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 귀르겐 ( 4 )
그림자 섬.
바다를 건너오는 바람은 늘 비린내를 품었다. 노을이면 깃발은 역광을 등지고 펄럭거렸고, 늙은 물새는 기약없이 육지로 날아올랐다. 밤바람은 헐벗은 섬을 쓸어담듯이 몰려왔다. 휑하니 펼쳐진 모래톱과 바위마다 비린내에 절었고, 들이치는 달빛을 가릴 나무 한 그루도 없어서, 밤마다 연안은 창백한 흰 빛에 깔리어 뒤척였다.
죽은 생선의 눈알 같다, 앳킨슨은 그렇게 생각했다. 그는 이 섬을 수십년 째 지키고 있는 성도 8궁, 귀르겐을 보좌하기 위해 보름마다 찾아오는 성기사였다. 바닷바람에 비꺽대는 배를 끌어올리면서 앳킨슨은 자꾸 섬의 중앙을 바라보았다. 그 자리에는 외신의 침입을 막기 위한 결계가 있었고, 그 위에 무릎 꿇은 귀르겐이 있었다.
"식량을 좀 더 남겨두고 갔어야 하는 게 아닌지."
지금부터 사흘 후면 귀르겐의 광증이 시작될 것이었다. 지금 앳킨슨과 그를 따르는 성기사들은 그 광증을 피해서 랭 반도로 돌아가려는 참이었다. 수십 년째 겪어온 일이기 때문에 귀르겐은 서운한 빛을 보이지 않았다. 그저 정물처럼 결계의 주춧돌 위에 무릎을 꿇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를 이 외로운 섬에 남겨두고 떠나는 밤이면, 앳킨슨은 죄스러워서 자꾸만 멀리를 바라보았다.
"다 끌어올렸습니다!"
배를 묶은 로프를 내려놓으며 선원이 그렇게 외쳤다. 앳킨슨은 자꾸만 뒤를 돌아보며 배 위에 몸을 실었다. 돌아갈 배는 두 대였다. 두 번째 배는 바닷바람을 맞고 저 멀리까지 떠나간 것인지, 뱃줄이 팽팽했고 사람들이 악을 쓰면서 그 줄을 잡아당기고 있었다.
"어이! 도와줄까!"
앳킨슨이 외치자 희미하게 괜찮다는 말이 들려왔다. 안 괜찮다는 뜻이었다. 무슨 상어나 커다란 문어 따위가 들러붙은 걸지도 모르겠군. 앳킨슨은 훌쩍 선창에서 뛰어내려 뱃줄을 끌어올리고 있는 사람들 옆으로 다가갔다. 까끌까끌한 로프를 붙잡자마자 로프 너머에 있는 존재의 억센 힘이 느껴졌다.
"어쩌면 해양 괴물일지도?"
종종 있는 일이었다. 다 끌어올리면 싸울 준비를 해라, 앳킨슨은 좌우를 돌아보며 외쳤다. 그렇게 십분 여, 팽팽한 싸움이 지속된 끝에 성기사들은 배를 끌어올렸다. 그리고 전율했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뭐, 뭐야!"
그 밧줄 끝에 매달려 있는 것은 배도, 앳킨슨이 예상하던 문어 괴물도 아니었다.
그건 산양의 두개골을 닮은, 거대한 머리뼈를 가진 괴물이었다.
"아, 미안하지만 밤바람이 하도 심해서 말일세. 어느 바위섬이 그림자 섬인지 외지인은 알 길이 없으니, 자네들의 힘을 좀 빌렸다네."
그리고 그 어깨에는 지팡이를 짚고 까만 새를 부리는 마술사가 올라타 있었다. 그는 길 아잘록, 학장의 명을 받고 야만인의 땅을 떠돌아다니고 있는 7위계의 마술사였다. 이 곳 그림자 섬은 랭 반도에서도 남쪽에 있는 곳이어서, 야만인의 땅과 그리 멀지 않았다. 헤카톤 케이레스와 함께 남부를 헤매던 그가 어떤 목적인지 이 곳에 당도한 것이었다.
"이곳에 찾아온 목적이 무엇이오!"
앳킨슨은 진은검을 뺴어들고 외쳤다. 검면에 아잘록의 평온한 얼굴이 비치었다. 그는 태연한 얼굴로 말했다.
"자네들에게는 관심이 없으니 그냥 물러가도 좋다네. 나는 쓸모없는 희생은 그다지 좋아하지 않아서 말이야."
"목적이 무엇이냐고 물었소!"
"데몬스폰. 이 섬에서 머무르고 있는 데몬스폰이 필요해서 들렀다네."
"귀르겐 경? 경에게 무슨 목적이 있소!"
"별 것 아니야. 그냥 좀... 실험을 할 필요가 있어서 말일세."
진보를 위한 실험을.
그렇게 말하는 그의 눈빛은 어린아이처럼 천진했다. 앳킨슨은 부르르 떨었다. 칼을 뽑아든 그는, 솔선해서 달려들며 돌격 명령을 내렸다.
"모두 저 미치광이를 죽여!"
앳킨슨의 명령으로 이전부터 전투를 준비하던 성기사들은, 하늘에 닿을 듯 높게 솟은 헤카톤 케이레스를 향해 달려들기 시작했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그러나 무용한 일이었다. 헤카톤 케이레스는 거체를 들어올리며, 새롭게 손에 얻은 쌍검을 휘둘렀다. 갈라아이의 쌍검은 새까만 검영을 흘리며 사방을 휩쓸었고, 지나간 자리에 피륙조차 남기지 않았다. 산양이 움직일 때마다 모래톱이 움푹 패이며 모래가 흩날렸고, 성기사들은 수수깡처럼 부러지거나 으깨지거나 박살나서 흩날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상황은 정리되었다. 성기사들 중 살아남은 자는, 앳킨슨밖에 남지 않게 되었다.
아잘록은 팔이 부러져 헉헉대는 앳킨슨에게 다가갔다. 눈을 베였는지 한쪽 눈은 피로 가득했고, 헉헉대며 시선을 바로잡지 못하고 있었다. 그 멱살을 붙잡고 들어올린다.
"자네에게 질문할 것이 있네."
아잘록의 등에 매달린 귀조, 세네터는 주인의 의중을 알아채고 앳킨슨에게 날아들었다. 그 검은 날개가 앳킨슨을 빈틈없이 휘감았다. 피에 젖은 앳킨슨의 눈을 들여다보며, 아잘록은 나지막하게 물었다.
"자네가 보기에, 귀르겐에게는 아직 인간의 영혼이 남아 있는가?"
"그렇다!"
악쓰듯 외친 앳킨슨은 곧 새된 비명을 내질렀다. 불타오르는 석탄 구덩이에 몸을 던져넣은 듯한 아픔이었다. 몸부림치는 앳킨슨을 두고, 아잘록은 미소를 지었다.
"역시 영혼이 마모되기 시작했군. 그럼 실험체로서는 조금 가치가 떨어지는데 말일세. 안타깝군."
그 말대로였다. 최근 몇 년간, 귀르겐은 급속도로 지쳐가고 있었다. 인간적인 상호작용을 기대하기 어려웠고, 사람과의 대화를 꺼리는 듯했다. 밤이면 침대에 눕는 대신 여왕이 죽은 자리로 나아가 무릎을 꿇고 하염없이 밤하늘을 바라보았다. 앳킨슨은 그것이 마치 죽음을 기다리는 사냥개 같다고, 무의식중에 생각했었다.
"그럼 묻지. 지금도 그 자는 그 자리에 있는가?"
"없다!"
이를 악물며 앳킨슨은 다시 뻔한 거짓말을 했다. 심문에 응할 생각이 없다는 것을 보여준 셈이었다. 거짓말을 하면 영혼을 파먹는 세네터의 힘, 그것을 견디지 못하고 얼마 못 가 앳킨슨은 축 늘어졌다. 그 희생은 무용했다. 앳킨슨의 시신을 고이 눕히고, 아잘록은 섬의 중앙을 향해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 뒤를 헤카톤 케이레스가 조용히 뒤따랐다. 아잘록은 여전히, 발을 절뚝이고 있었다.
*
그림자 섬의 중앙.
무릎꿇은 채 하늘을 쳐다보던 귀르겐은 문득 거대한 발소리를 들었다. 천갈궁 파에톤을 뽑아들고 자리에서 일어서니 어느새 그 발소리는 지척이었다. 헤카톤 케이레스와 아잘록이 도착한 것이었다. 은랑왕의 피를 받아서, 짐승과 같은 후각을 가진 귀르겐은 곧바로 상대가 적임을 알 수 있었다. 온 몸에서, 성기사의 피 냄새가 났기 때문이다.
"안녕하신가. 오늘은 달밤이 참 밝군."
그는 해맑게 인사했다. 귀르겐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검을 오른손으로 쥐고, 짐승이 연상될 정도로 낮은 자세를 취할 뿐이었다. 귀르겐이 전투 태세를 취함에도, 아잘록은 여전히 천연덕스럽게 물어왔다.
"자네에게 협조를 구하고 싶은 실험이 있어서 먼 길을 찾아온 참인데, 혹시 내 연구 이야기 좀 들어줄 생각이 있는가?"
어처구니없는 태도였다. 귀르겐은 이빨을 드러내며 나지막하게 말했다. 어디선가 불어온 한 줄기 밤바람 때문에, 그의 아랫턱에 수북히 매달린 흰 수염이 흔들렸다.
"말해."
물론 들을 생각은 없었다. 그저 빈틈을 유도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아잘록은 빙그레 웃더니, 자신의 계획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자네라면 이 아이가 얼마나 위대한 생명체인지 한 눈에 알았겠지. 데몬스폰의 유골과, 거기 남아 있던 신의 유지. 즉 아나테마가 된 데몬스폰을 사용해서 만든 인공의 신일세. 의지를 잃은 신의 힘과 악마의 육을 합쳐서 만들었기에, 이 신은 내 의지에 복속해서 움직인단 말이야. 놀랍지 않나? 드디어 인간의 진보는 신의 영역을 넘보는 단계에 들어섰단 말일세!"
아잘록의 말을 귀르겐은 듣고 있지 않았다. 머리, 허리, 다리. 어느 쪽을 후려치는게 더 좋을까, 고민하고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자신의 말에 들뜬 아잘록은 한 발자국, 발걸음을 내딛으며 말했다.
"그런데 이 녀석은 안타깝게도, 실패작일세. 만들고 보니 여러 가지 생각지도 못한 문제점이 있더군. 나는 절망했다네. 아나테마의 힘을 가진 데몬스폰, 그런 말도 안 되는 존재가 어디에 또 있단 말인가?"
귀르겐은 움찔했다. 아잘록의 단안경에 자신이 비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깊게 고민해보니 하나 있더군."
"나 말인가?"
"어때, 같이 영광스러운 진보에 동참해 볼 생각은 없나."
손을 내뻗는 아잘록. 그러나, 귀르겐은 거기에 동참할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 그저 천갈궁의 힘을 끝까지 끌어내어서, 할 수 있는 최선의 일격을 가할 뿐이었다.
쾅!
거대한 폭음. 그리고 귀르겐의 몸이 폭발적으로 굽혀졌다가 튀어오르며, 아잘록의 머리를 노린다. 참랑격, 은랑왕의 심장을 부쉈던 그 일격이었다. 이 공격의 무서운 점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귀르겐이 나아가는 도중, 그의 몸에서 그림자가 분리되어 다른 방향으로 검을 내뻗기 시작했다. 천갈궁의 힘으로 만들어진 그림자 분신은 하단을, 귀르겐은 상단을 노리고 동시에 참랑격을 시전한 것이다.
"안타깝게 됐군."
그러나 그 두 번의 일격은 너무도 쉽게 가로막혔다. 헤카톤 케이레스가 갈라아이의 쌍검을 내뻗어 위 아래의 일격을 동시에 막아냈던 것이다. 귀르겐은 멈추지 않고 그림자를 부렸다. 그림자는 몸을 곧추세우고, 쌍검의 사이에 서 있는 아잘록의 얼굴을 향해 달려들었다. 푹, 그 얼굴을 찢어발기고 천갈궁이 박힌다. 그러나 찢긴 줄 알았던 아잘록은 너울거리며 사라졌다.
"무슨?"
그리고 정신을 차렸을 때, 그는 이미 귀르겐의 뒤에 서 있었다. 아잘록은 귀르겐의 뒷목을 잡고 들어올렸다.
"깊이, 그렇지, 깊이. 내 눈을 바라보게나."
목을 붙잡힌 순간, 엄청난 양의 마력이 그 붙잡힌 목을 타고 들어와 온 몸이 타는 듯 아팠다. 귀르겐은 눈을 부릅뜨고 아잘록을 쳐다보았다. 그의 눈동자는 어둡고도 깊었다. 그것은 자신을 꿰뚫어보는 듯이 느껴졌다. 그 거울면 같은 눈동자 위로, 자신의 얼굴이 비쳤다.
"이제야 알겠군. 자네는 겁이 많아."
아잘록의 말에 귀르겐은 숨이 턱 막혀오는 것을 느꼈다. 귀르겐의 영혼을 세밀히 들여다본 아잘록은, 귀에 무언가를 새겨넣듯이 또박또박 중얼거렸다.
"사실 여왕은 스스로 희생한 게 아니었군?"
귀르겐이 정신을 잃었을 때, 여왕은 자청해서 죽으러 떠나지 않았다. 외신의 결계를 유지해야만 했던 교구가 그녀를 강제로 납치했으며, 여왕은 이 곳에서 마지막까지 귀르겐이 자신을 구하러 올 것이라 믿고 기도하다가, 칼을 맞았다.
이 섬에 찾아온 지 10년이 지났을 때, 귀르겐은 우연히 그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는 제국을, 불가피한 희생을 강요하는 이 세계를 마음 깊이 증오했다. 하지만 그것을 드러내지 못했다.
"이 세계 전체와 맞서 싸울 용기가 자네에겐 없었어."
그리고, 그를 존경한다며 멋대로 선망에 찬 눈길로 다가오는 성기사들을 내버릴 수 없었다. 짊어진 죄의 무게로 신음하고 있으면, 그들은 멋대로 자신을 이해했다고 착각했고 멋대로 존경했고 멋대로 눈물겨워했다. 귀르겐은 숨이 막혀오는 것을 느꼈다. 자신의 어깨 넓이까지, 독이 차오르는 듯한 기분이었다. 아잘록은 그 머리를 쓰다듬으며 조용히 선언했다.
"결국 인간에게 소통은 불가능하며, 모두는 각자의 세계 안에 갇혀 있는 것일세."
뒤에서 산양이 길게 울부짖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아잘록은 말했다.
"그렇다면, 타인을 사물처럼 여기는 삶이야말로, 진보의 끝 아니겠는가."
그 말을 마지막으로, 아잘록은 귀르겐을 붙잡은 손을 놓았다. 쿵! 커다란 소리와 함께 귀르겐은 바닥을 굴렀다. 그는 가슴을 부여잡고 긴 괴성을 내질렀다. 그의 등에, 그리고 앞가슴에, 기다란 갈비뼈가 돋아나고 있었다. 귀르겐을 붙잡은 아잘록이, 그 역시 산양과 같은 인공의 신으로 만들려 시도했던 것이다.
"ㅡㅡㅡㅡㅡㅡㅡㅡ!!!"
그리고 아잘록은 자신의 창조물을 보고 고개를 저었다.
"실패군. 절망의 깊이가 그다지 깊지 않았던 모양이야."
끝없이 돋아나는 뼈와 함께 울부짖는 귀르겐을 뒤로 하고, 아잘록은 천천히 섬 밖으로 걸어나가기 시작했다. 그의 눈에 흐붓한 달빛이 비쳤다. 섬 위로 길게 늘어진 달빛은, 다음 행선지를 묻고 있는 듯했다.
"역시, 나하트 칼벨레인. 그가 남긴 실험체를 찾아내는 수밖에 없나."
그는 조용히 중얼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