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귀향 ( 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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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험은 곧 시작되었다.
흑복을 입은 시험관이 연단에 올라서 시험인수와 내용을 발표했다. 354명, 전해의 시험 인수가 30여명인 것에 비하면 말도 안 되는 숫자였다. 사람들 사이에서 가벼운 술렁임이 있었다. 에페 바체의 인원이 비정상적으로 부풀었다는, 기나센의 상황을 몰랐던 사람들이 내는 술렁임이었다. 교관은 채찍을 휘둘러 소란을 제압했다.
"여기 열 개의 문이 있다! 그리고 이 너머에는, 전 에페 바체 시험에서 아깝게 탈락한 상위 열 명의 낙오자들이 대기하고 있다!"
용병의 나라답게 기나센은 공회당에도 결투장을 여럿 구비하고 있었다. 그 숫자는 열 개. 결투장으로 들어서는 아치문의 둥근 쐐깃돌에는 소나무가 음각되어 있었다. 교관은 우렁우렁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
"각자 들어갈 문을 골라라! 여섯 명씩 조를 짜서 이 낙오자들을 상대한다. 낙오자들은 목검을, 너희는 진검을 들게 될 것이고, 검이 부러진 쪽이 패배자다!"
만일 그 낙오자가 이겨서 삼십 명을 탈락시키면, 그 자는 한 번 더 기회를 받는다. 반대로 낙오자가 패배한다면 다섯 명이 시험을 통과한다. 교관의 말은 그런 설명으로 끝맺었다. 시험의 내용은 특이했다. 현 세대의 시험자들을 탈락시키기 위한 시험이라기보다는, 전 세대의 시험자들에게 부활의 기회를 주기 위한 것처럼 느껴졌다. 낙오자들에게는 이것이 진짜 마지막 기회일 테고, 정말로 죽기살기로 달려들 것이다.
'4번, 7번, 10번 문...'
들어가지 말라는 건 그런 의미였나. 아이는 안색을 굳혔다. 그 문 뒤에는 어쩌면 특별히 강한 탈락자들이 대기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런 예감이 들었다. 그리고 아이에게 가짜 정보를 들은 자들은 반대로 생각했다.
"어이, 촌놈. 뭘 그렇게 쭈뼛대고 있나?"
골린이 으스대며 다가왔다. 여전히 등에는 네 명의 남자들을 호위처럼 두르고 있었다. 그는 그 호위들을 아주 믿음직스럽게 여기는 듯했다. 어깨를 툭툭 치며 말한다.
"일단 반쯤은 믿어보겠어. 네가 말한 숫자 뒤에 병신같이 약한 놈들이 있나보지? 가자구."
그리곤 아이의 팔을 잡아끌려 들었다. 시험을 받기 위해 뭉쳐야 하는 숫자는 여섯 명, 그리고 이들은 다섯 명이었다. 골린은 아이로 마지막 한 명을 채우려는 것 같았다.
"꺼지시죠."
"어허, 얌전히 따라오는게 좋을 텐데? 아니면 뭐, 따라오지 못할 이유라도 있는 건가?"
골린의 눈이 번뜩였다. 나름대로 간사한 머리나마 굴리고 살아온 자답게 그는 일말의 의심을 품고 있는 듯했다. 아이는 잠시 망설였다. 그 문들 너머에 어떤 자가 숨어 있더라도, 자신을 탈락시킬 수 있을것 같지는 않았다. 그렇다면 이 자들한테 응분의 대가를 치르게 만드는 것이 우선이겠지.
"4번으로 갑시다."
한숨을 내쉬며 아이는 손을 뿌리쳤다. 그리고 골린의 뒤를 따라 걸었다. 그것으로 마지막 의심도 사라졌는지, 골린은 기쁜 발걸음으로 성큼성큼 앞장섰다. 아치문을 넘어서자 널따란 결투장이 드러났다. 먼 옛날, 재판 대신 결투 재판을 일삼을 때 지어진 결투장이었다.
그 결투장의 저편에는 한 명의 여자가 다리를 꼬고 앉아 있었다. 사냥용 각모자와 회색 가죽바지를 입은 여검사였다. 시험을 앞두고도 그녀의 얼굴은 굉장히 태연해 보였다.
"흐으으음."
미소를 지으며 골린은 구석의 검가에서 진검을 뽑아들었다. 다른 네 명의 남자들도 마찬가지였다. 상대의 겉모습을 보고 상당히 얕잡아본 것이 틀림없었다. 아이는 팔짱을 낀 채로 돌아가는 상황을 바라보았다. 그제야 시험이 시작되었다는 것을 알았는지, 그녀는 모자를 벗어두고 자리에서 일어나 목검을 집어들었다.
"이거 촌놈이 월척을 물어왔군. 십오 분이면 끝나겠는데? 왜 탈락해서 이딴 곳에서 뒹구는지 알 것같은 꼬락서니야."
골린은 비웃으며 그렇게 말했다. 여자의 몸매는 호리호리했다. 굳이 유효타를 먹일 필요도 없이, 검만 계속 부딪히면 알아서 손아귀 힘이 빠져서 검을 놓칠 것만 같았다. 하지만 아이는 전혀 다른 해석을 하고 있었다.
왜 저 정도의 사람이 여기에 있는 거지? 아이는 눈을 가늘게 떴다. 품고 있는 기세와 여러 흔적으로 아이는 알아챌 수 있었다. 저 여자는 신기를 다룰 줄 아는 자였다. 순수한 검술로 따지자면 3위계, 또는 4위계와도 자웅을 겨룰 수 있을 듯했다. 에페 바체 시험 따위에서 떨어질 사람이 아니었다.
그런 아이의 속내를 아는지 모르는지, 골린과 남자들은 일자형으로 대형을 펼쳐 여자에게 접근했다. 여자는 얼음처럼 가만히 서 있었다. 거리가 가까워지자, 남자들 중 한 명이 곰처럼 고함을 지르며 달려들었다.
"죽어!"
상체를 노리고 달려드는 검격. 하지만 느리고 어설펐다. 여자는 상체를 뒤로 물려 피하곤 목검을 찔러넣어 이빨을 쳐부쉈다. 목검끝이 분홍 잇몸을 부수고 어금니를 바닥에 흩날렸다.
"뭐, 뭐야!"
"당황하지 마! 덮쳐!"
골린이 날카롭게 소리질렀다. 물론 자신이 나서지는 않았고 다른 자들을 독려했다. 남자 셋이 제각기 상단, 중단, 하단을 노리고 진검을 휘둘러댔다. 아이는 진중하게 그 검세를 살펴보았다. 여자의 솜씨는 훌륭했다. 피하고, 손을 후려쳐 손뼈를 박살내고, 옆으로 굴러 피하고, 주먹을 명치에 꽂아넣고, 발을 높이 들어 검을 짓밟고, 목검으로 검날의 이음매를 후려쳐 검을 쪼개놨다.
"으, 아, 아아...."
순식간이었다. 순식간에 골린은 그의 가문이 구해준 동료들을, 그가 철썩같이 믿었던 호위들을 전부 잃고 말았다. 그는 검을 들고 바들바들 떨더니, 불쑥 뒤를 돌아보고 화를 냈다.
"이 개같은 촌놈 새끼, 씨발, 말이 다르잖아! 이건 무슨 괴물이야!"
"적을 눈 앞에 두고 화낼 여유도 있습니까?"
"뭐, 이 개새끼야? 어떻게 책임질, 흐아아악!"
그 말대로였다. 골린의 뒤로 여자의 목검이 날아왔다. 푸른 잔영을 그리며 날아든 목검은 그의 뒤통수를 후려쳐 일자 자국을 남겼다. 깡! 두개골을 때리는 소리가 결투장 가득 울렸다. 그는 토악질을 하며 바닥에 쓰러졌다.
"우욱, 우우욱..."
마구 바닥을 더럽히고 있는 골린을 여자는 크게 걷어찼다. 옆구리를 걷어차인 골린은 볼품없이 뒹굴어 벽에 부딪혔다. 그리고 그녀는 투명한 눈으로 아이를 바라보았다. 그 입술이 움직여 첫 마디를 흘렸다.
"기권하고 싶으면 기권해. 검을 뽑아서 스스로 부러뜨려라. 그럼 무탈하게 보내주겠어."
"그럼 제 시험은요?"
"내년을 노려. 올해는 시기가 안 좋으니까."
"그 안 좋은 시기에 대해서 이야기를 듣고 싶은데요. 대체 왜 당신 같은 사람이 낙오자인 척 가장하면서 여기서 이러고 있는 거죠?"
"뭐?"
그녀의 얼굴에 아주 잠깐이지만 당혹이 스쳤다. 그녀는 풀었던 자세를 고쳐잡았다. 해명을 요구한다.
"낙오자인 척이라니?"
"갈무리해서 잘 숨겼다고 생각했겠지만, 당신의 목검 안에서는 신기가 흐르고 있다는 게 제 눈에는 보이는 걸요."
아이는 성큼성큼 걸어서 검가로 다가갔다. 진검 대신 목검을 집어들었다. 진짜 제대로 된 결투라면 서로 목검을 써야 맞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돼지가죽으로 감은 손잡이가 손바닥에서 까끌거렸다. 잠시 후, 그 목검의 검날 위로 붉은 신기가 피어올라 태양처럼 이글거린다. 그 모습을 본 여자는 말문이 막혔는지 침묵했다. 검을 집어들고 선언했다.
"너도 범상한 놈은 아닌데. 떄려눕히고 뭐 하는 녀석인지 물어봐야겠어."
원래대로라면, 신기는 다 자란 20세 이상의 성인만이, 아주 재능 있는 경우에만 터득할 수 있는 것이었다. 그것을 저렇게 물처럼 뽑아대는 여자도 아이도 세간의 상식에 비추어보면 터무니없는 괴물들이었다.
"그럼 피차 목적은 같군요. 당신 이름이 어떻게 되나요?"
"경고야. 시험 도중엔 서로 신분을 밝히는 게 금지되어 있다."
"패배하면 알려주신다는 건가요?"
"그럴 일은 없겠지만 그렇다고 해 두지."
그 말을 끝으로 그녀는 달려들었다. 처음으로 그녀가 취한 선공이었다. 저 태양처럼 부글거리는 신기는 아무리 보아도 자신의 것보다 밝고 짙어 보였다. 그것을 계속 보고 있다간 마음이 꺾일 것만 같아서 취한 행동이었다.
쾅!
이제는 숨길 생각도 없었기에, 그녀의 목검에서도 푸른 신기가 일렁였다. 그러나 아이의 목검에서 빛나는 붉은 광휘에 비하면 태양 앞의 촛불처럼 보잘것없었다. 둘이 충돌하며 굉음을 뿌렸다. 결과는 뻔했다.
"큭!"
단 일합만에, 여자의 목검에 쫘자작 거미줄 같은 금이 갔다. 풍압은 바람을 일으켜 여자의 앞머리가 갈대처럼 흔들렸다. 아이가 자신의 힘을 7할은 숨겼는데도 그랬다. 아이는 목검을 움켜쥐고, 가벼운 일격을 더했다. 여자는 황급히 목검을 끌어당겨 자신의 가슴을 보호하려 했다.
"크학!"
이 격째에 승부는 났다. 그녀의 검이 산산조각나 부서진 것이다. 검편은 가루로 부서져 결투장의 대리석 바닥에 흩날렸다. 내부를 상한 듯 여자의 입술에선 피가 흐르고 있었다. 그녀는 믿을 수 없다는 듯 아이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 역시 원한다면 자유 기사 작위까지 얻을 수 있는, 4위계에 달하는 강자였지만, 이미 숱한 수라장을 헤치고 십칠야의 마지막에 도달한 아이 앞에서는 무력할 수밖에 없었다.
"이젠 탈락했으니 신분을 물어도 되겠군요. 당신, 정체가 뭔가요?"
그 때였다. 누군가가 아이의 발목을 붙잡았다. 골린이었다.
"그 검... 그 검 나 줘, 아니, 사겠다. 주십시오... 몇천 루덴을 주고서라도 살테니까..."
그리고 아이의 진검을 가리켰다. 머리에는 이따만한 혹이 솟아 있었다. 정신을 잃은 줄 알았던 그가 시험의 마지막이 되자 어마어마한 집착을 발휘해 이렇게 달려든 것이었다. 아이는 어이가 없어 웃었다. 살짝 연민이 느껴지기도 했다.
이 자 역시 에페 바체라면, 어딘가에서 입양해온 불행한 아이였을 것이다. 그리고 에페 바체라는 자격을 상실하게 되는 순간, 다시 불행한 아이로 버려지게 될 것이었다. 그것을 생각하니 이 자의 추한 집착의 원인을 알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이런 자가 그 설화를 더럽히게 둘 생각은 없었다.
아이는 말없이 골린의 검을 집어들었다. 그 검은 거미줄처럼 금이 갔을 뿐 부서지지는 않았다. 어쩌면 이것으로 시험을 통과했노라고 우길 수도 있을 것이다. 아이는 맨손으로 그 검날을 붙잡고, 우두둑 우그러뜨렸다. 검날은 종이처럼 가볍게 구부러져서 망가졌다.
"아, 아아아...이 개자식아!"
이것으로 골린은 에페 바체의 자격을 잃었을 뿐만 아니라, 헤이든에서도 쫓겨나게 될 것이었다. 다시는 거들먹거리며 돌아다닐 수 없게 되었다. 그는 이성을 잃고 아이에게 달려들었다. 아이는 간단히 그 공격을 피하고, 목을 붙잡아 바닥에 내려찍었다. 쿵! 대리석 바닥에 코뼈가 뭉개지는 소리가 울렸다.
뜻밖의 방해를 물리치고 아이는 다시 여자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자, 하던 얘기를 계속... 어?"
그 여자는 이미 사라져 있었다. 얼떨떨해 있는 사이에, 시험관이 들어와 아이가 첫째 시험을 통과했음을 알렸다. 시험의 증표인 메달, 그 맨 윗줄에 붉은 실을 하나 감아주었다. 앞으로 두 개, 더 시험을 통과하면 에페 바체로 인정받게 되는 것이었다. 아이는 떨떠름한 마음으로 골린 패거리가 널브러진 결투장을 나섰다.
그 여자와 다시 만난 것은, 그 날 저녁 여관에서였다. 객실이 다섯 개밖에 없는 아담한 초록 벽돌 여관에서 아이는 여느 때처럼 나무로 조각을 하고 있었다. 조각의 대상은 에바였다. 잠결에 드미트리에게 붙잡힌 그녀가 어디에서 무슨 일을 하고 있는 것인지, 곰곰히 생각하다보니 알아서 소재가 정해졌다.
에바의 얼굴을 다 새기고, 장난기가 동해서 우스꽝스러운 옷을 입힐 작정으로 몸 조각에 들어갈 무렵이었다. 갑자기 벌컥 문이 열렸다.
"저, 손님, 이 세 분들이 손님께 꼭 볼 일이 있다고..."
아이는 황급히 서랍을 열어 조각을 숨기고 고개를 돌렸다. 거기에 있는 것은 세 명의 사람들이었다. 모두가 흑복을 입고 있었다. 흑복, 시험관들이 입던 검은 경장 갑옷이었다. 그리고 그들 중 가운데에 있는 여자는 면식이 있는 여자였다.
"어, 당신은?"
"약속대로 대화를 나누러 왔다."
그 여자는 자신의 이름을 레테라고 밝혔다. 그 뒤에 있는 자들은, 7번, 10번 결투장에서 낙오자 행세를 하던 자들이었다. 이어서 자신의 정체를 밝혔다. 그녀의 정체, 그건 낙오자인 척 숨어든 시험관이었던 것이다.
"왜 그런 짓을?"
"자, 자, 말하자면 길어지니까. 우선 선물로 가져온 이거나 좀 들라고."
그녀는 그 세 명의 시험관 중에서도 가장 지위가 높은 듯 두 명을 시켜 문을 막았다. 그리곤 바구니에서 구리구리한 냄새가 나는 무언가를 꺼내 내밀었다. 아이는 눈살을 찌푸리고 코를 막았다. 그게 뭔진 알고 있었다. 산양젖 치즈, 푸르스름한 곰팡이가 겉면에 슬어 있는 기나센의 괴식이었다.
레이븐사이드의 나이 지긋한 사람들, 예를 들면 블레어 같은 사람들만 맛있다고 먹는 음식이었다. 음식을 가리지 않는 아이지만 저건 예외였다. 어렸을 때 호기심으로 눈을 반짝이던 아이는 한 입 저걸 먹고 목을 켁켁대며 괴로워한 적이 있다. 그런 괴식인 주제에 소렌 사람들에게만은 귀한 별미로 여겨져서, 귀한 선물 취급을 받는다는 말을 들었었다.
"뭐야, 이것도 못 먹는 건가? 완전 어린애였군."
간신히 한 조각을 꿀떡 삼키고 물로 혀를 닦아내는 아이를 보며 레테는 웃었다. 아이는 한숨을 내쉬었다. 어쨌든 이런 고급 선물을 가져온 이상, 이들이 호의를 가지고 접근한 것임은 분명했다. 아이는 제일 궁금한 것을 물어보았다.
"대체 지금 기나센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겁니까?"
이제는 그 대답을 들을 수 있을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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