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메이지 슬레이어-124화 (124/279)

22. 산맥 ( 6 )

륜 우르드.

용병이 아닌 자에게 권리를 주지 않는 관습 때문에 그녀는 없는 듯 존재해왔지만, 용병단이 멸문하자 달라졌다. 그녀에게는 상속권이 있었다. 만일 용병의 자격을 가진 자가 그녀와 결혼한다면, 합법적으로 레이븐사이드의 전통적 권리를 인계받을 수 있을 것이었다.

물론 이미 용병단이 멸문한 만큼, 그 권리는 오래가지 못할 것이다. 5년마다 있는, 24가문의 자격 연장 심사 때에 레이븐사이드는 권리마저 소멸당할 것이다. 하지만 뒤집어 말하면 그 심사가 오기 전까지 그녀는 그 권리를 줄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심사가 오기 전에 통령 선거가 있었다. 그녀와 결혼한 용병단은, 오직 자신의 독단으로 투표를 행사할 수 있었다. 그 탓에 그녀는 살아있는 투표용지처럼 여겨졌다. 한 번의 투표를 위해구겨지고, 버려지는.

에바는 더듬더듬 그 상황을 전했다. 아이는 떨리는 눈으로 에바의 말을 듣고 있었다. 드미트리는 그 말을 들려주면서, 자신들이 그 소녀를 구하자고 말했다고 했다. 에바는 륜이 처했던 상황을 들려주었다. 란페이의 죽음, 그리고 북서 자치령에서 레이븐사이드가 멸문되었음이 전달되자마자 사람들은 밀어닥쳤다. 밀어닥쳤다... 밀어닥쳤다.

상복을 입고 멍하니 누워 있는 그녀에게 누군가는 막무가내식의 구혼을 했고, 누군가는 협박을 했다. 그녀의 존재는 위협이라는 말이 공공연히 떠돌아다녔다. 누군가가 손에 넣어서 정치적으로 이용하기 전에, 죽여야 한다. 먼저 손에 넣어야 한다. 그런 말이 거리에 돌아다녔고 그녀의 귀에까지 흘러들어왔다. 상을 치르던 중에도 소문은 멈출 줄을 몰랐고, 위협적인 편지와 칼조각, 고양이 시체 따위가 전달되었다. 자살하라는 투서에 마음을 베였고 그 편지봉투 바닥에 있던 칼날에 손을 베였다. 상을 마치자마자, 그녀는 새된 비명을 질렀다. 백조의 비명처럼 가느다랗고 높은 비명이었다. 비명을 질렀고, 쓰러졌다. 기면증으로, 자주 죽음에 가까운 잠에 빠졌던 그녀의 눈꺼풀은 세상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영영 감기려는 듯싶었다.

그런 그녀에게 드미트리가 접근했다. 조디악은 그녀에게는 구원자처럼 굴었다. 호위를 보내 다른 사람들에게서 지켜주었고, 투서를 보낸 자를 붙잡아 매달았다. 드미트리는 륜이 처한 상황을 간략하게 전달해주면서, 에바에게 연기를 부탁했다. 그 용병단에서 돌아온 기나센 사람인 것처럼 굴어달라는 부탁이었다. 륜은 조디악의 간호 덕에 점점 생기를 되찾았고, 죽은 듯한 잠에 빠지는 일도 줄어들었다. 제국의 복수를 위해 도와달라는 말에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그런."

아이는 망연히 침묵했다. 에바의 말대로라면, 조디악은 륜을 인질로 잡은 것이 아니라, 구원해서 동료로 삼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녀의 말이 거짓은 아닐까 생각했다. 하지만 아이가 알고 있는 에바라는 사람은, 그런 거짓말을 이토록 울먹이며 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 뒤에서, 무슨 복잡한 사정이 돌아갔는지는, 나는 잘 몰랐어. 그냥, 그러면 좋다고 해서... 좋아해서."

그래서 기나센에서 머물렀다고 한다. 그리고 어느 날, 통령의 특무국이 에바에 대한 조사에 나섰다. 에바가 가짜 아이가 될 것이라는 사실은 극비였다. 에페 바체 시험 당일에야 드러낼 생각이었다. 조사를 피해 드미트리는 에바를 나사렘으로 파견 보냈고, 거기에서 에바와 아이는 만난 것이었다.

"믿어 줘. 진짜야. 너를 속일 생각이나, 이름이나, 난 그런 건 몰랐어..."

아이는 말없이 칼을 내렸다. 울상이던 에바의 얼굴에 살짝 기운이 돌아왔다. 하지만 다시 말을 꺼내는 아이의 목소리는 여전히 차가웠다.

"그래서? 결국 어쩌라는 건데? 왜 찾아온 거야?"

"언니는 이미 교섭의 길이 끊겼다고 그랬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일단, 사과하고, 그리고, 지금이라도 함께하자고 말하고 싶었어."

"함께? 뭘?"

"그러니까, 이 나라랑 밑엣 나라랑 합쳐서, 제국을 상대로..."

"닥쳐!"

"대, 대가로, 레이븐사이드를 재건하는 걸 도와줄게."

에바는 울먹이면서도 말했다. 아이는 잠시 침묵했다.

"정말이야. 이미, 그, 륜 아가씨한테도 같은 걸 약속했어. 그 동전으로, 맹세까지 했어. 많은 자금을 넣어 주었고, 무기도 주었고, 잘은 모르겠지만 이것저것 많이 이미 주었다고 그랬어. 배신하지 않을 거라고, 절대적으로 편이 되어줄 거라고 그랬어."

머리가 어지러워 오는 것이 느껴졌다. 정말로 그렇게까지 했다면, 이미 그들의 행위는 인질극이라고 할 수조차 없었다.

"결국 이용하기 위해서잖아!"

스스로에게 들려주려는 것처럼 아이는 말했다. 그리고 흉험하게 늘어놓았다. 북서 자치령에서 자신이 보았던 것들을, 그리고 조디악이 하고 있는 짓들에 대해서 가감 없이 에바에게 들려주었다. 에바는 경악한 얼굴이 되었다. 아마도, 그녀에게는 숨겨 왔을 사실들이었다.

"너희들의 말이 진짜인지 나는 모르겠어. 내가 본 건, 너희들이 먹어치우고 커다란 도박장이 되어버린 땅 뿐이야. 이 나라도 그 꼴로 만들어버릴 텐데, 너는 거기 동조하는 거야?"

벼락을 맞은 듯 에바는 부르르 떨었다. 그 눈에는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 있었다. 하지만, 그 고개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어쩔 수 없어."

아이의 가슴속에서 울컥 무언가가 치솟아올랐다. 차라리 륜을 위해서라거나, 제국이 싫다거나, 그런 변명을 해주기를 바랬다. 그러면 마음 깊은 곳에서 에바를 미워할 수 있을 것 같았지만, 그 모든 것을 감내하고도 결정한다는 듯한 침묵은 아이의 가슴에 혼돈을 일으켰다. 눈물 섞인 목소리는 진심처럼 들렸다.

다른 나라, 다른 민족을 희생시켜서라도 제국을 타도한다. 그것을 에바는 선택한 것이었다. 충분히 선의를 가지고 있을 사람인데도 그랬다. 아이는 문득 충동을 느꼈다. 저 눈물로 일그러진 얼굴을 더 짓밟아 부숴버리고 싶다는, 어린아이의 파괴 충동과 비슷한 것이었다. 간신히 그것을 억누르면서 아이는 말했다.

"너도 결국 똑같은 마술사였구나."

그 말에 충격을 받은 듯, 에바의 입술이 푸르르 떨렸다. 그리고 물으나마나한 질문을 했다.

"제안을 거절하는 거야?"

침묵. 대답 대신 다시 유혼을 뽑아들었다. 그녀는 고개를 푹 숙였다. 그렁그렁 맺혀 있던 눈물이 기어코 바닥에 몇 방울 떨어지는 것이 보였다. 함께하고 싶었는데, 미안해. 에바는 그런 말을 조용히 뇌까리곤 들어선 문으로 조용히 나갔다. 쾅, 문이 닫혔다.

에바가 떠나고 아이는 다시 침대에 드러누웠다. 방 안은 어두웠다. 이제 아이가 잠들지 못하게 괴롭히는 것은 바깥에서 몰아치는 눈비뿐이 아니었다. 에바가 들려주고 간 말이 아이의 마음을 어지럽혔다.

그녀의 말 속에서 륜은 자신의 의지로 제국에 대한 복수를 결정하고, 조디악에게 협력하고 있는 듯이 들렸다. 하지만 아이가 바라보았던 륜은 아니었다. 그녀의 눈은 투명하고 무기력했다. 아이는 그런 눈동자를 본 적이 있었다. 어렸을 적, 거울에서였다. 아이가 생각하기에 그녀는 그저 삶의 의지를 잃고 흘러가는 대로 세상을 표류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 다음 아이는 에바를 떠올렸다. 함께 동행하면서 본 에바는, 선한 사람처럼 보였다. 최소한 선하려고 노력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녀는 지금 기나센을 조디악의 병참기지처럼 만들어버리려는 음모에 동참하고 있었다. 선한 사람이 왜 악한 결정을 내려야 하는 지 아이는 이해하기 어려웠다. 그녀는 제국의 적으로 태어났다고 했다. 숙명에 대해서 생각했다. 누군가의 적으로서 태어나는 삶에서 순수를 지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생각했다.

에바가 남긴 말은, 기나센과 레이븐사이드를 분열시키고 있었다. 훌륭한 기술이었다. 자신이 가진 긍지가 기나센 용병의 긍지인지, 레이븐사이드의 일원으로서의 긍지인지, 무언가를 선택하면 무언가는 영영 소멸해버리는 것인지. 아이는 스스로도 구분하기 어려웠다. 머리가 실타래가 뒤얽힌 듯 복잡해서 아이는 머리를 쥐어뜯었다. 침대에서 상체를 일으켜 앉았다.

"재판에서... 이기면."

이기면, 자신은 조디악의 음모를 분쇄할 수 있을 것이다. 통령 후보를 잃어버린 조디악은 기나센을 먹어치울 수 없을 것이고, 작센과의 전쟁도 제국과의 전쟁도 일으키지 못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륜은 어떻게 되는 걸까. 그런 물음이 머리에 떠올랐다. 그 때였다.

"깨어 계셨군요?"

벌컥, 문이 열리고 또 다른 사람이 들어왔다. 이번에는 에길론이었다. 밤이 깊어질수록 바깥에 내리는 눈비는 더 세차게 내리는 듯, 그의 몸은 난파선에서 살아남은 사람처럼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급하게, 조력자가 될 만한 사람을 모셔왔습니다. 이 쪽에서도 아이 씨를 찾고 있어서 접선이 빨랐어요."

그러면서 에길론은 누군가를 앞세웠다. 아이는 초점이 가라앉은 눈으로 그 누군가를 바라보았다. 아는 얼굴이었다. 레테였다. 그녀는 살갑게 미소를 지으며 손을 내밀었다.

"어떻게 그렇게 강한가 안 그래도 뒷조사를 하던 참이었는데, 진작 말하지 그랬나. 이거 악수 한 번 해봐도 되겠나?"

아이는 조용히 그 손을 바라보았다. 손에 새겨진 굳은살과 손금이 그리는 무늬를 바라보았다. 그 결합은 아이의 머릿속만큼이나 어지러웠다. 한참이나 악수를 받아주지 않자, 머쓱해진 레테는 콧잔등을 슥 쓸며 말했다.

"뭐, 마음이 복잡하겠지. 이해해. 나도 셋째 동생이 죽었을 때 그랬거든."

그 말에 에길론은 떨었지만 아이는 아무 말도 없었다. 레테는 본론을 말해주었다.

"가자구. 통령이 밤잠도 설치면서 자네를 기다리고 있어. 모든 힘을 다해서 자네를 도울 테니, 빨리 저택에서 대책을 세우자고 그러시던데."

통령. 아이는 그 인내심의 화신 같은 사람을 떠올렸다. 그 역시 만나보아야 할 사람임은 분명했다. 유령처럼 일어서면서, 아이는 문득 창문을 바라보았다.

눈비는 거셌다. 눈비의 뒤로, 기나센을 성벽처럼 둘러친 산맥이 보였다. 출렁이는 산맥은 어둠 속을 뒤채이는 파도처럼 보였다.

*

접선 장소는 예의 그 안가였다. 에길론은 그 안가에 들어갈 수 없어서, 아이의 손을 붙잡고 작별 인사를 했다.

"꼭, 꼭 승리하시길 바랄게요."

에길론은 아이의 손을 맞잡으며 그렇게 말했다. 몇 시간 전만 하더라도 거기에 자신있게 대답해주었을 텐데, 아이는 어물거리며 답할 수밖에 없었다. 륜의 초점 잃은 눈동자가 자신을 응시하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푹 젖은 채 들어가자마자, 어떤 노인이 수건으로 자신의 머리를 닦아주었다. 통령이었다.

"먼 길 오느라 고생했네. 아이 우르드 군. 아니, 나사렘의 구원자라고 불러야 하나? 아니면 아셀라이 클라릿체의 제자라고?"

뒷조사를 했다더니 이미 거기까지 알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통령은 사과를 건넸지만 그 얼굴에는 숨길 수 없는 득의의 빛이 맴돌고 있었다. 조디악에게 수세에 몰려 있던 상황에서, 갑자기 무기가 손에 들어온 것이다. 기뻐하지 않을 수 없을 터였다.

아이는 꾸벅 고개를 숙여 답례하고, 통령이 인도하는 대로 의자에 앉았다. 통령은 아이를 감격시킬 셈이었는지 상 하나를 두고 마주 앉았는데, 아이는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그런 것에 일일히 반응하기에는, 륜이 겪었다던 고초가, 그리고 륜을 그렇게 몰아세웠다던 24가문에 대한 생각이 너무 무거웠다.

통령은 노회했다. 곧 그 낌새를 눈치챈 것인지, 아이에게 물어보았다.

"혹시,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나? 우선 그것부터 확실하게 풀고 가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 드는군."

아이는 몇 번이나 입을 움직였고, 곧 질문을 던졌다.

"륜 우르드. 그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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