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메이지 슬레이어-129화 (129/279)

23. 치즈와 구더기 ( 3 )

*

먼 옛날, 한 재판이 있었다.

생애의 혼돈을 담은 재판이었다. 그 결과와 과정에서 사람들은 도덕적인 내용물을 추출해낼 수 없었고, 그 전말은 사람들을 불쾌하고 슬프게 만들었다. 재판의 기록은 숨겨졌다. 장서고의 퀴퀴한 문서더미 속에 던져졌다.

한 맹인 처녀가 있었다. 화재로 시력을 잃은 그녀는 기적적으로 살아남았으며, 그 대가로 절대로 거짓말을 하지 않겠노라고 맹세했다. 그녀는 그다지 좋은 혼처를 구하지 못했다. 주정뱅이와 결혼했으며, 그 주정뱅이는 아내를 험하게 다루었다. 농사일은 하는 둥 마는 둥 술집을 전전하던 그는, 어느 날 건드려서는 안 되는 사람과 시비가 붙었고, 더럭 겁이 나서 그날 밤 야반도주했다. 여자는 혼자 남았다.

일년쯤 후, 누군가가 그녀의 집에 찾아왔다. 목소리 흉내를 아주 잘 내는 떠돌이었다. 그 떠돌이는 달아난 주정뱅이와 매우 닮아서, 술집에서 세 명이나 되는 사람한테 주정뱅이로 오해를 받았다. 사연을 들은 떠돌이에게 기막힌 계획이 떠올랐다. 떠돌이 생활도 질렸겠다, 달아난 주정뱅이로 위장해서 이 곳에 정착하자는 것이었다.

여자는 처음에는 돌아온 남편을 의심했으나, 그의 능숙한 연기에 속아 진심으로 그를 남편인 것으로 믿게 되었다. 얄궂게도, 그 떠돌이는 그 주정뱅이보다 좋은 농부였고, 이웃이었고, 또 남편이었다. 삼년 후 진짜 주정뱅이가 돌아왔을 때, 떠돌이는 이미 완전히 정착해 있었다.

일대 소란이 일었고 재판이 일었다. 닮았다 한들 진짜보다 똑같을 수는 없는 법이었다. 곧 주정뱅이의 부모는 누가 진짜인지를 알게 되었고, 소송이 일어났다. 그러나 부모를 제외한 모든 사람들은 주정뱅이가 진짜이기를 원하지 않았다. 심지어 법관조차 그러했다.

그래서 그들은 떠돌이가 이길 수 있는 재판을 기획했다. 흉터, 어린 시절의 기억, 그만이 알고 있는 비밀 등등 주정뱅이가 가진 증거들을 무력화할 수 있는 재판이었다. 유관자 배심원단을 공정하게 뽑아서, 그들이 진짜와 가짜를 정하는 방식이었다. 남자의 부모 두 명, 아내, 주정뱅이의 죽마고우 두 명과 마을의 존경받는 촌로 몇 명까지 여덟 명이 배심원으로 정해졌다.

계획대로라면 남자의 부모와 친구 한 명 말고는 전부 떠돌이의 손을 들어주어야 했다. 하지만 이변이 일어났다. 뒤늦게 전말을 알게 된 아내가, 당연히 떠돌이의 편을 들 것이라는 예측을 저버리고 주정뱅이의 손을 들어주어 버렸던 것이다.

재판장이 거듭해서 정말이냐고 물어도 아내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그게 진실이므로 그래야만 한다는 것이었다. 결국 재판은 연기되었고, 주정뱅이가 이기고 말았다. 떠돌이는 목이 잘려 초소의 장대에 내걸렸다. 주정뱅이는 분노에 사로잡혀서 더욱 심하게 술버릇을 부렸고, 아내가 간음을 했다며 매일 학대했다. 견디다 못한 아내는 죽었고 주정뱅이는 가산을 들고 또다시 도망쳤다. 텅 빈 집에는 부서진 사기그릇만이 하얗게 빛났다.

이토록 무가치한 진실도 진실이라는 이유만으로 지켜져야 하는 것인가. 사건을 정리한 법관은 황망한 필체로 이런 글을 적어 마무리했다. 드미트리는 그 기록을 읽고 쿡 웃음을 터뜨렸다. 먼 옛날의 자신, 법으로 생애의 혼돈을 풀어낼 수 있으리라고 믿었던 어린 날의 자신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이제 거의 다 도착했군요. 에바, 일어나세요."

드미트리는 차창 밖으로 지나가는 풍경을 보며 말했다. 드미트리는 지금 에바와 함께 마차에 타고 있었다. 재판을 준비하기 위해서였다. 속으로는, 여기 오기 전 읽었던 그 기록을 생각하고 있었다. 그 이야기는 어린아이의 낙서처럼 무내용했다. 무언가 잔뜩 뒤엉켜 있었고 들어차 있었지만 어떤 의미도 읽어낼 수 없었다. 생애의 혼돈이란 원래 그런 것일지도 몰랐다.

오로지 기술적인 의미에서만, 그 기록은 가치를 가졌다.

'결국 은방울꽃 재판은 신의 눈 아래 이뤄지는 재판이니까, 현지의 관습과 현지의 판례에 영향을 많이 받는단 말이죠.'

그렇다면 그 기록은, 지금 드미트리에게 무엇보다도 중요한 기록이었다. 억지로 여자를 구원해주기 위해서, 법관들은 어떤 재판들보다도 배심원의 의견을 존중하는 법정을 구성했다. 그 이후로 그런 엽기적인 재판이 일어난 적이 없었으므로, 이는 곧 선례라고 보아도 무방했다.

'그러니 이 재판은, 종국에는 배심원 쟁탈전이 될 거라 이 말이지요.'

검토해본 결과 9할 이상 확신했다. 이 재판은 8명의 유관자를 배심원으로 불러서, 어느 쪽을 지지하는지를 묻는 재판이 될 것이었다. 촌극이었다. 어이없는 이야기였던 그 재판은, 수백 년의 시간을 지나 느닷없이 중요성을 가지게 되었다.

'문제는 레이븐사이드가 이미 멸족해서, 배심원으로 뽑을 유관자 자체가 얼마 남지 않았다는 건데...'

우선 한 명은 확보했다. 륜 우르드, 지금도 죽은 듯 잠에 빠져있을 그녀는 가장 직접적인 유관자였고, 또 무조건 자신들의 편을 들 것이었다. 그럼 나머지 일곱 명을 찾아야 한다. 드미트리는 어제부터 철야해서 그 일곱 명이 될 법한 사람들을 골랐고, 지금은 그 유력한 후보와 접선하러 이동하는 중이었다.

"에바! 일어나야 한..."

말하던 드미트리는 멈추었다. 잠자고 있는 줄 알았던 에바가, 전혀 잠들지 않았다는 것을 확인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멍하니 차창 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기나센에 도착한 이후 그녀는 계속 그랬다. 어딘가 침울한 듯하기도 했고, 어른스러워진 것 같기도 했다. 원래는 말끝마다 언니를 붙이며 곤란할 정도로 달라붙었던 녀석이었는데 지금은 거리감까지 느껴졌다.

"많이 속상한가요?"

드미트리는 먼저 다가서기로 했다. 에바는 중요한 인물이었다. 앞으로는 더더욱 중요해져야 했다.

조디악은 예지로 레이븐사이드의 멸문과 길 아잘록의 7위계 등극을 알고 있었다. 예지는 3할 정도는 흐릿했고 7할 정도가 선명했으나, 이 두 가지는 너무나 명확했다. 소니아의 능력으로 이 사실을 알아낸 조디악은 바로 계획을 수립했다. 레이븐사이드의 생존자를 우상으로 만들어서, 기나센을 선동하고 전쟁으로 몰아넣는다는 계획이었다.

그래서 에바를 기나센에 대기시키던 중, 아이를 발견했다. 뒷조사 끝에 아이가 정말로 기나센의 눈표범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조디악은, 곧 아이를 회유할 계획을 세웠다. 마술사가 아닌 아이가 우상 역할을 맡아준다면, 성도 8궁의 직위까지 덮어씌우며 더욱 공고한 우상화가 가능해기 때문이었다. 회유라기보단 협박에 가까웠지만 조디악의 기준에선 그건 회유였다.

그리고 아이를 동료로 맞으려는 계획이 실패한 지금, 에바는 앞으로 기나센의 우상이 되어주어야 했고 전쟁 때에는 통령이 되어주어야 했다.

"마음 굳게 먹으십시오, 에바. 지금 당장이라도 그 괴물들이 저희 마차를 습격해올지 모릅니다. 제 호위를 해 주어야 할 당신이 그렇게 넋이 빠져 있으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에바와 드미트리가 굳이 동행하는 데에는 그 이유도 있었다. 이렇게 약한 척, 믿고 의존하는 척을 하면 에바는 알통을 만들어보이며 기운을 차리곤 했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에바는 여전히 반쯤 풀린 눈으로 먼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언니, 제가 옳은 일을 하고 있는 걸까요?"

"무슨..."

"요즘엔 잘 모르겠어요."

그리고 고개를 푹 숙여 무릎에 머리를 박았다. 뒤늦은 사춘기인가? 드미트리는 눈썹을 경련했다. 대체 무슨 심경의 변화가 있던 것일까. 에바는 반쯤 아나테마였고 그래서 그녀가 얽힌 일들의 예지는 모두 흐릿했다. 지금까지 그 흐릿함은, 에바 본인이 좋은 말론 순수하고 나쁜 말론 바보같았기 때문에 통제되어 왔다. 그런데 어디서 무엇을 보았는지, 요즘 자꾸 이상 징후를 보이고 있었다.

"명심하세요. 모든 것을 구할 수는 없는 법입니다. 여기 오기 전에 같이 그 맹인 처녀의 이야기를 읽었지요?"

"네..."

"개인의 양심을 지킨 대가로 그녀는 주변 모두를, 심지어 자신까지도 파멸에 몰아넣었지요. 그게 에바, 당신 눈에는 보기 좋던가요?"

"아니요..."

"무언가를 얻으려면 무언가를 포기해야 합니다. 세상의 실타래는 너무나도 복잡하게 얽혀 있어서, 잘라내는 것 외에는 푸는 방법이 없는 혼돈이에요. 무언가를 잘라내야 무언가를 지킬 수 있다 이 말입니다. 알겠지요? 예를 들면, 아가씨라던가."

"아가씨..."

에바는 멍하니 륜을 떠올렸다. 인형 같은 사람이었다. 깨어 있는 짧은 시간동안, 함께 이야기를 나누면 즐거웠고 이야기를 듣는 것이 좋았다. 그런 사람을 돕는 일이라기에, 에바는 흔쾌히 가짜 역할을 수락한 것이었다. 드미트리는 또다시 그 부분을 찌르려 하고 있었다.

"그 버르장머리없는 녀석은 결국 통령 편에 붙은 모양이던데요. 통령은 그녀를 가만두지 않을 겁니다"

"왜요?"

"가장 위험한 정적이니까요."

드미트리는 득의양양해서 설명했다. 이미 저 쪽은 륜을 잘라내서 버릴 작정인 것이 틀림 없다고, 그러니 륜을 지키기 위해서는 다소 양심에 찔리는 부분이 있어도 자신의 말을 따라야 한다는 설명이었다. 하지만 에바는 눈을 반개한 채 반은 듣고 반은 흘려보냈다.

"글쎄요? 언니, 나는 잘 모르겠어요..."

아이가 정말로 그 아가씨를 희생시킬까? 지난 한 달 동안 아이와 함께 다녔었던 에바의 입장에선 도저히 그럴 것이라곤 상상이 되지 않았다. 드미트리는 쓴웃음을 지었다.

"뭐, 이제 차차 알게 되겠지요. 도착했습니다. 이 곳이 아노덴 출신자들이 모이는 곳이라고 그랬지요?"

마차삯을 지불하고 내리는 드미트리. 에바도 힘없이 드미트리의 뒤를 따랐다. 드미트리는 주섬주섬 커다란 망토를 뒤집어썼다. 거기에는 헤이든의 가문 문장이 크게 박혀 있었다.

벌컥, 여관의 문을 열어젖힌 드미트리는 사방을 둘러보았다. 때는 점심이었고 내부에선 군대식의 배식이 이뤄지고 있었다. 그럼 아마 여기에 있겠군요. 드미트리는 크게 소리질렀다.

"혹시 여기에 비제 캄벨, 그리고 에어비스 캄벨이라는 사람들이 머물고 있습니까?"

웅성이던 소음이 가라앉았다. 시선이 이쪽에 모였다. 시선이 모이자 어쩐지 주눅이 든 에바는, 머리 깊이 후드를 뒤집어써서 얼굴을 숨겼다.

"그 수석 합격자?"

"남매였지?"

"무슨 일이우?"

사방에서 다시 질문과 웅성임이 솟아올랐다. 몇 명은 헤이든의 문장을 알아보고 나서서 사근사근하게 굴기까지 했다. 이 곳에 모인 사람들은, 아노덴에서 상경해 막 시험을 통과한 사람들이었다. 24가문의 하나인 헤이든에 잘 보인다면 바로 취직 자리를 얻을 수 있으니 싹싹하게 구는 것도 당연했다. 수석 합격이라, 드미트리는 방금 들은 정보를 바로 활용하기로 했다. 드미트리는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저는 헤이든의 인사 총책을 맡고 있는 드미트리라고 합니다. 이번에 아노덴 특별 귀화 시험을 수석으로 합격한 비제 캄벨 님을 특별한 조건으로 영입하고 싶어 직접 찾아왔습니다만..."

그 말에 다시 일대 소란이 일었다. 잠시 후, 드미트리와 에바는 떠밀리다시피 한 남매 앞에 도착했다. 젓가락으로 쌀밥을 먹고 있는 금발의 사내가 눈에 들어왔다. 이 자가 캄벨인가? 드미트리는 득의의 미소를 지었다.

레이븐사이드의 직접적인 유관자, 그건 유족일 터였다. 일년 전 전장에서 죽은 도린 캄벨, 그의 네 동생들은 전부가 배심원으로 선정될 가능성이 높았다. 그 판단을 마친 드미트리는 바로 정보를 모았고, 마차를 달려 여기까지 도착한 것이었다. 에바가 흘리듯이 말한 정보가 큰 도움이 되었다.

"반갑습니다. 저는 헤이든의 인사..."

드미트리가 말을 마치기도 전, 비제는 젓가락을 딱 소리나게 내려놓았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나 2층으로 올라가려 했다. 무례한 태도였다. 드미트리가 당황하자, 옆에 있던 에어비스가 쏘아붙이듯이 말했다.

"본심부터 말하시죠."

"예? 그게 무슨... 섭섭하군요."

드미트리가 어떻게든 수습을 하려고 해도 소용없었다.

"재판 때문에 찾아온 거 아닙니까?"

어쩐 이유에서인지 이 자들은 이미 자신들의 가치를, 그리고 드미트리의 본심을 꿰뚫고 있었다. 드미트리는 얼굴을 딱딱하게 굳혔고, 한숨을 내쉬었다.

"이거, 생각보다도 훨씬 더 영민하신 분들이시군요. 말 그대로입니다. 귀하의 자랑스러운 큰오라버니가 머물렀던 용병단, 레이븐사이드가 지금 백척간두의 위기에..."

"거절할게요."

눈을 껌뻑거리던 드미트리는 평정을 잃지 않고 빙그레 웃었다.

"십만 루덴. 배심원으로 출석해주시면, 십만 루덴을 드리겠습니다. 그리고 헤이든의 간부 자리를 약속드리지요. 어떻습니까?"

거액이었다. 특히 이런 배경 없는, 고아나 다름없는 용병들에게는 정말 거절하기 힘들 정도의 거액임이 틀림없었다. 하지만 에어비스는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잠시 후에 알 수 있었다.

"양심의 가격치곤 지나치게 싼데."

비제가 돌아서서 말했기 때문이었다. 드미트리는 대답했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어디까지나 저희가 함께하는 공자가 진짜로..."

그리고 말문이 막혔다. 2층에서부터, 몇 번 보지 않았는데도 너무나 익숙한 얼굴이 걸어내려오고 있기 때문이었다.

"다, 당신은..."

아이였다. 에길론과 함께 서고에 들어서서 같은 기록을 보고, 같은 결론을 내린 그가 한 발 앞서서 여기 도착해 있던 것이었다. 그리고 비제와 에어비스는 이미 누가 진짜인지, 동행하면서 확인을 끝마친 후였다. 두 사람은 이미 아이의 편을 들기로 맹세를 마친 후였다.

"실례했습니다!"

드미트리는 재빨리 에바를 끌고 줄행랑쳤다. 모양 빠지는 일이었지만, 조디악의 본대와 떨어진 곳에서 아이와 마주쳐서 좋을 일이 없었다. 재빠르게 잡아당기는 바람에, 에바의 얼굴을 가린 후드가 뒤로 벗겨져 얼굴이 드러났다. 슬픈 빛을 품은 에바의 눈동자가 잠시 아이의 시선과 부딪혔고, 곧 사라졌다. 아이는 잠시 그 모습을 응시하다가, 에어비스 옆에 푹 앉았다.

"우선 밥이나 먹죠."

배심원 쟁탈전, 2대 1.

첫 발은 아이 쪽이 크게 앞서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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