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 불면증 ( 3 )
어두운 방에서 아이는 다시 귀면상을 조각하기 시작했다.
쇠와 나무가 부딪히며 특이한 침식이 시작되어서, 굴곡진 주름은 험상궂게 일그러진 입으로 변모했고 움푹 패인 자국은 눈동자가 되었다. 정좌한 선주는 거만하게 앉아서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아이는 귀면상에서 눈을 떼지 않고 칼질을 거듭했다. 손에 들린 귀면상과 눈싸움이라도 하는 듯 눈을 부릅뜬 채였다.
방은 어두웠다. 어슴푸레한 어둠이 나뭇결마다 고여서, 귀면상은 얼핏 주름진 노인의 얼굴처럼 보였다. 조각해나가던 아이의 눈망울이 흔들렸다. 그 귀신의 얼굴에 다른 이의 얼굴이 겹쳐보였기 때문이었다. 일순 그 조각은 잘린 목처럼 보였다. 통령의 목이었다.
"윽."
무심코 힘을 너무 줬다. 나무는 움켜쥔 손아귀힘을 이겨내지 못하고 과일처럼 부서졌다. 흩날리는 톱밥 속에서 아이는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한심하다는 듯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또 한 토막조차 조각하지 못하고 부숴버린 게냐? 이래선 평생 걸려도 무리겠군."
거칠게 부서진 톱밥에 쓸려서 손바닥엔 피가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따가움이 손바닥 가득 번져왔다. 이를 악물고 머리를 헝크러뜨리며 아이는 외쳤다.
"무리가 아닙니다!"
"아니, 좀 달라졌다 싶더니 그대로였군. 강해지는 건 너에겐 평생 무리다."
선주의 그림자는 단언했다. 강해지는 것, 아이는 읊조렸다. 그 말대로였다. 아이가 지금 이 방에 틀어박혀 있는 것은, 단순히 낙망했기 때문이 아니었다.
단테와, 그리고 귀르겐과 싸우면서 아이는 자신의 수준을 가늠했다. 성도 8궁 중 가장 강하다는 단테에게는 확실히 못 미쳤고, 귀르겐도 간신히 이겨낼 수 있었다. 성도 8궁 사이에선 잘 쳐줘도 중하위권 정도의 실력일 것이었다.
일반적인 사람에게라면 분에 차고도 넘칠 강함이지만, 아이가 처한 상황은 일반적이지 않았다. 더욱 더 강해져야만 했다. 귀르겐을 붙잡아 자신의 실험대로 삼아버린 자, 길 아잘록. 이대로는 그 자를 무찌를 수 없었다. 그 자는 아주 간단하게 귀르겐을 농락했으며, 어쩌면 길 아잘록 자신보다도 강할지 모르는 괴물을 거느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 괴물의 가슴팍엔...
"윽."
헛구역질했다. 먹은 것이 없어서 뜨끈한 열상감과 위액만이 식도에서 맴돌았다. 아이는 지금보다도 더욱 더 강해져야만 했다.
그리고, 고금을 통틀어 가장 강한 자가 자신의 몸 안에는 있었다.
아이는 천갈궁의 힘으로 선주를 불러냈다. 도움을 청하기 위해서였다. 그는 7위계의 마술사 셋과 동시에 칼을 겨루어도 지지 않았다고 했다. 그의 힘을 빌릴 수 있다면, 분명히 큰 도움이 될 것이었다. 천갈궁의 그림자로 불려나온 선주는 자초지종을 듣더니 피식 웃었다.
"그럼 네가 그 몸을 내게 넘겨주면 되겠군."
"정말입니까?"
아이가 그렇게 묻자 림은 옆에서 얼굴을 딱딱하게 굳혔다. 그러나 선주가 덧붙인 말을 듣고 고개를 저었다.
"그래. 그 놈 뿐만 아니라 이 세계에 아직도 찌꺼기처럼 달라붙어 있는 마술사 전부를 말살해주지."
뻔한 대답이었다. 그리고 그건 아이가 바라는 바가 아니었다. 선주 역시 그 제안에 응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선주는 고개를 저으며 말을 이어갔다.
"뭐, 예상했다. 하지만 예전에 봤을 때보다는 많이 마음에 드는 꼬라지가 됐구나. 좀 더 사람다워졌어."
아이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좋은 의미인지, 나쁜 의미인지 알 수 없었다. 선주는 딱 잘라 대답했다.
"당연히 나쁜 의미지."
"그렇, 습니까."
고뇌에 시달리는 아이에게서 무엇을 보았는지, 선주는 이전보다 누그러져 있었다. 그는 아이에게 협력하는 것을 반쯤 긍정했다. 하지만 그답게 꼬인 방식이었다. 그는 이상한 조건을 달았다.
"네가 생각하는 지옥도를 한 번 그려봐라."
지옥의 모습을 그려봐라, 그게 선주의 조건이었다. 그것을 보고 협력할지, 협력하지 않을지를 정하겠다는 것이었다. 영문 모를 조건이었지만 단순한 괴롭힘은 아닌 듯했다. 선주의 얼굴은 더없이 진지했다. 아이는 그림을 그릴 줄 몰랐고 조각은 오래 연습해왔으므로, 차라리 지옥도를 조각해주는 것을 택했다. 그 날부터 아이는 지금 방 안에 틀어박혀서 이렇게 나무토막을 조각하고 있는 것이었다.
방 밖으로 나가지 않고 있는 이유도 선주였다. 비록 아이의 힘으로 실체화되어있기는 하나, 선주는 통제할 수 없고 예상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 바깥에 함부로 내보냈다가 어떤 일을 벌일지 두려웠다.
그리고 오늘에 이르기까지 아이는 선주의 요구를 들어주지 못하고 있었다. 형편없이 망가진 나무토막을 보며 선주는 나직하게 말을 이어갔다.
"자꾸 사람의 얼굴을 담으려고 하니 실패하는 거다."
선주는 부서진 귀면상을 집어올렸다. 그 부릅뜬 눈 아래에는, 한 줄기의 주름이 선명하게 새겨져 있었다. 그 일그러짐이 담으려고 하는 감정은 명확했다. 연민이었다.
"네가 지금 조각하고 있는 건 지옥의 나졸이다. 나졸은 눈 앞에 배송된 죄인의 선악이나 미추를 고려할 계제가 아니다. 그저 으깨고, 골통을 쳐부수고, 목을 잘라내고, 온갖 방법으로 형벌을 주어야만 하는 자다. 그런데 너는 자꾸 그 얼굴에 인간을 담으려고 하니 실패하는 거다."
"하지만..."
"의미 없는 반론은 그만둬라. 나는 지옥도를 그리라고 했다. 너는 지옥도를 보고 싶어하는 사람의 마음, 그 마음이 바라는 걸 만들어다 바치면 되는 게다. 그런데 왜 자꾸 의미없는 표현주의에 골몰하는 거지?"
선주의 말은 서릿발처럼 엄하고 차가웠다. 부서진 나무토막을 공처럼 던졌다 받기를 반복하며 선주는 말을 이어나갔다.
"너라면 알겠지. 검은 그릇이다. 무는 그릇에 마음을 담는 것이다. 내 검을 배우려면 우선 내 마음을 이해해야 하지 않겠나. 그런 망설임과 감상주의를 검에 담아서야, 내 검은 배울 수 없다."
"망설임 같은 건 없어요!"
"넌 없다고 생각하겠지. 하지만 없다고 생각하는 것과 없는 건 달라. 그럼 물어볼까, 너는 그 괴물을 베어낼 때, 망설임 없이 그 란페이라는 여자의 시신까지 베어넘길 수 있나?"
아이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이 집에 머무르고 있는 네 약혼자, 그 여자가 널 배신한다면, 바로 쳐죽일 수 있나?"
"그런..."
"아마 그 여자는 그럴 수 있을 텐데."
아이는 왜 이런 질문을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선주는 말했다.
"망설였군. 싸움 도중이면 이미 너는 세 번은 죽었다."
"그런 극단적인 가정은..."
"세상은 원래 극단적이다. 극단적인 흑백이지. 내가 생각하는 지옥은, 그래, 이 바둑판 같은 거다."
돌 정리를 하지 않아서 흑백으로 가득한 바둑판을 가리키며 선주는 말했다.
"적과 아군으로만 나누어진 단순성을 나는 사랑한다. 이 개별적인 돌이 어떤 사연을 담고 있는지, 어떤 마음인지, 나는 궁금하지 않아. 그 외의 모든 것은 무의미하다."
그 말은 어떤 깨달음을 담고 있는 듯했다. 아이는 바둑판을 들여다보며 선주의 말을 음미했다. 몸 내부에 응어리진 신기가 회오리치는 기분을 느꼈다.
"무가치한 모든 것을 덜어낸 색이 바로 이 흑백이다. 결국 죽으면 썩어 없어질 모든 감정을 덜어내고 원념과 증오만 남겨라. 모든 색을 탈색해라. 베어낼 대상만 남은 세계, 그게 바로 지옥이다..."
"그만!"
뒤로 갈수록 선주의 말은 웅변처럼 낮고 짙어졌고, 말꼬리는 뱀처럼 떨렸다. 메스꺼웠다. 깨달았다고 생각한 것이 갑자기 검게 뒤흔들리는 기분을 느꼈다. 바둑판의 모와 눈금이 실처럼 풀려나와서 괴상한 광경을 그려냈다. 전쟁터였다. 송장이 제가끔 쳐박혀 거무죽죽하게 썩어가는 전장 위에서 하얀 것들이 춤을 추고 있었다. 욱, 갑자기 구역질이 치밀어오르는 것을 느꼈다.
"오늘은 여기까진가."
"욱,우우욱..."
선주를 유지시키던 집중력도 흐트러져서, 선주의 그림자는 일렁이며 천갈궁 속으로 빨려들어갔다. 아이는 계속 창 밖에 구역질을 하고 있었다. 먹은 것이 없었기 때문에, 흐릿한 위액과 찌르는 듯한 통증만이 식도 가득 몰려왔다.
"후욱, 후우욱..."
토사물이 묻었을까 두려워서 상의를 벗었다. 쌀쌀한 밤바람이 등골의 식은땀을 스치고 지나갔다. 녹초가 되어 초췌하게 앉아 있는 아이의 귀에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평소라면 제지했겠지만, 지금의 아이는 문을 가로막을 힘도 없었다. 피곤했고 괴로웠다.
"일어나 계세요...?"
끼이익, 언제 집에 돌아온 걸까, 문을 열고 들어온 것은 륜이었다. 아직 겨울임에도 몸선이 내비칠 정도로 얇은 봄옷을 입고 들어온 그녀는 방 안의 꼴을 보고 깜짝 놀라 눈을 크게 떴다. 그 손에는 자그마한 술병이 들려 있었다.
"아이 씨, 방 안이 이게 무슨 꼴이에요?"
불을 밝힌 그녀는 어처구니없다는 듯 술병을 내려놓고 사방을 돌아보았다. 방 안은 심하게 어지러웠다. 부서진 귀면상과 나무토막이 어지럽게 흐트러진 꼴은 현기증이 날 정도였다. 아이는 대답할 기력이 없었다. 계속 구역질이 치밀었기 때문이었다. 억누르고 싶어서, 아이는 조용히 륜에게 손짓해서 요청했다.
"이거 달라구요?"
아이의 손짓이 가리키는 것은 담뱃갑이었다. 복잡한 표정으로 담뱃갑을 집어든 륜에게 아이는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두통 때문에 말을 꺼내기도 힘들었다. 바둑판 위에서 보았던 전쟁터의 환영이 아직도 눈 앞에서 어른거리고 있었다. 그 전쟁터에서, 죽은 자들은 익숙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총관, 통령, 가주, 그리고 지금까지 기나센에서 자신이 죽여온 사람들의 얼굴이었다. 머리 한 움큼을 움켜쥔 아이를 바라보던 륜은 담배를 건네주기 직전 팔을 접어 빼앗았다.
"이제 안 돼요!"
그리고 저 멀리로 던져버렸다. 담뱃갑은 창문 밖으로 떨어져버렸다. 륜은 아이가 어떤 목적으로 방에 틀어박혀 있는 것인지 알지 못했다. 괴로워하는 이유는 알고 있었지만, 조디악의 흉중을 읽을 수 없어 생긴 초조함이 더 우선했다.
"아이 씨, 언제까지 이렇게 방에 틀어박혀 있을 거에요!"
그리고 연상이니 강하게 나가라는 타니아의 강하게 나가라는 조언을 좀 다르게 해석했다. 지금 이렇게 아이가 어리광을 부리게 놔둬서는 안 된다, 어떻게든 방 밖으로 끌어내야 한다는 결론에 도착한 것이다.
"물론 괴롭겠지만, 이미 저와 함께하기로 선택하셨잖아요. 작센과 전쟁이 시작되어도 계속 이 자리에 틀어박혀 있을 건가요? 그럼 저는 가주들한테 뭐라고 설명해야 하나요, 미안하다, 우리 통령이 사춘기가 늦게 와서 못 싸울 것 같다?"
옆에서 림이 신음성을 흘렸다. 하지만 아이를 자극하려는 륜의 말은 끊이질 않았다. 아이는 그 말을 멈출 수도 반박할 수도 없었다. 어지러움이 극에 달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대로 아이 씨 때문에 전쟁이 흐지부지되면, 지금까지 죽은 사람들의 죽음도 의미가 없어지잖..."
"그만."
아이는 손을 붙잡아 그 말을 멈추었다. 륜의 얼굴이 당혹으로 달아올랐다. 눈뜬 아이의 눈은 분노를 담고 있었다.
"꼭 다른 사람의 책임처럼 말하는군요."
"아니, 그런 의미는... 이미, 이미 계획이 진행되었으니, 도중에 멈출 수는 없다는..."
"걱정하지 마시죠. 당신이 바라는 대로, 통령이든, 저기 지나가는 사람이든, 나 자신이든. 원하시는 대로 죽여드릴테니까요."
그건 냉소였다. 아이가 한 번도 보여준 적이 없는 것이었다. 얼음처럼 얼어붙은 륜을 방 안에 남겨두고, 아이는 침대에서 일어나 성큼성큼 문 밖으로 걸어나갔다. 쾅, 크게 문이 닫히는 소리만이 방 안에 길게 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