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치즈와 구더기 ( 5 )
그녀의 집에는 이미 선객이 있었다.
팔이 기다란 레버넌트 두 마리가 그녀의 집을 지키고 있었다. 어떻게 알았는지, 이미 조디악이 그녀와 접촉을 한 모양이었다. 종이 울리고 문이 열릴 때까지도 그 레버넌트들은 동상처럼 서 있었다.
가구는 새것이었다. 지나치게 장식적이고 화려한 식탁이나 화장대가 눈에 들어왔다. 기다란 손톱칼로 손톱을 다듬으며 그녀는 기다리고 있었다.
"그래서, 뭘 줄 수 있는데?"
플로에타 보르지아, 그녀는 이미 모든 상황과 자신의 가치를 꿰뚫고 있었다. 랑벨로를 잡기 위해 레고르가 그녀를 유혹할 때, 안심시키기 위해서 간이 혼인 서약서를 써 주었었고, 용케도 살아남은 그녀는 그것을 들고 여기까지 찾아왔던 모양이었다. 그 덕분에 그녀는 친족 지위를 얻어 재판의 증인으로 선택받은 것이었다.
그녀의 원래 성은 다른 것이었으나, 기나센에서는 결혼한 사람은 배우자의 성으로 자신의 성을 바꿀 수 있었다. 그녀는 자연스럽게 보르지아라는 이름을 썼다.
"참고로 상대쪽은 이미 1만 루덴을 호의의 표시로 두고 갔고, 내가 진실을 증언해 준다면 매년 1만 루덴읜 연금을 추가로 주겠다고 약속해줬어."
"진실이요?"
아이는 얼굴을 딱딱하게 굳혔다. 그녀는 이미 자치령에서 아이의 얼굴을 보았다. 누가 진짜 에페 바체인지 그녀는 분명히 알고 있을 것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할 뿐이었다.
"내가 평화롭고 안락하게 살 수 있게 해 주는게 진실이지, 안 그래?"
이 재판이 정상적으로 진위를 가리는 재판이었다면, 라달라리아가 직접 지켜보는 재판이니만큼 이런 위증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하지만 선례 자체가 가짜를 진짜로 둔갑시키기 위한 재판이었기 때문에 이 재판은 위증이 가능했다. 그녀는 간접적으로 말한 것이었다. 나를 매수해보라고. 플로에타, 이 여자는 단순히 돈을 받고 증언을 조작하는 것을 넘어 둘 사이에 경쟁을 붙여서 최대의 이익을 뜯어내려고 하고 있었다.
"돈으론 저 쪽을 못 이기겠지? 돈으로는 따를 자가 없다는 조디악이니까. 그럼 귀족 자리는 어때?"
그녀는 반질반질하게 닦은 손톱을 후 불며 그렇게 말했다. 아이는 얼굴을 딱딱하게 굳혔다.
"무슨 소리죠?"
"그 계집애 같던 애가 이젠 제법 인상 쓸 줄도 아네? 시치미 떼지 마렴. 너는 여기 그 통령인가 뭔가 하는 놈 밑에서 일하고 있을 거 아냐. 잘은 모르겠지만 통령이면 왕 같은 거지? 왕이면 봉작 정돈 해줄 수 있는 거 아닌가?"
플로에타, 그녀는 몰락한 귀족의 영애였다. 도드라울 정도로 아름다웠던 탓에 목숨이 살아서 온 세상을 헤매다 이 곳에 도착했다.
"뭐, 대단한 걸 달라는 건 아니야. 그냥 남들이 우습게 보지 않을 정도, 그 정도면 돼. 그 정도 지위와 땅만 약속하면, 협력해줄 수 있는데?"
그런 그녀에게 귀족 지위는 조금 다른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어쩌면 그녀는 다시 귀족의 지위를 얻는 것으로, 가문의 몰락으로부터 시작된 그 긴 세월을 전부 없는 셈 치고 싶어하는 걸지도 몰랐다. 아이는 문득 그녀가 가여웠다. 하지만, 아이가 그녀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은 없었고 협상할 재료도 없었다.
"통령의 도움은 거절했습니다. 저는 제 자신의 의지로 움직입니다."
"뭐?"
그녀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어 게슴츠레하게 눈을 뜨더니, 떠 보듯이 물었다.
"정말로? 이래뵈도 어렸을 때 가정교사한테 배울 건 다 배운 몸이야. 지금 이 재판이 이 정치적 시국에서 얼마나 중요한지, 내가 모를 것 같아?"
아이는 뒤돌아섰다. 이 여자를 설득하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재판을 빌미로 양쪽을 경합시켜 최대의 이익을 얻어내려는 심보가 드러나 보였고, 그런 사람이 최종적으로 선택할 건 어떻게 보아도 조디악이었다. 뒤돌아서서 빠져나가는 아이에게, 플로에타는 앙칼지게 쏘아붙였다.
"네 사형이었으면 더 달라붙었을 걸!"
쾅. 문을 닫았다.
증인 쟁탈전, 4대 4.
아이가 거세게 문을 닫고 빠져나갈 때, 동상처럼 서 있던 커다란 레버넌트 뒤에서 누군가가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고양이처럼 귀를 쫑긋거린다.
"통령이랑, 상관이 없다고?"
그건 플로에타를 호위하던 중 이야기를 엿들은 에바였다.
*
재판을 15여일 앞두고, 결국 증인 쟁탈전은 4대 4로 종결되었다.
이쪽의 증인은 레나,타니아,비제,에어비스였고, 저쪽의 증인은 플로에타,륜,시렌,다브였다. 증인이 동수가 되었을 때 재판의 향배는 어떻게 되는가? 거기서부터는 정석적인 재판이 펼쳐질 확률이 높았다. 여기서부터는 문외한이 대비하기 힘든 영역이었다.
"그러니까, 음..."
모든 일을 도맡아 처리하던 에길론의 한계도 여기까지였다. 밤마다 아이 일행은 머리를 맞대고 토의했지만, 에길론도 전문적인 법적 공방까지 처리하진 못했다. 그렇게 머리를 싸매고 있을 때, 넌지시 화해를 청하는 손길이 있었다. 통령이었다.
"법관을 파견해 주겠다고요?"
기나센에서 법관 일을 하는 사람 중에는, 율사 시험에서 떨어지고 귀향한 이들이 많았다. 율사 시험은 이름난 수재들도 운이 없으면 통과하기 힘든 고난이도의 시험이었고, 그래서 떨어진 자들이라 하더라도 충분한 역량을 가진 경우가 많았다.
"저번에 지나치게 무례한 이야기를 꺼내서 미안하고, 재판에서 승리하기를 바라니 순수한 호의에서 법관들을 파견해 주겠다는데..."
통령의 말을 전한 사람은 레테였다. 문간에서 그녀는 난처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아이는 고민했다. 어쨌든 조디악이 재판에서 승리하는 것보다는, 자신이 승리하는 것이 통령에게도 이로울 것이었다.
"거절하죠."
고민하던 아이는 대답했다. 그 방에서, 통령은 륜을 무서워하고 있는 듯 보였다. 아이가 보기에 륜은 그저 삶의 힘을 잃고 표류하던 중에 조디악의 손에 넘어간 것으로 보였지만, 통령에게는 그렇지 않은 모양이었다. 통령은 륜이 복수심에 젖어 있지나 않을까, 그래서 정당한 복수자의 명분을 쥐고 기나센을 전쟁의 구렁텅이로 밀어넣지는 않을까 염려하고 있는 듯했다. 아이는 그런 염려는 다른 누군가가 결코 잠재울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일단저 도움을 받아들이면, 언제 어떤 방식으로 륜을 노릴지 모른다.
"정말로? 그래도 되겠나? 상대는 전 5위계 율사로 추정된다는데, 재판은 만만하지 않아."
레테는 그렇게 말하고 떠나갔다. 그 걱정은 타당했지만, 할 필요 없는 것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원군이 도착했기 때문이었다.
"으, 여기는 정말 춥군요."
한 대의 마차가 눈이 소복히 덮인 길을 지나 소렌에 도착했다. 마차에서 내린 여자, 율사복을 입은 분홍 머리의 여성은 부르르 떨었다. 그리고 자신을 마중 나온 남자를 발견하곤, 약한 척 와락 달려들었다.
"너무 추워서 그런데 어깨 좀 빌려주시겠어요?"
다나였다. 성녀 호노레 블뢰유는, 본인이 공정을 기해야 하는 판사이므로 재판 당일까지 소렌에 올 수 없었다. 그래서 그런 의무로부터 자유로운 다나가 조력하러 찾아온 것이었다. 3위계로 진급하면서 새로 율사복을 받은 것인가, 이전의 여러 번 기운 율사복보다 훨씬 고급 원단의 율사복을 입고 있었다. 아이는 쓴웃음을 지었다. 노출이 많은 듯 보여도, 저 옷에는 방한 마법이 걸려 있어 추울 리가 없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짜잔!"
여관에서 자기 방에 들어선 다나는 곧 옷을 갈아입고 나왔다. 아이는 금방 알아볼 수 있었다. 북서 자치령에서 헤어질 떄, 자신이 선물한 옷이었기 때문이었다.
"춥지 않아요?"
저건 소렌의 추운 기후와는 맞지 않아서 정말로 추울 터였다. 하지만 다나는 이번에는 오히려 전혀 내색하지 않고 웃어넘겼다. 두 사람은 곧 여관의 1층으로 내려가 회의를 위해 준비된 커다란 원탁에 앉았다.
"저, 저, 이 분이?"
맞은편에서 망설이던 레나가 다나를 쳐다보며 물었다. 그러나 다나가 더 빨랐다. 그녀는 이미 개략적인 상황을 편지로 들어 알고 있는 터였다. 활짝 웃으며 레나에게 다가가 손을 마주잡고 자기소개를 했다.
"아, 당신이 그 레나라는 분이시군요! 제 집행관이셨던 아이 씨한테 정말 많은 도움을 주셨다고 들었어요. 정말 감사합니다."
은근한 견제가 여럿 섞인 말이었지만, 자신이 율사와 손을 맞잡았다는 사실에 놀란 레나는 당황해서 얼굴을 붉히고 말을 더듬었다.
"도도도도움이요? 아니요, 저는 별로 한 것도 없고, 그냥, 지켜야 할 걸 지키려는 것 뿐인데요..."
"상인이라고 하셨죠? 그래서 그런지 옷도 정말 수수하면서도 기품 있는 옷을 입고 계시네요? 물건 보는 안목이 대단하신 것 같아요!"
레나의 옷은 튜닉 벨트로 가슴을 조이는 활동용의 옷이었다. 색깔도 때타지 않는 회색이었다. 은근히 신경을 쓰긴 했지만, 파티용처럼 화려하기 그지없는 다나의 옷에 비하면 한참 모자랐는데 그걸 굳이 칭찬을 했다.
"아, 아뇨, 다나 님이 입고 계신 옷이야말로 정말 예쁜걸요! 옷 고르시는 안목이 대단하신 것 같아요."
"정말요?"
"네!"
"그렇대요."
다나는 빙그레 웃으며 아이에게 공을 돌렸다. 레나가 영문을 몰라서 눈을 끔뻑일 때, 다나는 살짝 의기양양한 어조로 말했다.
"이 옷, 옛날에 아이 씨가 저랑 헤어질 때 기념으로 선물해 주신 거거든요. 제가 아니라 아이 씨 안목을 칭찬해주세요."
"아..."
레나는 살짝 입을 벌렸다. 다나가 입고 있는 옷은, 척 보기에도 굉장히 고급 원단으로 만든 것이었다. 가격은 자기가 입은 것의 열 배는 넘을 터였다. 그런데 그걸 선물해줬다니. 갑자기 풀이 죽은 레나를 보며 에길론은 살짝 몸을 떨었다. 그는 남자지만 이런 일에 대해서 눈치가 굉장히 비상했다. 방금 아무렇지도 않게 나눈 대화에 몇 번의 견제타와 유효타가 있었는지 세기도 힘들었다. 이미 한 번 다나를 본 적이 있는 에어비스는 쓴웃음을 지을 뿐이었다.
"참 고생스럽게 사네."
커다란 베이컨 감자말이를 우적우적 먹던 타니아가 말했다. 에길론은 영문을 몰라서 타니아를 쳐다보았다.
"저런 여우들이 실속은 못 챙기더라. 사방에 눈 부릅뜨고 다니다가 다른 놈이 제 신랑 채가는거 눈치도 못 채던데."
주변 사람들이 그런 촌평을 남기는 도중에도, 레나를 위험인물로 낙인찍은 다나는 계속해서 은근한 견제구를 날려대고 있었다. 림은 뒤에서 한숨을 내쉬며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
"그냥 재판으로 가면 집니다."
그 요란한 소개가 끝나고, 본격적으로 자료를 검토한 다나가 내린 결론이었다. 지금의 그녀는 아주 신중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에길론이 얼굴을 굳히고 물었다.
"왜죠?"
"블로어. 그 검이 가진 증거능력이 너무 강해요."
그건 확실한 물증이었다. 레이븐사이드의 초대부터, 대대로 이어져온 보검. 죽음을 각오한 란페이조차 최후까지 그 검을 쥐고 죽기를 선택했을 정도로 그 상징성은 강했다.
"이 쪽이 명확한 진짜인 만큼, 부수적인 증거들은 이쪽이 압도적인 우위지만, 다들 증거로 명확하게 채택하기엔 애매해요."
레이븐사이드의 기술인 윈드밀을 시연해서 보여주는 것, 지휘체계를 읊는 것, 레이븐사이드의 사소하고 시시콜콜한 비사를 읊는 것, 그런 증거라면 아이는 차고 넘치게 제시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 재판에서 그것은 효력이 떨어졌다. 이 재판의 선례가 되었던 재판에서, 가짜가 외워서 읊어댔던 것들이 그런 정황 증거들이었기 때문이었다.
'무엇이 진실인가'와, '무엇이 재판에서 진실로 판정되었는가'는 비슷해 보여도 완전히 다르다. 후자는 언어와 논리 속에서 일어서는 것이다. 그리고 아이가 가진 실재의 기억들은, 언어로 짜내기에는 형체가 불분명한 것들이었다.
"륜 우르드, 그 여자가 저 쪽에 있다는 걸 명심해야 해요. 저쪽도 그런 '당사자만 알 수 있을 것 같은 증거'쯤은 얼마든지 조작해낼 수 있습니다. 륜의 기억을 토대로 에바에게 암기시키면 그만이에요."
"그럼 방도는 없는 건가?"
비제가 성난 듯 물었다. 다나는 의기양양하게 대답했다.
"그러니 사전에 찍어내버리면 됩니다."
"사전에?"
"이미 증인은 이쪽에 넷, 저 쪽에 넷으로 갈라졌다고 했죠?"
더 회유를 해 보려는 것인가, 아이는 만류하려 들었다. 그러나 다나의 입에서 나온 계획은 회유 따위가 아니었다.
"제가 제도에서 지독하게 배운 용어가 있는데요. '행정적 폭력'이 뭔지 알려드리죠."
다나의 계획은 축출. 증인 중 제일 신분 근거가 빈약한 플로에타를 찍어서, 전방위적인 압박을 가하는 것이었다.
*
이틀이 지났다.
제도에서 파견된 율사의 권리를 이용해서 법원에 들어선 다나는, 정말로 적용 가능한 모든 법을 사용해 플로에타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조회 가능한 모든 신분을 조회했고, 트집잡을 수 있는 모든 꼬투리를 트집잡았으며, 수천 장이 넘는 문서를 제출하라고 요구해대기 시작했다. 그건 정말로 법의 이름을 빌린 폭력이나 다름없었다. 저 수많은 제출과 출석 요구중 하나라도 빠뜨린다면, 플로에타는 기나센의 시민 자격을 잃고 쫓겨나며 자연히 증인 자격도 상실하게 될 것이었다.
엄청난 속도로 문서를 써갈기는 다나를 보며 아이는 질린 표정을 지었다. 저게 법과 질서를 수호하는 라달라리아의 대법원에서 배워온 기술이라니, 조금 서글픈 기분만이 들었다. 첫 하루동안, 플로에타는 27개의 요구에 대답하지 못했고 그래서 3천 루덴의 벌금을 내야 했다. 다음 날부터 반격이 들어왔다. 드미트리가 달라붙은 모양이었다. 그 다음날부터 다나의 요구에 대한 완벽한 대응이 이어졌을 뿐만 아니라, 숫제 비꼬는 답변까지 돌아오기 시작했다.
"그 재수없는 꼬맹이, 이번에 갚아줄 때가 됐군요."
숨길 생각도 없이 담배를 뻑뻑 피면서, 핏발선 눈으로 다나는 그렇게 말했다. 아무래도 플로에타를 사이에 둔 이 공방전은 재판 직전까지 이어질 모양이었다.
적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혹시라도 다나의 공세가 성공해서 플로에타가 증인 자격을 잃게 되면 곤란하다, 그렇게 생각한 조디악 쪽에서도 증인을 노린 공격을 시도했다. 대상은, 비제였다.
모두 잠든 한밤중, 비제가 아이의 방문을 두드렸다.
"조디악 쪽에서 내게 사자를 보내왔다."
비제는 침착하게 말했다. 림과 함께 환상 속에서 수련을 하던 아이는, 그 말을 듣고 신음을 흘렸다.
"뭐라던가요?"
"꽤 그럴듯한 수법으로 회유를 시도하던데."
비제는 투명한 눈으로 아이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말했다.
"큰 형이, 너 때문에 죽었다는 말을 하더군."
아이의 동공이 흔들렸다. 조디악이 그걸 어떻게? 생각해보니 저들의 수중에는 플로에타가 있었다. 그녀가 도린의 죽음을 둘러싼 내막을 조디악에게 말해준 모양이었다. 비제는 아이의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보면서 말을 이어갔다.
"복수를 위해서는 우리 편을 들어야 하지 않겠느냐고 하더군. 네 큰 형은, 친동생도 아닌 사제를 지키기 위해서 죽었다고 하면서 말이야."
"그런가요."
아이는 고개를 숙였다. 만약 그런 이유로 비제와 에어비스가 떠난다면, 자신은 붙잡지 못할 것 같았다. 하지만 대답은 딴판이었다.
"그래서 나는 결심했다. 무슨 일이 있더라도 네 편에 서기로."
아이는 번쩍 고개를 들었다. 그렇게 말하는 비제의 얼굴에는 어떤 감정도 묻어나지 않았다. 담담했다. 해야 할 일을 한다는 듯한 담담함이었다.
"이 웃기지도 않은 재판을 보면서, 많은 걸 생각했다. 멍청한 낭만주의자들은 네 편에 섰고, 현실을 아는 똑똑한 놈들은 저쪽으로 도망쳤더군. 피도 이어지지 않는 동생을 위해 죽는다니, 큰형은 역시 천하의 멍청이였어."
비제는 아이의 어꺠를 툭 치며 일어섰다.
"증명해줘. 멍청한 결정이라도, 무가치하지 않았다는 걸."
아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쑥스러운 듯 물러서는 비제의 등은 굉장히 넓어서, 어쩐지 도린이 많이 겹쳐보였다. 그날 밤 아이는 오랜만에 도린을 조각했다.
재판은 어느새 일주일 앞으로 다가와 있었다. 아이는 시간이 남을 때, 륜이 잠들어 있는 저택 앞을 서성였다. 레이븐사이드 저택은 조디악에 의해 빈틈없이 지켜지고 있어서, 먼발치에서 2층만을 간신히 볼 수 있었다. 항상 창문은 닫혀 있었고, 불이 꺼져 있었으며, 커튼이 드리워져 있었다.
"응?"
그렇게 돌아다니던 아이는 문득 한 종이조각을 발견했다. 성경을 찢어 만든 종이조각이었다.
'신부.'
아이는 속으로 되새기며 그 종이조각을 펼쳤다.
-곧 누군가가 찾아간다. 쫓아보내지 말고 길게 대화하기를.
여덟 번이나 접어 던지기 쉽게 만든 그 종이조각에는, 이런 내용이 적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