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권 후일담 #1. 진보
야만인의 땅은 죽어 있었다.
끝없이 펼쳐진 사막이었다. 사구를 할퀴는 바람에선 어떤 냄새도 나지 않았다. 이따금씩 꽃핀 숲의 바람이 꽃내음을 품고 날아오면, 몇 발자국 못 가 사막의 열기에 붙들려 잿빛 모래 깊숙이 매장되었다. 그 텅 빈 대지 위로 세 명이 걷는다.
"야만인들이 물보다 낙타젖을 챙기는 이유가 있군. 안 그런가?"
앞장서는 사람의 목소리는 중후했다. 길 아잘록이었다. 누군가가 우물쭈물 대답했다.
"예에, 맞습니다."
그것은 그의 조수인 올셉 가니트였다.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달고 있는 아잘록과 달리, 그는 죄 지은 사람처럼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그냥 물을 챙겼다간 얼마 지나지 않아 전부 말라버릴 테니 말일세."
아잘록의 말에 올셉은 또 우물우물 대답했다. 쿵! 커다란 소리, 옅게 피어올라 흩어지는 모래바람이 말을 끊었다. 거인의 발걸음이 만들어내는 소리였다. 그 산양 해골의 거인, 헤카톤 케이레스는 발걸음을 멈추고 자줏빛으로 타오르는 하늘을 바라보며 큰 괴성을 내질렀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아아, 드디어 종착지에 다다른 모양이군. 슬슬 준비하는 게 좋겠네."
헤카톤 케이레스가 울부짖는 굉음 아래에서 아잘록은 말했다. 그들은 지금 야만인의 땅 깊숙이 들어가고 있었다. 목적은 하나, 나하트 칼벨레인을 찾아서 죽이기 위해서였다. 어린아이처럼 볼을 붉히고 앞장서는 아잘록의 발자국은 불균질했다. 다리를 절고 있기 때문이었다. 지팡이로 모래를 깊숙이 짚어가며 그는 걷고 있었다. 엉거주춤 뒤따르는 올셉은 불안하게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아잘록이 다리를 절게 된 이유, 그리고 그들이 나하트를 쫓아 이 외지고 위험한 곳까지 찾아온 이유. 그건 모두 올셉에게 있었다.
길 아잘록은 헤카톤 케이레스를 탄생시키며 7위계에 올랐다. 수백년 만에 탄생한 7위계였다. 처음, 아지프는 그것에 환호했다. 그러나 아잘록이 대권에 관심을 갖자 기류가 바뀌었다.
아잘록은 아지프에서도 굉장히 특이한 인물이었다. 그는 영혼을 연구했다. 아무도 연구하지 않는 분야였다. 다른 이들이 군문의 영광을, 세속의 출세를 노리고 뼈의 재활용법이나 악마를 부리는 법 따위를 연구할 때, 그는 늘 아무도 이해할 수 없는 추찰을 거듭하고 있었다. 그 연구가 무엇을 겨냥하는지, 사람들은 알 수 없었다.
그런 자가 학장이 된다면 아지프는 어떻게 될 것인가? 불안한 기류와 소문이 맴돌았다. 누군가가 일부러 퍼뜨리기라도 한 듯 소문은 가지런했고 위력적이었다. 카나기의 학장 이신 아이신고르, 그의 수작이었다. 그는 가진 정치적 역량을 총동원해서 아지프의 관절과 뼛골 사이마다 의심과 분열의 독을 불어넣었다.
아잘록이 학장의 자리를 노린다는 소문이 돌았다. 그가 학장이 된 이후에는 명목뿐인 황실을 뒤엎고 황제를 차지하리라는 소문이 돌았다. 다음 날엔 커다란 숙청이 있을 것이라는 소문이 돌았고, 그 다음날엔 민간인의 희생을 금지시킬 것이라는 소문이 돌았다. 그 소문은 비탈길을 구르는 눈덩이처럼 점점 부풀면서 커져가더니, 종국에는 길 아잘록이 손톱만한 비위라도 저지른 사람이라면 모두 숙청해버리고, 그 죽은 시체로 군대를 일으켜 제국을 뒤엎으려 한다는 소문으로까지 번졌다.
아지프가 제국 최고의 무력임에도 제국을 무너뜨리지 않는 이유는 율사들이 더 높은 위계의 마술사도 막아낼 수 있어서인데, 7위계인 그에게는 5위계의 율사조차 저항할 수 없고 6위계의 율사들은 이미 아잘록을 황제로 모시기로 약조했다는 내용까지 길거리를 떠돌았다.
아지프가 제국에서 가장 강한 세력이 아니었다면 이런 소문은 큰 힘을 갖지 못할 것이었다. 하지만 아지프는 제국이 성립된 이후 언제나 수위의 자리를 차지해왔다. 1인자에게 변화란 두려운 것이었다.
이 모든 혼란을 집약해서, 현 학장은 넌지시 아잘록에게 불출마를 권유했다. 학장에 버금가는 명예직을 줄 테니 연구에 전념하지 않겠느냐는 권유였다. 아잘록은 빙그레 웃으며 거절했다.
"진보를 위해서."
거절의 사유는 그것이었다. 학장은 아잘록의 진보를 이해할 수 없었다. 얼굴을 굳히고 안락의자에서 일어나서 문을 닫고 사라졌다. 피바람이 몰아친 것은 그 이후였다.
아잘록은 중앙 마탑 소속이었다. 중앙 마탑은 연구를 중심으로 하는 마술사들이 모이는 곳이어서 정치적 세력이 빈약했다. 그 빈약한 세력을 노리고 숙청의 피바람이 몰아쳤다. 아이가 기나센으로 건너오며 처리한 아지프의 마탑주 역시 그 숙청의 가운데에 있던 사람이었다.
그들은 곧 아잘록의 가장 큰 약점을 찾아냈다. 그를 7위계로 만든 연구가 자신에게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나하트의 힘을 빌린 것이라는 사실이었다. 아잘록은 정직해서 그 출처를 숨기지 않았고, 나하트는 배교자였다.
실수로 비밀을 노출한 것은 올셉이었다. 나하트가 이미 데몬스폰의 잡종을 만드는 연구로 반쯤 7위계의 문을 열어젖힌 상태였다는 비밀, 아잘록이 알려주었던 그 비밀이었다. 아지프의 마술사들은 무언가를 희생시켜 자신의 연구를 완성시켰을 때, 마력을 얻고 위계를 전진시킬 수 있었다. 아잘록이 나하트의 연구를 빌려서 7위계가 되었다면, 이미 나하트 역시 7위계일 확률이 높았다.
아지프의 마탑은 발칵 뒤집혔다. 그들은 아직 나하트가 죽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만약 나하트가 살아있다면, 그리고 7위계에 완전히 도달했다면, 아지프는 정말 상대하기 힘든 난적을 만나게 된 셈이었다.
그 사실을 숨겼던 길 아잘록, 그리고 나하트의 딸인 마리아 칼벨레인에 대한 혐의는 그렇게 완성되었다. 적용할 수 있는 혐의는 무궁무진했다.
그들은 마리아 칼벨레인을 잡아들였고, 극심한 고문으로 모든 정보를 짜내려 들었다. 마리아 칼벨레인이 잡혀간 다음 날 아잘록은 자신의 발로 학장의 방에 찾아갔다.
"궁금한 게 있다면 나한테 묻는 것이 사리에 맞지 않겠는가."
학생을 대하는 교수처럼 평온한 목소리였다. 그의 목에선 여전히 세네터가 깃을 고르고 있었다. 곧 청문회가 마련되었다. 세네터는 접촉한 자가 거짓을 말하면 영혼을 파먹는 힘을 가지고 있었다. 그 귀조의 왕과 계약한 길 아잘록은, 절대로 거짓을 말할 수 없는 몸이었다. 그런 자에게 청문회는 사형장이나 다름없었다.
학장은 그렇게 생각하고 청문회를 소집해 아잘록을 앉혔다. 이 자리에서 아잘록의 숨통을 끊어놓을 셈이었다. 학장은 고르고 고른 질문을 던졌다.
ㅡ그대는 왜 배교자의 거짓된 신앙심으로 더럽혀진 연구를 멋대로 유용했는가?
"진보를 위해서."
ㅡ중앙 마탑의 위원장으로서, 그대는 배교자를 추적할 의무를 갖는다. 그 의무를 멋대로 활용하여 사적인 성취를 도모했음을 인정하는가?
"진보를 위해서."
학장은 머리를 얻어맞은 듯한 표정이 되었다. 아잘록은 계속 그 여섯 글자만을 뱉었고, 세네터는 반응하지 않았다. 아지프, 희생의 학파는 진보를 위한 희생을 긍정했다. 진실로 아잘록이 사욕 없이 진보를 위해 행동했다면, 저 여섯 글자를 대답하는 것으로 대부분의 질문은 회피가 가능한 셈이었다. 그렇게 일흔 일곱개의 질문이 지나갈 때까지도 대답은 같았다. 자포자기한 학장은 마지막 질문을 던졌다.
ㅡ마리아 칼벨레인은 나하트 칼벨레인의 딸로, 사사로운 육친의 정에 홀려 배교자의 배교를 도왔다는 혐의를 받고 있다. 그대는 그 사실을 인정하는가?
처음으로 아잘록은 대답하지 않았다. 청문회에 들어서기 전 그는 모든 질문에 성실하게 대답하기를 맹세했다. 침묵은 불가능했다.
곧 축 늘어졌던 학장의 얼굴에 희열이 차올랐다. 세네터가 그의 오른 다리를 뜯어먹기 시작한 것이었다. 세네터가 주는 상처는 영혼에 주는 상처였다. 수복이 불가능한 상처를 입으면서까지, 그는 그 질문에 대답하기를 거부한 것이었다.
"결국 죄를 인정했군!"
영혼을 뜯어먹히는 고통 속에서도 아잘록은 고요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아지프의 지하에 있던 영지의 샘은 미래를 엿볼 수 있게 해 주는 물건이었다. 나하트의 탈주를 돕기 위해 마리아는 그 샘을 망가뜨렸다. 아잘록은 마리아의 목숨이 자신의 오른 다리보다 가치있다고 생각했다. 그것은 진심이었으므로, 개인적인 정욕으로 죄인을 비호했느냐는 학장의 질문에는 다시 대답할 수 있었다.
"진보를 위해서."
어쨌든 그 정도면 그에게 죄를 뒤집어씌우기엔 충분했다. 곧 아잘록에게 형벌이 떨어졌다. 달아난 나하트 칼벨레인을 찾아서 그 목을 잘라 가져오라는 형벌이었다. 헤카톤 케이레스 외의 어떤 지원도 대동하지 못한다는 제한이 따라붙었다.
앞으로 2년 뒤로 다가온 학장 선거, 그 때까지 아잘록을 헤매게 만드는 것이 학장의 목적이었다. 나하트가 살아있다면 함께 양패구상하면 좋고, 죽어있다면 헛되이 세상을 떠돌며 시간을 낭비하게 되니 좋다. 그런 속셈이 뻔히 내비쳤다. 아잘록도 그 속셈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사람 좋은 교수같은 미소를 지으며, 조용히 처분을 받아들일 뿐이었다. 의자를 밀고 일어나 청문회장을 나서는 그는 다리를 절고 있었다.
그것이 지금 그가 이 야만인의 땅을 헤매는 이유였다. 그가 떠나기 직전, 올셉은 아잘록과의 동행을 자처했다. 자신의 책임으로 아잘록이 이런 처분을 받게 되었으니 면목이 없다는 이유에서였다.
"제 전 스승은 아나테마가 될 길을 찾고 있었습니다."
올셉은 야만인의 땅으로 아잘록을 인도했다. 실제로 나하트가 죽은 북서 자치령과는 정 반대되는 장소였다. 올셉은 나하트가 외신을 연구했노라고 주장했다. 그 외신의 힘을 받아들여서 마력을 보충하고 아나테마가 되려고 들었으니, 나하트의 행선지는 남쪽이 틀림 없다는 것이 그 내용이었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그리고 지금, 올셉은 또다시 아잘록을 파멸로 인도했다.
"저, 저건, 저번 회전을 패배하게 만든, 갈리아이의 쌍검입니다!"
나하트의 은거지가 틀림없다며 올셉이 인도한 곳은 사지였다. 저번 회전에서 아지프의 6위계 마도사를 죽게 만든 외신의 아바타, 갈리아이의 쌍검이 머무르는 곳이었다. 그 쌍검은 검 형태이지만 외신인 것이어서, 자신의 주인을 조종해 미쳐 날뛰게 만들었다. 그 쌍검을 움켜쥔 거인을 발견한 헤카톤 케이레스가 괴성을 내질렀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저, 저 거인이, 저번 회전에서, 인골귀 삼천을 혼자 도륙냈다는... 도망쳐야 합니다!"
황망해서 말하는 올셉을 아잘록은 유심히 들여다보았다. 거인 역시 헤카톤 케이레스를 발견했다. 모래바람을 일으키며 두 괴물은 서로에게 달려들었다. 쿵! 산양의 뿔과 검이 부딪혔다. 뿔에 금이 가고 검은 박살날 듯 삐걱거렸다. 충격파는 둥글게 퍼져나가서 사방의 모래를 원형으로 흩날렸다.
둘은 그렇게 뒤엉켰다. 시작된 전투는 신화적이었다. 산양이 거인의 목을 붙잡아 무릎에 내려찍고, 거인은 쌍검으로 갈비뼈를 쳐부쉈다. 뿔로 아랫배를 찔러 내장을 터뜨리자 거인은 팔꿈치로 산양의 턱을 후려쳤다. 거인의 몸에서 흘러내린 핏물은 피바다가 되어 사방을 적셨다. 헤카톤 케이레스의 뼛가루는 그 위에서 희게 흩날렸다.
모래바람 때문에 눈을 뜰 수 없었던 올셉은 가늘게 눈을 뜨고 앞을 살펴보았다. 넓은 등이 보였다. 어둡고 뿌옇게 휘날리는 먼지의 한가운데에, 오연히 서 있는 아잘록의 등이었다. 언제나의 평온한 어조로 그는 말했다. 올셉이 기다리던 말이었다.
"나는 저 아이와 함께 끝까지 저 놈을 막아 보겠네. 자네는 도망치게."
"그런, 무운을 빌겠습니다!"
올셉이 번져가는 입꼬리를 간신히 억누르며 달아나려고 할 때, 차가운 목소리가 뒤따랐다.
"뭐, 그런 대사라도 할 거라고 생각했나?"
"윽!"
유령처럼 다가온 아잘록은 어느새 올셉의 목을 붙잡고 있었다. 올셉은 핀셋에 붙잡힌 실험쥐처럼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의 외알 단안경에 자신의 모습이 비쳤다. 어떻게 보아도 캥기는 것이 있는 쥐새끼의 모습이었다. 아잘록은 빙그레 웃더니, 손톱이 반듯한 손을 올셉의 귓구멍에 쳐박았다.
"끄아아아아악!"
"아파도 참게. 공생충이 도망쳐서 뇌하수체를 파먹기라도 하면, 더 빼내기 골치아파지지 않겠나."
올셉은 마취당한 개구리처럼 경련했다. 축 늘어진다. 잠시 후, 아잘록은 그의 귓구멍에서 엄지손톱만한 검은 벌레를 꺼냈다. 피에 젖은 그 벌레는 뭉툭한 부속지를 미친듯이 흔들어댔다. 콱, 힘을 주자 뭉개져 흩어졌다. 아잘록은 조용히 말했다.
"실수로 마리아 군을 잡혀가게 만든 것도 자네고, 나하트의 비밀을 실수로 흘린 것도 자네고, 이제 실수로 저 괴물을 만나게 만든 것도 자네인데, 자네는 살아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 겐가?"
"흐으으윽, 용서를, 용서를...!"
"음, 무엇이 원한이었나. 짚이는 것이 없군. 안 그런가, 세네터?"
세네터는 부리를 크게 벌리고 까악댔다. 쿵! 뒤에선 거인과 산양이 주먹을 부딪히고 있었다. 방금 올셉의 귀에서 꺼낸 공생충은, 일종의 도청 장치였다. 올셉은 배신자였다. 학장의, 또는 학장에 준하는 누군가의 사주를 받고 아잘록을 궁지에 몰아넣은 게 틀림없었다. 아잘록은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설마, 저자로 등재시켜주지 않은 게 그렇게 큰 원한이었나?"
"용, 용서를, 배움이 필요합..."
"아니. 자네에게는 배움이 필요하지 않네. 잘 가게나."
아잘록은 올셉의 목을 붙잡은 채로 뒤돌아섰다. 산양과 거인은 어지럽게 뒤얽혀서, 서로의 팔관절을 붙잡고 힘싸움을 하고 있었다. 아잘록은 시를 읊듯이 중얼거렸다.
"아드마가랄리의 굉혈포."
"끄아아아아악!"
아잘록이 말을 마치자마자, 바닥에 검게 뚫린 구멍에서 환골탑이 치솟았다. 나하트의 것보다도 두 배는 지름이 큰 환골탑이었다. 그 환골탑은 제물, 올셉 가니트를 삽시간에 먹어치우고 녹아내렸다. 다음 순간, 아잘록의 손바닥 앞에서는 붉고 거대한 원기둥이 용솟음쳤다. 태산이라도 쳐부술 수 있을 듯한 크기의 그 굉혈포는 거인의 가슴으로 돌진해서 그 두꺼운 피부와 살점을 쳐부수고 거대한 구멍을 뻥 뚫었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크게 튀는 핏물. 거인은 고통으로 몸을 뒤틀었다. 주인의 조력으로 승기를 잡은 헤카톤 케이레스는 그 때를 놓치지 않았다. 온 몸으로 달려들어서 거인을 바닥에 깔아뭉갰다. 쿵! 굉음과 모래먼지가 피어오르고, 소름끼치는 소리가 낮게 깔렸다. 으적,으적, 헤카톤 케이레스가 거인을 산채로 뜯어먹기 시작한 것이었다. 거인은 경련하며 저항했으나 헛수고였다. 힘줄을 드러내며 떨던 거인의 팔다리가 추욱 늘어졌다.
그 소름끼치는 포식의 현장을 등진 채 아잘록은 조용히 걸어갔다. 목표는 쌍검이었다. 쌍검은 살아있는 생명처럼 꿈틀거리고 있었다. 그 형상은 어딘가 레바테인을 닮았다. 아잘록은 그 쌍검을 쓰다듬으며 중얼거렸다.
"이것으로 내 아이도 무기를 가지게 되었군. 축하하네."
곧 혐오스러운 만찬을 마친 헤카톤 케이레스는 길게 울부짖으며 네 발로 기어왔다. 흰 뼈가 도드라진 손으로 갈라아이의 쌍검을 집어들었다. 일어선 헤카톤 케이레스의 거체는 하늘의 천장에 닿을 듯 거대했다. 그 길게 늘어진 그림자 아래에서, 아잘록은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뒤돌아섰다.
길 아잘록, 그는 단순히 음모에 희생된 것이 아니었다. 그는 이 유배형을 합법적으로 야만의 땅을 홀로 떠돌아다닐 수 있는 기회로 여기고 있었다. 이 살풍경한 죽음의 땅에서조차, 그는 연구를 할 생각이었다.
헤카톤 케이레스를 바라보던 아잘록의 눈에 다른 사람의 얼굴이 비쳤다. 산양의 가슴에서 눈감고 있는 란페이의 얼굴이었다. 란페이 군, 그는 좋은 청자였지. 그 억센 눈썹과 일자로 곧게 닫힌 입술은 질문을 하고 있는 듯했다. 어떤 연구인가요, 하는.
"진보를 위한 연구라네."
아잘록은 절뚝이며 사막을 걷기 시작했다.
유모 잃은 유골은 입가에 피를 묻힌 채 뒤따랐다.
그들이 사라진 자리에서, 희미하게, 아기 울음소리가 울린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