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메이지 슬레이어-162화 (162/279)

30. 목적 ( 3 )

기나센으로 돌아가는 마차는 풍성했다.

수많은 사람들이 수많은 선물을 챙겨 주었기 때문이었다. 화환부터 말린 과일, 레몬 파이 묶음, 옷감, 귀해 보이는 술 등등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한 아름 선물을 들고 찾아온 랭 교구의 시민들은 줄지어 악수를 청하거나, 뺨에 입을 맞추고 사라졌다. 운집한 인파 사이에서 마차는 겨우 겨우 자신의 갈 길을 찾아 움직였고, 떠나는 순간까지도 차창을 두들기며 초콜릿이나 과일 따위를 전해주려는 손길이 가득했다. 어색하게 그 인파에게 손을 들어 화답하면서, 아이는 먼발치를 바라보았다.

"아."

구름처럼 많은 사람들 때문에 멀찍이 서 있는 사람이 보였다. 붉은 옷의 남자였다. 어깨에 자그마한 아이를 무등 태우고 있었고, 멀리서도 알아볼 수 있었다. 마레였다. 올라탄 엘레나는 두 팔을 활짝 벌려 흔들며 인사를 하고 있었다. 인사하려고 손을 들자, 엉뚱한 사람이 기뻐서 펄쩍 뛰었다. 그의 몸짓에 차창이 가렸고, 다시 차창이 드러났을 때 마레와 엘레나는 사라져 있었다.

몇 시간이 지나서야 인파의 행렬을 빠져나올 수 있었다. 해가 저무는 언덕 위로, 구불구불 뚫린 길을 따라서 마차는 달렸다. 땅거미가 내려앉을 때, 마차 천장에 매달린 등롱에 불을 밝혔다. 따뜻한 색조의 빛이 둥그렇게 퍼져나갔다. 에바는 그때까지도 차창에 매달려서 풍경을 바라보았다. 입은 함박웃음이었다. 그녀의 목에는, 금빛 찬란한 훈장이 매달려 있었다.

"이거 봐!"

배시시 웃으며 에바는 훈장을 내밀었다. 에바가 없었다면 그림자 섬에서 살아돌아올 수 없었노라고, 네이슨이 솔직하게 보고해서 그녀에게 내려진 훈장이었다. 에바는 입이 귀에 걸리도록 웃고 있었다.

"부럽지? 부럽다고 솔직하게 말하면 한 번 만지게 해 줄 수도 있는데."

아이는 피식 웃으면서 으스대는 에바를 바라보았다. 에바는 지금까지 타인에게 조종당하는 삶만을 살아왔다. 자신의 판단과 자신의 힘으로 선한 일을 하고, 이렇게 칭찬을 받은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래서 에바는 저 자그마한 2등 훈장이 그렇게 자랑스러운 모양이었다.

"에바."

"응?왜?"

싱글벙글 웃으며 다가온 에바는 아이의 얼굴을 보고 표정을 가라앉혔다. 아이가 어딘가 슬픈 듯한, 또 진지한 듯한 얼굴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또, 내가 개입해야 하나. 아이는 랭 반도로 떠나오기 전 륜이 건넨 조언을 떠올리고 있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에바를 사로잡으라고 했었고, 자신은 거부했었다...

"들려줄 말이 있어."

"그, 그렇게 분위기 안 잡아도, 구경하게 해 줄려고 했는데..."

"그런 게 아니야."

아이는 고개를 젓고 에바의 어깨를 붙잡았다. 이렇게 가까이서 아이와 얼굴을 마주한 적이 없었던 에바는 얼굴을 붉게 물들였다. 얼마 전, 그림자 섬에서 입술을 맞대고 약을 흘려넣을 때가 떠올랐다. 도리도리 고개를 젓는 에바에게 아이는 충격적인 사실을 늘어놓았다.

"지금 이 세상은 멸망할 위기에 놓여 있어."

에바의 얼굴이 당혹으로 물들었다. 하지만 아이의 말은 멈추지 않았다. 아이는 곧, 자신이 륜과 만나고 알게 된 모든 사실을 들려주었다. 조디악이 에바를 굳이 길러낸 것도, 아껴온 것도 어떤 이유였는지 전부 들려주었다. 에바의 얼굴은 당혹과 혼란으로 물들었다. 얼마 전의 자신과 똑같은 모양새였다. 아이는 에바의 봉곳하게 솟은 어깨를 더욱 세게 움켜쥐고, 진지하게 말했다.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 지 모르겠다고 했지? 그럼 부탁할게. 앞으로도 나를 따라줘."

에바는 어떻게 대답해야 할 지 몰라 침묵했다. 아이는 이를 악물었다. 그렇게 얼마나 있었을까, 무의식적으로 어깨를 움켜쥔 손에 힘이 너무 들어갔던 모양이었다. 에바는 작은 신음을 흘렸다.

"아파..."

"아."

에바의 양 어깨엔 빨갛게 손자국이 남아 있었다. 에바는 팔짱을 끼듯 양 어깨를 움켜쥐고 부르르 떨었다. 아이가 사과를 건네자 휙 돌아서더니, 밀짚 침낭 위에 움츠리듯 드러누웠다.

"난, 난 잘 모르겠어. 일단, 생각할 시간을 좀 줘."

갑작스레 마주한 진실 때문에 그 등은 움츠러들어 있었다. 아이는 한숨을 쉬고 마차의 구석으로 걸어가 앉았다. 흰 천으로 감싼 천갈궁을 두 팔로 감싸안고 머리를 기댔다. 검날의 서늘한 감촉이 이마 가득 번져왔다. 잘한 일일까, 에바를 완전히 여기에 끌어들이는 것이. 하지만 잘한 일일지, 못한 일일지는 이제 도덕으로 판단할 일이 아니었다, 해야만 하는 일이었다... 눈을 감은 아이는, 아우렐리우스와의 만남을 되새겼다.

자신을 어포슬의 수장이라고 밝힌 아우렐리우스는 이어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십자군에서 돌아와 성상에 검을 꽂아넣었을 때, 그는 아탕칼리의 형상을 꿈에서 보았다. 그리고 그에게서 충격적인 예지를 들었다. 7위계의 마술사가 등장함과 동시에 멸망이 다가오리라는 예지였다. 그 이후 그는 자신의 신분을 활용해 예지와 미래의 구조에 대해 깊이 공부했고, 그 예지를 바꾸기 위해선 아나테마가 필요하다는 사실도 깨달았다.

마침 아탕칼리는 아나테마를 숙청하고, 재판에 부칠 권한을 위임받은 집단이었다. 각고의 노력 끝에 그 정상에 오른 아우렐리우스는 그 멸망을, 멸망의 운명을 바꿀 시간을 기다리고 있었다.

"내 가장 무서운 적은 시간이었지."

그 말과 함께 아우렐리우스는 자신의 등을 보여주었다. 노인답게 비쩍 마른 등이 드러났다. 겨울 산을 닮은 등이었다. 그 한 가운데에는, 난해한 성흔이 새겨져 있었다.

"이건 계약일세. 죽어서 영원히 안식하지 못하고, 천사가 되어 영원히 주에게 봉사하는 것을 대가로, 나는 삼십 년의 시간을 더 얻었지."

그래서 그는 순수한 인간임에도 그렇게 장수할 수 있었던 것이었다. 그 수명 연장의 조건에는 예지를 막기 위해 살아가겠다는 것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 목적을 벗어난 사사로운 이익을 위해 움직일 경우, 이 성흔이 불타올라서 나는 바로 소천하게 되어 있다네."

옷을 다시 입으며 아우렐리우스는 말했다. 이것으로 그의 신용은 완벽히 증명된 셈이었다. 아이는 문득 눈 앞의 노인이 실제 키보다도 더욱 거대하게 보였다. 아우렐리우스는 성상의 검에 꿰뚫린 자국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그리고 긴 시간동안, 아나테마는 나타나지 않았지. 오랫동안 그 멸망의 예지가 시작되기를, 어느 날에는 시작되지 않기를 기다리던 나는 어째서 멸망이 도래하게 되었는지, 그 구조를 깊이 연구했다네."

그 멸망의 원인은 마술이었고, 신앙을 마술로 오도해 세워진 제국이었다. 아우렐리우스는 아나테마가 아니었고, 정해진 운명을 바꿀 힘이 없었다. 그러니 그는 자신의 역할을 준비했다. 이 멸망을 막아내고 나면, 다시는 비슷한 위기가 찾아오지 않도록, 제국을 해체하는 것이 그의 역할이었다.

"신들은 저 천상에서 신들끼리 싸우라고 내버려 두고, 인간의 터전에서 인간이 살아가는 세상을 만드는 것. 아마도 그게 주께서 진정으로 우리를 인도하고자 하는 방향이라고 나는 믿고 있다네."

이 땅에서 마술의 중요성이 줄어들고, 사람들이 마술이 아니라 자신들의 이성과 힘으로 만들어낸 세계에서 살게 되면, 더 이상 세계의 존망 같은 신화적인 문제는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그게 아우렐리우스의 진단이었다. 마레는 이 성상에서 검을 뽑아들어서 자신의 진단이 옳음을 증명했다. 마레와 학자들이 연구해서 만들어나갈 인간의 세계에서, 더 이상 이런 거대한 전쟁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성상의 텅 빈 자국을 문지르며 아우렐리우스는 그렇게 중얼거렸다.

"그래서 나는 비슷한 목적으로 움직이던 어떤 단체에 접근했지."

"그게 그 어포슬이란 단체입니까?"

"그 당시에는 조금 다른 이름이었어. 사도들(Apostles)이라는 늙은이 취향의 이름을 누가 지었다고 생각하나?"

피식 웃으며 악수를 건네는 아우렐리우스. 아이는 그 손을 붙잡았다. 늙었어도 쇠하지 않은 강인한 힘이 손바닥을 통해 전해져왔다.

"그리고 사도들은 마지막 사도를 기다리고 있다네. 사도들은 결국, 사람의 운명에서 벗어나지 못할 보통 사람들이야. 지금 이 위기는 신앙의 왜곡에서 비롯된 것일세. 그 위기를 막아줄 사람은, 신의 운명을 받은 인간이 되어야 하지 않겠나."

그 말은 완곡하게 아이의 가입을 권하고 있었다. 아이는 입술을 세게 깨물었다. 얼마 전, 호노레가 제국의 재건만을 이유로 가입을 권해왔을 때 아이는 거절했다. 하지만 아우렐리우스의 제안은 더 깊은 사정을 담고 있었다.

신앙을 도구로 사용하는 현 제국의 구조는, 절망한 관념의 숫자, 외신의 숫자를 늘릴 수밖에 없고, 고로 멸망은 필연적으로 다가온다. 그러니 우선 멸망을 막아내야만 하고, 제국을 재구성해야만 한다. 이 이론은 관념과 말로 이루어진 호노레의 이론보다 절박했고 또 실천적이었다. 젊은 날 외신과 칼을 맞대고 싸운 끝에, 절망해서 돌아왔던 아우렐리우스의 경험이 그 이론에는 녹아 있었다.

그렇다면 이에 함께할 것인가. 하지만 아이는 순진하게 여기서 고개를 끄덕일 수 없을 만큼 많은 것을 겪은 상태였다. 아이는 조용히 물었다.

"그러기 위해선, 어떤 수단이든 허용됩니까."

신 없는 세상에선 모든 것이 허용된다, 그 문구가 떠올랐다. 나사렘 근처의 마을에서 보았던 것이었다. 아우렐리우스는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끄덕임 뒤로, 혀를 길게 빼물고 죽은 총관의 환영이 어른거렸다. 아이는 침묵했다. 눈 앞의 노인은 과연 성인이었지만, 그 총관을 위한 성인은 아니었다. 아우렐리우스 역시도 그의 죽음을 긍정하고 있었다. 그 침묵 앞에서 아우렐리우스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자네도 참 지독한 시대에 태어났군. 평화로운 시대에 태어났더라면, 그래, 시인이 되었을지도 모르겠어."

"시인, 말인가요."

"그래. 우습겠지만 내 꿈도 시인이었다네."

메마른 웃음을 흘리더니 무언가를 꺼냈다.

"그럼 좀 더 구체적인 제안을 내세워 볼까. 예지에서 멸망은 어떤 마술사가 7위계에 오름으로써 시작된다고 했었지. 아마도 그건 아지프의 마술사일 게야. 나는 자네의 손으로 이 자들을 모두 죽여주길 원한다네."

그건 자료였다. 현재 세 명 존재하는 아지프의 6위계 마술사, 그들의 신상명세가 기록되어 있었다. 이들이 아마도 아이가 최우선으로 죽여야 할 세 명의 적일 것이었다. 학장, 서부 마탑의 탑주, 그리고,

"이, 이 자는."

아이는 눈을 크게 떴다. 익숙한 얼굴이 눈에 보였기 때문이었다. 귀르겐의 환영에서 보았던 자였다. 그의 무감정한 광기와, 재미있는 것을 말하는 듯한 어조가 귀 저편에서 울려댔다. 자료를 내려놓던 아우렐리우스는 역시 그렇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그런가. 자네의 말을 듣고, 나는 예언에서 말하는 재앙이 바로 이 자일 거라고 반쯤 확신하고 있었다네. 귀르겐을 그렇게 만든 게 이 자인가?"

그는 길 아잘록이었다. 아이는 정신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림에 그려진 그 이상한 미소로부터 얼굴을 뗄 수가 없었다. 머릿속이 가려웠다. 귀르겐의 섬에서 보기 이전부터, 이 사람을 봤던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 기분은, 아우렐리우스가 내준 다음 자료를 보고 확신으로 변했다.

"이 자는 이런 괴물을 수하로 부리고 있다네. 카나기의 학장은 이미 그가 7위계에 이르렀을 거라고 내게 말하더군."

그건 헤카톤 케이레스였다. 그리고 그 가슴팍에는 여성의 형상이 그려져 있었다. 도저히 잘못 볼 수 없는, 또 잊어버릴 수도 없는, 그런 형상이었다.

"쿨럭."

다시 마차 안에서, 아이는 두통을 느끼며 헛기침을 했다. 어느새 선잠이 들었던 모양이었다. 시일이 촉박한 탓일까, 마차는 잠든 두 사람을 태우고도 달리고 있었다. 어둠이 깔린 숲의 풍경이 차창 너머에서 유령처럼 빠르게 달려나갔다. 흐린 차창에 설핏 비치는 자신을 들여다보며, 아이는 조용히 중얼거렸다.

"단장님..."

그 헤카톤 케이레스의 가슴에 매달린 것은 란페이 우르드였다. 그 순간 아이는 모든 것을 떠올렸다. 길 아잘록이라는 이름도, 그가 레이븐사이드에게 했던 짓도. 아우렐리우스는 부들부들 떠는 아이를 바라보며, 이 자를 죽여야만 그 여인의 영혼이 안식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 말했고, 다시 한 번 어포슬에 들어올 것을 권했다. 다음 순간 아이는 맹세하고 있었다. 맹세할 수밖에 없었다. 어포슬에 들어갈 것을.

"잘한 거겠죠."

아이는 입술을 깨물었다. 연한 입술은 이빨을 이겨내지 못하고 터져서 피가 흘렀다. 그 핏내와 아픔 속에서, 아이는 오히려 머리가 시원해지는 것을 느꼈다. 여러 목적, 방향 없이 여러 각도로 틀어진 삶의 목적들이 드디어 하나의 대적을 향해 모이는 기분이었다.

길 아잘록, 그 자를 죽인다.

세상의 구원도, 자신의 복수도, 삶의 의미도. 그 연후에야 성립될 수 있는 것이었다. 그 생각을 하면 자신을 괴롭히던 환영과 죄책감이 멀어지는 것을 느꼈다. 흘끗 고개를 돌려보니, 에바는 아직도 웅크려 자고 있었다. 륜의 조언대로, 에바를 끌어들이려 한 것도 결국 그 그림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아이는 이제 정말로, 모든 수단을 사용해서 그를 타도할 생각이었다. 그래야만 하는 이유가 아이에겐 있었다. 피가 나도록 입술을 세게 깨물며 아이는 계속 그 다짐을 잊지 않으려 애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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