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치즈와 구더기 ( 6 )
다음 날, 회유에 실패한 조디악은 그 다음 행동에 나섰다. 암습이었다.
"조심해요, 습격입니다!"
한밤 중, 칼날에 달빛이 반사되어 번쩍이는 걸 확인한 아이는 비상종을 두들기며 외쳤다. 저 멀리서 가면을 쓴 레버넌트 무리가 달려오고 있었다. 눈을 가늘게 뜬 아이는 그 중심을 바라보았다.
"저건..."
그들 중 하나, 유난히 잽싼 녀석이 있었다. 레버넌트 흉내를 내며 네 다리로 뛰고 있지만, 그 모습이 어딘가 익숙했다. 아이는 그게 누군지 알 수 있었다.
"이쪽은 부탁해요!"
신기를 깨닫고, 아노덴에서 수석으로 졸업한 비제는 믿을 만한 자원이었다. 제일 위험한 것은 에바일 터였다. 아이는 여관의 경비를 비제에게 맡기고, 에바를 향해 뛰어나갔다.
"ㅡㅡㅡㅡㅡ!!"
그렇게 말하고는, 레버넌트처럼 위장하기 위해 쓴 황금 가면을 벗었다. 드러난 얼굴은 역시 에바였다. 아이는 레바테인을 불러내 겨누고 말했다.
"암습을 하다 말고?"
에바는 손사래를 쳤다. 진심으로 당황한 듯한 표정이었다. 그리고 긴 변명을 시작했다. 재판이 결정된 이후, 드미트리를 비롯 조디악의 사람들이 자신을 엄청나게 열심히 감시하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너랑 만나서, 하고 싶은 말이 있었는데, 이제 마음대로 빠져나갈 수가 없었어."
그래서 암습을 틈타 접근했다는 내용이었다. 에바가 생각해낸 것치곤 제대로 된 계획이었다. 여전히 경계를 늦추지 않고 칼을 세운 아이에게 에바는 무언가를 내밀었다.
"이게 뭐야?"
그건 한 권의 공책이었다. 에바는 울먹이며 말했다.
"일기장. 아가씨의."
"뭐?"
"엿들었어. 네가 통령인가, 하는 그 사람. 아가씨한테 자살하라고 했던 그 사람과 따로 움직이고 있다는 걸. 그건 그런 거지?"
침을 꿀꺽 삼킨 에바는 연이어 말했다.
"재판에서도 이기고, 아가씨도 살리고, 아무도 희생당할 일 없는 승리를 거두려고, 그래서 그러는 거지?"
아이는 침묵했다. 에바는 그 침묵을 긍정으로 받아들인 모양이었다.
"나도 그랬으면 좋겠어. 그냥, 착한 사람들은 모두 좋은 결말을 맞고, 악한 사람들은 벌을 받는, 그런데, 잘 모르겠어. 제국은 멸망해야 해. 우리 민족도, 융성해야 해. 그런데 이 나라 사람들을 희생시키면서 그걸 이루고 싶지는 않아. 그렇다고 너희 편을 들자니, 아가씨가 죽게 하고 싶지도 않아."
고민이 사람을 성숙시키는 것인가. 그렇게 말하는 에바의 고민은 얼마 전까지의 자신이 가지고 있던 것과 거의 같았다. 또 한 번, 유년다운 억지를 부려보려고 마음 먹은 자신과 다르게, 에바는 갈피를 잡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그래서, 너한테, 아가씨가 죽지 않아도 될 방법이 있다고, 말해주고 싶어서 왔어."
아이의 칼끝이 조금씩 내려갔다. 지금까지 지켜본 에바의 사람됨으로 보았을 때, 이건 진실일 확률이 높아 보였다.
"너랑 만난 다음 날부터, 아가씨가 잠에서 일어나질 않아."
"뭐?"
아이는 눈을 크게 떴다. 하지만 에바는 훌쩍이며 계속 말을 이어갔다.
"밥도 먹지 않고, 그냥 문을 걸어 잠그고 하루종일 잠만 자고 있어. 이대로라면 재판이 끝나기도 전에 죽어버릴 것만 같아. 끝나도, 이미 죽은 거나 다름 없을 거야. 그래서, 그래서, 뭐라도 했으면 해서..."
아이는 먼 기억을 떠올렸다. 아셀라이와 나눈 대화였다. 그때 아셀라이는, 악한 자를 징벌하는 천칭으로 에바를 묶었을 때 에바가 아무런 해를 입지 않았다고 했다. 지금까지 에바는 자신이 정말로 민족의 해방을 위해 제국을 부수도록, 그렇게 정의롭게 태어났다고 믿고 살아온 듯했다. 아이의 말로, 그리고 당면한 현실로 그 믿음이 깨진 에바는 우왕좌왕했다. 그 순수함이 지금 이 자리에 에바를 이끌었다.
"아가씨, 륜 아가씨는 언니랑 한 가지 계약만을 맺었어."
통령이 염려하던 것이었다. 드미트리가 이미 파계 율사의 계약을 이용해 륜을 꼭두각시로 만들었으리라는 염려. 에바는 지금 그 계약의 내용을 전해주려 하고 있었다.
"반드시 '아이 우르드'를 위해 행동할 것."
"그런 내용이라고?"
아이는 잠시 아연했지만 돌아오는 설명을 듣고 납득했다. 륜은 상당히 영리한 재원이었다. 통령에게 간접적으로 들은 내용만으로도, 륜이 굉장히 머리가 좋다는 것은 알아챌 수 있었다. 그런 그녀이니만큼, 심장이 터지는 가미온의 계약을 할 때에는 신중하게 내용을 골랐으리라.
원래 그녀는 어떤 계약도 맺지 않으려고 했는데, 그나마 순수하게 선의를 가지고 접근하던 에바를 내세워서 이런 계약이라도 맺은 것이라고 했다. 당시 에바의 이름은 아이 우르드로 지칭되고 있었다. 조디악의 계획은, 무지한 에바를 이용해서 륜을 통제하는 것일 터였다.
"아가씨가 마지막까지 계약을 맺으려고 하지 않아서, 나도 약속했어. 그러면 나도 반드시 아가씨를 위해 행동하겠다고."
그리고 에바는 지금 그 서약을 지키기 위해 여기 온 셈일지도 몰랐다. 심장이 터지거나, 배상금을 입히거나, 그런 어떤 징벌도 없는 서약이지만 에바는 그런 종류의 약속이라도 반드시 지키는 사람이었다. 어쩌면 륜은 에바의 사람됨을 믿고 그런 계약에 동의해준 것일지도 몰랐다.
"내가 전해준 내용이랑, 이 일기장을 보면, 그 통령이라는 사람도 납득할 거야. 이긴다고 해서, 륜 아가씨를 죽일 이유는 없다고. 그러니 통령이랑 협력해서라도, 재판을 이, 이, 이,"
이겨줘. 라고 그녀는 끝까지 말했다. 이런 결정을 내리면서도 에바는 몸을 떨고 있었다. 지금 그녀가 하고 있는 것은 배신이었다. 조디악에 대한 배신. 그 떨리는 얼굴을 보며 아이는 정말로, 이 사람이 자신과 닮았다는 생각을 했다. 북서 자치령에서 막 헤매던 때의 자신이었다.
자신이 결국, 비극과 악을 감당하더라도 모든 마술사를 죽이는 복수귀가 되지 못했듯이, 에바 역시 제국에 대한 복수귀가 되기에는 여린 사람이었다. 어쩌면 아이와 만나고 에바의 십칠야는 시작되고, 또 끝나려는 것일지도.
"알았어."
어느새 아이의 칼끝은 완전히 바닥까지 내려와 있었다. 에바의 얼굴이 조금 밝아졌다. 그러나 그 얼굴에는, 처음 나사렘에서 보았던 것 같은, 어린아이 같은 당당함과 의기양양함은 많이 사라져 있었다.
"방법을 찾아서, 모두 행복하게 해 줘. 할 수 있지?"
에바는 그렇게 말하고 뒤돌아섰다. 자신은 찾지 못한 방법을 찾아달라고, 남에게는 저렇게 쉽게도 말한다. 아이는 피식 웃었다. 어쩌면 그렇게 서로 의존하는 것이야말로 사람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에바에게는 내가 그 방법이었을까.
돌아오는 길에, 아이는 일기장을 펼쳐보았다. 이 잠깐의 만남이 세계의 운명을 얼마나 크게 바꾸었는지도 알지 못한 채.
조디악은 지금 소니아의 피를 이용해 계속해서 예지를 관측하고 있었다. 그 예지에서 조디악은 계속해서 승리했다. 변수는, 베들렘인 에바와 아나테마인 아이였다. 아직 조디악은 아이가 아나테마라고 의심은 했어도 확신하지 못했으므로, 에바를 철저하게 감시하고 있었다. 에바는 지금 그 실낱같은 틈을 타서 운명의 수레바퀴를 크게 뒤흔들어 놓은 것이었다.
"하지만 통령에게 가진 않을 거야."
아이는 정치를 잘 몰랐지만, 감각은 예리했다. 에바는 순진하게 '조디악에게 통제당하고 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통령이 륜을 적대한다고 믿었지만, 아이는 그렇지 않다는 걸 알았다. 아이는 쓸쓸하게 웃으며 에바가 건네준 일기장을 펼쳤다.
막 레이븐사이드가 북서 자치령에서 전멸되었을 무렵, 륜의 일기가 생생하게 적혀 있었다. 한참을 읽어 나가던 아이는 이상함을 발견했다.
-오늘은 언니와 치즈 제조법에 관한 이야기를 했다. 즐거웠다. 우유가 어떻게 치즈가 되는지는, 아직 아무도 알지 못하는 비밀이다. 밝혀지지 않은 비밀은 아무리 황당무계한 이야기라도 전부 그럴듯하게 만들어준다는 점에서, 아름답고 찬란하다. 블루 치즈의 제조법에 대해서 얘기를 했다. 치즈를 푸르게 만드는 치즈의 요정이 있을 거라는 말을 하자 언니는 웃었다. 사실 그 곰팡이 사이에는, 구더기가 꿈틀댄다는 걸 나는 안다. 하지만 요정이 더 아름다우니까...
그렇게 길게 란페이와의 경험이 늘어진 페이지 다음에는, 이런 페이지가 자리하고 있었다.
-눈을 뜨면 아무도 없다. 다시 눈을 감고 싶다. 눈을 감으면, 꿈 너머에는 모두가 있는 방이 있고, 거기에 내 자리가 있다.
이건 그러니까, 꿈 일기였다.
잠을 자면서 륜은 계속해서 레이븐사이드의 사람들의 꿈을 꾸는 모양이었다. 현실보다, 꿈 속에서 살아가는 것을 택한 것 같았다. 그래서 그렇게 무기력하게 다른 사람들의 의지대로 움직이는 모양이었다. 아이는 조용히 중얼거렸다.
"그렇구나."
먼 옛날을 떠올렸다. 란페이와, 잰슨과, 블레어와 마지막으로 헤어지던 날. 그 작은 방에서 떠나고 싶지 않아서, 응석을 부리던 자신이 떠올랐다.
"당신은 그 방에서 나오지 않는 걸 택한 거군요."
*
어슴푸레한 달빛이 비로드 커튼을 어루만지는 밤이었다. 륜은 침대에 누운 채로, 멍하니 텅 빈 방의 허공을 응시하고 있었다. 깨어있을 때에는 언제나 그랬다. 꿈이 륜에게는 현실이고, 현실이 륜에게는 꿈인 것처럼.
하녀가 문을 두드렸다. 밤까지 륜을 감시하도록 되어 있는 하녀였다. 그녀는 방에 들어와서, 손도 대지 않은 접시를 수거하며 고개를 저었다. 트레이를 돌돌돌 밀면서 떠나갈 때, 멍하니 허공을 응시하던 륜의 눈에 이채가 띠었다.
그 흐릿한 창문 너머에서, 누군가가 문을 두드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무의식적으로 륜은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커튼을 걷었다.
"흡!"
그리고 깜짝 놀라서, 무서운 것을 본 것처럼 경악한 표정으로 침대 밖으로 나동그라졌다. 거기에는 사람이 있었기 떄문이었다. 능숙하게 창문을 열어젖힌 그 사람은, 륜에게 손을 내뻗으며 말했다.
"안녕하세요. 당신을 방에서 꺼내려고, 왔습니다."
세상의 절반을 가로질러서.
아이는 안심시키기 위해서, 지을 수 있는 가장 환한 미소를 지으며 그렇게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