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 불면증 ( 2 )
륜은 지금 세계의 모략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끝없이 펼쳐진 수면 위에 누워서, 가라앉고 떠오르기를 반복하는 듯한 부유감이 온 몸에 번져갔다. 잠에서 막 깨어나는 순간의 몽롱함이 의식을 가득 채웠다.
ㅡ그 부분은, ■■■을 준비시키십시오.
ㅡ■■■에게는 아무런 언질도 ■■■하도록, 극비이니 주의해서 전달해주십시오.
지금 륜이 들여다보고 있는 것은 드미트리의 마음이었다. 궁지에 몰린 자의 초조함, 절망, 그러나 굴복할 수 없게 만드는 그 무언가가 마음에 와닿았다. 륜은 눈살을 찌푸렸다. 그 감정 이상의 정보가 제대로 전달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날카로운 잡음과 뿌연 안개에 가려서, 드미트리의 계획 일부를 자꾸 가리고 있었다. 더 들여다봐도 소득은 없겠군. 륜은 눈을 떴다.
"윽."
어지러웠다. 몸 속 깊은 곳에서 구토감이 몰려왔다. 휘청이며 목을 두드려 구토감을 가라앉히고, 차가운 냉수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후아, 숨을 내쉬고 자리에 주저앉았다.
"대체 뭘 그렇게 준비하고 있는 것인가."
륜은 중얼거렸다. 얼마 전부터, 조디악은 자신의 예지를 숨기기 시작했다. 아마도 재판 과정에서 있었던 일련의 사태를 보고 자신들의 예지가 엿보이고 있다는 것을 깨달은 듯싶었다. 소니아의 흔적은 아예 종적을 감추었고, 드미트리의 모략만 드문드문 들여다볼 수 있었다. 드미트리는 조디악이 장악한 작센에서 전쟁을 준비하고 있었다.
"거꾸로 보이지 않기 때문에 짐작할 수 있는 것들도 있지요."
륜은 스스로와 토론하듯이 그렇게 말했다. 운명에서 벗어난 자들, 아나테마와 같은 이들은 자신의 능력으로 속을 읽을 수 없었다. 고로 뒤집어 생각하면 저들이 운명을 바꿀 수 있는 누군가와 접촉했음을 알 수 있었다.
"아마도 성좌일 텐데, 백양궁 아니면 사자궁일 테고."
수십 년째 종적을 감춘 백양궁, 아니면 행동이 일반적인 성좌와 다른 사자궁일 것이었다. 다른 성좌들은 각기 자신의 영역과 세력에 틀어박혀 있으므로, 작센 같은 제국의 변새에 있을 턱이 없었다. 거기까지라면 계산 안인데. 륜은 조용히 뇌까렸다. 그럼에도 불안감이 가시질 않았다.
륜은 드미트리의 모략을 집요하게 들여다보았다. 대부분이 안개처럼 뿌옇게 가려져 있었지만, 두 가지만은 그 덕분에 읽어낼 수 있었다. 그녀가 품고 있는 절망감, 그리고 죽음에 대한 결의였다. 그녀는 죽음을 각오했고, 그녀가 죽어야만 어떤 것의 봉인이 풀리는 계약을 맺은 상태였다. 그 계약의 내용은 불투명했다.
모순. 륜은 중얼거렸다. 그 감정과 결의는 모순되어 있었다. 그녀가 준비시키고 있는 작센의 군세는, 거기에 성좌 하나를 더한다 하더라도, 아이를 막아세우기엔 모자랐다. 드미트리 자신도 그 사실을 뚜렷하게 알고 있을 터였다.
"무릇 전쟁이란 한 쪽이 다른 쪽을 이길 수 있을 때가 아니라, 서로가 서로를 이길 수 있다고 착각할 때 일어나는 법인데."
그 외의 경우에는 외교나 항복이 우선시되기 때문이었다. 륜은 머리를 감싸쥐었다. 이 무너진 전력균형에도 불구하고 드미트리는 가진 모든 것을 끌어모아 항전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들은 자신들이 작센을 배후에서 조종하고 있음을 노골적으로 드러냈고, 레버넌트 군대를 일으켜 국경으로 보내고 있었다. 그에 소요되는 재원은 아무리 조디악이라고 해도 경시하기 힘든 수준이었다. 아무리 드미트리를 들여다봐도 그 세부적인 내용은 텅 비기라도 한 것처럼 읽어낼 수 없었고, 륜도 덩달아 초조해졌다. 일어나서 마룻바닥을 삐걱대며 빙글빙글 걷기 시작했다.
"설마 정말로 백양궁까지 확보한 것인가? 탐색할 수 있는 방법은, 두드릴 수 있는 풀섶은..."
그 모호함 때문에 기나센은 전쟁을 선포하고도 탐색전을 계속하고 있었다. 아이의 이름 뒤에 숨어서 륜이 그 탐색전을 지휘했다. 작센 내부의 반전파와 접촉해서 정보를 캐내려고 애썼고, 그들로 하여금 외교로 이 사태가 해결될 수 있으리라는 거짓 희망을 품게 만들었다. 반전파는 작센의 토호가 주축이었다. 죽음이 두려운 기득권자들의 집단적 공황은 륜이 휘젓기 딱 좋은 가마솥이 되어주었다.
그들은 무너지는 건물의 쥐들처럼 우왕좌왕했고, 계통 없는 단말마 같은 내통문서를 잇달아 보내왔다. 그것이 륜을 더욱 혼란스럽게 했다. 그들의 행위는 작센의 가장 깊은 내부에서도 전쟁의 승리를 점치고 있지 않다는 것을 뜻했다. 그럼 대체 노리는 것이 무엇인가?
"저번에는 세자와, 세자가 장성할 때까지 훈육해줄 저명한 인사 300여명을 우호의 표시로 기나센에 보내라는 요구를 하도록 시켰었지."
륜은 서성였다. 말이 훈육이지 사실 인질을 엄선해 보내라는 요구였다. 륜은 중얼거렸다. 급작스럽게 외부 세력에 의해 준동하고 있는 작센은 전쟁 태세에 들어설 때까지 시간이 필요했다. 그들은 반전파의 뒤에 기나센이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시간을 확보하기 위해 대부분의 요구는 고려하는 척을 했다. 고려하는 척, 그게 륜이 노리는 것이었다. 륜은 지금 상대의 의중을 찔러서, 모략의 능력으로 들여다볼 수 없는 그들의 전략을 알아내려 하고 있었다.
"그럼, 대산맥파에 협력했다는 약점을 가지고 있는 기나센 내부 가문을 뒤흔든다, 그런 내분이 전략은 아닐 테고."
이렇게 대량의 인질을 보낸다면, 그 사이에 선동가나 간자를 섞기도 용이해진다. 그것을 고려하다 거부했다는 소리는 애초에 그런 방면의 전략이 준비되어 있지 않다는 뜻이었다. 그럼 다음에는 어떤 요구를 시켜 볼 것인가, 적의 의중은 무엇인가... 륜은 갑자기 현기증을 느끼고 자리에 주저앉았다. 그녀의 고질병이었다. 약한 몸으로 중얼거리며 너무 많은 생각을 한 탓에 저혈압이 몰려와버렸다. 그녀는 마룻바닥에 벌렁 드러누웠다. 작은 가슴을 가르랑거리며 색색 숨을 내쉬던 륜은, 문득 벽에 걸린 시계를 보고 벌떡 일어났다.
"아, 벌써 시간이..."
오늘은 드물게도 륜이 외출을 해야 하는 날이었다. 자리에서 일어난 륜은 주방으로 들어가 긴 머리를 말총머리로 틀어묶고, 요리를 하기 시작했다. 많이 해본 적이 없기에 솜씨가 어설펐고 칼질은 위태위태했다. 옆에서 보기 불안할 정도였다. 아니나다를까, 소시지를 굽던 중 사고가 터졌다. 칼집을 내는 것을 깜빡하고 그냥 구워버린 바람에 기름이 크게 튀었던 것이다.
"꺅!"
륜은 세상이 떠나가라 소리를 질렀다. 볼에 기름이 닿았기 때문이었다. 얼른 기름을 닦아냈지만, 빨간 자국이 남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울상이 된 륜은 그 자리에 거즈를 붙이고 주섬주섬 요리를 끝마쳤다. 접시를 들고 2층, 아이의 방으로 올라간다.
"저, 저, 아침 식사 준비가 다 됐는데, 오늘도 안 드실 건가요?"
방 안에서는 아무런 말도 들려오지 않았다. 딱, 바둑돌 내려놓는 소리만 크게 울릴 뿐이었다. 륜은 조심스럽게 접시를 방 앞에 내려놓고 물러섰다.
"오늘, 외출할 일이 있어서 나갈 테니까, 꼭 챙겨 드세요."
대답은 없었다. 통령이 죽고, 작센과의 전쟁이 결정되고 나서부터 일주일 동안이나, 아이는 계속 저렇게 방 안에 틀어박혀 있었다. 륜의 얼굴에 수심이 가득 차올랐다. 갓 성년이 된 사람한테 너무 큰 짐을 씌웠다는 죄책감과, 조디악의 저 불분명한 위협을 깨부숴주어야 할 사람이 망중한에 빠져 있다는 사실에 대한 불안감이었다. 고개를 저어 그 모두를 몰아내고, 륜은 저택 밖으로 나섰다.
*
륜이 향한 곳은 타니아의 집이었다.
"귀엽지? 여기, 눈썹 봐봐. 제 아빠랑 똑 닮았다니까? 얘, 이모 왔다 이모. 인사해야지?"
타니아가 낳은 아기의 이름을 지어주기로 했기 때문이었다. 아직 이름없는 아기는 볼살을 불룩거리다가, 륜을 보고 울기 시작했다. 낯가림이 심한 모양이었다. 레나가 황급히 달려들어 딸랑이를 들고 아이를 달랬다. 륜에게로 시선을 돌린 타니아는, 문득 륜의 얼굴에 난 상처를 보고 얼굴이 딱딱해졌다.
"얘, 너 그 상처 뭐야?"
"예? 이거 말인가요?"
타니아는 레이븐사이드의 고위 간부인 블레어의 딸이었고, 그래서 어려서부터 륜과 자주 보았던 사이였다. 륜의 얼굴에 생긴 상처를 보고 염려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설마 너희, 싸웠냐?"
"아뇨, 아니라네!"
"아니라네?"
당황해서 말투가 바뀌고 말았다. 륜은 손사래치며 강하게 부정했다. 여러가지로 생각이 복잡한 탓에, 표정을 관리하지 못하고 깊은 수심을 내비친 모양이었다.
"아니, 아니에요. 그냥 요리를 하다가 기름이 튀어서..."
"네가 집안일을 한다고? 개가 풀을 뜯어먹는다는 말이 더 그럴듯하겠다."
타니아는 륜의 말을 간단히 일축했다. 대꾸할 말이 없었다. 당황하는 륜에게 타니아는 조금 더 상인다운 완곡어법으로 대화를 시도했다.
"혹시 둘 사이에 뭔가 관계가 원만하지 않게 돌아가고 있냐?"
"그건... 그럴지도요."
"아니 왜. 너네 거의 신혼 아냐? 그냥 서로 눈만 마주치고 있어도 깨가 쏟아져야 할 시기에... 분위기도 좋다는 것 같더만."
"그게... 제가 뭔가 실망을 많이 시킨 것 같아요."
"많이 당황하고 있구만. 초짜답게."
륜은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옷자락을 꼼지락거릴 뿐이었다. 분계선은 통령의 죽음이었다. 통령의 죽음 이후로 아이는 자신과 대화하기를 피했다. 아이는 륜이 그 흉중을 들여다볼 수 없는 사람이었고, 륜은 이런 경우를 겪은 적이 없었다. 타니아의 말대로, 륜은 당황하고 있었다. 그 얼굴을 물끄러미 들여다보면서 턱을 매만지던 타니아는 곧 박수를 짝 쳤다.
"자세한 내용을 털어놓긴 힘든 거지?"
"예, 이런 저런 이유로... 죄송해요."
"그럼 일단 옷 얇게 입고 술 들고 방에 돌격해봐."
"예?"
옆에서 레나가 얼굴을 홍당무처럼 붉히고 눈을 끔뻑였다. 하지만 타니아는 더없이 진지한 어조로 말을 이어나갈 뿐이었다.
"걔가 생긴 건 건장해도 아직 어린애 아냐? 네가 연상이잖아? 가끔은 연상답게 쎄고 강하게 나가야지, 질질 끌려다니고 눈치보고 하니까 오히려 더 꼬이는 걸수도 있지 않냐. 그러니까 이 언니 말만 믿고 일단 돌격해봐."
륜은 눈을 껌뻑이다가 멍하니 되새겼다.
"강하게... 나간다."
그 말을 듣고 얼굴이 빨개진 레나는 딸랑이를 떨어뜨리고 말았다. 쨍그랑, 무언가가 꺠지는 큰 소리가 울렸고, 타니아의 아기는 다시 정신사납게 울어젖히기 시작했다.
*
그 때, 아이는 여전히 방에서 선주와 단둘이 독대하고 있었다.
"저녁은 먹지 않아도 되나?"
선주는 그림자로 만든 곰방대를 물고 물어보았다. 방안은 어둡기 그지없었다. 너구리굴이 연상될 정도로 담배를 피워댄 바람에, 유리창은 뿌옇게 안개가 끼어서 어둡고 흐릿한 빛만을 투과시켰다. 아이는 피식 웃으며 장미 리본이 둘린 담배갑을 보여주었다.
"이게 밥인데요."
"제기랄. 늦게 배운 도둑질이 무섭다더니."
치익, 어두운 방 속에서 자그마한 불이 피어올랐다. 그러나 그것이 아이의 솔직한 기분이었다. 밥을 먹지 않는 것이 아니었다. 먹을 수 없는 것이었다. 고기를 먹으면 구역질이 치솟았고 채소를 씹으면 무언가의 살가죽을 씹는 것처럼 구역질이 몸 속 깊은 곳에서부터 몰려왔다. 림이 옆에서 걱정 어린 시선을 보내는 것이 느껴졌다. 아이는 애써 그 시선을 무시하고, 내던진 나무토막에 손을 가져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