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산맥 ( 4 )
"그 쪽에서의 증거는?"
드미트리는 박수를 쳤다. 그러자 에바는, 주섬주섬 검을 묶은 붕대를 풀어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하늘 높이 그 검을 쳐들었다. 그 검을 바라본 아이는 눈을 부릅떴다. 천장에 매달린 등불이 그 검날에 부딪혀 부서져서, 하나의 글귀를 영롱하게 비추고 있었다.
'정의 없는 힘은 무력하며, 힘 없는 정의는 압제이다.'
블로어. 레이븐사이드의 단장이 대대로 물려받은 보검. 그 검날에는 단 하나밖에 없을 글귀가 새겨져 있었다. 란페이의 여동생이 란페이를 위해 직접 작성했다고, 란페이가 자랑 섞인 어조로 말했던 것이 떠올랐다. 아이는 뒤통수를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익명으로 블로어를 수소문하던 고용주, 그것이 조디악이었나? 이렇게 사용하기 위해서 그렇게 악착같이 구했던 것인가? 드미트리는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이 검이야말로 저기 저 아이 양이 진짜 레이븐사이드의 후계라는 명징한 증거입니다!"
"이, 개자식이!"
아이는 끓어오르는 격분을 참지 못했다.
"림, 레바테인!"
치켜든 아이의 두 손에 구부러진 적색의 대검이 치솟아 공기를 꿰뚫는다. 갑자기 나타난 대검에 사람들은 당황했지만 드미트리는 태연했다. 검날이 눈 앞에 다가왔는데도, 여전히 가면 같은 웃음을 지은 채 응시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검날을 드미트리의 대가리에 쳐박기 직전, 누군가의 목소리가 아이를 멈춰세웠다.
"거짓말! 사람들을 속이지 마세요!"
에길론이었다. 들것에 실려나갔던 그가, 아이의 시합을 보기 위해서 정신을 차리자마자 돌아온 것이었다. 그는 어려서부터 검보다 각종 제도와 글을 공부하는 데 힘썼고, 그 공부한 내용중에는 법도 있었다.
"그 검도 명백한 신분 증명은 되지 않습니다! 법령으로 정해진 증명을 따지신다면 저 증표나 검이나 마찬가지입니다!"
"호오오?"
드미트리는 씩씩대는 에길론을 바라보며 웃었다. 에길론은 다리가 후들거렸지만 똑바로 서려 애썼다. 그가 생각하기에, 또 그가 지켜본 인품으로 미루어 볼 때, 아이는 가짜일 리가 없었다. 상황이 이상하게 흘러가기 전에 배운 지식으로 은혜를 갚는 것. 그는 그것을 자신의 의무라고 생각했다.
"그럼 명백한 증명에는 어떤 것이 있을까요, 어린 소년?"
"당신이 나보다 더 작으면서 무슨...! 어울리지도 않는 어른 흉내입니까!"
그 말을 듣자 드미트리의 금색 눈이 잠시 흉악하게 드러났다가, 평정을 되찾았다. 그 표정에는 여유가 있어 보였다. 에길론은 대답했다.
"증인. 신분이 확실한 증인 같은 게 있겠지요!"
"신분이 확실한 증인이라면 누가 있을까요?"
드미트리는 여전히 빙긋빙긋 웃고 있었다. 에길론은 어쩐지 자신이 말려들어간다는 느낌이 들었지만 악을 쓰듯 대답했다.
"이 경우라면, 레이븐사이드의 친족이나 명성 있는 유관자가 맞을 겁니다!"
"잘 말하셨군요."
그 말과 동시에, 드미트리는 조심스럽게 자신이 몰고 온 휠체어를 톡톡 두들기고 휠체어를 덮은 포대를 치웠다. 그 포대 밑에서는, 작은 소녀가 잠을 자고 있었다. 검은 머리를 길게 늘어뜨린 소녀였는데, 어찌나 말랐는지 옷을 입었는데도 쇄골의 윤곽선이 옷에 새겨져 있었고 흰 팔목에는 가냘픈 손목뼈가 보일 정도였다. 그렇게 수척한 가운데에도, 빛을 잃지 않은 부분이 있었다. 눈썹이었다. 어쩐지 강인해보이는 굵은 눈썹.
드미트리가 잇달아 그 어깨를 흔들자, 그 눈썹이 흔들리며 눈을 떴다. 아이는 그 눈동자도 어디선가 본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깨달았다.
"자, 이 분으로 말씀드리자면, 몸이 워낙 병약하시어 용병단에 적을 올리지는 못했지만, 세상에 살아남은 란페이 우르드의 유일한 혈육."
그 눈썹과 눈은, 란페이 우르드를 똑 닮아 있었다.
"그 분의 여동생인 륜 우르드라고 합니다."
드미트리는 빙긋이 웃었다. 아이는 그제서야, 왜 에바와 드미트리가 그토록 기권을 권유했는지를 깨달았다.
"이 분께 여쭤볼까요. 어느 쪽이 진짜입니까?"
이 행위는, 아마도 영영, 아이를 조디악과 척을 지게 만들 행위였기 때문이었다.
륜 우르드. 아이는 란페이에게 들었던 말을 떠올렸다. 자신에게는 유난히 병약한 여동생이 있다는 말을, 그리고 그것이 항상 걱정이라는 말을. 그리고 그 걱정을 둘러싼 레고르의 망상을 떠올렸다. 그 말대로, 륜 우르드는 란페이와 얼굴은 닮았으나 보다 수척하게 청초했고 또 병약해보였다. 막 잠에서 깨어난 그녀의 눈동자는 흐리멍덩했다. 기면증, 갑자기 잠에 빠지는 희귀병을 앓고 있다고 했었다. 아이는 그것이 떠올라 주먹을 세게 쥐었다. 손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드미트리가 연이어 재촉하자, 그녀는 느릿하게 담요에서 손가락을 빼서, 에바를 가리켰다. 에바는 고개를 떨구었고, 드미트리는 박수를 쳐서 사방의 주목을 모았다.
"자, 이제 누가 정당한 진짜인지 좀 감이 오십니까?"
아이가 회유되지 않았을 때의 대책. 기권하지 않았을 때의 대책. 그 대책이라는 것은, 란페이가 그토록 지키고 싶어했던 동생. 그녀를 무기삼아 이용해서 아이를 실각시키는 것이었다.
'괜찮으냐?'
말없이 상황을 지켜보던 림이 아이를 보고 말했다. 아이는 놀랄 정도로, 손을 떨고 있었다. 이런 상황은, 정말로 감당하기 어려웠다. 자신의 은인의 혈육이, 자신 때문에 이용당하고 또 위험한 정쟁의 전면으로 끌려나오는 것을 아이는 정말로 바라지 않았다. 가슴 깊은 곳에서 분노 그리고 죄책감이 뒤엉켜 치받고 목울대로 올라오는 것을 간신히 삼켰다. 그 진정의 시간동안, 드미트리는 뻔뻔하게 이야기를 계속하고 있었다.
"배심위원으로서 바로 이 자리에서 약식 재판을 청구하는 바입니다. 에페 바체 시험은 신성한 것이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 신성한 시험에 가짜가 섞여서 정당한 시험자의 몫을 빼앗는다니, 이거 안 될 일이지요. 여기 만장하신 여러분은 고로 이 재판의 유관자인 바, 배심원의 자격이 충분히 있습니다. 재판을 열어도 되겠습니까?"
이것이 드미트리의 노림수인 듯했다. 일부러 아이를 이기게 만들고, 그 상태에서 이렇게 기습적으로 재판을 걸어서 공석으로 만들어버리면, 어쩌면 재시험이 열릴지도 모른다. 지금까지 통과한 사람들은 논외로 치고, 탈락자들에게 기회가 주어질지도 모른다. 드미트리는 계속 자신의 언변과 법적 지식을 섞어서 그런 희망을 유도했다. 이 자리에서 아이를 에페 바체 시험에서 떨어뜨리고 그걸 확정시켜버려서, 통령이든 누구든 개입할 수 없는 불가역적인 상황을 만들려는 수작이었다.
그것은 효과가 있었다. 지금 여기 있는 사람들은, 에페 바체 시험을 통과하지 못하면 버려진 고아로 돌아가야 할 젊은이들이었다. 여론은 서서히 드미트리 쪽으로 기울고 있었다.
"거기 숙녀분은 어떻습니까?"
드미트리는 빙긋 웃으며 샤론에게 말을 걸었다. 드미트리가 파악하기로 그녀는 대산맥파였고 명문가의 자손이었다. 정치적인 정세를 대충 이해하고 있을 것이라 생각해 말을 건 것이었다. 하지만 샤론의 반응은 달랐다. 그녀는 물수리를 꼬나쥐고 달려들었다.
"닥쳐, 이 재수없는 땅딸보 새끼야!"
휙, 드미트리는 기겁해서 물수리를 피했다. 하늘색 머리카락 몇 올이 잘려 바람에 나풀댔다.
"신성한 에페 바체? 지랄하고 있네. 신성한 걸 더럽히는 게 지금 어떤 새끼인데?"
고삐가 풀린 그녀의 말은 험했다. 드미트리의 제안을 받아들이자는 쪽으로 기울었던 장내의 분위기가, 샤론의 활약으로 일순 뒤집혔다. 시험관도 칼을 뽑아들고 가세했다.
"헤이든은 이미 더러운 조디악의 개다! 사소필렌 자식들의 황금 개집에서 헐떡이는 개자식들이다! 그대들은 개가 되고 싶은가!"
순식간에 무대 아래는 개싸움판이 되었다. 드미트리의 달변에 기울었던 분위기가 단숨에 팽팽해졌다. 드미트리는 실눈을 떠서 금안을 드러내고, 가늘게 눈꼬리를 떨었다.
'어쩔 수 없군요.'
하지만 자신의 손에는 륜 우르드. 란페이의 동생이 있었고 그녀는 이 사안에 대해서는 무제한의 명분 생산 기계나 다름없었다. 어떻게 쥐어짜내서 다시 여론을 돌려볼까, 드미트리가 고민하며 륜의 어꺠에 손을 대는 순간. 아이가 소리쳤다.
"잠깐!"
그 우렁찬 외침은 소란을 가라앉게 만들기 충분했다. 드미트리는 륜을 다시 깨우려던 손을 멈추고 아이를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경악으로 눈을 부릅떴다. 금색 눈동자가 놀람을 품은 채 부르르 떨었다.
'저걸 왜, 왜, 왜 당신이 가지고 있습니까!'
이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아이가 내민 것.
그것은 은방울꽃이었다.
성녀, 호노레 블뢰유에게 받았던 물건. 그 기능은, 어떤 사안에 대해서든 가장 공정한 재판을 받을 수 있도록 제소할 권리를 주는 것이었다.
아이는 저걸 내밀어서 지금 간략한 배심재판으로 몰아가려는 드미트리를 저지하고, 정식 재판으로 끌고갈 셈이었다. 성녀의 권위로 만들어지는 물건. 레이븐사이드를 죽음으로 몰고 간, 해골 세 개에 갈음하는 물건이다. 거부할 방법은 없었다.
'대체! 대체! 무슨 일을 겪으면, 저걸, 아니, 어떻게? 에바는 왜 저걸 보고 안 한 거야!'
드미트리의 얼굴이 흙빛으로 변했다. 이것 또한 예지에는 없는 일이었다. 아나테마가 개입해서 예지를 흔들어서 생긴 일임이 틀림없었다. 드미트리는 머리가 띵해지는 것을 느꼈고 아나테마라는 족속에 대한 불신이 솟아올랐다. 아이는 우선 은방울꽃을 내밀고 사방에 말했다.
"저는, 이 은방울꽃의 권리를 행사하겠습니다. 저, 방법은..."
"우선 사건 정지! 재판을 받을 때까지 사건 상황을 동결시킬 수 있으며, 제국의 동맹국은 라달라리아의 이름 아래 그 동결과 공명한 재판을 위해 신의성실을 다해야 할 것이 조약에 명시되어 있습니다!"
아이가 더듬자, 밑에서 지원사격이 들어왔다. 에길론이었다. 그 후로도, 에길론은 드미트리의 힘없는 역공을 반격하며 은방울꽃을 제대로 사용할 수 있도록 도왔다.
"제길, 제길!"
상황이 끝나자 드미트리는 화풀이로 쓰레기통을 걷어찼다.
한 달 후, 제국에서 성녀가 직접 행차해 재판을 주재할 것이며, 그때까지 에페 바체 시험은 동결.
이것이 합의의 내용이었다. 이 상황만 놓고 보자면, 조디악의 완벽한 패배였다. 배심원을 이용해서 날치기로 아이를 몰아세우려는 계획이 완전히 수포로 돌아갔다.
"갑시다!"
주춤대는 에바를 데리고 휠체어를 몰며 떠나는 드미트리. 목소리가 그 뒤를 잡아세웠다.
"잠깐!"
아이였다. 아이는 재빨리 휠체어로 다가가, 륜에게 무언가 말을 건네고 싶었다. 하지만, 그 기면증이라는 병의 영향인가. 륜은 그 잠시를 견디지 못하고 눈 감은 채 잠들어 있었다. 아이는 그 잠을 깨울 수 없었다.
멍하니 서서, 아이는 잠든 채 떠나가는 륜을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