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메이지 슬레이어-121화 (121/279)

22. 산맥 ( 3 )

생각은 복잡했지만 해야 할 일은 명확했다. 아이는 장검을 뽑아들었다. 에바는 움찔하더니, 주섬주섬 품에서 길따란 검을 꺼내들었다. 새까만 가죽붕대 같은 것으로, 날을 칭칭 감은 검이었다. 아이는 눈살을 찌푸렸다. 자비라도 보이겠다는 것인가?

"풀어."

하지만 에바는 아무 말도 없었다. 앙다문 입술로, 그럼에도 흔들리는 눈동자로 이 쪽을 바라볼 뿐이었다.

"풀어!"

아이는 고함치며 달려들었다. 아이가 지금 사용하는 장검은 금지된 숲에서 거두어들인 것이었다. 시체의 품에서도 예기를 잃지 않은 그 검은 무언가를 잘 베어낼 수 있도록 테두리가 날카롭게 파여 있었다.

쩡, 검과 검이 부딪히는 소리. 에바는 아이의 일격을 익숙지 않은 검격으로 받아냈다. 싸움의 시작이었다.

싸움은 시종 아이의 우세로 진행되었다. 두 손으로 붙잡은 장검으로 하단을 쳐부술 듯 후려쳤고, 에바는 뒤로 물러서 피했다.

무대를 박차고 뛰어올라 머리를 쪼갤 듯 내려찍었고, 에바는 간신히 검을 받아치곤 옆으로 굴렀다. 검격을 맞고 돌조각이 대신 부서져서 크게 튀어올랐다.

검을 부딪힐 때마다 아이는 차츰 냉정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오히려 왜 그 가짜가 에바라고 생각하지 못했는지, 스스로가 바보처럼 여겨질 정도로 냉정해졌다. 조디악과 관계가 있다, 드미트리와 친자매 수준으로 친하다, 그 조디악의 명에 따라 기나센에서 머물다 파견되었고, 에페 바체 시험 직전에 귀향했다. 모든 단서가 눈 앞에 있었는데도 눈치채지 못했다. 설마 이 멍청하고 순수했던 소녀가, 자신을 배신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배신, 자신이 무심코 떠올린 어휘에 아이는 웃었다. 무엇이 배신이란 말인가? 둘 사이에는 막연한 친애가 있었을 뿐 공식적인 관계는 아무것도 없었다. 아이는 냉정해지려 애썼다. 에바는 기나센에서 머무르다가, 모종의 이유 때문에 나사렘으로 파견되었다고 한다.

'아마 수사를 피한 것 아니었을까.'

이 음모는 굉장히 예전부터, 어쩌면 레이븐사이드가 멸문한 그 시점에 바로 진행되었을지도 몰랐다. 십중팔구 그랬을 것이다. 차갑게 식은 아이의 머리에 차례로 사건의 전말이 떠올랐다. 멸문되자마자 그들은 레이븐사이드를 정치적으로 이용할 계획을 세웠을 테고, 그 시점에서는 아이에 대한 정보가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풍문으로만 '기나센의 설표'의 가짜를 만들다보니 허점이 생겼다. 여자라는 소문을 곧이곧대로 믿었을 것이고, 그래서 에바를 가짜로 세웠을 것이다. 그 음모를 눈치챈 통령이 뒤를 캐려 들자, 바보나 다름없어서 무슨 증거를 흘릴 지 모르는 에바를 멀리 치워둔 것이리라.

"웃기지마, 빌어먹을!"

손에 힘이 들어갔다. 손잡이는 돼지가죽을 둘러 마감되어 있어서, 꽉 쥐니 손뼘 가득 까끌까끌함이 밀려왔다. 번개처럼 달려들어 비스듬히 올려쳤다. 좌상단으로.

"큭!"

에바는 검손잡이로 간신히 그 일격을 막았다. 쩡, 검이 울어댔다. 한 발 뒤로 물러선 에바의 입술은, 흐물흐물 떨리고 있었다. 미안함일까. 아이는 어제 보았던 쪽지를 떠올렸다. 어쩌면, 에바는 칼라일에게 당했듯이 또 이용당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분노가 앞섰다.

"왜 네 장기도 아닌 검을 쓰고 있는 거지?"

뻔했다. 기나센의 교육을 받은 것으로 위장하기 위해서일 터였다. 에바의 입술이 부르르 떨리더니, 한 마디를 뱉었다. 화났어? 그런 물음이었다.

그 물음이 아이의 분노에 더욱 불을 지폈다. 장검에 아지랑이처럼 커다란 신기가 피어났다. 관중들이 흡, 숨을 들이켰다. 거대한 불덩이처럼 피어오른 그 신기는 황소의 몸통만한 크기로 일렁였다.

쐐애액, 쇄도했다. 에바는 또 엉거주춤 방어했다. 어물쩡 흘려낼 수 있는 일격이 아니어서, 그녀도 거무튀튀한 신기를 가득 일으켜 세로로 막아세웠다. 그러나, 막지 못했다.

"큭!"

신음. 검과 검이 부딪히자 신음과 먼지 또 쇳가루가 피어올랐다. 에바는 바닥에 깔렸고. 아이는 그 위에 올라탄 채 목에 검을 겨누고 있었다. 차갑게 분노가 갈무리된 눈으로 아이는 물었다.

"애초에 계획적으로 접근한 거였나?"

"아니야, 그렇지 않아..."

에바는 아까부터, 두 가지 표정을 한 얼굴에 이고 있었다. 결의를 품은 표정과 울상이었다. 눈이 결의를 품으면 입술이 처연하게 떨렸고, 입술을 앙다물면 눈망울이 폭풍 속의 호수처럼 흐릿해졌다. 진실일까, 진실일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그녀는 까막눈이었다. 국경에서 제출한 서류에 아이의 이름이 적혀 있다는 걸 몰랐을 수도 있었다. 조디악이 그녀에게 자세한 사정을 설명할 것이라고는 생각하기 어려웠다.

아이는 그 목에 칼을 겨눈채로 잠시 멈추었다. 그녀의 입술이 무언가 말을 꺼내려는 듯했기 떄문이었다.

"기권해."

"뭐?"

"내가 지게 되면, 네가 견디지 못할 거야. 기권해."

이상한 협박이었다. 그 협박은, 금방이라도 무너져내릴듯 희미하게 떠는 입술에서 나왔다. 진심인 듯싶었다. 그러나 아이가 받아들일 수는 없는 말이었다.

"너도... 너도."

결국 마술사였나. 아이는 뒷말을 삼켰다. 그녀의 말을 무시하고 목끝에 검을 들이밀었다. 규정상으로는, 이렇게 완벽하게 제압한 상태를 1분여간 유지하면 시험관이 판정승을 주도록 되어 있었다. 57,58,59, 끝. 가만히 끝을 헤아릴 때까지도, 에바는 아무런 저항도 하지 않았다.

"승자가 정해졌다!"

시험관은 황급히 달려와 아이의 검을 치웠다. 그에게는 아이의 적의가 이해가지 않을 것이었다. 그는 화난 짐승을 다루듯이 아이를 붙잡아서, 무대 중앙으로 몰고 갔다. 방금 본 신기로 미루어 짐작하건대 이 자는 괴물이었다. 빠르게 무대에서 퇴장시켜야겠다. 시험관은 재빨리 품에서 밀랍으로 봉인된 종이봉투를 꺼냈다.

"자 그럼, 시험에 통과한 승자를 발표하노라!"

그 종이 봉투에는 시험자의 신분과 정보가 적혀 있었다. 에페 바체 시험에서 신분을 드러내는 것은 가장 큰 금기였다. 부정을 방지하기 위해서였다. 그래서 에페 바체 시험은, 우선 증표를 제출해서 간접적으로 신분을 증명하고, 이렇게 마지막 시험 직전에 스스로 봉인된 종이봉투에 자신의 신분과 소속을 적어넣어 제출하기로 되어 있었다. 시험에 통과하면 시험관은 그 종이봉투를 뜯어 비로소 신분을 확인하는 방식이었다.

"통과자는, 레이븐사이드의 에페 바체, 아이! 그가 이 시간부로 당당한 기나센의 국민이 되었음을 선포하노라!... 레이븐 사이드?"

무의식적으로 읊고도 본인이 당황한 모양새였다. 사방이 술렁였다. 시험장 구석에는 아직 탈락하지 않은 특무국 요원이 한 명 남아 있었다. 그는 뜻밖의 사실을 전해 듣고, 놀라서 입을 벌렸다.

"레이븐사이드? 저 자가?"

"기나센의 설표?"

"그렇다기엔, 아니, 여자다운 얼굴이긴 한데... 은발이고."

사방에서 술렁대는 소리가 들렸다. 샤론도 놀라서 입을 벌리고 이 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레이븐사이드는 상당히 온후하고 건전하게 운영되었던 용병단이었다. 대대로 그 단장은 인격자들이 역임했고 은혜를 입은 사람도 많았다. 조디악은 바로 그 레이븐사이드가 멸문되었다는 사실, 그리고 그 단장은 피선거권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에 착안해서 이 용병단을 점찍었다.

선동하기에 좋은 소재였다. 해골 세 개, 거부할 수 없는 명령에 당해서, 그것도 적도 아닌 아군에 의해서, 그 명문가가 사라진 것이다. 선동 없이 사실만으로도 의분을 일으키기 충분한 소재였고 선동을 더하자 그것은 광풍이 되었다. 샤론이 대산맥파 쪽으로 기울었던 이유 가운데 레이븐사이드도 있었다. 젊은 층의 의견은 대다수가 샤론과 같았다.

그렇게 선동을 위해 윤색되어 여기저기 흩뿌려졌으니, 레이븐사이드라는 이름과 사건은 사방에 널리 퍼져 있었다.

"정말로? 자네가?"

시험관이 놀라서 물었다. 아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고개가 끄덕여지자마자, 사방에서 열화와 같은 박수가 터졌다. 무슨 의미의 박수였는지는 모른다. 생환자의 귀향을 축하하는 박수일 수도 있었고, 시험을 이겨낸 자를 위한 박수일수도 있었다. 치는 사람들도 명확히 몰랐다. 에바는 그때까지도 검을 끌어안고 누워서, 조용히 아이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 얼굴에는 죄책감이 배여 있었다. 그 죄책감의 이유는, 금세 드러났다. 박수가 끊겼다. 누군가의 고함에 의해서였다.

"저 녀석은 가짜입니다!"

소년의 것 같기도, 소녀의 것 같기도 한 미성숙한 미성. 지겨운 목소리였다. 어디서 나타났는지, 드미트리가 소리를 지르며 다가오고 있었다. 어째서인지 그는 휠체어를 한 대 끌고 있었다. 휠체어는 이불로 덮여 누가 타고 있는지 보이지 않았다. 사람들은 박수를 멈추고 드미트리를 바라보았다. 아이는 으르렁거리듯 말했다.

"또 당신입니까? 무슨 헛소리를 할 생각인지 모르겠지만, 저는 란페이 우르드 단장에게 이름을 받은 그들의 세 번째 에페 바체. 아이가 맞습니다. 헛소리는 집어치우십시오."

"아 그래요? 그럼 신분을 증명할 물건이 있습니까?"

아이는 증표를 꺼내 집어던졌다. 시험 직전에 돌려받은 것이었다. 거기에는 분명히 잰슨의 글씨로, 이 증표를 소유한 자가 레이븐사이드의 에페 바체임을 증명한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그걸 받아든 드미트리는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이게 증거인가요? 아니, 증거는 이게 답니까? 참으로 성실하고 대단한 재판 준비 자세군요?"

"재판 준비?"

아이는 어안이 벙벙해져서 말했다. 드미트리는 가면 같은 미소를 지은 채 말을 이어갔다.

"저는 이 자리에서, 통령령에 따라 정해진 권리를 행사하겠습니다. 법령이 정한 24가문 중 하나인 헤이든의 법률고문 직이 가진 정당한 권리, 배심위원의 권리로 저 가짜 에페 바체를 재판에 회부하기를 청하는 바입니다!"

"이보쇼! 저 양반이 가짜면 진짜는 누구란 말이오!"

"물론, 저기 저 가엾은 소녀지요. 아이 우르드 양! 일어서서 사람들에게 당신의 모습을 보여 주시지요."

그 말에 에바는 엉거주춤 일어났다. 드미트리는 에바를 바라보며 말했다.

"이 자가 가짜임이 증명되면 이 자의 출전은 원천적으로 무효인 셈입니다. 원천적으로 무효, 아시겠습니까? 그렇다는 소리는 2차 시험때 이 자 때문에 탈락한 사람도, 1차때 탈락한 사람도 구제의 기회를 받는다 이 말이지요."

드미트리는 영악했다. 장내에 모인 사람들 중 다수가 에페 바체 시험자라는 사실을 이용해서, 은근히 그들을 회유하려는 말을 늘어놓았다. 그 말을 들은 사방이 술렁였다. 상황은 급변하고 있었다. 레이븐사이드의 유일한 생존자가 살아 돌아왔다, 그 사실만으로도 놀라운데, 그 사실을 둘러싸고 이번엔 소송이 열린다고 한다. 사람들은 미친 듯 수군거렸다.

고작 이게 에바가, 그리고 드미트리가 경고한 기권해야 하는 이유인가. 아이는 코웃음을 쳤다. 생각해보면 이들은 꽤 예전에 아이의 정체를 눈치챘다. 아이가 기나센에 가고 있다는 것도 눈치챘고, 지속적으로 회유하기까지 했다. 에바가 아이에게 패배했을 때, 또는 신분을 두고 다툴 때를 대비해 계획을 세우는 것도 당연했다. 아이는 차갑게 말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