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치즈와 구더기 ( 2 )
다음 날 새벽, 아이는 레나를 데리고 산장으로 돌아갔다.
에길론, 샤론과 함께 재판의 대책을 세우는 기지 역할을 하기로 한 그 산장에는, 이미 샤론과 에길론 두 사람 모두 돌아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뜬눈으로 밤을 지샌 듯, 꾀죄죄한 몰골로 두 사람은 엉겨붙어 있었다. 샤론은 침까지 한 줄기 흘리면서 자고 있었는데, 문 열리는 소리에 잠을 깨서 후다닥 기지개를 켰다.
"뭐야, 이제, 언제, 음, 언제 온 거야?"
그리고 그녀는, 아이 옆에서 쭈뼛거리는 레나를 보고 눈을 가늘게 떴다.
"그 아가씨는 뭔데?"
"중요한 사람."
그 말을 들은 레나의 얼굴이 더없이 새빨개졌다. 아이는 순수하게 재판에 있어서 중요한 사람이라는 뜻으로 말한 것이었지만, 오해하기에 충분했다. 비죽 솟은 한 가닥의 앞머리가 나풀거리도록 샤론은 크게 콧바람을 불었다.
"이래서 잘 생긴 놈들이 싫다니까. 네 연인 먼저 챙기러 홀랑 떠난 거야? 밤새 습격이라도 있었나 우리가 얼마나 걱정했는지 알아?"
"여여여여여여..."
레나는 말을 더듬었다. 구멍을 뚫으면 김이 푹 솟아오를 것 같은 상태였다. 그 난리통에 잠들어있던 에길론도 부스스 몸을 일으켰다. 통령의 집에 인도한 것이 에길론이었던 만큼, 그가 더 책임과 걱정을 느끼고 있던 모양이었다. 일어나자마자 울먹이며 자초지종을 물었다.
아이는 잠시 고민했다. 자초지종을 이야기해주어도 괜찮을까, 그런 망설임이 들었다. 그러나 뜬눈으로 밤을 지샌 듯한 두 사람의 몰골을 보자 마음을 정할 수 있었다. 아이는 간밤의 일을, 그리고 자신이 열여섯 살이 되고 나서부터 살아온 삶을 간략히 들려주었다. 아이가 아나테마라는 사실이나, 숨겨야만 하는 중요한 사실들은 얼버무렸지만 이야기를 전개하는 데에 문제는 없었다. 통령의 제안을 듣자 샤론은 귀신 쫓는 동상처럼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그건 말도 안 되지!"
그녀는 씩씩거렸다. 정치와 파벌의 논리는 샤론을 설득할 수 없는 듯했다. 에길론은 가만히 침묵하고 있었다. 복잡한 표정이었다. 한 사람의 목숨과 나라를 저울질할 수 있는가, 아니라고 대답하기는 쉬울 것이다. 하지만, 그 쉬운 것을 과연 통령이 몰라서 그랬겠는가... 아이는 어제 자신의 얼굴이 떠올라서 피식 웃음을 지었다.
"나는 그래서 전부 베어내기로 결정했어."
뭐가 어떻게 되었든, 위협은 최종적으로는 폭력으로 다가올 것이다. 그 폭력은 악마의 모습일 수도, 산양의 모습을 한 해골일 수도 있고, 용일수도 천사일 수도 있다. 그럼 그 모든 것을 베어버리면 될 일이었다. 아이는 칼로 세상을 지켜낼 수 있다고 믿고 싶었다.
아이는 어떤 것도 내줄 생각이 없었다. 륜도 구해내고, 이 나라에서 조디악을 몰아내고, 가문을 재건한다. 아이가 지난 일 년간 걸어온 삶은, 이 허황된 이야기를 진실로 만들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었다.
그 단순성이 에길론을 설득한 것일까. 에길론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동의할게요."
이건 그에게는 위험한 이야기일 수 있었다. 에길론이 속한 용병단, 쿠일란은 소산맥파에 속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 말을 꺼내는 소년의 얼굴은 결연했다. 그때 그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는 목소리가 있었다.
"저, 저, 혹시 시장하지 않으세요?"
레나였다. 어젯밤 아이에게 끓여준 치즈 스튜는, 제대로 맛을 내려면 10인분을 한번에 끓여야만 했다. 그래서 잔뜩 남은 스튜를 여기까지 싸들고 온 것이었다.
"아니, 여기는 산 속이니까. 곰이나 이리가 안 꼬이게 하려면 냄새가 많이 나는 건 피해야... 이거 가야쉬잖아?"
가야쉬. 이 치즈 스튜의 이름이었다. 샤론은 반문을 하다가 말고, 가야쉬는 어쩔 수 없다며 앞장서서 불을 피웠다. 어처구니가 없어서 아이는 쿡 웃음을 터뜨렸다.
*
간밤새 숙성되면서, 감칠맛이 나는 국물을 더욱 깊게 빨아들인 고기는 육향이 진하고 살결이 부드러웠다. 그 고기를 접시 가득 담아 집어삼키며 샤론은 말했다.
"그러니까, 어제 돌아갔더니 파티를 열어두고 기다리고 있더라 이 말이지."
시사이드. 24가문에 속하는 명가. 그녀는 이미 시험을 통과했으므로, 더 이상 가문을 숨길 이유가 없었다. 시사이드의 파티는 그녀를 위해 주최된 것이었다. 그녀는 거기서 엿들은 이야기를 열심히 늘어놓았다.
"영감탱이나 재수 없는 오라비나, 전부 네 이야기였어. 여론은 반반이더라. 네가 진짜라는 놈도 있었고, 그 고양이 닮은 여자가 진짜라는 놈도 있었고. 살짝 설득을 시도해봤는데, 무슨 말을 꺼내든 다 '통령이 조작한 증거'라고 몰아붙이던데."
대산맥파도 소산맥파도 좋을 대로 믿음을 골라잡았다. 고향에 당도한 떠돌이의 신분처럼 무결하게 증명되기 힘든 것도 없을 것이다. 대산맥파는 아이가 통령이 조작한 가짜라고 믿을 준비가 되어 있었고, 소산맥파는 에바가 가짜라고 믿을 준비가 되어 있었다. 진영 논리 속에서 개별적인 사실관계들은 기실 큰 의미가 없었다.
"그래서, 뭐시더라, 조디악 놈들이 뒤에서 꿈틀대는 건 역겹지만 이용만 잘하면 될 일이다, 오랜 맹방인 레이븐사이드를 돕자, 뭐 이렇게 결의대회 같은 걸 하고 끝났어."
"결국 여론의 지원 같은 건 받기 힘들다는 뜻이군요."
에길론은 자조하듯 말했다. 이런 사태에 있어서만큼은, 어쩌면 초당적인 합의가 일어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만, 무리였던 모양이었다. 샤론은 걸쭉한 국물을 후루룩 마시며 말을 이어갔다.
"그래도 얻은 건 있는데. 밤중에 영감탱이 방 앞을 지나가다가 우연히 몇 마디를 주워들었어. 우리 법률 고문이랑 먹물 몇 놈을 찝어다가 공회당 비밀 장서고에 파견을 하려고 하고 있던데?"
"비밀 서고?"
"숨겨야 하는 기록이나 중요 자료 같은게 들어있는 서고인 모양이야. 네가 성녀의 꽃인가 뭔가로 피할 수 없는 재판을 열어버렸으니까, 이 쪽도 재판을 도와주려고 조사 같은 걸 하는 거 아닐까? 뭐 난 멍청해서 잘 모르겠지만."
에길론은 눈을 껌뻑이며 말했다.
"우연히 들은 것 치고는 굉장히 자세하네요? 혹시 몰래 엿들은 거 아닙니까?"
"그래, 들켜서 화장실 간다고 얼버무리다가 남자 화장실에... 뭐 임마?"
샤론이 맞받았다. 쑥쓰러운 듯 접시를 탕 내려찍었다. 에길론은 그 모습을 보고 몇 마디 더 놀려줄까 하다가 그만두었다. 어쨌든 샤론의 말은 다음 행동을 알려주고 있었다.
"그럼 우리가 먼저 그 비밀 서고라는 곳에 가야겠네."
아이는 자리에서 일어서서 검은 망토를 뒤집어썼다. 샤론은 레나와 함께 남아서, 타니아의 호위를 하기로 했고 에길론은 동행해서 서고의 자료를 살펴보기로 역할이 정해졌다. 네 사람은 재빨리 각자 맡은 역할대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
공회당의 경비는 삼엄했다. 지금 재판은 초미의 관심사였다. 떨어진 에페 바체 후보들은 어떻게든 아이가 가짜로 판명나기를 바랬고, 그 사람들의 입을 타고 소문이 전염병처럼 번져나가서 가라앉을 줄을 몰랐다. 공회당 앞에서는 사람들 몇 명이 시위를 하고 있었다. 익숙한 얼굴도 있었다. 골린이었다. 얻어맞아서 온몸에 붕대를 감은 그는 제딴에 열심히 선동을 하고 있었다.
"그 비열한 놈의 본명은 갈릴 쿠크란이라는 정보를 얻었소! 그 자는 작센인이오! 작센에게서 정치자금을 받아먹은 통령이 데려온 매국노요! 본국에서 아녀자 열일곱 명을 강간하고 서른 명을 죽인 죄로 감옥에 갇혀 있다가 이번 일을 마치면 풀려난다는 조건으로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고 들었소!"
개소리였다. 갈릴 쿠크란, 아니 아이는 어이가 없어서 그냥 웃음이 나왔다. 골린에게 자신이 지껄이는 말이 진짜인지 가짜인지는 그다지 중요한 게 아닌 듯했다. 그는 계속해서 확인되지 않은 정보를 그러모아서 선동했고, 사람들은 열렬히 호응했다. 아이는 그 호응이 고마웠다. 그 덕분에, 경비가 정면에 집중된 틈을 타서 공회당에 숨어드는 데 성공했기 때문이었다.
"지하 장서고, 지하 장서고가 어디일까..."
에길론은 사방을 더듬으며 비밀문을 찾으려 애썼다. 얼마 지나지 않아 찾을 수 있었다. 장서고는 결투장의 지하에 있었다. 어떻게 이렇게 금방 찾아낼 수 있었느냐고 묻자, 에길론은 쑥스러운 듯 대답했다.
"여기서 이틀 정도 머물렀었잖아요. 혹시라도 이용할 수 있는 게 없나 해서, 여기저기 조사를 해 보았어요. 그런데 지하에서 볼 때, 이 부분만 벽으로 막혀 있더라구요."
매일 바둑만 두면서 노는 줄 알았는데, 그런 일을 하고 있었단 말인가? 아이는 그 준비성에 살짝 탄복했다. 지하는 어둑어둑했다. 과연 책이 많은 곳인가, 보존제와 가죽 장정의 습한 향기가 눅눅하게 사방에 퍼져 있었다. 아이는 준비해둔 등롱을 꺼내 불을 밝혔다. 장서고로 향하는 통로는 금세 찾을 수 있었다. 그러나, 그 끝에는 예상하지 못한 것이 있었다.
"왔군?"
레테였다. 레테가 팔짱을 끼고 통로의 끝을 지키고 있었다. 아이는 표정을 딱딱하게 굳히고, 품에서 검을 꺼내들었다. 함정에 빠진 것인가? 순간적으로 에길론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에길론 역시 당혹한 표정이었다.
"예. 비켜 주실 수 있으신가요."
아이는 싸늘하게 말했다. 그런데 레테의 반응도 의외였다. 그녀는 한숨을 쉬더니, 체념 섞인 미소를 짓고 옆으로 비켜섰다. 적의가 없다는 것을 표현하는 듯했다. 아이는 얼굴을 딱딱하게 굳히고 그녀가 열어준 길을 따라 통로의 끝에 도달했다. 그리고 얼굴을 구겼다. 장서고의 문은, 두꺼운 철문으로 막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문은 이 열쇠로만 열 수 있어. 억지로 열면 바로 경보가 울려서, 벌떼처럼 사람들이 쏟아지겠지."
레테는 둥근 열쇠꾸러미를 짤랑거리며 말했다. 아이는 홱 돌아섰다. 레테는 빙긋빙긋 웃으며 아이에게 말을 계속했다.
"어제 결국 관저로 돌아오지 않았지? 왜 그랬나?"
"동의할 수 없으니까요. 나는 나의 방식대로 승리할 겁니다."
"그래, 나도 그렇다."
그 말과 함께, 레테는 열쇠꾸러미를 집어던졌다. 엉거주춤 그 열쇠꾸러미를 받아든 아이는 순간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레테는 신중한 얼굴로 말을 계속했다.
"통령께서는 존경할 만한 분이시지. 나는 그 분을 존경해. 하지만 존경이 복종을 뜻하는 건 아니야. 나는, 다른 모든 것에는 동의한다만, 그 아가씨의 죽음이 필수불가결하다는 데에는 동의할 수 없어."
"당신..."
레테는 지금 항명을 하고 있는 것이었다. 이게 얼마만큼 위험천만한 일인지, 정치에 무지한 아이도 짐작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눈빛은 진중했다.
"통령께서는 그녀의 영혼이 죽었으니 이미 죽은 사람이라고 그러셨지? 정치판에 발을 들이기 전에는, 다른 말을 하시곤 했어."
"무슨 말인가요."
"영혼은 부활할 수 있다. 숨이 붙어 있다면."
그 말과 함께 그녀는 주먹을 내밀었다. 아이는 엉거주춤 그 주먹에 주먹을 부딪혔다. 레테는 씨익 웃으면서 말을 이어갔다.
"부활시켜 줘."
그리고 뒤돌아섰다. 그녀는 작게 설명을 덧붙였다. 어제 관저에 다시 돌아왔더라면 받을 수 있었을 조력. 그것이 이 열쇠라는 것이었다. 이 장서고 안에는 외부에 공개되지 않은 법조문들, 판결문과 저작물 등이 잔뜩 쌓여 있었다. 재판이 열리는 곳의 습속을 우선시하는 은방울꽃 재판에서는 천금과 같은 가치를 가진 것들이었다. 만약 아이가 통령에게 적극적으로 협조했더라면, 통령은 그 즉시 이 저작물을 오직 아이에게만 공개하고 법관들을 동원해 도움을 주었을 것이라고 했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이게 다야."
레테는 그 중, 장서고에 출입할 권리만을 몰래 건네준 것이었다. 그녀는 믿는다고 했다. 아이와 직접 검격을 나누어보았기 때문에, 그 품은 힘과 순결함을 믿을 수 있다고. 아이는 가슴 속에서 무언가가 울렁거리는 것을 느꼈다. 멀어지는 그녀의 뒷모습에 자그맣게 머리를 숙였다.
"자, 그럼."
에길론을 심호흡을 하며 열쇠를 장서고의 문에 꽂아넣었다. 기름칠이 잘 되어 있는지, 두꺼운 철문은 소리도 없이 미끄러지듯 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