구나? 말 안 듣고 그냥 튀어나왔던 거지?"
"사실 커넥션에선 그 마술사 시체 수레만 확보하라고 했는데... 임기응변이지. 임기응변."
"너 임기응변이 무슨 뜻인지는 알아?"
"알아!"
"한 줄로 말해 봐."
아이도 지식이 그렇게 많은 편은 아니지만, 마레를 만난 이후로 틈틈이 책도 읽고 공부도 하면서 이제 평균적인 열여섯 살의 지식 수준에는 도달한 상태였다. 그러나 이 동물 같은 소녀는 그런 상식이 한참 부족해 보였다. 그녀는 그 말을 듣고 땀을 뻘뻘 흘리더니, 이상한 대답을 했다.
"그냥 마음 가는 대로 대충 해도 괜찮다? 어떻게든 된다?"
"아니야."
자기도 모르게 꿀밤을 쥐어박은 아이. 그리고 스스로 놀랐다. 이건 예전에, 자신이 거의 백치 상태일 때, 도린이 자주 했던 행동이었다. 아, 이런 기분이었겠구나. 갑자기 먼 옛날의 추억이 떠올라 아이는 피식 웃었다. 그게 분했는지, 에바는 아이의 손을 확 쳐내고 말한다.
"나는 아직 겨우 열여섯 살이란 말이야, 그럼 좀 모르는 거 있어도 되는 거 아니야?"
"나도 열여섯인데. 동갑이었구나."
단번에 말문이 막힌 에바. 더듬거리며 말을 이어간다.
"애,애초에, 언니가 무장은 이름 석 자만 쓸 줄 알면 나머지는 어떻게든 된다고 그랬어. 너는 약하니까 이것저것 지식이 필요한 거야. 충분히 강하면, 자신의 이름 말고는 아무것도 필요 없다. 글은 약한 자들의 무기야."
이것도 자신이 언젠가 했던 말이었다. 이 여자와 아이는 정말로 닮은 구석이 많았다. 자신이 삶을 살아오면서 했던 몇 가지 선택, 그리고 받았던 몇 가지 행운. 그게 다른 방향으로 작용했다면, 자신도 이런 형태로 살고 있지 않았을까. 그런 생각이 들 정도로 비슷했다.
아이는 신기해서 웃음을 흘린다. 그런 아이의 심경을 아는지 모르는지, 평정을 되찾은 에바는 으시대듯 말한다.
"그래, 계획도 전략도 다 돌아가는 길과 도망치는 방법에 불과해. 충분히 강한 힘이면, 강을 만나면 강 위를 걷고 태산을 만나면 태산을 뚫고 걸어가면 되는 법. 그 양아치 같은 율사를 죽여서 암살자가 파견된다면 더 기쁜 일이지. 내 손으로 처리해야 할 악이 배달되어 온 격이니까."
광오한 선언. 그러나 자신의 실력에 충분히 자신감이 있기에 나올 수 있는 선언이었다. 아이는 피식 웃으며 되받았다.
"그렇게 자신 있으면 왜 거짓말을 했어?"
"응? 무슨 거짓말?"
"넌 신이 없는 사람들을 위해 조직에 가입했다고 했는데, 넌 마술사잖아."
"어, 어떻게?"
어떻게 알았느냐는 말이겠지. 아이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꾸짖듯 에바를 바라볼 뿐이었다. 그러자 에바는 들키지 말아야 할 것을 들킨 사람 특유의 당황을 보여주었다.
"그,그게 말이지. 원래는 내가 있던 곳의 높은 사람들이 이 커넥션 일을 도와주라고 해서, 파견을 나온 건데... 같이 생활하다 보니 이 사람들이 마음에 들어서, 오히려 교단보다 더 좋아져서 붙어버렸다고 해야 하나. 그런 거야. 그러니까 내 마음에 거짓말은 없는 거지. 그 증거로 봐, 언니가 돌아오라고 직접 소집령을 내렸는데도 안 돌아가고 이렇게 숨어 있는 걸. 아, 이건 비밀이다?"
"알았어, 알았어."
아이는 당황해서 변명을 늘어놓는 에바의 어깨를 눌러 진정시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떠나기 위해서였다. 에바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그 뒷모습을 보고 말한다.
"어디 가? 가입하라니까!"
"싫어."
"내, 내가 처음에 그걸 안 말한 건 사과할게. 그렇지만 다들 좋은 사람들인데..."
"아니, 네가 싫은 건 아니야. 오히려 너는, 호의가 가느냐 않느냐를 따진다면 호의가 가는 쪽에 가깝겠지.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그 루나틱 커넥션인가 하는 조직은 믿을 수 없어."
싸늘하게 말하는 아이. 그 말을 듣자, 에바는 얼굴을 딱딱하게 굳혔다.
"그게 무슨 소리야?"
"너 같은 녀석은 이용당하기 딱 좋다는 걸 잘 알고 있으니까. 그렇게 완벽하게 긍휼한 조직이 있을 리 없다는 것도 잘 알고 있고. 그러니 네 입에서 네가 본 조직의 장점 같은 걸 말해봤자, 나는 믿을 수 없다는 거야."
"너 지금 내가 이용당하고 있다는 거야? 커넥션의 사람들이 날 속이고 있다는 거고?"
"그런 말을 할 생각은 아니었는데, 그렇게도 들릴 수 있겠네."
"하!"
그 말을 듣자 이빨을 드러내는 에바. 스릉, 등에서 기형의 검을 뽑아든다. 백병전보다는 암살에 어울릴 듯한, 뾰족뾰족한 가시가 달린 검은 빛의 검이었다. 그 모습은 어딘가 짐승의 이빨을 연상시키는 데가 있었다.
"네 말이 맞았네. 그건 인간의 사고방식이야! 넌 인간이 맞았구나."
"칭찬 고맙군. 그럼 가 봐도 돼?"
"안 돼!"
그 말과 동시에, 온몸에서 노도와 같은 기세를 일으키는 에바. 그 한 번에 장내의 분위기가 바뀌었다. 까마귀가 원무를 추고 피냄새가 풍기는 전장의 분위기로. 아이는 홱 돌아서서, 조용히 유혼을 불러내었다. 시린 빛의 대태도가 어두운 방 속에서 서슬푸르게 빛난다.
"가입하기 싫다면, 내기를 하자. 내가 널 커넥션으로 끌고 가서 그 사고방식을 뜯어고쳐주겠어."
"좋지. 내가 이기면 더 이상 나한테 신경쓰지 마."
에바는 두냐의 마술사였다. 그러나 그 품성이 나쁜 것은 아닌 듯 했다. 그래서 아이는 가급적이면 에바를 죽이고 싶지는 않았다.
에바는 씨익 웃으며 검을 두 손으로 붙잡고 말한다.
"일합. 한 번 검을 맞부딪혀서, 네가 견디면 네가 이긴 거로 쳐 줄게. 못 버티면 내 승리다."
"그게 조건이야? 오만하군. 덤벼."
그 말이 떨어지기를 기다렸다는 듯, 에바는 번개처럼 달려들었다. 그녀가 있던 자리에 남는 검은 잔영. 그리고 전혀 예상하지도 못한 곳, 등 뒤 좌측 상단에서 나타나, 검을 벼락처럼 내려 꽂는다.
"큭!"
그리고 신음성을 흘렸다. 전에 두냐의 암살자와 싸워본 경험이 있는 아이는, 대충 이런 식의 속검이 날아들 것임을 예측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날이 둥글고 기다랗기 때문에, 허리를 쓰기에 따라 360도 전방위가 커버되는 유혼을 무기로 택한 것이었다.
빙글 치솟아 에바의 검을 막아서는 유혼. 첫 충돌에선, 분명히 아이의 승리였다. 거기 담긴 신기도 힘도, 에바의 것은 아이를 이기지 못했다. 검을 맞부딪힌 채로 대치한 두 사람.
'좋아.'
아이는 속으로 미소를 지었다. 에바의 검끝이 파르르 떨리는 것이 보였기 때문이었다. 이대로 5초만 대치를 계속하면, 에바는 검을 손에서 놓치고 말 것이었다.
하지만 예상 외의 일이 벌어졌다.
"ㅡㅡㅡㅡ!!!"
갑자기, 인간의 것이라기보다는 괴물의 것 같은 함성을 내지르는 에바. 그러자, 그 뺨에 썩은 짐승의 살코기 같은 검붉은 빛이 뭉실뭉실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그 기운은 에바가 든 기형검에도 어리었다.
"뭐, 뭐야?"
그것이 기형검에 어리는 순간, 갑자기 에바의 힘이 몇 배는 배증되었다. 순간적으로, 유혼을 든 아이가 기세에서 밀릴 정도였다.
"ㅡㅡㅡㅡㅡㅡ!!!"
다시 한 번 괴성을 내지르는 에바. 불길한 기운이 찌르듯 아이를 덮쳐왔다. 그 검붉은 기운은 마치 역병처럼, 기형검에서 쏟아져나와 유혼의 푸른 날도 먹어치우려 들었다.
"큭!"
하는 수 없이, 아이는 검을 세차게 휘둘러 에바의 기형검을 떨쳐냈다. 그리고 뒤로 유령처럼 물러난다. 에바의 그 핏발이 선 눈은, 무언가 이성을 상실한 듯 보였기 때문이었다.
"후욱...후욱..."
그러나 그것은 기우였다. 검을 떼자마자, 에바는 곧 제정신으로 돌아온 듯 했다. 온몸을 부르르 떨더니, 정신을 차리고 기형검을 다시 등에 비끄러맨다.
"쿨럭, 아니, 좋아. 나름 잘난 척할 이유는, 쿨럭, 있었네."
"괜찮아? 안 아파?"
"응, 속이 많이 아파... 아니, 안 아파! 아무렇지도 않다!"
아이의 진심으로 염려하는 목소리. 그걸 듣자 무의식적으로 반응했다가, 화를 내며 소리를 지른다. 그리곤 짐짓 강한 척 말을 남기고 뒤돌아서서, 문밖으로 빠져나갔다.
"이번 건은, 쿨럭, 무승부로 해 주지. 하지만 기대해, 다음번엔 다를 테니까. 우욱."
그리고 속이 뒤틀렸는지, 볼을 잔뜩 부풀리더니, 눈물을 흘리면서 삼켰다.
약한 모습을 보이기 싫어서 토를 삼킨 모양이었다.
그 모습조차도 언젠가의 자신 같아서, 아이는 피식 웃고 손을 흔들고 말았다.
*
도망치듯 유령 저택을 빠져나온 에바.
그녀는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자신의 패배를.
"쿨럭, 열 여섯이라고? 언니, 거짓말이잖아요. 쿨럭, 스무 살까지는 나를 이길 놈이 전혀 없을 거라더니."
한참 뛰어나와 인근의 숲에서 한바탕 토를 한 후에야, 조금 내상이 가라앉은 에바. 그녀는 밑동만 남은 나무를 베개처럼 베고 드러누웠다. 시야 가득 밤하늘이 들어온다. 그 탁 트인 광경을 보고 있자니 현기증이 가라앉는 듯 했다.
그리고 그녀는 자신이 마주한 강자, 아이와의 대결을 되새기기 시작했다.
"어떻게 그렇게 신기를 많이 축적할 수 있는 거지? 열여섯이라며. 엄마 뱃속에서부터 신기를 축적하고 살았나? 신기의 양만 보면..."
대답을 기대하지 않고 한 혼잣말이지만, 그 대답은 다른 곳에서 돌아왔다.
"6위계의 경지. 어쩌면 그 이상일 수도 있지."
"누구야!"
다음 순간, 예바는 불길한 예감을 느끼고, 구르듯 자신이 누워 있던 자리에서 빠져나왔다. 현명한 판단이었다. 기다란 십자검 세 개가, 자신이 누워있던 자리에 화살처럼 날아와 꽂혔기 때문이었다.
에바는 기형검을 뽑아들고, 개처럼 몸을 낮추는 기수식을 취했다. 이빨을 벌리고 으르렁댄다. 본능적으로, 강자의 출현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소년이 네 제안을 받아들였더라면 많이 슬펐을 거야. 스토킹도 하다 보니 조금 정이 들었는데, 내 손으로 목을 베야 했을 테니까."
저 숲 속의 어둠으로부터, 한 명의 여자가 걸어온다. 걸음마다 기세가 파도처럼 쏟아져나와, 에바의 앞머리를 흩날리게 할 정도였다.
마침내 공터까지 걸어나온 그녀는, 자신이 꽂아넣은 십자검 중 하나를 뽑아들었다. 두 자루는 뽑지 못했다. 팔이 하나뿐이기 때문이었다.
"이건 정말 의외의 소득이군. 두냐의 검은 개를 여기서 쳐죽일 수 있게 되다니."
에바는 베들렘이었다. 여덟 살때 카나기의 4위계 무반을 죽인, 두냐의 검은 개.
몰래 둘을 감시하던 아셀라이는, 곧바로 그 사실을 눈치챌 수 있었다. 또, 둘의 회화에서 이 사실도 눈치채버렸다. 그녀가 지금 돌발적인 단독 행동을 하고 있다는 것을.
그 말은 즉.
"여기서 죽여도, 책임질 일이 전혀 없다 이거지."
아셀라이는 씨익 웃으며 십자검으로 에바를 가리켰다.
가증스러운 조디악의 용병으로 전락한 두냐를 처단할 기회. 아탕칼리의 성기사로서, 그녀는 이 절호의 기회를 놓칠 생각이 전혀 없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