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 목적 ( 4 )
아이가 천갈궁의 주인이 되었다는 소식에 제일 먼저 반응한 것은 기나센이었다.
기나센에서 성좌를 배출한 것은 가장 가까운 해가 200년 전이었다. 무려 200여년 동안, 그들은 제국 내부의 일에 참여하지 못했다. 그 200년 동안, 성좌라는 이름은 수많은 의미를 부여받으며 실체보다도 더욱 거대한 무엇으로 기나센 내부에서 울려퍼지고 있었다.
아이가 천갈궁의 자리를 계승받았을 때, 그 거대한 울림은 봇물처럼 터져나왔다. 계통이 없었고 걷잡을 수 없었다. 누군가는 성좌가 된 아이가 작센과의 전쟁을 이끌어주기를 바랬고, 누군가는 내부에 숙청의 칼날을 들이밀지 않을까 걱정했고, 누군가는 당당히 제국과 맞서주기를 바랐고, 누군가는 제국과 협상해서 활로를 열어주기를 바랐다. 어린아이들은 한 번도 본적 없는 아이 우르드라는 사람을, 존경하고 경모한다고 말하고 다녔다.
치이익, 쑥에 불을 붙여 훈연기에 집어넣으며 통령은 속으로 생각했다. 아마도 그 누군가는 자신들일 것이었다. 무력한 자신의 소망을 멋대로 뒤집어씌운 것일 터였다. 같은 거울을 보더라도 제가끔 다른 형상을 보는 것처럼, 그들은 아이 우르드라는 인간을 보고 있었다.
후욱, 놋쇠 훈연기의 손잡이를 잡아당기자 매운 연기가 뿜어져나왔다. 통령은 뒤뜰의 호수 앞에 자그맣게 벌통을 기르고 있었다. 그의 유일한 취미였다. 연기에 취한 벌들은 맥없이 비틀거렸고, 통령은 어렵잖게 여왕벌이 매달린 소비장을 꺼낼 수 있었다.
"그러니, 그 존경이라는 것도, 결국 왜곡된 자기애에 불과할 뿐이지."
그 왜곡된 자기애야말로 국가를 움직이는 원동력임을 통령은 알았다. 그게 통령이 아는 유일한 정치학이었다. 통령은 중얼거리며 밀랍 속을 들여다보았다. 겨울이 오면, 힘이 쇠한 여왕벌을 갈아주어야 한다. 일벌들은 연기에 취해서 여왕이 손톱에 짓뭉개질 때까지도 눈치채지 못했다. 여왕은 사지를 옹송그리다 허리가 부러져 죽었다. 통령은 재빨리 준비한 새 여왕을 소비장에 집어넣었고, 벌통을 닫았다.
"후우우..."
벌통에서 멀어진 통령은 가슴에서 담배 한 개비를 꺼내 입에 물었다. 아이에게 선물했던, 그 유난히 연기가 순한 녀석이었다. 매 년 하는 일이지만 끝날 때마다 마음이 편치 않았다. 여왕은 손톱에 으깨지는 순간까지도 알을 낳고 있었다. 인간의 사정으로 멋대로 목숨을 빼앗는 것은 괴로운 일이었다.
"하지만 올해는 이상하게 마음이 편하군."
그 여왕벌에 자신이 겹쳐 보였기 때문일 것이다. 처음으로 통령은, 어쩌면 여왕벌이 홀가분하게 안식하지 않았을까, 그런 생각을 했다. 집으로 돌아온 통령은 코트를 걸치고, 막 랭 반도에서 돌아온 아이가 있을 장소로 향했다.
*
"이거, 늙은이가 함부로 들어와도 되는 곳인지 모르겠군."
그곳은 타니아의 집이었다. 아이가 돌아오기 직전, 타니아는 출산을 끝마쳤다. 우량한 남자아이였다. 산모는 무늬가 화려한 이불에 덮여 잠자고 있었고, 레나와 아이, 그리고 륜이 둘러앉아 자그마한 아기를 매만지고 있었다.
"저, 저, 이 분은?"
통령은 멀리서 볼 때와 가까이서 볼 때, 극단적으로 인상이 차이나는 유형의 사람이었다. 그래서 통령을 알아보지 못한 레나가 눈을 크게 떴다. 유난떨고 싶지 않았다. 통령은 너털웃음을 지으며 원형 의자에 앉았다.
"그냥 은퇴한 늙은이일세. 주책을 부리러 찾아왔다네."
흘깃 아이를 쳐다보았다. 소드 벨트에 붉은 가죽으로 된 검집을 매달고 있었다. 그 손잡이는 짐승의 뼈를 갈아 만든 듯 시린 빛을 뿜어냈다. 아마도 저게 그 천갈궁인 모양이었다.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꾸벅, 예의바르게 인사하는 아이의 뒷머리가 드러났다. 거칠게 잘라낸 뒷머리가 눈에 들어왔다. 분명히 그리 긴 시간이 지나지 않았는데도, 처음 보았을 때와 인상이 많이 달라져 있었다.
"그게 이번에 얻은 물건인가?"
"예. 덕분에."
"잘 어울리는군."
빈말이 아니었다. 굳게 다문 아이의 입술과 심홍색 눈동자를 바라보는 통령의 마음속에는, 자신도 모르게 어떤 장면이 펼쳐졌다. 대군의 앞에서 저 검을 뽑아들고 낭랑한 목소리로 연설하는 모습이었다. 연설을 마치자마자 갈기 하얀 말 위로 뛰어들고, 저 검을 날개처럼 휘두르며 적병에게 돌진하는 모습이 자연스럽게 눈 앞에 그려졌다.
"아니, 아닐세."
고개를 저었다. 그런 서사시는 통령이 가장 피해야 하는 것이었다. 그가 아이에게 자리를 물려주려는 이유가 그것이었다. 전쟁을 막는 것. 통령은 모자를 눌러쓰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모든 준비가 끝났다는 걸 알려주려 들렀다네."
"그렇습니까."
"결행일은 내일일세. 연기를 잔뜩 뿌려뒀으니, 지금이 적기겠지."
사람들이 성도 8궁을 얻게 된 기쁨에 취해 몽롱한 지금이 적기였다. 기나센을 떠날 때 약조했던 대로, 아이칼마로이의 투창을 이용한 테러의 범인을 대산맥파의 후보로 지목한다. 그 후보에 대한 조작된 증거와 증인은 이미 통령이 준비를 끝마친 상태였다. 그가 스스로를 변호하지 못하도록 즉결 처형하고, 그 다음 아이는 선거 없이 자연스레 통령의 자리에 오른다. 그리고 통령의 자리에 오른 아이는, 자신이 그랬던 것처럼, 겨울을 기다리는 여왕벌의 삶을 살아간다... 돌아서던 통령은 문득 아이의 얼굴에 수심이 맺혀 있는 것을 보았다.
"왜 그러는가, 망설이는가?"
고개를 저어 부정하지만 오래 살아온 자의 지혜로 통령은 알 수 있었다. 속눈썹의 떨림은 그가 망설이고 있음을 알려주었다. 문득 안쓰러운 생각이 들었다. 처음으로 정치에 뛰어들었을 때, 자신이 지었던 표정을 아이는 그대로 보여주고 있었다. 그때 이미 자신은 늙은이였지만, 이 자는 어려서부터 늙은이의 삶을 살아야 하는군. 그런 생각이 들어 엄하게 꾸짖듯 말했다.
"아이 군. 망설임은 어떤 미덕도 아닐세. 차라리 저지르고 후회하거나, 저지르지 않을지언정, 망설임을 품고 살아가진 말게. 자네가 선택한 길 아닌가."
"그렇,습니까."
"자네는 죽을 때, 망설임을 품고 휘두른 검에 죽고 싶나?"
그것이 망나니의 미덕이었다. 더 많은 사람을 살리기 위해서라거나, 더 큰 선이라거나, 그런 변명은 통령도 하고 싶지 않았다. 아이의 눈 가득 맺혀 있던 떨림이 멎었다. 그 말을 마지막으로 통령은 타니아의 집에서 떠나갔다.
*
환호성, 놀란 시민들의 얼굴, 그리고 피에 젖은 돌바닥.
그것이 통령이 마지막으로 본 풍경이었다. 다음 날, 관저의 광장에서, 통령은 가슴에 칼을 찔린 채 쓰러져 죽어가고 있었다.
"여기 계신 여러분의 가주를, 어버이를 앗아간 그 비열한 암습을 사주한 자는 바로 이 자입니다!"
그는 혼미한 정신으로 상황을 파악하려 애쓰고 있었다. 자신의 가슴에 찔린 검은 천갈궁이었다. 자신의 요구에 따라 천갈궁에서 그림자를 불러내 한 편의 검무를 춘 아이는 곧 암습을 사주한 자를 밝히겠노라고 나섰다. 예정보다 빠른 일이었지만 통령은 수락했다. 한바탕 수려하게 치장된 말을 공허하게 늘어놓던 아이는 느닷없이 칼을 빼들고 외쳤다.
"그렇다면 당신들께 묻습니다. 제가 이 자리에서, 그 비열한 자를 처단해도 괜찮겠습니까?"
사람들은 우렁차게 대답했다. 어서 그 자를 감옥에서 꺼내와야겠군, 통령이 그렇게 생각할 때였다. 가슴에 뜨거운 통증이 치받고 올라왔다. 울컥이는 핏물을 토하며 통령은 바닥에 쓰러졌다. 그가 항상 쓰고 다니던 외알 안경이 부서져서, 흐릿한 시야 가득 아이의 얼굴이 밀고들어왔다. 그는 입술을 깊게 깨물고 있었다. 그 눈에선 어제처럼 망설임을 찾을 수 없었다. 통령은 그렇게 절명했다.
아이는 통령의 가슴에서 천갈궁을 뽑아들며, 이를 악물고 어제 륜과 연습한 대로 말을 늘어놓았다.
"이 자는 이미 우리가 사랑하던 얀 하세팔로스가 아닙니다! 권력의 맛을 본 그는 타락했고, 두 번째 대선을 치를 때, 작센의 자금을 받아 당선되었습니다! 지금 우리의 동포가 제국의 부당한 폭압에 시달릴 때, 전쟁을 막고자 갖가지 비열한 방해 공작을 저지른 이유는 바로 그것입니다!"
죽은 시신 위로 여러 혐의가 덧씌워졌다. 전쟁 시국에 들어서면 노쇠한 자신이 권력을 잃을까 두려워했다는 혐의, 에페 바체 시험을 망친 혐의, 조디악과 협력한 혐의 등등이었다. 연단 아래에서 대산맥파의 가주 몇몇은 가슴을 쓸어내렸다. 사전에 약조된 일이었다. 륜은 그들의 약점을 쥐고 있었고, 통령을 죽이며 그에게 죄를 떠넘기는 것을 조건으로 그들을 회유했다.
"이 검을 제게 건네준 귀르겐 경께서는, 제게 영웅이 되라는 말을 남기셨습니다. 그리고 영웅은 결코 동포가 죽어가는 굴욕을 욕되게 버티는 자는 아닐 것입니다!"
아이는 천갈궁을 뽑아들며 그렇게 외쳤다. 통령의 피가 묻어 번들거리는 천갈궁의 검날을 멀리서 불어온 찬바람이 어루만지고 지나갔다. 아이는 더 세게 이를 악물었다. 처음부터 이것이 그의 목적이었다. 통령은 자신의 사람들을 지키고 싶다는 아이의 열의를 믿고 협력해주었다. 그는 세계가 위험에 처하더라도 기나센 사람들이 전쟁에 휩쓸리지 않기를 바랐다. 하지만 아이와 륜에게 있어 지켜야 할 사람은 온 세계의 사람들이었다. 그들을 지키기 위해서, 기나센은 세계를 겨누는 칼이 되어주어야만 했다.
"그러므로 저는 이 자리에서 천명합니다! 둘로 갈라져 제국에 맞설 힘을 잃은 이 기나센이, 이 굴욕의 상태를 벗어날 수 있는 영광스러운 전쟁에 돌입한다면! 저는 마땅히 그 선봉에 서겠노라고!"
사람들은 열광적으로 소리질렀다. 원래부터 칼잡이들의 여론은 전쟁을 바라고 있었다. 가주들이 앞다투어 아이의 이름을 선창했고, 그들 중에는 심지어 통령의 아들도 있었다. 자신들을 구하려 했던 자가 누구고 사지로 몰아가는 자가 누구인지도 모르는 채로, 그들은 그저 그렇게 무언가를 열광하고 있었다. 어지러웠다. 아이는 그 말을 마치고, 천갈궁을 납도한 채 연단을 내려섰다.
"괜찮은가?"
연단 밑에서 기다리고 있던 륜이, 아이가 내려오자마자 달려들어 숄을 걸쳐주었다. 아이는 훌륭하게 연기를 마쳐주었다. 예상한 것보다도 훨씬 더 멋진 연기력이었다. 아이는 고개를 저었다. 륜이 사주한 대산맥파의 가주가, 륜이 준비한 자료를 들고 연단 위에 올라서서 능숙하게 선동하는 소리가 뒤에서 들려왔다.
"당신이야말로요."
아이는 륜을 쳐다보았다. 통령은, 륜에게도 많은 의미를 가지고 있는 사람일 터였다. 애당초 그를 통령이 되도록 유도한 것도 륜이었다. 통령 본인은 죽을 때까지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을지 모르지만, 그는 륜에게 유도당해 영웅으로써 소모되었고, 이렇게 비참한 방식으로 삶을 끝맺었다. 아이는 륜의 얼굴에 그에 대한 죄책감이 맺혀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녀의 얼굴에서 찾을 수 있는 것은 아이에 대한 걱정뿐이었다. 어쩐지 보기 싫어져서, 아이는 륜을 밀치고 걸어나갔다.
"악, 저, 잠시만요!"
아이는 그렇게 비틀비틀 걸어나갔다. 그 뒤로 공허한 함성이 또다시 물결처럼 밀려왔다.
*
퐁당, 물 위로 작은 파문이 번져나갔다.
아이가 도착한 곳은 통령의 저택 뒤편이었다. 마당 뒤로 작은 호수가 펼쳐져 있었다. 해가 저물어 산맥 위로 노을이 내려앉을 때까지 아이는 그 자리에 앉아 멍하니 물수제비를 던져댔다. 일을 끝마쳤을 때, 이 자리에서 만나기로 한 사람이 있었다.
"많이 기다렸어?"
에바였다. 기나센으로 돌아오는 마차에서 아이는 에바에게 요구했다. 세상의 멸망이 다가오고 있으므로, 자신의 말을 무조건 따라주기를. 에바는 혼란스러워했고, 책을 읽으려고 애썼고, 방에서 끙끙댔다. 그리고 오늘,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을 들려주기로 했다. 손으로 엉덩이를 감싸며 에바는 아이 옆에 앉았다. 퐁당, 또 수면 위로 물수제비가 번져나갔다.
"저번에 했던 얘기 말인데, 나는, 나는 솔직히 잘 모르겠어."
"그래, 그렇구나."
아이는 다시 물수제비를 길게 집어던졌다. 일곱 번이나 튕긴 돌은 마지막엔 큰 파문을 일으키며 물 속으로 잠겼다. 물 위에 비친 아이의 얼굴도 둥글게 쪼개져 어지럽게 흔들렸다. 에바는 조용히 말을 덧붙였다.
"그래서, 그래서, 너는 어쨌든 착한 사람이니까. 너를 믿어보려고 해."
역시 그런 결정을 내렸나. 아이는 그럴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아이는 에바가 그 이후 늘어놓는 여러 말을 듣지 않았다. 들을 이유가 없었다. 그 동안, 아이는 통령을 생각하고 있었다. 그의 죽음이 남긴 파동이 아직도 손에 깊게 맺혀 있었다.
통령은 원망을 남기지 않고 죽었다.
마지막 숨으로 자신의 얼굴을 깊이 들여다보았고, 아이는 그 눈동자를 마주 바라보았다.
그 눈동자 너머에는 그의 나라가 넓게 펼쳐져 있었다.
그의 낡고 작은 집과 손떨림을 생각했다.
그는 늘 힘겨운 것을 버텨내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관절염에 시달리면서, 그 집에 홀로 앉아서, 바라봤던 나라의 풍경이 그 눈동자엔 담겨 있었다.
그는 스스로를 소모해서 나라를 지켜왔다.
그가 운명을 바꿀 힘이 있는 자가 아니었으므로, 세계의 종말 앞에서 그 지켜냄은 무가치했고, 아무도 알아주지 않을 터였다.
하지만 그는 분명히, 그 가물은 눈에 비치는 자신의 사람들을 힘껏 지켜냈다.
그 사람들 사이에는, 아마 아이도 있었을 터였다.
품에서 건네받은 연초를 꺼내어 물었다.
그의 나라는 어떤 원도 한도 품지 않은 듯했다.
그저 마지막으로, 그는 무언가를 부탁하는 듯 했다.
아이는 빨아들이듯 그의 눈동자를 깊게 응시했다.
그게 그의 소멸이었을까.
"그래서, 음, 내가 너를 믿어도 괜찮을까?"
멍하니 자신의 세계에 잠겨 있던 아이의 귀에, 에바의 말이 들려왔다. 아이는 중얼거렸다.
"나를 믿어 줘."
처음 피어본 담배는 독했다.
왜 이런 것을 피우는지 알 수 없었다.
깊게 빨아들인 연기는 폐부에 깊게 스며서, 아이의 몸 속 깊이 펼쳐진 나라를 휘돌았다.
"울어?"
에바는 놀란 듯 되물어왔다.
아이는 깊은 숨을 빨아들이면서, 입에 문 담배를 놓지 않고 말했다.
"내가 나를 믿는 만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