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권 후일담 #2. 먼 곳
다나 아니스. 어렸을 때의 이름은 실험체 17호. 그녀가 깊은 잠에 빠지는 일은 드물었다. 늘 선잠이었다.
그녀를 괴롭히는 꿈이 너무 많았다. 부모님의 꿈, 아지프의 마탑에서의 꿈... 그 중에서도 가장 다나를 오래 괴롭힌 것은 마지막 밤에 보았던 동생의 하얀 목덜미였다. 아이와 만난 이후로 그 꿈을 꾸는 일은 줄어들었다. 위안이었다. 하지만, 그래도 그녀에게는 숱한 악몽이 남아 있었다. 사람 없는 관저의 책상에 엎드린 채로 풋잠을 자면서 그녀는 지금도 악몽을 꾸는 중이었다.
최근의 일이었다. 북서 자치령에서부터 자신을 괴롭히던 악연, 호즈 아도헤르가 자신을 집요하게 기소해서 재판대에 올려놓았을 때의 꿈을 다나는 꾸고 있었다.
율사는 다른 율사의 마력을 흡수할 수 있었다. 심각한 부정을 발견하여 기소하고 재판에서 승리해서 상대를 파문시키면, 파문된 자의 마력이 기소자에게 넘어가는 방식이었다. 기소한 자가 패배하면 반대로 기소자의 마력이 무고당한 자에게 넘어갔다.
아이가 아지프의 마탑주를 무찔러 호노레를 구해주기 전까지 호노레의 실각은 확실해 보였으므로, 그 제자인 다나를 노리고 호즈는 기소를 걸어온 것이었다.
호즈의 공격은 악의에 차 있었다. 그녀는 다나의 신분과 출신을 문제 삼았다. 율사 학원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꽤 많은 돈이 필요한데, 천애고아인 다나가 어떻게 그것을 확보했느냐는 공격이었다. 다나가 없는 틈을 타서 제도에선 온갖 더러운 말이 돌아다녔다. 무명의 1위계 율사 출신으로 벼락출세한 다나가 호의를 얻는 것은 어려웠다. 그녀가 몸을 팔았을 것이라는 소문은 아주 온건한 축에 속했다.
그런데 아지프의 마탑주가 죽고 호노레가 돌아오자 상황은 반전되었다. 실각이 확실해보였던 호노레가 오히려 위기를 이용해 입지를 반석처럼 다진 것이다. 호즈의 편에 서 있던 사람들은 일거에 돌아섰다. 제도에서는 영원한 아군도, 영원한 적군도 없었다. 그걸 모르고 기세등등했던 호즈가 비싼 대가를 치르는 것은 당연지사였다.
궁지에 몰린 호즈는 해서는 안 되는 짓을 저질렀다. 사재를 풀어서 청부사를 고용해 다나의 어린 시절을 샅샅이 조사하고 증인을 조작하려 한 것이다. 다나는 간신히 그 시도를 막아냈고 재판은 다나의 승리로 끝났다. 패배의 고통으로 몸을 비트는 호즈의 얼굴을 다나는 피고인석에서 똑똑히 볼 수 있었다. 호즈의 발밑에선 푸른 마법진이 세차게 빛났다. 심장에 새겨진 보호문을 박탈당하고, 마력을 빼앗기면서 그녀는 비통하게 소리질렀다.
"저 년은 살인자입니다! 증거를 은폐했을 뿐이지, 살인자가 맞단 말입니다!"
방청하던 호노레는 코웃음쳤다. 재판에 참가한 모두가 그랬다. 모두에게 호즈의 말은 궁지에 몰린 자의 추한 울부짖음으로 들렸다. 단 한 사람, 다나를 제외하고. 다나는 얼굴을 딱딱하게 굳히고 있었다. 호즈는 끌려가면서도 악담을 멈추지 않았다.
"성녀님! 당신께서도 주의해야 할 겁니다. 저 여자는 언제든 당신의 뒤를 찌를 준비가 되어 있는 뱀 같은 여자입니다!"
"패배 소감치고는 참 멋 없군요."
일축한 호노레는 돌아섰다. 아마도 승리의 미소를 짓고 있을 다나를 보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그녀는 깜짝 놀랐다. 그녀의 제자는 어두운 얼굴로 입술을 씹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재판장에서의 표정과 같은 얼굴로 다나는 부스스 잠에서 깨어났다. 주위를 둘러보니 방은 텅 비어 있었다.
"아, 재판은."
잘 되었겠지. 다나는 믿었다. 그녀는 율사복을 입은 채였다. 조심스레 사방을 살피고 텅 빈 관저를 확인한 다나는 부스스하게 뻗친 머리를 가다듬었다. 빗을 입에 물고 한 움큼씩 머리를 땋아 나갔다. 거울 속에는 분홍색 머리를 아리땁게 땋아올린 성년의 여성이 비치고 있었다. 다나는 그 모습이 가끔 타인처럼, 낯선 얼굴처럼 느껴졌다. 어릴 적, 붉은 단발로 송곳니를 드러내며 웃던 모습, 17호라고 불렸던 모습이 대신 거울에 비치기를 바랄 때가 있었다. 아직 잠에서 덜 깼기 때문인가, 거울이 흐려지며 그 붉은 머리 소녀의 환영이 빛났다. 머리를 다 땋은 다나는 부르르 몸을 떨었다.
ㅡ그래! 뭐, 나한테 실망했어? 난 다 죽일거야! 엄마도, 아빠도, 이렇게 죽었단 말이야!
거울에 비치던 어린 날의 자신은 그렇게 외쳤다. 거울 속의 어린 다나, 17호는 그 말을 마치고 열린 방문으로 조르르 달려나갔다. 다나는 숙연히 고개를 꺾었다. 호즈의 비난은 거의가 터무니없었지만 그 한 마디는 달랐다. 살인자라는 비난, 그 비난만은 정당한 것이었다.
행복한 미래를 상상하며 잠들고, 밤새 악몽으로 뒤채인 후 눈을 뜨면, 이렇게 17호의 환영이 어른거리곤 했다. 아이와 만난 후로 다나를 가장 괴롭히는 기억은 칼슨의 기억이었다. 억지로 송곳니를 뽑아낸 자국이 시큰거렸다. 그 텅 빈 자리를 혓바닥으로 매만질 때마다 혀 끝을 저미는 듯한 아픔이 밀려왔다. 그 아픔은 말하는 듯했다. 너에겐 행복할 자격이 없다고.
"아니, 아니야."
느닷없는 비감 때문에 눈물을 흘리는 건 어린아이나 할 일이었다. 뺨을 쳐서 갑자기 밀려오는 슬픔을 몰아내고 다나는 일어섰다. 두꺼운 회색 망토를 뒤집어쓰고 그녀는 관저를 나섰다. 이렇게 주변에 아무도 없을 때를 틈타서 해야 할 일이 있었다. 기나센에 올 때부터 계획했던 일이었다.
소렌에는 칼슨의 유족이 살고 있다고 들었다. 그 유족에게 찾아가서 모든 사실을 밝히고 사죄하는 것. 그게 그 계획의 내용이었다.
모두 재판을 보러 몰려갔기 때문일까, 소렌의 거리는 텅 비어 있었다. 가지런하게 눈이 쌓인 도시의 고요는 정취를 품고 있었다. 하얀 손을 호호 불어가며 움직이던 다나는, 이따금씩 발걸음을 멈추고 그 차갑지만 포근해보이는 눈의 도시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어느새 밥 짓는 시간이었다. 굴뚝의 하얀 증기가 피어오르는 집마다 식기가 달그락거리는 소리와 웃음이 새어나왔다. 문득 발걸음을 멈추고 창 너머로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자신이 그것을 부러워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마다, 텅 빈 잇자국이 쑤시며 발걸음을 재촉했다.
유족의 집은 소렌 구석에 있었다. 사각의 나무지붕 위에는 눈이 한계까지 쌓여서 녹은 자국으로 난해한 무늬를 그렸다. 다나는 그 창문을 바라보면서 망설였다. 돌아갈까. 하지만 이를 악물고 문을 두드렸다. 얼마 안 가 문은 열렸다.
"무슨 일이오?"
문을 연 것은 다 늙은 노인이었다. 금방이라도 부러질 듯 가느다란 팔과 다리로도 목소리는 당당했다. 꾸벅 인사하고 다나는 안으로 들어섰다. 율사복을 보자 노인은 군말 없이 자리를 내 주었다.
"저, 여기에, 칼슨 봄머라는 분이..."
"죽었소."
"살았었다고, 들어서, 왔는데요."
대답은 냉담했다. 다나는 망설이며 뒷말을 붙였다. 노인은 흰 눈썹으로 덮인 눈으로 다나를 들여다보았다. 꿰뚫어보는 듯한 눈빛이었다.
"그래서? 죽은 자에게 위문을 하고 싶다면 묘지로 가야 할 일인데."
"저, 저, 사죄를 드리고 싶어서... 어르신께서는 혹시..."
"아무 관계도 아니오. 그냥, 그 놈이 어렸을 때 검을 몇 년 가르친 정도지. 유족이라면 어린 아들... 입양한 아들이 있을 텐데, 떠났소. 그 녀석이 죽은 뒤에."
검을 가르친 관계. 기나센에서 그건 무관계가 아니었다. 하지만 노인의 말은 일부러 칼슨과의 관계를 잘라내려 하는 듯했다. 다나가 고개를 숙인채로 아무런 말도 하지 않자, 노인은 옥수수 수염을 달인 차를 홀짝이며 말했다.
"두 놈을 가르쳤는데, 한 놈은 제법 재능이 있었어. 끊어낼 때와 막아낼 때를 잘 알고 있었소. 나머지 한 놈, 칼슨이라는 놈은 그렇지 못했어. 상대를 후려쳐야 할 떄마다 망설이더군. 꾸짖고 꾸짖어도 천성이 그런 놈이라 포기했었지. 멍청한 놈이오."
"그렇, 군요..."
"그런데도 용병을 한다고, 내가 은퇴하면 가게를 차려서 먹여살려준다고 하길래 머리를 후려쳤지. 이 놈아, 너는 전쟁터에 나가면 삼 일도 못가고 죽을 놈이다. 그래도 머저리처럼 헤헤 웃더니, 얼마 못 가 죽었지. 자업자득이오."
다나가 고개를 푹 숙이고 있자니, 노인이 말을 이었다.
"그러니 아가씨도 죄책감을 가질 필요 없소."
"예?"
다나는 고개를 들었다. 노인은 은퇴한 용병이었다. 그의 말에선 여전히 무인다운 삶의 힘이 뻗쳐오고 있었다.
"전쟁터에서 죽는 건 용병에게는 자연사나 다름 없는 것이오. 그 죽음 뒤에 원한을 남기는 것도, 증오를 남기는 것도, 우리에게는 덧없는 일이라오."
삶의 경험일까, 아마도 다나가 찾아온 이유를 짐작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 말에 이끌려 다나는 흉중을 털어놓았다. 노인은 수염을 쓰다듬으며, 다나의 긴 이야기를 들었다. 이야기가 끝나고 다나는 처분을 기다리듯 고개를 숙였다. 노인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래서, 유족에게 사죄를 하고 싶어서 여기 찾아온 것이로군?"
노인의 어조는 변함이 없었다. 그는 또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 수염을 쓸어내렸다. 그는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무슨 소용이겠소. 죽은 자는 사죄를 받지 않는데."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다나는 황급히 고개를 들었다. 노인은 그러면서도 담담하게 말했다.
"유족을 찾는 것이라면, 이미 말했지만 떠났소. 아직 열 살 짜리 사내아이였는데, 칼슨이 생활비를 전부 대어 주고 있었지. 내가 몇 년은 더 돌봐주겠다고 했지만 막무가내였소. 편지 하나만 남기고 집을 떠났소."
"편지라면..."
"먼 곳으로 가겠다는 편지였소."
"먼 곳..."
"아주 먼 곳인 모양이오."
아직도 편지 하나 안 보내오는 것을 보면. 그것으로 노인은 말을 끝마쳤다. 다나가 아직 책상에 남아 있는데도 지팡이를 짚고 자리에서 일어나 방으로 들어갔다. 쾅, 소리를 내며 문을 닫았다. 축객령이었다. 그가 자신의 사죄를 받아들인 것인지, 아닌지. 다나는 가늠할 수 없었다. 어쩌면 노인은 진실로 자신이 칼슨의 죽음과 무관계하다고 생각하는 걸지도 몰랐다. 다나는 그 닫힌 문에 꾸벅 인사를 하고, 자리에서 일어나 문 밖을 나섰다.
차가운 눈조각이 다나의 뺨에 닿아 삽시간에 녹아내렸다. 올려다보니 함박눈이었다. 저 아득한 하늘의 끝자락에서 눈송이는 쏟아지고 있었다. 먼 곳, 먼 곳... 그 먼 곳이 어디일까를 생각하며 다나는 한참이나 걸었다. 발 밑에선 사부작대는 소리가 났다. 어깨가 으슬으슬하게 추워지고 나서야, 문득 자신이 외투를 놓고 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거기에는 적지 않은 루덴과 지갑이 들어 있었다. 하지만 돌아가서 되찾을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저, 칼슨의 어린 아들이 떠나갔다는 먼 곳을 생각하며 관저까지 걸어서 돌아왔다. 돌아온 다나는 피곤에 젖어 침대에 쓰러지듯 몸을 포갰다. 오늘도 악몽을 꿀 것 같았다. 아직 닫히지 않은 방문 너머에서, 17호가 빼꼼 고개를 내밀고 자신을 엿보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다나는 하루 종일 잠들었다. 또 호즈의 악몽을 꾸었다. 수천의 사람 가운데서 살인자라고 비난받는 와중 잠에서 깨었다. 머리를 정리할 기력도 나지 않아서, 부스스한 얼굴로 식당에 내려온 다나에게 들려온 것은 그것보다도 충격적인 소식이었다.
"들었어요? 륜 아가씨와 아이 씨가 약혼을 했대요!"
에길론의 눈치 없는 목소리였다. 식당 입구에서 그녀는 우두커니 멈춰섰다. 등지고 앉은 에길론은 다나의 등장을 알지 못해서 열심히 떠들었지만, 다른 일행들은 다나의 충격받은 표정을 보고 얼굴을 굳힌 채였다.
"이제 아이 씨가 아니라 아이 우르드, 우르드 씨인 셈이죠. 하긴, 용병단을 재건하려면 그 정도 작업은 해 두는게 맞겠죠. 통령이 직접 보증했다던데요. 이야, 어울리는 한 쌍이네요. 그렇죠?"
신나서 떠드는 에길론의 옆구리를 샤론이 쿡쿡 찔렀다. 에길론은 의뭉스러운 얼굴로 뒤돌아보고, 놀라서 얼굴을 굳혔다.
계단에 멈춰선 다나가, 얼굴을 엉망으로 일그러뜨린 채, 울고 있었던 것이다.
훌쩍대는 소리가 식당을 가득 메웠다. 다나는 어깨까지 들썩이고 있었다. 그렇게 서서 한참 훌쩍거리던 그녀는, 갑자기 뒤돌아서서 다시 자신의 방으로 돌아가서 침대에 얼굴을 파묻었다.
텅 빈 이빨이 시리도록 아파왔다. 살인자라는 비난이 머리에서 맴돌았다. 어쩌면, 이미 자신에게는 행복해질 자격 같은 건 없는 걸까. 그런 낙담이 등골부터 머리까지 가득 퍼져서, 다나는 하루 종일 불 꺼진 방에서 울고 있었다.
목이 쉴 정도였던 그녀를 진정시킨 것은 호노레였다. 그날 밤 호노레는 다나의 방에 찾아와서 엎드린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녀는 어른인 척 애쓰려는 자신의 제자와 동질감을 느끼고 있었다. 제자를 위해 정보를 모아온 성녀는 이야기로 다나를 달래기 시작했다.
아마도 그 혼약은 일종의 정치적인 행보로 보인다는 것, 레이븐사이드가 재건되고 나면 무효가 될 지도 모른다는 것, 아직 결혼까지는 3년이라는 유예가 남아 있다는 것. 그런 내용들이었다.
"포기할 거에요?
그 말로 길고 긴 달램은 끝났다. 다나의 훌쩍임은 어느 새 멎어 있었다. 천천히 다나는 머리를 들었다. 눈에 길게 눈물자국이 남아 있었지만, 더 이상 울고 있진 않았다. 그녀는 입술을 깨물고 고개를 저었다. 그 표정은 결연했다.
"두고 보세요. 저는, 반드시, 행복해지고 말 거니까."
먼 곳, 그 먼 곳을 3년 안에 반드시 찾아내겠다는 결의를 담은 표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