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메이지 슬레이어-164화 (164/279)

5권 후일담 #1. 백양궁

하레하둔 산맥의 초당.

새끼줄과 금줄로 여러 번 둘러쳐서, 사람의 발길을 막아놓은 이 심산유곡의 초당에 한 늙은이가 앉아 있었다. 카나기의 학장, 이신 아이신고르였다. 수묵선이 우람한 산수화 병풍 앞에서 장죽불은 뻐끔거렸고, 그의 작고 날카로운 눈은 연신 문서를 훑었다.

[ 단수의 몸에 복수의 생명이 공존할 수 있는가. 그것은 일시적으로는 가능한 듯 보인다. 자연계에서 그런 공존은 두 가지 경우에만 관찰된다. 바로 종양과 회임이다. 종양은 쇠잔한 생명 속에서 움트는 또 다른 생명이다. 생물의 몸은 그 육신을 훌륭히 경영하라는 대의 아래 뇌와 영혼에게 육신의 통제권을 양여하는 무수한 생명들의 종합으로 이루어져 있다. 종양은, 그 육신의 주인이 그 대의에 실패했을 때 - 즉 육신을 훌륭히 경영하지 못했을 때, 몸 속에서 치받고 올라오는 또다른 생명이다. 종양에게는 대의가 없고 영혼이 없다. 그 영혼 없는 살덩이는 내장 깊은 곳에 붙어 육신을 잠식하고, 결국 그 생물을 몰락하게끔 한다. 그러나 그 몰락은 아름답다. 그 몰락의 순간 속에서만, 단수의 몸은 여러 생명을 품을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은 별의 명멸을 닮았다. 그 병마(病魔)의 상태, 한 몸에 여러 개의 생명이 겹쳐 있는 상태야말로 어쩌면 생의 본질에 더욱 가까운 형태일지도 모른다. 외신의 육신은 지독한 병마에 시달리는 듯 보인다. 그들의 영혼은 절망해 있다. 육신을 훌륭히 경영해서 이루어야 할 목적도 없고, 몸 안의 생명을 정돈시킬 대의도 없다. 이 무의미한 세상에서, 어쩌면 모든 생명이 취해야 할 궁극적인 형태는 그런 병마의 상태일지도 모른다. ]

장죽불을 뻐끔대며 이신 아이신고르는 페이지를 넘겼다. 그는 지금, 길 아잘록이 작성한 논문을 비밀리에 입수해 검토하는 중이었다.

[ 그럼 회임은 무엇인가. 회임은 내게 종양과 별반 다르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생명은 결국 죽음 앞에 굴복할 수밖에 없다. 그 엄정한 부조리의 병마에 시달리기 전에, 몸 속 깊이 커다란 종양을 길러내 예방적으로 절제하는 것이다. 10개월의 기간을 거쳐 세상으로 절제된 태아라는 이름의 종양은, 부모에게 사랑을 받을 수 있도록, 그들이 사랑할 수 있는 유일한 대상 - 그들 자신을 닮도록 태어난다. 종을 가리지 않고, 부모는 그 잘라낸 종양을 자신의 삶의 목적으로 섬기도록 설계되어 있다. 그런 망상증은 대물림된다. ... 그 망상증이야말로, 이 세상의 진보를 가로막는 가장 큰 난적이다. ]

"더 읽는 건 무가치하겠군."

이신 아이신고르는 논문을 덮었다. 정말로 이런 관념적인 관찰로부터 그런 실천적인 괴물과 마술을 뽑아낼 수 있단 말인가? 이해하기 어려웠다. 깊게 빨아들인 장죽의 연기가 폐부를 그슬려서 뜨끈한 소양감이 가슴 가득 번져갔다.

"하긴, 그건 나에게 중요한 것이 아니지."

이 논문은 길 아잘록을 7위계에 올린 연구의 논문이었다. 아지프의 마술사들은 연구에 골몰하여 새로운 지식을 발견해낼 때 위계가 올라간다. 그리고 이신 아이신고르는 알고 있었다. 아직, 길 아잘록은 자신의 연구를 완성하지 못했다. 그가 자랑스럽게 내보인 헤카톤 케이레스는 미완의 성공작, 다시 말해 실패작이었다.

"단지, 축양과 같은 방식으로, 마력을 동원해 7위계까지 위계를 뚫었을 뿐이지."

그래서 이 논문은 가치를 가지는 것이었다. 이신 아이신고르의 앞에는 긴 흑발의 남자가 앉아 있었다. 이신에게서 논문을 받아 훑는 그의 눈매는 싸늘하기 그지없었다. 그건 레고르였다.

"그래서, 이게 무슨 가치를 가지고 있습니까?"

"이게 바로 우리가 진행하던 계획, 산양 사냥의 핵심일세."

레고르는 눈을 크게 떴다. 그의 사위가 되기로 약조한 때부터, 레고르는 이신 아이신고르가 깔아놓은 판에 적극적으로 뛰어들게 되었다. 산양 사냥은 이신과 그의 아들이 항상 언급하던 중요한 이야기였다. 레고르도 몇 번이나 그 이야기를 귀동냥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그게 정확히 무슨 계획인지 알려주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이신은 한숨을 길게 내쉬며 말했다.

"아지프, 그들이 압도적인 무력을 가지고도 왜 제국을 집어삼키지 못한 채 일개 학파로 살아가고 있는지 아는가?"

"예. 정치 때문이죠."

"말이 빨라서 좋군. 그들은 본질적으로 혼자일세. 필요에 따라 뭉쳐있다 한들, 언제나 서로를 희생하고 배반할 준비가 된 자들이지. 고질적인 반목과 내부 다툼 때문에 그들의 세력은 일정선 이상으로 확장되질 못해."

이신은 논문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그 습성을 이용해서, 이 논문을 작성한 자. 아마도 이미 7위계에 오른 길 아잘록을 그들 스스로의 손으로 유배시키는 데에 성공했다네. 그들은 이미 자신들의 가장 강력한 마술사와 전쟁까지 할 태세를 갖추고 있지."

"그렇습니까. 돌아가는 꼴을 보고 대충 예상은 했지만, 역시 학장님의 안배셨군요."

이신은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그런데 말일세. 이 시점에, 그를 7위계로 만든 논문이 아지프의 6위계 마술사들에게 배달되면 어떨까?"

레고르는 눈을 크게 떴다. 이신의 말은 거침이 없었다.

"이 논문은 미완일세. 그가 7위계에 오르게 된 건, 그 과정에서 만든 실패작이 아나테마의 제단이나 다름없었고, 그 마력을 빨아들여서 강제적으로 7위계에 오르게 된 것이지, 이 연구를 완성한 게 아니란 말일세. 그렇다는 말은, 이 연구를 가로채서 자신이 완성한다면 7위계에 오를 수 있다는 소리야."

"그렇, 습니까?"

"그래. 그리고 그가 7위계에 오르게 된 내막을 정확하게 아는 건, 이 세상에 나, 자네, 그리고 내 아들과 아탕칼리의 성인뿐이야."

산양 사냥. 레고르는 읊조렸다. 이신은 시험하듯 레고르를 바라보며 엷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빠르게 머리를 회전하던 레고르는 조용히 말했다.

"그러면, 각 학파의 학장들이 이 논문을 완성시키려고, 아니면 아잘록의 방법을 따라 아나테마가 되려고 자신의 세력을 이끌고 내홍을 일으킬 거란 말씀입니까? 7위계가 되기 위해서?"

"바로 맞췄다네."

"너무 뻔한 유도가 아닌지요."

"뻔하더라도 할 수밖에 없어. 아지프의 희생술사란 그런 종자들이니까."

재가 튀어 흩날렸다. 이신은 장죽을 칼처럼 화로에 꽂아넣었다.

"그들의 신은 자신 외의 모두를 희생시키며, 유아론적인 사고관을 가지고 살아가라고 가르침을 받지. 이 논문을 받게 될 세력의 수장들인 학장, 그리고 서부 마탑의 탑주는, 그런 사고방식으로 살아가는 삶에서 정점을 찍은 자들일세. 그들은 이미 7위계에 오른 길 아잘록을 적으로 돌린 상태지. 자신이 7위계가 되지 못하면, 언제든 죽을 수 있는 상황까지 내몰렸단 말일세. 그렇다면 그들 개인의 입장에서는 이건 합리적인 결정일 수밖에 없어."

"7위계가 되려고, 자기 세력 전체의 명운을 걸고, 이 만 명이 넘는 실험체가 필요한 실험을 거듭하는 게 말입니까."

이신은 병풍을 매만지며 말했다.

"그들에게는 더없이 합리적인 결정일세. 그들은 이 세계에서 가장 고독한 개인이 되도록 교육받고 살아온 자들이야. 그리고 세계를 설계하는 자는, 개인들이 가장 합리적인 결정을 반복한 끝에 패배하고 굴복하도록 설계하기 마련일세. 도박장처럼 말이야."

만약 그들이 세력 전체의 안위를 생각한다면, 그리고 자신이 맡은 아랫사람들의 목숨을 염려한다면, 그들은 누군가가 흉계를 꾸미고 있음을 짐작하고 거부할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그런 사고방식 자체가 결여되어 있다. 그것이 이신의 이론이었고, 평생을 걸쳐 아지프와 혀로 다투어온 자의 이론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길 아잘록을 유배보내서 이신의 말이 옳음을 한 번 증명해보였다. 레고르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납득했습니다."

"그래. 그리고 아나테마가 되려 하는 것은 불법이자, 이단이지. 나는 이미 라달라리아의 상층부와, 그리고 아탕칼리의 성인과 입을 맞춘 상태라네. 아지프의 학장은 곧 실험체와 아나테마를 찾아 제국 내부를 아수라장으로 만들 게야. 그 떄를 틈타서, 나는 두 세력에게 내전을 승인받을 생각이라네."

명분은 지당했다. 몸이 달아오른 그들은 불법적으로 실험체를 모집할 것이며, 아나테마가 되려 시도할 것이다. 제국의 질서를 지키는 양대 세력인 아탕칼리와 라달라리아의 금기를 동시에 건드리게 되는 셈이었다.

"그 때를 노려서 셋으로 갈라진 아지프의 세력을 각개격파한다. 그리고 그 영토와 이권을 우리의 것으로 만든다. 그게 산양사냥의 최종장일세."

결단과 관찰을 바탕으로 한 그의 계획은 빈틈이 없었다. 레고르는 무릎을 꿇고 골똘히 생각했다. 생각하고 있는 것은, 그 계획의 개연성과 타당성이 아니었다. 그걸 왜 자신에게 말해주고 있는가, 그 의도였다.

"왜 벌써 자네에게 이런 말을 들려주는지 의문스럽다는 표정이로군?"

정곡을 찔린 레고르는 잠시 입가를 경련했다. 이신은 너털웃음을 터뜨리더니, 자리에서 일어나 손수 병풍을 걷었다. 그 병풍 뒤에는 자그마한 바닥문이 숨겨져 있었다. 이 초당 자체가 카나기의 학장만이 출입할 수 있는 금지인데, 거기에 또 숨겨져 있는 문이라니, 보통 장소가 아니었다. 레고르는 안색을 굳혔다. 끼이익, 바닥문을 열어젖힌 이신은 내걸린 사다리에 발을 들이밀고 손짓했다.

"따라오게."

바닥은 무저갱처럼 깊었다. 해묵은 동굴 특유의 석회 냄새가 비릿하게 풍겨왔다. 아마도, 이 바닥과 이어진 동굴을 숨기기 위해 이 초당을 지은 모양이었다. 어둠 속에서도 이신은 길 하나 잃지 않고 휘적휘적 걸어나갔다. 레고르는 거듭된 수련으로 5위계에 버금가는 실력을 가지고 있음에도, 그 등을 뒤쫓기 힘들어했다.

'어린 순례자야. 몸을 조심하거라. 이 곳은 독기로 가득하구나.'

레고르의 옆에 붙어 있던 에단이 사방을 살피며 말했다. 레고르는 조용히 뇌까렸다.

"알고 있으니 하나마나한 소리는 하지 마라, 망령."

'너무해...'

울상을 짓는 에단을 무시하고 레고르는 온 신경을 집중해 사방을 살폈다. 그 말대로, 독기로 오인할 정도로 짙고 끈적한 신기가 사방에 가득했다. 머릿속을 뒤져서 이런 장소에 대한 지식을 찾던 레고르는 결국 깨달았다.

"용맥?"

이곳은 용맥이었다. 북서 자치령에서, 악룡 우스무를 낳게 만든 그 용맥과 같은, 신기가 이상하게 집중되는 장소였다. 그 말을 들은 이신은 우뚝 멈춰섰다. 뒤돌아선 그의 주름진 입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허허, 역시 눈치가 빠르군. 그래. 이 곳은 용맥일세. 단, 용을 낳기 위한 곳은 아니야."

이신은 서서히 옆걸음질했다. 그러자 이 동굴의 끝에 보관되어 있던 물건의 모습이 드러났다. 하얀 빛을 내뿜는 대태도가 바닥의 균열에 꽂혀 있었다. 레고르는 단번에 그것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백양궁?"

백양궁 하말. 성도 8궁의 하나였다. 레고르의 입이 놀람으로 크게 벌어졌다. 저 물건은 오십년 전부터 사라진 것으로 되어 있었는데, 이게 사실 카나기의 지하에 보관되어 있었을 줄이야. 레고르의 눈에 자연스럽게 정념이 불타올랐다. 검사로서, 저것의 주인이 되고 싶지 않은 자는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 열의를 확인한 이신은 조용히 말했다.

"나는 자네가 그 전쟁의 선봉을 맡아주기를 바라고 있다네. 길 아잘록, 그 자를 참살하기 위한 칼 말일세."

"하겠습니다."

"응?"

"그래서 저 물건의 주인이 되라는 거잖습니까."

이신은 저돌적인 레고르의 말에 웃음을 터뜨렸다. 이렇게 간단하게 결정할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자네가 이 물건을 다룰 수준이 된단 말인가?"

성도 8궁은 격이 맞지 않는 자가 감히 손을 대면 그 자를 불태워버린다. 그리고 레고르는 아직 백양궁을 다스릴 만한 수준이 되지 못했다. 레고르는 이를 악물고 대답했다.

"그 전쟁의 때가 다가올 때까지, 목숨을 걸고 수행하겠습니다. 제게 그 역할을 맡겨 주십시오."

"그래, 어쩌면 이렇게 내 마음에 드는 얘기만 꺼내는지 모르겠군."

이신은 그 말을 마치고 박수를 쳤다. 동굴 속에서 박수는 메아리로 울렸다. 그에 화답하듯 용맥에 가득 차 있던 독기가 요동치기 시작했다. 쿠르릉 소리와 함께 돌조각이 떨어지고, 백양궁 앞에 선 레고르는 당황해서 사방을 돌아보았다. 이신은 이미 저만치 걸어나가고 있었다.

"이 용맥은 이 물건을 보관하기 위한 장소이자, 동시에 수련을 위한 장소일세. 앞으로 한달 간, 이 용맥에 들끓는 기운에서부터 작은 독룡이 끝없이 태어날 게야. 그 놈들을 잡으며 수행해보게. 한 달이 지난 후에는 저 검의 주인에 어울리는 사람이 되어 있겠지."

"자,잠시만!"

"물론, 살아남는다면 말일세."

당황한 레고르가 항의할 새도 없이 이미 이신은 저만치 멀어져 있었다. 연기처럼 꾸물대는 신기로부터 곧 한 마리의 뱀 같은 용이 생겨나 레고르를 덮쳐왔다. 간신히 몸을 틀어 피하면서 레고르는 대태도를 뽑아들었다. 스하악! 긴 쇳소리가 울리고, 독무를 뿜어내던 용의 대가리가 둘로 갈려서 바닥에 흩어졌다. 이를 악문 레고르는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망령, 앞으로 한 달은 말참견해도 좋다."

'정말이냐?'

"대신 전력을 다해 도와라."

다시 솟구치는 용에게 대태도를 휘두르며 레고르는 소리쳤다. 쩡! 검과 비늘이 부딪히는 굉음이 동굴 가득 울렸고, 한참 걸어나가 있던 이신은 흐뭇하게 웃으며 뒤를 돌아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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