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메이지 슬레이어-156화 (156/279)

29. 겁쟁이 ( 1 )

여왕의 써클릿을 챙겨서, 랭 교구에 도착한 아이와 에바는 난관에 봉착해 있었다.

"어떡하지?"

수로 위, 에바는 아이의 눈치를 보면서 검지를 맞대고 꼼지락거리고 있었다. 이 도시는 물 위에 세워진 도시여서, 목적지에 찾아가려면 배를 빌려야만 했다. 그런데 에바의 고집으로 수상쩍어 보이는 배를 빌렸고, 그게 수로 한 가운데서 고장이 나서 두 사람은 물 위에 갇힌 상태였다. 그 결과 두 사람은 인근의 말뚝에 로프를 걸고 구조를 기다리는 신세였다.

"나, 나 수영 잘하는데. 잠수해서 뒤에서 배 밀까?"

아이는 눈을 가늘게 뜨고 지긋이 에바를 바라보았다. 굳이 하고 많은 배 중에서 이 배를 고른 이유는, 이 배가 특이하게 생겼기 때문이었다. 이 배는 전체적으로 노란 새끼오리를 닮았고, 에바는 눈을 빛내면서 이걸로 빌리자고 주장했다. 나아갈 때마다 목을 꺾고 들어올려서 물을 마시는 흉내를 내는 기능까지 있었다. 그런데 세 시간도 지나지 않아서 목은 꺾인 채 영영 돌아오지 않았다.

"한 대만 맞자."

그렇게 말하자 에바는 앞머리를 걷어올리고 이마를 들이댔다. 딱, 중지가 이마를 세게 통타했다. 에바는 과장되게 뒤로 넘어지며 이마를 부여잡았다.

"엄살 떨지 마."

벌떡 몸을 일으키는 에바. 그 바람에 배는 출렁거렸다. 그 때였다.

"어이 거기! 아가씨들! 곤란한 모양이야?"

커다란 삿갓으로 얼굴을 가린 사람이, 노를 저어 다가오며 말했다. 에바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 배를 바라보았다. 예전의 아이라면 모를까, 지금의 아이는 먼발치에서 보아도 여자로 오인할 리가 없는데. 그는 아이와 에바 옆에서 노를 멈추고 말을 걸어왔다.

"그 깜찍한 배는 뭐냐?"

햇빛은 삿갓을 타고 미끄러져서 물결 위에서 눈부시게 흔들렸다. 가까이 다가오자 삿갓 아래로 드러난 그 얼굴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익히 아는 얼굴이었다.

"당신!"

그건 마레였다.

기나센에서 떠나올 때, 이미 아탕칼리는 귀르겐과의 만남을 승인했다. 적극적으로 나서서 돕겠다고까지 했다. 마레와 아셀라이의 일 이후로 그들은 지속적으로 호의를 보여왔다. 아이는 아직 그 이유를 알 수 없었고, 그래서 긴장했다.

또 그들은 아이가 무사히 도착할 수 있도록 안내인을 파견한다고 했는데, 그게 마레였던 것이다. 몇 달 만에 마레는 인상이 달라져 있었다. 담배를 끊은 것인지, 혈색이 건강해 보였고 드문드문 갈색으로 탄 자국이 보였다. 아마도 이 반도의 강렬한 태양 아래서 생활한 흔적인 듯했다.

"그쪽의 아가씨하고 빨리 타라고."

마레는 씩 웃으며 아이의 손을 붙잡았다. 손 너머로 건장한 사내의 힘이 끼쳐왔다. 그 손을 붙잡고, 아이는 망가진 오리 배에서 흰 빛으로 빛나는 나무배 위로 옮겨탔다. 출렁, 물결이 흔들리며 오리의 목이 운하 깊숙이 쳐박혔다.

*

마레는 우선 낯선 건물로 두 사람을 인도했다.

"그간 어떻게 지냈어요?"

그 질문에 마레는 답하지 않았다. 그저 문을 열어젖힐 뿐이었다. 그러자, 그 뒤에서 여러 꼬마들이 빼꼼 머리를 내밀었다. 이 건물에서, 아마도 마레는 자신이 대부를 맡은 아이들과 함께 생활하고 있던 모양이었다. 마레는 씩 웃으며 뒤돌아보았다.

"애 돌보기를 조금 하고 있었지."

네가 구해준 아이들이다. 그런 말을 덧붙였다. 그 중에는 유난히 눈이 반짝거리는 아이도 있었다. 그 말을 듣더니, 쪼르르 아이에게 달려와 올려다보며 물었다.

"이 오빠가 그 항상 말하던 그 오빠에요?"

엘레나, 예전에 마레의 목숨을 구한 편지를 썼던 꼬마였다. 그 말뜻인즉슨 굉장히 예의바른 꼬마라는 뜻이기도 했다. 그녀는 확인을 구하지 않고 꼬박 고개를 숙였다.

"정말 감사합니다!"

어째서일까, 몇 달 되지 않은 일인데도 굉장히 먼 옛날의 일처럼 거리감이 느껴져서 아이는 쑥스러웠다. 그 틈에 눈높이가 맞는 사람이 나섰다. 에바는 무릎을 굽히고 다가서서, 함박웃음을 지으며 엘레나를 마주보았다.

"안녕! 몇 살이길래 이렇게 똘똘하니?"

그리고는 멋대로 엘레나의 볼살을 주물거리기 시작했다. 사방에서 웃음이 터졌고, 문간에 서 있던 사람들은 차례로 안쪽으로 들어섰다.

집 안은 쾌적했다. 마레 혼자 돈을 대는 영세한 고아원이라고는 믿기 힘들 정도였다. 너와 만난 이후로 많은 지원이 있었다고 마레는 살짝 귀띔해주었다. 멀리서 온 손님이 신기했는지, 아이와 에바는 얼마 안 가 수많은 아이들에게 포위된 상태가 되었다. 문득 가슴이 뭉클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북서 자치령에서 헤맸던 시간이 없었더라면, 결코 없었을 광경이 눈 앞에 펼쳐져 있었다.

코를 흘리면서 엉겨붙는 꼬마를 다정하게 쓰다듬는 아이를 보며, 마레는 피식 웃었다.

"역시 달라진 게 없군. 그럴 줄 알았지만."

그 순간 눈 앞에 환영이 스쳐 지나갔다. 혀를 길게 빼문 채 매달린 총관의 모습이었다. 아이의 얼굴에 일순 몰려왔다가 사라진 수심을 아는지 모르는지, 마레는 태연하게 책을 읽으며 시간을 기다렸다.

아홉 시가 넘자 아이들은 하나둘씩 잠을 자러 떠나갔고, 에바도 크게 기지개를 키더니 흔들리며 잠자리로 떠나갔다. 둥근 탁자에는 아이와 마레만이 남았다.

"할 말이 있으신가요."

아이는 눈치로 알 수 있었다. 굳이 이런 장소에서 먼저 만나도록 한 것, 마레를 굳이 접선인으로 택한 것. 아탕칼리가 무언가 비밀스럽게 전할 부탁이나 말이 있는 것이 틀림없다고 느껴졌다. 하지만 마레는 자리에서 일어서더니, 사탕이 가득 들어있는 병을 가지고 돌아왔다. 까드득, 사탕 하나를 깨물면서 마레는 그 후 자신에게 있던 일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자치령에서 돌아온 뒤, 나는 성인을 접견했다."

대성당에서 검을 뽑았던 이야기였다. 그 검 뒤에 숨겨진 아우렐리우스의 이야기까지, 마레는 숨김 없이 털어놓았다. 그리고 그 뒤 교단이 자신을 대하는 대접이 완전히 달라졌음을 말했다.

"지금은 낮에는 이렇게 아이들과 소일하면서, 다시 학문의 길을 걷고 있어."

학문. 마레는 사탕을 씹으면서 그 단어를 좀 더 깊게 발음했다. 아탕칼리의 본분은 학문의 연구에 있었다. 그들의 신인 아탕칼리는 스스로를 신으로 여기지 않았고, 그래서 그들의 신도가 신 없이도 삶을 완성하는 것을 좋아했다. 태초에 그 수단은 학문을 수양하는 것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긴 시간이 지나면서 교조성과, 광신과, 권위가 겹쳐지며 원래의 전통은 더럽혀졌고, 여느 교단처럼 세속의 세력이 되고 말았다...

"그리고, 성인께서는 그 검을 뽑은 나를 필두로, 다시 학문의 전통을 부활시키려고 하고 있다 이거지. 이야, 나름 대단한 개혁 아닌가?"

이전투구의 장이 되어버린 수도원을 정화하고, 복원하는 것이 마레에게 내려진 사명이었다.

"그래서요, 이번에는 잘 하고 있나요?"

아이는 조용히 물었다. 마레는 피식 웃으며 가슴을 몇 번 더듬었다. 아마도 무의식적으로 담배를 찾는 모양이었다. 없다는 것을 깨달은 그는 크게 뒤적거리며 병 속에서 사탕을 꺼냈다. 그리곤 아이를 바라보며 툭 말했다.

"네 덕분에."

"예?"

마레는 담담하게 말을 이어갔다.

"예전에, 내가 장서관에 있었을 때. 나는 매일같이 내 동포를 사랑하라는 말을 암송하면서도 세상을 믿을 수가 없었다. 나는 매일 세상의 모든 추한 면모를, 문자로 재현하는 게 거부된 비극들을 바라보고 먹칠을 하는 삶을 살고 있었으니까."

이전에 책을 쓸 때에는, 그런 비관에 사로잡힌 상태였다. 그 책은 세상의 무내용함과 부조리를 비판할 뿐, 무언가 창조적인 대안을 만들어내지 못했다.

"하지만 이젠 할 수 있을 것 같아."

정말로 각자의 사람들이 누구의 도움도 없이 자신의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그들을 상냥하게 품는 세계를 만들 수 있도록, 그런 믿음과 소망을 가지고 지식을 연구할 수 있게 되었다.

인간의 선의를 믿을 수 있게 되었으니까. 마레는 그렇게 말하며 아이를 바라보았다. 마레는 아이를 보고 그렇게 세계관이 뒤바뀐 모양이었다. 오묘한 기분이었다. 눈 앞의 사내는 씨익 웃고 있었다.

"뭐, 그래서 요즘엔 매일 책 읽고, 책 쓰고, 수도원의 허섭스레기들과 편지로 다투고, 그런 삶만 반복하고 있다 이 말이지. 그래서 마음은 예전보다 고되지만 행복해."

행복하다. 그 말을 들은 아이는 가슴 속에서 무언가가 울렁거리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간신히 쥐어짜내 대답하고 자리로 돌아갔다.

"다행이에요."

"고맙다."

문을 닫고 방에 들어가 누웠다.

어둠 속에서 웅크린 아이는 조용히 중얼거렸다.

"림, 있어?"

마치 먼 옛날의 어린아이같은 어조였다. 창문으로 스미는 달빛을 맞으며 림은 모습을 드러냈다.

'왜 그러느냐, 어린 순례자야.'

"내가 정말로, 무언가를 이 사람들한테 건네준 걸까?"

아이는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림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림은 그저 아이를 들여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렇게 말하는 얼굴은, 여러 수라장을 건너오며 보여주었던 강인한 얼굴이 아니었다. 아나테마가 되기 전, 노예의 천막에 누워서 무의미한 질문을 던지던 모습에 더 닮아 있었다.

"저 사람은 나 덕분에 세상을 믿을 수 있게 됐다나봐."

그런데 지금의 아이는, 북서 자치령에서의 자신을 마냥 긍정할 수 없었다. 마레가 말하는 아이와, 지금의 자신은 연관이 없는 타인처럼 느껴졌다. 지금의 지식을 가지고 그때로 돌아갔을 때, 자신이 똑같은 선택을 할 것인가. 어떤 희생도 부정하고 이상적인 결말을 위해 억지를 부릴 수 있을 것인가...

"뭐가 나지?"

'그게 무슨 소리냐?'

"어제의 나는 나와 같은 사람이 맞는 걸까... 어제의 나로부터 무엇이 이어졌고 무엇이 끊어져서 지금의 내가 된 걸까."

'이 먹물로 가득한 땅에 온 영향인가. 또 꼬마 철학자가 되고 말았구나, 어린 순례자야.'

아이는 피식 웃었다. 이윽고 블로어를 불러내어, 그 단단한 손잡이를 쥐어잡고 눈을 감았다. 눈꺼풀 너머의 어둠, 그 아득한 지평 너머에서 멸망의 환영이 어른거렸다. 그 환영이 분기점이었다. 과거의 자신과, 지금의 자신을 갈라놓는 분기점.

이 검을 쥐었을 때, 아이는 너무나 많은 멸망과 몰락을 보았다.

가난한 자들을 버리지 못해서 역병으로 나라를 몰락시킨 왕을 보았다.

불가능한 평화를 관철하다 세상의 멸망을 앞당긴 영웅을 보았고,

멸망을 앞에 두고서도 눈 앞의 이익으로 사분오열하는 사람들을 보았다.

어설픈 이상론을 견지하는 영웅들이 결국 비극의 영웅이 되고 마는 것을 수도 없이 보았다.

너무나 버거운 적들이 세상의 끝에서 몰려오고 있었다.

그 앞에서, 만용과 이상론은 개인의 고결함을 지키고자 세계를 희생하는 악덕으로 보였다.

'그래서 그 계집의 말을 따랐던 것이냐.'

륜을 말하는 듯했다. 아이는 뒤척이며 림의 말을 들었다. 그 말대로였다. 그래서 희생자를 용인했다. 무릎을 꿇고 엎드려 비는 늙은 가주를 죽였고, 총관에게 누명을 씌워서 장대에 매달았다. 예전의 아이라면 하지 않았을 행동들이었다. 총관의 시체를 땅에 내렸을 때, 그는 죽은 눈으로 말없이 자신을 들여다보았다. 그 눈에 비치는 자신은 소름끼치도록 낯설었다.

그런데 마레의 눈동자에 비치는 자신은, 예전의 모습처럼 보였다. 아마도 이미 잃어버린 과거의 자신이 마레 속에서는 살아 숨쉬는 모양이었다.

'그래서, 그 남자는 자기가 말한 걸 해낼 수 있을 것 같나?'

"해낼 거야."

아이는 중얼거렸다. 마레는 분명 자신 안의 무언가를 보고 힘을 얻었다. 이 세상을 더 풍요롭게 만들 무언가를 건설해낼 수 있을 거라고, 아이는 생각했다. 하지만 그 생각의 끝자락에서 어떤 불안과 슬픔은 밀려들어왔다. 마레가 보았던 그 무언가는, 이미 이 검을 쥐어잡은 후부터, 자신 안에선 소멸해버린 것 아닌가.

총관이 죽던 밤, 밤새 이런 고민으로 뒤척였다. 눈을 감으면 여러 얼굴이 어른거려서, 도저히 잠을 잘 수 없었다. 오늘은 자장가를 불러줄 륜도 없었다. 결국, 아이는 아침이 되어서야 얕은 잠에 빠져들었다.

눈을 떠 보니 정오였다. 이불 속에서 도롱이벌레처럼 웅크려 자고 있는데, 누군가가 이불을 확 빼앗았다.

"윽, 잠시만, 조금만 더..."

겨우 찾아온 수면에서 깨고 싶지 않았다. 깨어 있는 모든 시간은 어지러웠다. 그 떄, 누군가가 배시시 웃으며 꺼낸 말이 귓전에 울렸다.

"오빠, 게으름뱅이구나?"

엘레나였다. 눈을 뜨고 자리에서 일어난 아이는 부스스한 머리로 한참이나 침대 위에 앉아 있었다. 이 작은 고아원은 작은 만큼 따뜻했다. 이불 밖으로, 다시 정답 없는 세상의 바다로 몸을 던지고 싶지 않았다. 아이는 처음으로, 한번도 느껴본 적 없는 것이 자신의 몸 속을 타고 도는 것을 느꼈다.

무기력, 게으름, 힘겨움. 다시 이불을 덮고 잠들고 싶은 욕망. 그런 것들이었다.

"그래서 그랬구나."

조용히 중얼거렸다. 한 걸음 더, 륜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

다음 날, 두 사람을 배웅하며 마레는 말했다.

"자. 여기서 내려서 쭉 걸어가면 부두다. 부두에서 널 기다리고 있을 거다."

모래가 섞인 흙과 소금기가 스민 바람이 몰아치는 곳이었다. 두 사람을 태우고 직접 노를 저어 배를 몰고 온 마레는 지금도 삿갓을 쓰고 있었다. 삿갓에 가려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아마도 미소를 짓고 있을 것 같았다.

"잘 해내라. 그동안 더 강해졌겠지? 너라면 충분히 성좌가 되고도 남을 거다."

"당신도 힘내세요."

그것 말고는 해줄 말이 없었다. 에바가 먼저 짐을 가지고 뛰어내렸고, 아이는 머뭇거리며 늦게 내려섰다. 머뭇거리며 아이가 뒤돌아섰을 때, 마레는 조용히 말했다.

"그리고, 성좌가 되고 나면 대성당으로 와라. 성인께서 기다리실 거다."

아이는 번쩍 고개를 돌렸다. 다른 사람들이 들어서는 안 되는 말인지, 마레는 모른 척 노를 저어서 멀어지고 있었다. 성인, 성인이라. 아마도 그 면담이 지금까지 아탕칼리가 보여온 호의의 이유가 될 지도 모르겠다고 아이는 생각했다. 그 말의 의도와 본 적 없는 아우렐리우스를 상상하며, 이미 저만치 나아가서 손짓하는 에바를 따라 발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부두에서 예상치 못한 소식을 듣고 얼어붙고 말았다.

"그림자 섬으로부터 연락이 끊겼다구요?"

성기사와의 대련 도중, 비바람을 뚫고 찾아온 전령은 불길한 소식을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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