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메이지 슬레이어-171화 (171/279)

31. 불면증 ( 6 )

촤악, 차가운 물이 머리 위로 쏟아졌다.

"머리는 왜 이렇게 엉망으로 잘랐어요?"

"어쩌다보니."

물에 젖어서 순하고 가지런하게 늘어진 머리카락을 매만지며 다나는 말했다. 송진을 바른 활줄처럼 건강하고 아름답던 아이의 머리였다. 보는 사람마다 자르는 것을 말릴 정도였다. 그런데 그 머리가 칼날로 거칠게 잘려나간 꼴을 보니, 자연스럽게 안타까움과 분노가 치밀었다.

"그, 옆에 있는 그 여자는 옆에 있으면서 이런 꼴을 보고 정리도 안 해줬어요?"

부산스레 움직여서 다나는 자그마한 손가위와 빗을 꺼내왔다. 아이는 등진 채로 묵묵히 앉아서, 자신의 머리를 매만지는 손길을 느끼고 있었다. 먼 옛날이 생각났다. 막 림의 신전에서 빠져나왔을 때, 백치나 다름없었던 자신을 돌봐주던 다나의 모습이었다. 눈을 감았다.

"요즘 무슨 중요한 일이 일어나고 있죠? 아이 씨를 둘러싸고."

조심조심 머리를 다듬으면서 다나는 툭 말했다. 호노레의 잦은 외출, 그리고 자신에게조차 보여주지 않는 비밀스러운 일처리가 늘어나고 있는 데서 유추한 것이었다. 아이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었다. 끝이 둘로 갈라진 머리카락 끝을 잘라내며 다나는 이어 말했다.

"덕분에 저도 요즘 엄청 힘들고 바쁘지만, 열심히 버티고 있어요."

그리고 다나는 머리를 다듬으면서 이런저런 불평이나 생활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아이는 눈을 감은 채 가만히 있었다.

"그렇지만 꿋꿋하게 잘 버티고 있는데, 누구 덕분인지 알아요?"

한참이나 얘기하던 다나는 문득 상체를 굽혀서 뒤에서부터 아이를 끌어안으며 물었다. 얼굴은 발갛게 물들어 있었다.

"대, 대답해봐요."

스스로의 대담한 행동에 놀라서 머뭇거리던 다나는, 문득 자신에게 기댄 아이의 상체가 힘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어느새 잠들어 있던 것이었다. 최근 극심한 피로에 시달리고 잠도 제대로 자지 못했던 아이가 마음이 풀어진 결과였다. 입술도 살짝 벌어져 있었다. 긴장이 풀어진 다나는 그대로 아이를 머리에 뉘였다.

"왜 이렇게 수척해졌어요?"

가까이서 그 얼굴을 들여다본 다나는 놀라서 물어보았다. 헤어진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도, 이전과는 확연하게 인상이 달라졌기 때문이었다. 그 소년 같던 미간에는 한 줄기의 수심이 선명하게 박혀 있었다. 가슴 깊은 곳에서 자그마한 분노가 끓어올랐다. 도대체 그 약혼자라는 인간은 옆에서 뭘 하고 있길래?

"영차."

내가 옆에 있었다면 절대로 이렇게 놔두지 않았을 텐데. 다나는 아이를 껴안듯 들어올려서 욕탕을 벗어나 자신의 방 침대에 뉘였다. 방에는 침대가 하나뿐이었다. 이불을 덮어주고 방에서 나가려던 다나는 방을 나가기 직전 멈춰섰다. 이어서, 방 밖으로 목을 내밀어 누가 없나 두리번거렸다. 복도는 텅 비어 있었다.

"아무도 없지?"

끼이익, 문을 닫고 돌아선 다나는 살금살금 침대 옆으로 다가갔다. 창으로 들이치는 달빛이 희디흰 아이의 머리에서 고요하게 부서지고 있었다. 목덜미는 물기가 남아 있어 촉촉했다. 다나는 침을 꿀꺽 삼키고, 조용히 이불을 들어올렸다. 옆으로 돌아누운 아이의 품에 안기듯이 침대 속으로 들어갔다. 바로 앞에 잠든 아이의 얼굴이 있었다. 숨을 들이쉬고 내쉴 때마다, 가르랑거리는 따스한 숨결과 늑골의 오르내림까지 선명하게 보였다. 그 모든 것을 망막에 새기면서 누워 있을 때, 갑자기 아이의 몸이 크게 움직였다.

"힉?"

젖은 몸 때문에 추위를 느낀 듯, 옆에 있는 따스한 것 - 즉 다나를 억세게 끌어안은 것이었다. 다나의 얼굴은 김이 나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아이의 팔힘은 강했다. 등 뒤에서 아픔이 느껴질 정도였다. 혹시 깨어 있는 건가? 다나는 손으로 가슴을 밀쳐내려 했지만, 그럴수록 잠든 팔은 더욱 세게 조여왔다. 꼼짝없이 이대로 잠이 들어야만 할 것 같았다. 결국 다나는 당황한 채로 눈을 감았다.

"누나..."

그 때문에, 그 희미한 잠꼬대를 듣지 못했다.

*

아이가 일어난 것은 새벽 무렵이었다.

바람에 창틀이 덜거덕거리는 소리로 눈을 뜬 아이는 상반신을 일으키자마자, 자신의 옆에서 곁잠을 자고 있는 다나를 보고 굳었다. 왜 자신이 여기서 자고 있는 것인지 기억이 없었다. 마지막 기억은, 욕실에서 그녀가 머리를 다듬어주던 데에서 끊겨 있었다.

"말도 안 되는 짓을."

아이는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 때, 아이는 잠시 마레를 봤을 때 느낀 것과 비슷한 감정을 느꼈다. 자신이 이미 잃어버린 무언가를 마주하는 느낌이었다. 그래서 마음이 풀어져 버린 모양이었다. 다나가 잠에서 깨지 않도록 조심조심 팔을 뺀 아이는 일어나서 옷을 걸쳐입고 바깥으로 나섰다. 밤 산책이었다.

바깥 공기는 선선했다. 옷자락으로 스며든 밤바람은 등골을 서늘하게 어루만졌다. 정원을 헤매던 아이는 무언가를 발견하고 멈춰섰다. 그건 뒤뜰에서 목검을 휘두르고 있는 검사, 단테였다. 초인적인 오감으로 아이를 발견한 단테도 검을 멈추고 이쪽을 바라보았다.

"네가 왜 여기에 있지?"

아무래도 호노레는 아이의 방문을 단테에게는 얘기해주지 않은 모양이었다. 우연히 들렀습니다. 아이의 짧은 대답을 들은 단테는 가라앉은 눈으로 이 쪽을 바라보더니, 널브러진 목검 하나를 이쪽에 집어던졌다. 턱, 엉겁결에 받은 아이는 검을 세게 붙잡았다.

"잘 됐군. 불면증이 심해서 힘을 빼던 중인데, 좀 어울려주지 않겠나."

거부할 이유는 없었다. 그렇게 한밤의 대련이 시작되었다. 단테의 검에는 절도가 있었다. 머리를 노리고 덮쳐오는 일격의 궤적은 곧았고, 한 번도 정면 아닌 곳을 찔러오지 않았다. 검을 부딪힐 때마다 목검은 쨍하고 울어서, 손바닥 가득 강한 힘이 끼쳐왔다. 일곱 합 째, 세로로 찔러오는 단테의 일격을 아이가 후려쳐서 물러나게 했을 때, 단테는 오른손을 들었다. 잠시 휴식하자는 뜻이었다. 그는 가볍게 목검을 위아래로 휘두르며 물어왔다.

"어떤가."

맥락 없는 질문이었지만 아이는 이해할 수 있었다.

"조금 힘이 실려 있는 것 같습니다."

"역시 그렇군."

일전에, 금지된 숲에서 보았던 단테의 검에는 여분의 힘이나 잡념이 없었다. 지금은 한 번 한 번의 휘두름이 끝날 때마다, 여분의 힘이 목검을 타고 흘러오는 것이 느껴졌다. 스스로도 그 문제점을 알고 있었던 듯, 단테는 심각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얼마 전, 나와 호노레는 아우렐리우스에게 그 사실을 들었다. 그 다음부터 죽 잡념을 떨쳐낼 수가 없더군."

"아."

아이는 그 잡념의 원인을 이해할 수 있었다. 세계의 운명이 확정되었다는 사실, 그리고 자신이 그 운명을 바꿀 수 있는 몇 안 되는 사람이라는 사실, 그건 뇌에 종양처럼 달라붙을 부담이었다. 단테조차 그 사실을 무심히 흘려내지 못한 듯했다. 단테는 흙바닥에 아무렇게나 앉았다.

"결국 내가 할 일에 변함은 없다. 주어지는 적을 베어내고 베어내다 어느 날 소멸하는 게 내 업이겠지."

"그런가요."

"그렇지만 무의식이라는 게 쉽게 떨쳐지지가 않아. 너는 진작부터 이런 걸 짊어지고 있었다고 했나? 내 생각보다 더 강인한 사람이었군."

그 말과 함께 단테의 목소리는 누그러졌다. 그는 말주변이 없는 사람이었다. 그는 툭 던졌다.

"축하한다."

"예?"

"천갈궁이 되었다고 들었다만."

보여달라는 눈짓이었다. 아이는 허리춤에 묶어둔 천갈궁 파에톤을 뽑아들었다. 지잉, 뽑아드는 순간 검이 울리며 선주가 새어나오려고 했다. 아이는 온 힘을 다해서 선주를 억누르고, 태연하게 그것을 단테에게 보여주었다. 단테는 자신의 금우궁 알데바란을 마주 뽑아들었다.

"저번에, 내가 이 무구들은 베루스의 유골로 만들어진 것이란 얘기를 했었지."

"예. 기억하고 있습니다."

"너도 이 물건의 주인이 되었으니 이야기를 더 해줘도 괜찮겠군."

그리고 또 뜸을 들였다. 그는 조리있게 말하기 위해서, 많은 생각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었다.

"사실은, 베루스는 이 유골의 주인의 진정한 이름이 아니다. 그냥 통칭일 뿐이지."

"예?"

"잊혀진 신의 아나테마가 되는 방법을 알고 있겠지."

"제단에 엎드려서, 그 잊혀진 신의 이름을 부르는 것... 이었죠."

"그래. 그리고 자격 없는 자가 이름을 부르면 신격은 그 자를 태워 죽인다. 성도 8궁이 주인을 불태우는 이유는, 이 유골 하나하나가 그 제단이나 다름없기 때문이고."

단테는 또 길게 뜸을 들이더니 말했다.

"우리가 운명을 바꿀 수 있는 이유도, 이 유골을 손에 쥐고 있는 이상, 어느 정도 아나테마와 같은 힘을 가졌기 때문이겠지."

"그건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진짜 아나테마는 아니야. 그 이유는 두 가지인데, 첫 번째는 베루스가 그 무의 신의 진짜 이름이 아니기 때문이다. 두 번째는 그 제단이 여덟 개로 쪼개져 있기 때문이고."

"진짜 이름이 아니라니..."

아이의 물음에 단테는 미간을 찌푸리며 신중하게 대답했다.

"베루스의 진짜 이름이 무엇인지는 아무도 몰라. 세월 속에서 소실되어 버렸다. 그저 그가 남긴 무술이 베루스니까, 통칭으로 베루스라고 부르고 있을 뿐이지."

"그렇군요."

"하지만 그 이름을 알아낼 방법이 있다."

"그게 뭔가요?"

"베루스를 끝까지 익히는 것. 무를 완성하는 것."

아이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단테는 자신의 금우궁을 툭툭 치며 말했다.

"이 여덟 개의 유골은 진정으로 자격 있는 자의 손에 함께 들어갔을 때 다른 무기로 합쳐진다더군. 오백년 전에, 성도 8궁을 세 개까지 합쳐본 사람이 있으니 진실일 터다."

아이는 자신의 손에 들린 천갈궁을 만지작거리며 이야기를 경청했다. 단테가 계속 유골이라고 부르기 때문일까, 어떤 짐승의 뼈를 움켜쥔 듯 손바닥이 서늘했다.

"그리고 그는 네 개째의 성도 8궁을 합치려다 검에게 불타 죽었지. 그는 죽을 때가 되어서야 자신이 왜 성도 8궁을 합치려고 했는지를 밝혔다."

단테는 한 호흡 쉬고 말했다.

"베루스를 익혀서 지고의 경지까지 자신의 무를 끌어올리고, 여덟 개의 성도 8궁을 전부 하나로 합쳐서 그 진정한 주인으로 인정받았을 때, 그 자는 그 잊혀진 베루스의 진짜 이름을 알아낼 수 있다고 하더군. 즉 그는 베루스의 진정한 아나테마가 되려다 죽은 게다."

"그럼..."

"그리고 나는 네가 그 주인이 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한다."

아이는 눈을 크게 떴다. 단테는 금우궁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아셀라이 경이 굳이 무리해서 너를 제자로 삼은 이유도 그것이겠지. 무의 완성. 베루스의 복원. 그게 그녀의 소망이었으니까. 하지만 아우렐리우스에게 진실을 듣고 나서, 나는 그것을 그저 소망으로 남겨두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힘주어 말했다.

"우리 앞에 찾아온 위기는 그 정도는 이뤄내야 극복할 수 있을 것처럼 여겨지는군."

"당신은 저보다 강하지 않습니까? 그런 생각이 든다면, 당신 자신이 하면..."

"물론 나도 노력할 게다. 수련하고 수련해서, 강해져야겠지. 지금의 내가 우스워질 정도로."

단테는 딱 잘라 말했다.

"지금 이 이야기를 꺼내는 것은 그저 부탁하고 싶어서다. 그 긴 세월에도 불구하고 성도 8궁이 하나로 모이지 못한 이유는 이것들이 각기 어떤 세력의 소유물인 것처럼 보관되었기 때문이지. 내가 죽으면 금우궁은 라달라리아의 소유물이 되어서 장식품처럼 유리장 속에 보관될 거다. 나는 그래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만약, 내가 어떤 적과 싸우다 죽으면, 내 검을 받아가서 베루스에 도전해라."

미리 남겨두는 유언이다. 단테는 그렇게 말하고 일어섰다.

"물론, 네가 죽어도 마찬가지다. 그 천갈궁은 아탕칼리나 기나센에 넘기지 않겠다. 내가 가져가마."

"물론이죠."

그렇게 대답한 아이는 조용히 그의 다부진 등을 바라보았다. 저렇게 강한 자도 죽음을 생각하고 있는 것인가. 멸망의 운명이란 그렇게 짊어지기 힘겨운 것인가. 그런 생각이 머릿속에서 맴돌았다. 그 때였다.

"두 사람 다 새벽부터 여기서 뭐 하고 있어요?"

졸린 목소리가 들려왔다. 호노레였다. 그녀의 방은 1층에 있었고, 목검을 부딪는 소리에 잠을 깨서 여기까지 찾아온 것이었다. 단테와 아이를 보고 순식간에 상황을 파악한 호노레는, 얼굴을 굳히고 있는 단테에게 다가가 안겼다.

"또 불면증에 시달리고 있었나요?"

안쓰러운 얼굴로 단테를 바라보던 호노레는, 그 뺨을 붙잡고 길게 입맞춤을 했다. 윽, 천갈궁을 매만지고 있던 아이는 갑자기 신음을 흘렸다. 천갈궁에 갈무리해두었던 선주의 기운이 들끓어오르고 있기 때문이었다. 단테는 당연하다는 듯이 호노레의 머리칼을 쓸어담고 길게 입을 맞춰주고 있었다. 그 때였다. 천갈궁에서 그림자가 쏟아지듯이 흘러나와 선주의 모습을 이루었다.

"저 놈팽이는 뭐냐?"

선주는 사납게 외쳤다. 그 목소리에 놀란 호노레와 단테는 홱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이미 아이는 천갈궁을 붙잡고 저 멀리로 달려간 상태였다. 선주와 단테를 대면시킬 수는 없어서였다.

"저 빌어먹을 기생오라비는 뭔데 블뢰유에게 손을 대고 있는 거냐? 너는 그걸 왜 쳐죽이지 않고 그냥 놔두고 있나."

"아니, 기생오라비라니요. 저 분은 호노레의 연인..."

"연인? 저게? 누구 맘대로 말이냐. 몸을 내놔라. 오 분 안에 세 토막을 쳐주마."

"나잇값 좀 하세요."

아이는 당장이라도 칼을 뽑아들고 달려들 기세인 선주를 간신히 억눌러 갈무리했다. 바닥에 내려놓았는데도, 천갈궁은 생물처럼 웅웅 떨었다. 아이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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