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 The scariest part of being alone ( 5 )
재판의 결과로 아이가 얻은 것은, 레이븐사이드 재건을 위한 자금과 통령의 지원 외에도 또 있었다. 그 증거물로 압수되어 있던 검. 십칠야의 초입부터 어제까지 주욱 찾아왔던 검.
블로어였다. 호노레는 웃으며 아이에게 블로어를 돌려주었다.
"축하해요. 이젠 당신도 명확한 신분을 얻게 되었군요?"
"신분이라면..."
"이제 기나센의 유서 깊은 용병단인 레이븐사이드의 단장이잖아요. 안 그런가요?"
레이븐사이드의 생존자는 아이와 병약한 륜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렇게 요란한 재판으로 모두의 이목을 끌고, 훌륭히 이겨냈으니, 호노레가 아이를 레이븐사이드의 새 단장으로 여기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아이는 부정하지 않았다. 한 쪽 무릎을 꿇고 서임을 받듯이 검을 받았다.
"저, 다나 씨는..."
"피곤해서 곯아떨어진 상태랍니다. 어젯밤까지 며칠 연속으로 밤을 새워서 재판을 도왔으니까요."
감사한 마음과 미안한 마음이 동시에 일었다. 호노레는 입을 가리며 웃고 떠나갔다.
"관저에 머무를 예정이니 꼭 들러주세요. 아, 단테도 당신을 보고 할 말이 있다는 것 같으니."
떠나가며 호노레는 그런 약속을 남겼다. 모두 피곤했고 또 사방이 어수선했으므로, 아이 일행은 각자의 거처로 해산했다. 잠들어버린 륜은 아이의 몫이었다. 기나센의 눈 덮인 지붕들이 노을에 잠긴 저녁, 아이는 휠체어를 끌고 륜의 방으로 들어가 침대에 눕혀주었다. 그녀는 깃털처럼 가벼웠다. 덧없는 무게였다.
'오랜만에 고요해졌구나, 어린 순례자야.'
침대에 등을 기대어 앉아있자니 림이 말을 걸어왔다. 요즘 아이는 주변에 사람이 있을 때 림과 말을 나누는 것을 꺼려왔다. 아나테마인 걸 들키지 않기 위해서였다. 잠들기 전의 잠깐을 제외하면, 이렇게 대화를 나누는 건 오랜만이었다.
"그러게."
'그런데 그렇게 기쁜 표정이 아니구나. 어째서냐?'
아이는 말없이 움켜쥔 블로어를 뽑아들었다. 명검이었다. 검날은 칼집에서 부드럽게 뽑혀나와 들이치는 노을빛을 반사했다. 검에 코를 대고 쇳내를 깊이 빨아들였다. 그 향기는 한 번도 본 적 없는 고을의 풍경처럼 마음에 펼쳐졌다. 아마도 이 검을 찾아 헤매온 세월이 쇠비린내에 그윽하게 스며든 모양이었다.
아이는 일어섰다. 륜의 침대의 맞은편 벽에 블로어를 걸기 위해서였다. 검대 아래에는 세계의 지도가 널따랗게 펼쳐져 있었다. 기나센에 들어올 무렵, 수색자들의 오두막에서 보았던 지도와 같은 지도였다.
"글쎄."
무릎을 꿇고 앉아서, 아이는 지도 위에 걸린 블로어를 바라보았다.
'정의 없는 힘은 압제하며, 힘 없는 정의는 무력하다.'
수없이 보아왔던 글귀가 검면에서 반짝이고 있었다. 그 밑에 걸린 세계의 지도는 흰 빛으로 텅 비어서, 더없이 무내용한데도 넓었다.
저 지도의 절반을 가로질러서 아이는 이 방까지 왔다. 수많은 사람을 만나고, 수많은 길을 헤맨 아이에게 이제 세계라는 단어는 막연한 추상이 아니었다. 지금까지 지켜온 모든 것, 또 베어온 모든 것의 무게의 총합보다도 무겁고 막막한 어떤 짐처럼 느껴졌다.
"림, 나는 계속 이렇게 살아도 괜찮을까?"
아이는 중얼거렸다. 일 년 전의 자신은, 세계 위에서 빛나는 별이 되고 싶다고 선언했다. 하지만 세계의 무거움과 난해함을 살결로 알게 된 지금의 아이는 이제 그때만큼의 자신감으로 무언가를 선언하기 힘들었다. 한 자루 검으로, 이 무거운 세계를 베어내고 또 지켜낼 수 있을까. 계속 이렇게 억지를 부리며 살아갈 수 있을까.
'글쎄. 그러고 싶어서 너는 선주를 거부한 것 아니었나?'
아이는 깊이 고개를 파묻었다. 이번에 아이는 억지를 부렸다. 그런데 기이할 정도의 천운이 여럿 겹쳐서, 결국 아무것도 희생하지 않고 자신의 뜻을 관철할 수 있었다. 다음에도 그럴 수 있을 것인가? 그 다음에는? 그것이 아이의 고민이었다.
계속 이렇게 아무것도 희생하지 않겠다고 억지를 부리다가, 언젠가 돌이킬 수 없는 패배를 맞게 되는 것 아닌가. 그 때에 나는 후회하지 않을 수 있을 것인가.
이제 성년에 접어드는 아이에게 그 고민은 어떤 고민보다도 중요한 것이었다. 그 고민은 다른 누군가가 답을 줄 수 없는 것이었다. 고개를 들어 벽면을 바라보았다. 검과 지도는 폭이 거의 같은데도, 지금의 아이에게는 지도 쪽이 훨씬 더 넓게 느껴졌다. 그렇게 멍하니 지도를 바라보던 사이에 해가 저물었다. 지도와 검이 내걸린 벽면 역시 어둠에 잠겼다.
"응?"
그리고, 아이는 이상한 것을 발견했다. 일어선 아이의 흰 뺨에 음영이 어렸다. 아이의 눈은 곤히 잠든 륜을 바라보고 있었다. 잠시 무언가를 길게 생각하던 아이는, 발을 움직여 륜의 침대로 다가갔다. 그러더니 갑자기 이불을 걷어올리고, 륜의 옆에 누웠다.
'어린 순례자야, 무얼 하는 것이냐?'
아이의 행동을 이해하지 못한 림이 이런 말을 건넸다. 하지만 아이는 더없이 진지한 표정으로, 창문 너머를 바라보고 있었다. 창문은 고정된 커튼에 가려져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
그 날, 심야.
곤히 잠들던 륜은 어떤 그림자가 창문 밖에서 어른거리는 것을 느끼고 잠에서 깼다. 부스스한 머리로 눈을 비비던 그녀는, 그 정체를 알아차리고 엷은 미소를 지었다. 그녀는 창문을 열어젖혔다.
"무슨 일인가요? 열쇠를 부러뜨리기라도 했나요?"
창 밖에 매달려 있던 손님은 아이였다. 륜을 이 방에서 꺼내던 날처럼, 아이가 창문으로 륜의 방에 들린 것이었다. 륜은 이것을 무슨 장난으로 여기는 듯했다. 하지만 아이의 표정은 더없이 진지했다.
"역시. 당신에겐 이게 보이는군요."
아이는 손짓했다. 말해둔 대로였다. 그러자 륜의 얼굴 가까이로, 림이 얼굴을 들이밀었다. 륜은 당혹한 표정이었다.
"무슨 소리죠?"
"그 날, 저는 창문에 이렇게 매달려서 창을 두들겼었죠. 그런데 당신의 자리에 누워보고 깨달았어요. 이 침대에서 누워서는, 제 얼굴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 말을 들은 륜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아이는 이미 확신에 찬 상태였다.
"그런데도 당신은 문을 열었을 뿐만 아니라, 아주 무서운 것을 본 것처럼 몸서리쳤죠. 방금도 마찬가지에요. 당신은 무엇에 반응해서 문을 열어준 겁니까?"
"저, 저, 무서우니까, 농담은 그만해주지 않으시겠어요?"
"당신에게는 이 녀석이 보이는 거죠?"
"무슨..."
"방금 저는 창문을 두들기지 않았어요. 이 녀석이 두들겼을 뿐이죠. 원래대로라면, 들리지 않아야 정상이에요."
아이는 림의 어깨를 치며 말했다. 림은 이빨을 드러내며 웃고 있었다. 그 말을 들은 륜은 당혹한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그 표정을 놓치지 않고, 아이는 선언하듯이 말했다.
"묻죠. 당신이 이 쪽지들을 건네온 신부입니까?"
이런 의심에 도달하게 된 이유는 세 가지였다. 드미트리의 말, 그리고 너무나도 상황이 짜맞춘 듯 돌아갔던 것. 마지막으로, 기나센에서 물러설 것을 요구하던 신부의 쪽지였다. 그 쪽지가 태도를 바꾼 시점은, 공회당에서 륜과 아이가 만난 이후였다.
"당신의 정체는 뭡니까?"
토막난 성경 쪽지를 내밀자 륜은 더 이상 발뺌하지 않았다. 겁에 질린 다람쥐 같은 표정을 짓고 있던 그녀의 얼굴에서 당혹이 싹 걷혀가고, 능글맞게까지 보이는 웃음이 자리했다. 그녀는 우선 팔을 저어 침대에 올라서 있는 아이를 쫓아냈다.
"알겠어. 알겠으니 그 끔찍한 얼굴 좀 치워 주게."
말투도 바뀌었다. 옛 사람들이 사용하는 어투였다. 이는 자신이 림을 볼 수 있음을 인정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녀는 주섬주섬 침대 옆의 서랍을 뒤지더니, 맨 아랫서랍을 꾹 눌렀다. 그러자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서랍의 이중 바닥이 드러난 것이었다. 그녀는 그 이중바닥 밑에서 호리병처럼 생긴 무언가를 꺼내서, 탁상에 올려놓고 그 길따란 관에 입을 가져갔다. 호리병에선 주홍색 액체가 찰랑이고 있었다.
"이건... 당신 흡연자였습니까?"
"담배는 아니라네. 그냥 과일향이 나는 신경안정제지."
호리병의 안에 매달린 기하학적인 장치가 불을 일으키더니, 그녀는 곧 관에서 입을 뗐다. 거기에선 주홍빛이 감도는 연기가 쏟아져나왔다. 코가 떨어져나갈 정도로 달콤한 향을 풍기는 연기였다. 아이가 질색하며 코를 막자, 륜은 입을 가리고 웃었다.
'어린 순례자야. 네 주변에는 항상 골초만 꼬이는 모양이구나.'
림이 옆에서 중얼거리자 륜이 맞받았다.
"골초라니. 듣는 사람이 섭섭해지는 말을 하는군."
'호오?'
"이건 궐련보단 아편에 더 가까운 물건인데 말이야."
아편? 대경실색한 아이는 재빨리 달려들어 그 관을 빼앗았다. 그러다보니 자연스럽게 륜을 자신의 얼굴 아래에 깔아뭉개는 자세가 되었다. 코 앞에 다가온 륜의 얼굴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 상태로, 그녀는 지독하도록 달콤한 향기를 내뿜으며 말했다.
"내 이름은 륜, 모략의 륜."
이런 식의 소개법은 들은 적이 있었다. 륜은 입 안에 남은 연기를, 아이의 코에 쏟아부으며 말했다.
"그대들 세상의 언어로는, 아나테마라고 불리는 존재일세."
*
모략의 륜.
그녀는 자신을 그렇게 소개했다. 림은 오묘한 표정을 지었다. 아이의 제지에도 불구하고 관에 입을 댄 륜은 당연하다는 듯 중얼거렸다.
"당연히 그대는 이런 신을 들어본 적이 없겠지. 나는 창조된 아나테마니까."
자애의 갈란퀸.
20여년 전, 제국의 남부로 쳐들어왔던 외신의 이름이었다. 란페이의 어머니, 전대 레이븐사이드의 단장은 갈란퀸과 싸우던 도중 그것의 몸에 딸려들어갔다. 그떄 그녀는 회임 중이었다. 그 때를 틈타서 갈란퀸이 나르던 존재가 그녀의 뱃속으로 스며들었고, 그렇게 륜은 아나테마로 태어난 것이었다.
"그러니까 나는 륜 우르드이기도 하고, 모략의 륜이기도 하지."
륜은 옛 추억이라도 늘어놓는 것처럼 말했다. 그녀가 어려서부터 앓던 병인 기면증, 그건 그녀가 아나테마로 태어났기 때문에 걸린 병이었다. 꿈을 꾸면서, 그녀는 서서히 자신의 존재의의를 자각해갔다. 낮에 깨어나 있을 때에는 란페이의 병약한 동생인 륜 우르드이고, 잠잘 때에는 모략의 륜인 셈이었다.
"그대들이라면 외신이 어떻게 생겨나는 것인지 알고 있겠지? 외신은 스스로 존재할 의미를 잃고, 허무에 패배한 신들의 찌꺼기다."
자애의 갈란퀸은 자애의 신이 죽어 생겨난 찌꺼기라고 했다. 어떤 것도 버리지 못하는 품성 때문에, 처참하게 이용당하고 버려진 그녀는, 죽으면서 남은 힘을 그러모아 고치를 만들었다. 아나테마가 담긴 고치였다. 그 아나테마는 인간의 모략을 엿보는 힘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그럼 당신은 그 드미트리의 말대로,"
"이 침대에서 모든 걸 계획하고 있었다네."
아이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그렇게 말했다. 륜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세계의 비밀을 말했다. 그녀의 말대로라면 많은 것이 설명되는 셈이었다. 륜은 조디악의 계획을 엿보았고, 침대에 누워서 그 계획을 역이용할 수 있도록 판을 짜고 있던 것이 틀림없었다.
"우선 그 쪽지들은 조디악의 계획을 읽은 내가 미리 안배한 것일세."
그 쪽지가 처음에는 아이에게 도망칠 것을 종용한 것도 그런 이유였다. 미래 예지를 기반으로 한 조디악의 계획에는, 아이가 아나테마라는 사실이 들어 있지 않았다. 그래서 그녀는 아이가 패배할 것이라고 생각했고, 그래서 타니아와 레나를 데리고 대피할 것을 권했었다.
"에바는 보기 드물게 순수한 영혼을 가진 아이였고, 또 조종하기 쉬워 보였지."
원래의 계획에서 그녀는 조디악의 내부에 파고들어 에바를 이용해서 조디악을 장악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아이를 보고, 또 아이가 가진 힘을 보고 생각을 바꾸었던 것이었다. 조디악의 예지가 그렇게 송두리째 흔들린 데에는 그런 이유가 있었다. 에바, 아이, 그리고 륜까지. 무려 세 명의 아나테마가 예지에서 벗어나 멋대로 움직이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
아이는 표정을 험악하게 굳혔다. 륜의 말대로라면, 그녀는 소산맥파와 기나센을 희생시키면서 에바를 속여넘길 생각이었다는 뜻이었다. 아이가 표정을 굳히자 륜은 파이프에서 입을 떼고 미소를 지었다.
"재미있는 표정이군. 자애의 신이 당신 같은 걸 낳았다니 믿을 수가 없다, 뭐 그런 표정이야."
아이는 무표정으로 긍정했다. 그러자 륜은 연기를 쏟아부으며 또다른 사실을 알려주었다.
"먼 옛날 자애의 신은 무언가를 예지했지. 그래서 모두에게 싸우지 말고 화합할 것을, 힘을 합쳐 진보할 것을 호소했지만 아무도 들어주지 않았어. 그녀는 누군가의 모략에 이용만 당하다 죽었지. 절망 속에서, 그녀는 생각했다네. 사랑이 안 된다면 모략으로라도, 누군가가 이 미래를 바꾸어야만 한다."
그래서 태어난 것이 자신이라고, 륜은 말했다. 아이는 침을 삼키고 물었다.
"그 미래라는 게 뭐죠?"
"세계의 종말."
그 말을 들은 아이의 안색이 딱딱하게 굳었다. 륜은 그 얼굴에 선언하듯 말했다.
"자애의 갈란퀸은, 누군가가 피할 수 없는 세계의 종말을 예지했을 때. 세상에 드러나 제국으로 흘러가게 되어 있었다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