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메이지 슬레이어-138화 (138/279)

24. The scariest part of being alone ( 6 )

그 충격적인 선언을 끝으로 그녀는 입을 다물었다. 젖먹이가 젖병을 씹듯이 파이프 끝을 우물우물 씹을 뿐이었다. 자주 하는 행동인 듯, 파이프의 끝은 잇자국으로 너덜너덜했다.

"나만 계속해서 이렇게 가진 패를 내놓는 건 불공정하군. 안 그런가?"

그녀가 덮은 솜이불이 팔꿈치에 쓸려 사락사락 소리를 냈다. 텅 빈 파이프를 우물거리며 륜은 말했다.

"자네들의 이야기를 좀 들려주지 않겠나? 솔직히 자네들은 내 입장에서도 완전히 낯선 난입자들이라서 말이야. 조디악도 당황했겠지만, 그들의 계획을 훔쳐보던 나도 더없이 당황했다네."

한창 진행되던 연극에 누군가가 난입하더니 주연을 죽이고 대신 자리한 것만큼이나 놀라웠다고. 그런 비유를 덧붙였다. 아이는 잠시 그 말을 곱씹었다. 한숨을 내쉰 아이는 이야기를 시작했다.

긴 이야기였다. 처음에 이야기의 시작점을 북서 자치령으로 잡자, 륜은 더 앞의 이야기를 들려줄 것을 채근했다. 그보다 더 앞을, 그보다 더 앞을... 여러 번 채근한 끝에 이야기의 시작점은 먼 들판이 되었다. 림의 신전에서 막 빠져나와 마주한 들판이었다.

열린 창문으로 밤까치가 날아들어서 검푸른 깃을 부리로 여미고 다시 먼 숲으로 떠날 때까지도 이야기는 계속되었다. 륜은 탁월한 청자였다. 아이가 생각지도 못한 부분이나, 잊어버린 부분을 콕콕 집어 질문했고 추임새와 감탄사로 이야기의 진행을 도왔다. 오묘한 기분이었다. 때로는 자랑을 하는 기분이 들기도 했고, 때로는 고해하는 듯하기도 했다. 이야기가 기나센에 당도하자 륜은 이야기를 멈췄다.

"알겠어. 자네가 어떤 사람인지는 이제 똑똑히 알겠네."

파이프에서 입을 뗐다. 붉은 입술에서 새어나온 목소리는 깊었다.

"참 열심히 살아왔군."

왜일까. 어쩌면 그 목소리가 란페이의 것과 희미하게 닮아 있어서일까. 아까 블로어의 쇠비린내처럼, 그 한 마디는 가슴 깊은 곳까지 스며들어서 지치고 피폐한 마음을 쓰다듬었다. 긴장을 놓아선 안 돼. 아이가 고개를 저어서 그 까닭 모를 뭉틋함을 몰아내고 있는데, 륜은 또 새로운 것을 물어왔다.

"하지만 아직 밝혀지지 않은 게 하나 있군. 자네는 대체 어떻게 아나테마가 된 건가? 저 박피된 거인은 무슨 신인가?"

"말했잖아요, 마술사 살해의 신이라고..."

륜은 희미하게 웃으며 파이프를 입으로 가져갔다.

"설마. 그런 신이 있을 리가 없지."

이 말을 들은 건 두 번째였다. 처음으로 그 말을 한 것은, 아마도 이 세상에서 제일 아나테마에 대해 해박했을 나하트 칼벨레인이었다. 림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려 애쓰면서 륜은 말했다.

"그렇게 구체적이고 지엽적인 개념에도 신이 있다면, 아마도 자네는 매 걸음을 걸을 때마다 발바닥을 살펴봐야 할 걸세. 혹시 신을 짓밟지는 않았나 확인하려 말이야. 자네의 진짜 정체가 뭔가?"

한 번 들었다면 무지나 오해로 치부할 수 있겠지만 두 번은 달랐다. 아이는 살짝 눈꺼풀을 떨며 림을 바라보았다. 림은 이빨이 드러나도록 크게 웃고 있었다.

'잘 지적했군. 모른다.'

"모른다고?"

륜은 림을 들여다보며 추궁했다.

"그게 가능한가?"

'나는 지금부터 천 년 전, 세상을 뒤집으려던 세 위의 신을 쳐죽이고 봉인되었다. 신을 세 놈이나 쳐 죽이면서 아무런 대가를 치르지 않을 수는 없었지. 나는 반쯤 찢겨나갔다. 먼 기억들은 흐릿해서 잘 기억나지 않아. 이 흉측한 몰골도 그게 원인이다.'

이런 얘기는 림이 아이에게 해준 적이 없는 것이었다. 아이는 림과 처음 만났던 신전을 떠올렸다. 그 신전에서 림의 동상은 목이 잘린 채였다. 그것과 관련이 있는 것인가. 림은 조용히 선언하듯 말했다.

'하지만 내 진짜 이름은 중요하지 않아. 내가 봉인되기 전, 마지막으로 품은 의지만은 선명히 기억한다. 나는 마술사를 죽이는 신이었고 내 사도는 마술사를 멸하기 위해 존재했다. 너는 멸망을 말했지. 아마 그 멸망의 원인은 마술사일 게다. 나는 이 세상을 구성하는 법칙처럼 그것을 확신할 수 있다.'

"흠... 흥미롭군."

작은 입에서 또 주홍색 연기가 쏟아져나왔다. 아이의 가슴께에나 간신히 닿을까, 침대에만 있던 탓에 나이보다도 훨씬 어리게 보이는 그녀가 연기를 쏟아내는 광경은 오묘했다. 또 파이프를 잘근잘근 씹으며 륜은 물었다.

"그럼 경구는 기억하나?"

"경구?"

"자네도 신이었던 이상, 섬기는 자에게 들려주기 위한 경구 정도는 가지고 있지 않겠나."

질문에 대답한 것은 아이였다. 아이는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륜에게서 펜을 건네받은 아이는 찢어진 성경 조각 뒤에 그 경구를 적어 보여주었다.

홀로 남는 일의 가장 끔찍한 점은

깨닫기 시작하는 것이다.

왜 하나를 제외한 신이 모두 죽었는지.

"이건..."

이 경구로부터 신의 정체를 추리해내는 것. 그것 역시 나하트가 해내지 못한 일이었다. 그 대가로 나하트는 제단 위에서 몸이 불탔고, 키벨레의 단검에 심장을 찔려 죽었다. 륜은 그 종이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문득 중얼거렸다.

"알겠군."

'정말로?'

림이 놀랍다는 듯 중얼거렸다. 륜은 경구의 첫 줄을 쓸어내리며 말했다.

"홀로 남는 일의 가장 끔찍한 점. 자네는 그게 뭐라고 생각하나?"

그 질문은 아이를 겨냥했다. 쉽게 대답할 수 없었다. 외로움, 슬픔, 고독함. 그런 것들이 떠올랐다. 륜은 빙글빙글 웃더니 대답했다.

"질문을 조금 바꿔 보겠네. 홀로 남는 일을 고독이라고 치면, 가장 끔찍한 고독은 무엇이겠나?"

"고독..."

"멸종."

륜은 길게 빨아들인 연기를 아이에게 쏟아내며 말했다.

"이 세계에 홀로 남아 영영 갇히는 것. 그게 가장 끔찍한 고독이겠지."

아이는 머리를 망치로 얻어맞은 듯한 기분이 들었다. 충격이었다.

멸종. 종의 사멸. 생각해보면, 종이 사라지기 위해 남겨야 하는 생존자의 수는 0이 아니었다. 그것이 자손을 남기지 못하도록, 단 한 명만 남겨도 그 종은 멸종하는 것이었다. 그러니 홀로 남은 사람에게 내릴 수 있는 가장 끔찍한 재앙은 멸종일 것이었다.

"아마도 자네는 멸종의 림, 그런 이름으로 불렸을 걸세."

그 말은 아이를 먼 기억으로 인도했다. 자신 외의 모든 사람이 사라진 세계를 떠올렸다. 시체로 뒤덮인 전장 위에 홀로 서서 하늘을 바라보던 기억이었다. 까마귀가 둥글게 맴도는 붉은 하늘은 황폐했다. 그 몸짓에서 아이는 아무것도 읽어낼 수 없었다. 그건, 과연, 홀로 남는 일 중 가장 끔찍한 일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륜의 말은 이어졌다.

"아마도 이 세상에서 가장 원한을 사는 것, 증오를 받는 어떤 것을 멸종시키는 방식으로 살아왔겠지. 그리고 천 년 전, 그 대상을 마술사로 결정한 상태로 지금까지 이어진 것일 테고."

림은 침묵했다. 혼란스러운 듯했다. 무겁게 입을 닫고 있던 림이 입을 열었다.

'근거는 그 말장난이 전부인가?'

"아니. 또 있지. 자네의 사도, 이 소년이 살아온 행적이 근거일세."

륜은 또 연기를 쏟아냈다. 코가 익숙해진 것인가, 어쩐지 그 감귤향이 달콤하게 느껴졌다. 말을 마친 륜은, 이불을 끌어안은 채로 아이에게 가까이 접근했다. 어느새 코와 코가 닿을 정도로 두 사람은 가까이 얼굴을 대고 있었다.

"원한, 증오, 살해. 이런 것들의 신이 아닐까도 생각해보았지만, 그렇다고 하기에는 이 소년의 삶이 너무나 투명해. 그런 신의 아나테마였다면, 이렇게 투명한 삶을 지켜내지는 못했겠지. 그게 근거일세."

"투명..."

"마술사를 죽이는 게 자네의 삶의 사명이라고 했지. 그렇지만 자네가 바라는 그들의 죽음은 단순한 원한의 대물림도, 앙갚음도 아니고 그저 소멸인 듯 보였네. 무언가를 건설하기 위한 소멸."

그 말을 마친 륜은 갑자기 아이를 끌어안으려 두 팔을 내뻗었다. 검고 가느다란 머리카락이 뺨에 스쳤다. 아이는 황급히 륜을 밀치고 뒤로 물러섰지만, 륜은 이미 할 말을 마친 후였다.

"누구도 자네보다 그걸 잘 해낼 순 없었을 거야. 아마도 언니가 살아 있었다면, 참 장하다고 하지 않았을까."

살짝 콧날이 시큰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아이는 감정을 억누르고 소리쳤다.

"좋아요. 그건 그런 가설로 남겨두죠. 이제 저희 얘기를 다 들었으니 당신의 차례군요. 당신은 여기서 대체 뭘 꾸미고 있던 겁니까?"

"말했지 않나."

륜은 엷은 미소를 흘리며 말했다.

"멸망의 저지."

피할 수 없는 멸망을 예지했을 때 자애의 갈란퀸은 제국으로 흘러들어오도록 되어 있었다. 그 예언자는 조디악이었다. 그들은 누구보다도 먼저 멸망을 알고 많은 준비를 해나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들은 멸망을 막기 위해 움직이는 조직은 아니었다.

"그들은 오히려 세계의 파멸을 바라는 쪽이었지."

그들은 오히려 제국을 중심으로 형성된 지금의 세계가 부서지길 원했다. 부서진 세상에서, 한 조각이라도 자신의 나라를 세우면 그만이라는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런 조직이라도, 가장 많은 안배와 가장 많은 물자로 혼돈을 대비하고 있다는 건 변함이 없었지."

륜이 자신의 사명을 완전히 깨닫고 모략의 륜으로 눈뜬 것은 란페이의 죽음 직후였다. 드문드문 보이는 다른 이의 계획을 그 전까지는 그저 불길한 예지몽으로 알고 있었다. 그런 그녀에게 갑자기 세계의 죽음이 선고되었다. 막을 수 있는 자는 자신밖에 없다는 추신이 달린 선고.

"내가 뭘 어쩔 수 있겠나?"

그래서 륜은 조디악의 내부에 파고들기로 했다. 에바는 운명을 바꿀 수 있는 힘을 가진 아나테마였다. 륜은 그 중요성을 알았다. 그 때문에 일부러 그녀를 제외한 모든 사람을 물리치고, 오직 에바만을 믿는 듯 행동했다. 에바와 친교를 다지기 위해 노력했고, 순진한 그녀는 박식하고 가련한 륜을 가족처럼 여기게 되었다. 차후에, 조디악이 에바를 통령으로 만들고 나면, 그 관계를 이용해서 조디악을 파먹을 생각이었다.

"파먹으면?"

"장악해서, 그들이 자신의 나라를 세우기 위해 비축해온 힘을."

륜은 목소리를 가다듬더니 말했다.

"세계의 멸망을 저지하는 데 사용할 생각이었다네."

그런 것을 준비하고 있었나. 아이는 머리를 망치로 얻어맞은 듯한 기분이었다. 멍한 표정을 짓고 있는 아이에게, 륜은 때를 놓치지 않고 말했다.

"그리고 자네를 보고 계획을 바꾸었지."

한 호흡 쉬고, 감았던 눈을 뜨며 말한다.

"자네를 통령으로 만들어서, 자네와 함께 세상의 멸망을 막아내기로."

확신에 찬 목소리였다. 그녀는 아이에게 제안을 하고 있었다. 함께 힘을 합쳐서, 세상의 멸망을 막아내자는 제안. 손을 내밀어온다. 아이는 무심결에 그 손을 잡아버릴 뻔했다. 일 년간 수많은 아수라를 건너오지 않았던 아이라면 바로 잡았을 것이다. 하지만 아이는 얼굴을 굳히며 그 손을 물리쳤다.

"제가 당신을 믿어야 할 이유를 말해주시죠."

마레의 일이 떠올랐다. 목적과 수단의 불일치, 위선, 위악, 그런 모든 것들이 머릿속에 혼잡하게 뒤엉킨 채 떠올랐다. 예상하지 못한 반응이었을까, 당황한 듯 륜은 파이프를 내려놓으며 말했다.

"그거라면 보증이 있다네."

"보증?"

"내가 왜 드미트리, 그 율사 계집아이를 살려보냈다고 생각하나?"

륜은 애써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나는 이미 '아이 우르드를 위해 행동한다'라는 맹세를 한 상태라네. 자네가 만약 나와 약혼해서 성을 우르드로 바꾼다면, 나는 자네를 절대로 속일 수도 배신할 수도 없는 몸이 되지. 어떤가?"

그런 이유였나. 그 말은 륜 나름대로는 묘안이었을지도 몰랐다. 이 세상의 거의 모든 사람들은 그 말로 륜을 믿었을 것이다. 하지만 아이는 그런 종류의 설득이 먹히는 사람이 아니었다. 아이는 다시 뻗어오는 륜의 손을 쳐내며 말했다. 벌써 세 번째였다. 륜의 손등은 빨갛게 부풀어올라 있었다.

"그럼 또 거짓말을 한 셈이군요?"

"거짓말, 이라면, 무슨..."

"당신은 그 여자를 살려보낼 때, 에바가 그녀를 가족처럼 여겨서 그렇다고 했잖습니까. 그것도 거짓말이고, 지금 이렇게 저를 끌어들이기 위해서 그랬던 거군요?"

"그런, 아니, 그건..."

"결국 당신의 그 목적이라는 건 허황된 말뿐이고, 당신이 해온 건 거짓말밖에 없지 않습니까.저는 거짓말쟁이를 아주 싫어해요. 에바를 속였고, 통령을 속였고, 조디악을 속였고 또 저도 속였죠. 얼마 전에, 그 목상을 보여줬을 때, 감동했던 것. 그것도 전부 연기였습니까?"

그런 사람을 믿을 수는 없다. 아이가 그렇게 이야기를 매듭지으려 할 때였다.

아이는 그 말을 내뱉지 못했다. 눈 앞의 륜이 전혀 예상하지 못한 반응을 보이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울고 있었다. 잠시 침묵 속에서 훌쩍임만이 울렸다.

"아니야, 아니에요."

갑자기 그녀의 말투가 바뀌었다. 정체를 드러내기 전, 휠체어에 앉아 있던 륜과 같은 말투였다. 그 목소리는 도저히 연기로는 들리지 않았다.

"아이 씨를 만나서, 희망을 얻은 건, 정말이에요."

아이는 혼란스러웠다. 륜은 훌쩍이며 말을 이어갔다. 지금 그녀의 몸에는 두 개의 영혼이 뒤얽혀 있는 상태였다. 그녀는 모략의 륜인 동시에 란페이의 동생인 륜 우르드였다. 그녀는 한 손으로 파이프를 들어올리며 말했다.

"만약 여유롭게 세상을 버텨낼 수 있었으면, 이런 물건에는 손도 대지 않았겠지. 그렇지 않은가."

이번엔 모략의 륜의 말투였다. 세상의 멸망을 막을 사명과 능력을 지고 태어났다는 사실이, 곧 그녀가 꿋꿋이 그것을 이뤄낼 수 있다는 뜻은 아니었다. 쉬운 일일 리가 없었다. 병약한 몸의, 취하지 않은 정신으로 그 무게를 견뎌내는 것은 불가능했다. 아이는 말문이 막혀서 입을 다물었다.

"자네가 부숴준 내 미래... 제가 원래 걸어야 할 길에서, 걷기로 결심한 길에서, 저는 네 번 원치 않은 결혼을 하고, 짓밟히고, 버려집니다."

륜은 훌쩍이며 털어놓았다. 아이는 망연히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말투에는 지금 두 사람의 말투가 섞여 있었다.

"그래서, 그 끔찍한 미래를, 제가, 버텨낼 수 있을까. 나 혼자 보고 있는 미래를, 막아낼 수 있을까, 너무 무서웠다네. 그런데 자네가, 찾아와줘서, 나는..."

구원받았다고. 륜은 조용히 선언했다.

그 말을 듣자 마음 속에서 무언가가 치받는 것이 느껴졌다. 연민이었다. 하지만 아이는 알았다. 그런 연민이, 다정다감함이 자신의 약점이라는 것을 이제는 똑똑히 알았다. 가슴 속에서 모질게 그 연민을 쫓아내고, 일부러 감정을 억누르며 외쳤다.

"결국 당신은, 원래 기나센을 희생시켜서 세계를 구할 생각이었다는 거잖아요. 자신의 나라를 위해 당신을 죽이려던 통령이나, 기나센을 죽이려던 드미트리가 하던 일을, 더 큰 규모로 하려는 것뿐이잖습니까!"

그건 아이가 지금까지 걸어왔던 길과는 반대되는 것이었다. 륜은 절망한 자애의 신이 남긴 허무라고 했다. 그 자애의 신은, 올바른 목적을 위해서는 모략도 허용되어야만 한다는 절망 끝에 륜을 남겼다. 아마도 륜의 정의는 아이의 정의와는 사뭇 다를 것이었다. 누군가를 희생시킬 것이었고, 가까운 누군가를 베어넘길 수도 있었다.

"부정하지 않겠네."

륜은 무릎으로 침대 위를 기어서 천천히 아이에게 다가왔다. 들이치는 달빛이 그녀의 목덜미에서 하얗게 부서졌다.

"그 두 사람도, 처음에는 그렇지 않았을 거에요. 하지만 어느 순간, 세상의 난해함에 굴복해서, 스스로를 주체할 수 없게 되면, 지켜야 할 것과 희생해야 할 것을 구분하지 못하게 되면..."

"자네가 막아 주면 되지 않겠나."

그 말과 함께 륜은 아이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처음 느껴보는 감촉이었다. 몸이 작기 때문인가, 그녀의 몸은 이상할 정도로 따뜻했다. 가슴에 자그마한 온기가 번져갔다. 여러 번 손을 쳐낸 탓에 새빨개진 손등이 눈에 들어왔다. 이번엔 밀쳐낼 수 없었다.

"혹시 자네가, 스스로를 지켜내지 못하고 무너지는 게 걱정이라면, 그건 내가 막아주겠네."

아이의 단단하고 두꺼운 몸에 륜의 가느다란 팔이 포개졌다. 가슴을 껴안은 그것은, 팔 아래를 더듬더니 어딘가에 닿았다. 블로어의 칼집이었다. 아까 블로어를 검대에 걸어두었기 떄문에, 칼집은 텅 비어 있었다.

그런데 륜은 그 칼집을 세게 움켜쥐었다. 무엇인가가 들어 있다는 듯이.

"아."

그리고 아이는 깨달을 수 있었다. 세상의 절반을 가로질러서 생환했고, 몇 겹의 음모와 흉계를 깨부수어서, 위기에 빠진 아가씨를 구해냈다. 그 사실을 기나센의 국민 모두가 전해들었다. 이건 이미 훌륭한 전설이었다.

"이건, 블로어..."

용광을 만들어낼 때와 마찬가지로, 새 검을 만들어낼 정도로.

"내가 자네의 정의가 되어 줄 테니, 자네는 나의 힘이 되어 주게."

륜은 아이에게 새로 만들어진 블로어를 건네며 말했다.

검면에선 익숙한 글귀가 반짝이고 있었다. 아이는 천천히 그 검을 건네받았다. 막 만들어진 검날에선 쇳내가 그윽했다. 겨울이 녹아내리는 해토머리의 봄비린내를 닮은 쇳내였다.

무의식적으로 검에 코를 마주했다. 몸 속 깊숙히 그 향기를 빨아들였다. 세계의 절반을 건너온 이 검에는 이 세상의 언덕의 향기가 진하게 배여 있었다. 적어도 아이의 마음속에선 그랬다.

"아."

눈이 부셔서 눈을 찡그렸다. 어느새 아침이었다. 새벽이 걷혀가는 빛이 검에 부딪혀 부서지며, 정의라는 글자와 힘이라는 글자를 희게 물들였다.

"대답은?"

륜은 초조한 듯 물었다. 어둠이 스러지는 먼 새벽 하늘이 블로어의 검날에서 반짝였다. 말은 없었다. 검 위에서 빛나는 세계를 아이는 바라볼 뿐이었다.

이 세상의 죽음이 다가오고 있었다.

멸망의 다가섬은 밤처럼 확실했다. 그 멸망을 막기 위해서 모략과 악의를 긍정할 수 있을 것인지. 통령처럼, 또는 드미트리처럼 살아가는 것을 긍정할 수 있을 것인지. 아이는 자문해보았다.

아이가 지금까지 걸어온 길은 창조의 길이었다. 어설프고 유치하더라도 모든 것을 사랑할 수 있는 정의를 창조하고 싶었다. 륜이 제시하는 길은 소멸의 길이었다. 자신의 정의를 만드는 대신 무언가의 소멸에 기대서 살아갈 수 있을 것인지. 불분명했다.

하지만 몸 속 깊은 곳까지 스며든 쇳내는 호소하고 있었다.

무언가를 창조하려는 어린아이보다는, 죄업을 짊어지더라도 멸망을 막아낼 검을, 세계는 원하고 있다고.

"약혼은 받아들일게요. 하지만 결혼은 할 수 없어요."

륜은 얼굴을 흐렸다. 자신의 계획에 아이가 동참해 주겠다는 것인지 아닌지. 이해할 수 없어서였다.

"왜냐면, 이제 막 열일곱이 되었거든요."

성년이 되는 나이는 열일곱이지만 혼인하려면 스무 살은 되어야 했다. 그래서 혼인은 불가능했다. 그 말뜻은 륜과 진정으로 결혼할 생각은 없지만, 드미트리의 맹세 때문에 약혼은 하겠다는 뜻이었다.

즉, 륜의 제안을 받아들이겠다는 것이었다. 그 말이 끝나자마자 륜의 얼굴 가득 빛이 차올랐다. 밝은 햇빛이 창 가득 들이친 것은 그때였다. 여명 속에서 상기된 륜의 얼굴을 바라보며 문득, 아이는 깨달았다.

ㅡ 당신의 긴 여정은 이제 끝을 마주하고 있습니다. 당신이 소년으로 맞는 마지막 밤은, 이제 단 하나의 기적 같은 만남만을 남겨두고 있을 것입니다. 그 밤의 결말을 결정지을 그 만남을, 그리고 그 뒤에 기다릴 선택을. 신중히 결정하시기를.

호노레가 말했던 마지막 만남. 그게 륜이었나.

기나센의 여명은 특히 밝았다. 소렌의 눈밭 가득 아침의 빛이 차올라서, 찬란한 빛이 이 먼지 덮인 방마저 아름답게 밝혔다. 그 밝음과 자신의 가슴에 매달린 온기 속에서 아이는 실감할 수 있었다.

긴 여행의 끝을.

이것으로 길고 어두웠던 자신의 십칠야가 끝났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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