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메이지 슬레이어-166화 (166/279)

31. 불면증 ( 1 )

먼 땅에서는 아직 칼바람이 몰아치고 있었지만, 제도의 겨울은 끝나갔다. 서리낀 흙거죽을 뚫고 새싹이 올라왔고, 맑은 훈풍이 얼어붙은 처마를 녹여서 도시는 들뜨듯 깨어났다. 그 제도 위를 걷는 두 사람이 있었다.

"저기, 저기 봐!"

그 말에 노점상과 값을 흥정하던 여학생이 고개를 돌리고 탄성을 내질렀다. 그 두 사람이 걷는 길을 따라 경애와 놀람의 시선이 모였다. 그건 호노레와 단테였다. 얇은 천옷으로 몸을 감싼 호노레는 단테와 팔짱을 끼고 걸으며 사방에 그린 듯한 미소를 뿌리고 있었다.

"성녀님, 보기 좋으십니다!"

짓궂은 누군가가 휘파람과 소리를 지르자 호노레는 짐짓 부끄러운 듯 입을 가려서 화답했다. 그녀의 태도는 무대 위의 배우처럼 거침이 없었다. 반면, 단테는 이런 분위기에도 아랑곳않고 차가운 얼굴로 저벅저벅 걸어나갈 뿐이었다.

"조금 손이라도 흔들어주지 그래요?"

호노레가 옆구리를 쿡 찔러도 단테는 그대로였다. 그의 얼굴은 더없이 심각했다. 두 사람은 지금 저 멀리 랭 반도에 들러 성 아우렐리우스와 만나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기한에는 아직 여유가 있음에도 재촉해서 돌아온 이유는, 이렇게 제도를 거닐며 즐기기 위해서였다.

"에잇."

호노레가 억지로 단테의 팔을 붙잡아서 흔들어주었다. 그 어색한 목각인형 같은 동작 때문에 사방에선 웃음이 일었다. 인파에서 벗어날 즈음이 되어서 호노레는 한숨을 내쉬었다. 랭 반도에서 돌아온 단테는 죽 이런 상태였다. 무거운 사색에 잠겨 있었다. 스스로도 자각이 있었는지, 단테가 중얼거렸다.

"미안합니다."

원래대로라면 예약해놓은 근사한 식당에 들리고, 마술로 봄을 꾸며놓은 호숫가에서 밤산책을 해야만 했다. 하지만 단테가 이토록 깊게 사색에 잠겨 있으니 그건 무리였다. 말 없이 걷던 두 사람은 곧 호노레의 거처, 대법원 숙사 앞에 도착했다. 여기서부터는 단테가 들어가면 안 되는 구역이었다. 그의 얼굴에 잠깐 미안함이 내비쳤다. 호노레는 조금 심통이 난 얼굴로 단테를 올려다보았다. 서른이 넘은 나이에도 어딘가 소녀다운 표정이었다.

"미안해요?"

그래도 이런 점 때문에 오히려 좋은걸요. 호노레는 뒷말을 삼키고 발돋움을 한 채 눈을 감았다.

"그럼 사과해주세요. 입으로."

내밀어진 갸름한 연분홍빛 입술을 보고 머뭇거리던 단테는, 어색한 손놀림으로 그녀의 뒷머리를 잡고 길게 입을 맞추었다. 입을 떼고 멀어졌을 때, 호노레의 표정은 이미 눈송이처럼 녹아내린 후였다. 단테를 남기고 호노레는 종종걸음으로 자신의 숙사로 달려갔다. 이미 그에게 느끼던 미약한 서운함도 녹아내린 후였다.

"힘들겠죠. 어쩌면 내가 속없는 걸지도."

자신의 방에 다다른 호노레는 중얼거리며 문을 열어젖혔다. 그리고 너구리굴처럼 매캐한 연기 때문에 놀라서 입을 막고 말았다.

"아, 성녀님, 오셨나요? 일찍 오셨네요?"

동시에 피로에 젖은 곤죽같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건 다나였다. 그녀는 헝클어진 머리에 이틀은 갈아입지 않은 실내복으로 열심히 무언가를 속기하고 있었다. 어찌나 기운이 없는지 평소에는 싱그러운 연둣빛이던 눈동자가 이끼처럼 보일 정도였다.

아우렐리우스의 긴급한 부름으로 제도를 떠난 일주일간, 다나가 그녀의 공무를 맡아 대신 처리해야만 했기 때문이었다. 제도의 율사는 원래가 매일 격무에 시달리는 고된 직업이다. 그걸 2인분을 맡아 처리해야 했으니, 지금 다나의 몰골도 무리가 아니었다. 현장검증에 대한 소견서를 마무리하고 다나는 재떨이에 담배를 비볐다. 입으로는 짙은 한숨을 내뱉으면서였다.

'처음에는 흡연을 숨겼던 것 같은데'

호노레는 숨을 막으며 마구 벗어던진 속옷과 수건 사이를 깨금발로 건너 창문을 열어젖혔다. 환기를 위해서였다. 탁한 공기가 빠져나가고 밤바람이 가슴 가득 몰려들어왔다. 처음에는 이런 끝장난 생활태도를 숨겼지만, 이런 격무가 몇번 계속되자 자연스럽게 볼장 다 봤다는 듯 내숭을 내던져버린 다나였다.

"일찍 오셔서 참 다행이네요. 저는 내일까지 스승님이 어디 여관 잡고 알콩달콩하다 올 줄 알고 내일도 꼼짝없이 이 방에 갇혀서 하루종일 박혀 있어야 할 줄 알았는데~"

이렇게 말하는 다나의 말에는 가시가 돋혀 있었다. 호노레는 등골에서 죄책감이 몰려들어오는 것을 느꼈다. 최근 제국의 동향은 수상했고, 호노레가 자리를 비워야 할 일도 늘어났다. 그 때마다 다나는 이렇게 일을 떠맡아야 했으니 이런 원망이 나오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엎드린 다나는 원망조로 중얼거렸다.

"마지막 날에는 항상 다음날 아침에 도둑고양이처럼 돌아오셔서 하루종일 주무시니까, 내일도 꼼짝없이 이의신청서에 붓질이나 해야 하나 했는데, 참 다행이에요. 그쵸? 어디서 뭘 하고 오시길래 그런 걸까? 전 모르겠네요!"

"어허!"

얼굴이 새빨개진 호노레가 짐짓 경을 쳐도, 누적된 다나의 푸념은 멈출 줄을 몰랐다. 호노레는 침대 위에 정좌하고 앉아서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말했다.

"공, 공무입니다. 이 센디엘의 균형을 위한 아주 중요한 일을 마치고 오는 일이에요."

"식당이랑 잠자리 예약 제가 했는데요?"

"그랬죠..."

다나의 말에 바로 할 말을 잃은 호노레는 고개를 수그렸다. 큰일났어. 이대로라면 제자한테 일을 다 떠맡기고 놀러다니는 악덕 스승으로 찍히겠어. 식은땀이 흘렀다. 정확히는, 항변할 말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이번에 아우렐리우스가 호노레와 단테를 소집한 이유는 정말로 센디엘의 안전을 위한 것이었다. 그는 아탕칼리의 수장으로서가 아니라, 어포슬의 수장으로서 두 사람을 소집했다.

'이 세계는 지금 백척간두의 위기에 처했다네.'

그렇게 서두를 연 아우렐리우스는 예언의 내용을 드디어 두 사람에게 밝혔다. 지금까지 그 예언의 내용은 아우렐리우스만이 알고 있었다. 변수를 두려워했기 때문이었다. 성좌인 단테에게 그 내용이 들어갔다가, 그가 조바심이나 비극적 결함으로 인해 운명을 일그러뜨릴 것을 염려했던 것이다.

단테의 표정이 전에 없이 심각했던 이유도 그것이었다. 그는 아우렐리우스의 말을 무겁게 들었고, 밤새서 검을 들여다보며 무언가를 생각했다. 세상의 운명을 등에 짊어진 자의 삶의 무게를 호노레는 짐작하기 어려웠다. 굳이 마지막 일정을 밀회로 잡은 이유는 그런 그에게 위안을 주고 싶어서였다. 하지만 이런 이야기는 극비였다. 다나에게 들려줄 수 없는 얘기들이었다.

"좋으시겠어요. 성녀님은 만나고 싶을 때 항상 만날 수 있어서..."

늘어진 오징어처럼 몸을 푹 숙이고 담배를 꺼내 입에 무는 다나의 얼굴은 안쓰러웠다. 기력이 없는지, 불도 붙이지 못한 채로 그녀는 축 늘어져서 말을 이어갔다.

"최근에 아이 씨도 성좌가 됐고, 이어서 기나센의 청년 통령으로 등극했다는데, 알고 계신가요?"

아이 우르드. 그의 말을 들은 호노레의 눈이 번쩍 뜨였다. 아우렐리우스가 갑자기 두 사람을 소집한 더 근본적인 이유, 그것이 아이 우르드였다. 그 자는 이미 한 번 자신의 제안을 거부했었다. 하지만 세상의 멸망을 막기 위해서 제국을 재구성해야한다는 설득을 듣자, 그는 어포슬에 동참하기로 마음을 바꾸었다고 했다. 그는 운명에서 완전히 벗어난 존재였다. 세계의 멸망을 막고 제국을 재구성하고자 하는 아탕칼리의 계획의 주인공은 그가 되어야만 했다. 아탕칼리가 그를 천갈궁의 주인으로 인정한 데에는 그런 내막이 있었다.

"그러니까, 그 가짜 약혼한 꼬맹이뿐만 아니라, 앞으로도 날파리들이 더 더 많이 꼬일 텐데, 내가 옆에서 지켜줘야 되는데..."

다나는 힘없이 중얼거렸다. 대체 무슨 근거인지 모르지만 다나는 륜과의 약혼을 그냥 가짜로 치부하고 있었다. 그렇지 않으면 버텨내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일에 치여가지고 계속 보지도 못하고..."

다나는 거의 울 듯이 훌쩍이고 있었다. 호노레는 다나의 마음도, 아이의 마음도 깊이 공감했다. 진실을 듣자마자 얼어붙어 버렸던 단테만큼이나 큰 중압감을 아이도 느끼고 있을 것이다. 건어물처럼 엎드린 다나의 훌쩍임을 듣던 호노레는 눈을 감고 선언했다.

"알겠어요!"

"예?"

눈을 동그랗게 뜬 다나에게, 호노레는 방금 자신이 결심한 바를 말해주었다.

"그 사람과 저는 공식적으로 친분이 많은 걸로 되어 있지 않습니까."

"성녀님, 혹시 양다리 걸치시려는 건가요? 나이도 거의 두 배 가까이 많으면서?"

"무슨 소리에요? 그게 아니라, 친우가 성좌에 등극했는데 인사 한 번 안 갈 수는 없는 법이죠. 라달라리아 전체를 위해서라도, 그런 인맥 다지기는 분명 득이 되는 행위일 테고요."

"아, 그 말은..."

"다음 주에, 기나센에 내방하겠노라고 공문을 보내겠어요."

그 말은, 자신의 평판을 소모해서라도 다나와 아이를 만나게 해 주겠다는 말이었다. 두 사람 모두를 위한 일이었다. 그 말뜻을 알아들은 다나의 안색은 언제 그랬냐는 듯 생기로 달아올랐다. 벌떡 몸을 일으킨 다나는 머리를 다듬더니 눈을 똘망똘망하게 빛내며 펜촉에 잉크를 묻히기 시작했다.

"감사합니다, 스승님! 다음 주까지 계속 철야해서라도 맡은 직무를 전부 끝내놓을게요! 성녀님 몫까지 싹 다!"

"그, 그럴 필요는 없는데."

호노레의 사양에도 다나의 손은 멈출 줄을 몰랐다. 호노레가 옆 책상에 다가오자 손을 쳐내고 번쩍 호노레를 들어서 침대에 눕히기까지 했다. 혹시라도 호노레가 말을 철회할까 두려워서 그런 것 같았다. 침대에 누운 호노레는 밤새 잠을 자지 못했다. 설렘에 들뜬 다나가 두서없이 계속, 이런저런 기대를 늘어놓았기 때문이었다.

"듣기로는 아이 씨가 그 귀르겐 경이랑 같이 괴물을 무찔러서 인정을 받았다는데요. 정말 대단하지 않아요? 아직 열 일곱살밖에 안 됐는데, 이런 경우는 온 역사를 통틀어도 없지 않나요? 그쵸?"

"그, 그렇죠."

"분명히 더 성장했겠죠? 어렸을 때도 위엄이 넘쳤으니까, 지금은 더 멋있어졌을 거에요. 그렇죠?"

"그렇겠네요."

*

기나센, 레이븐사이드의 저택.

'어린 순례자야. 이제 방 밖으로 나갈 때도 되지 않았느냐.'

"응? 괜찮아."

그리고 그 아이는 지금 저택에 틀어박혀 있었다. 방 안은 매캐한 연기로 자욱했다. 담배 연기였다. 아침부터, 상의를 벗어던진 채로 침대에 걸터앉은 아이는 담배를 피우며 무언가를 조각하고 있었다.

"이것도 끝장났네."

아이는 천갈궁으로 나무토막에 귀신의 얼굴을 조각하고 있었다. 뿔이 세 개 달린 악마가 나무의 겉면에서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잠시 그것을 응시하던 아이는, 마음에 들지 않는지 조각을 쪼개버렸다. 사방에는 그렇게 부서진 나무조각과 톱밥이 널려 있었다. 윽, 아이는 짧게 신음했다. 피가 튀었다. 너무 세게 쪼개버린 탓에 손에 상처를 입었기 때문이었다. 옆에서 비웃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자해를 즐기나? 그럴 거면 그 몸, 나한테 주면 좋겠는데."

그건 그림자 모습의 선주였다. 단테의 말대로, 성도 8궁의 하나인 천갈궁을 얻자 선주는 더 이상 아이의 몸을 장악하진 못했다. 대신 성도 8궁을 타고 흘러나와 저렇게 그림자의 모습으로 아이 곁을 맴돌았다. 아이는 입에서 담배 연기를 흘리며 선주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담배를 내던져 방바닥에 밟아 끈 아이는, 상처를 햝으며 침대에서 바닥으로 내려왔다.

"그딴 흰소리 할 시간이 있으면, 바둑이나 두시죠."

"오냐. 다섯 점 깔아라."

"세 점."

"건방지군."

그리고 아침 댓바람부터 바둑을 두기 시작했다. 아마 저녁까지 저러고 있을 것이다. 옆에서 림은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둘 모두 바깥에 나갈 생각은 있는 것이냐? 벌써 일주일 째 이 방 안에서 이러고 있지 않느냐. 다른 사람들이 이 모습을 보면...'

"연자여, 시끄럽다."

천원에 돌을 내려놓으며 선주는 그렇게 말했다. 림은 한숨을 내쉬며 방 밖으로 날아갔다. 방문에는, 울 것 같은 표정을 지은 륜이 접시를 들고 서 있었다. 접시에는 어설프게 구운 소시지와 계란이 담겨 있었다. 륜이 만든 아침 식사였다. 아이에게 주려고 가져온 것이지만 벌써 며칠 째 아이는 식사도 먹는 둥 마는 둥 했다. 림은 무서운 얼굴로 륜에게 말했다.

'어떻게 좀 해 보거라. 명색이 모략의 신이라고 자칭하지 않았느냐.'

통령 선거를 마치고, 아이는 지금 일주일 째 폐인 생활을 하고 있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