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 불면증 ( 7 )
새벽의 방문자는 그걸로 끝이 아니었다.
단테와의 대련으로 상의가 땀에 젖은 아이는 우물가에서 물을 길어 등목을 하고 있었다. 두레박에는 살얼음이 둥둥 떠다녔다. 몸에 들러붙은 더러움과 소금기를 씻어내면서, 아이는 단테와의 만남을 곱씹고 있었다. 그의 딱딱하게 굳은 얼굴과 검에 실린 여분의 힘을 생각했다. 늘 소멸을 입에 담던 그에게도 종말은 두려운 것인 모양이었다.
"아!"
그 때였다. 익숙한 목소리가 뒤에서 울렸다. 이어 가쁜 숨소리도 자그맣게 들렸다. 아이는 두레박을 내려놓고 돌아서서 바라보았다. 그 자리, 저택의 입구에는 륜이 있었다. 안 좋은 몸으로 먼 거리를 뛰어다닌 바람에 몸을 굽힌 채 무릎을 붙잡고 색색댔다. 옷을 갈아입을 틈도 없었는지, 추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얇은 옷이었다.
"찾, 찾았어요."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 같아서 아이는 무의식적으로 륜을 받아주었다. 아이의 가슴팍에 기댄 륜의 얼굴은 새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어떻게 여기 있는 걸 알았죠?"
"밤에, 집을 나가서, 갈 곳은 여기밖에 없을 것 같아서..."
아직도 아이가 화나 있을 거라고 생각한 것인지, 륜은 머뭇거리며 말했다. 아마도 아이가 그렇게 방을 나서자마자, 밤을 꼬박 달려서 여기까지 도착한 모양이었다. 아이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륜은 와락 매달려서 말했다.
"미안하네. 전부 내 잘못이라네. 두려움 때문에 눈 앞을 보지 못해서, 자네가 얼마나 괴로울지, 옆에 있으면서도 그 마음을 생각하지 못했다네."
아이는 침묵하고 있었다. 륜은 두서없이 계속 말했다.
"하지만 믿어주세요. 호, 혹시, 제가 통령에게 그랬던 것처럼 당신을 이용하려고 한다고 생각한다면, 그건, 그건 아니에요. 맹세할 수 있어요."
아이는 눈썹을 찌푸렸다. 그렇게까지 말하지 않았는데, 아무래도 륜의 조바심은 다른 방향으로 번진 모양이었다. 그 말꼬리의 떨림에서는 두려움이 진하게 배여나오고 있었다. 아이의 등을 붙잡은 륜의 양 팔에 힘이 가득 들어갔다. 동앗줄을 붙잡는 듯한 동작이었다.
"저는 그, 그 파계 율사한테, 평생 '아이 우르드'를 위해 살아가겠다고 서약했잖아요? 절대로 제가 당신을 배신할 일은 없을 거에요. 나쁜 뜻을 가진 게 아니었어요. 앞으로도 그럴게요. 맹세해요."
거기까지 말을 마친 륜은 양 팔을 더욱 크게 벌려서 아이의 등판을 꼭 껴안았다.
"그러니까, 버리지 말아 주세요..."
있는 힘껏 껴안은 것일 텐데도 그 힘은 미약했다. 팔을 늘어뜨리고 아이는 가만히 그 힘을 느끼고 있었다.
단테의 검 위로 전해져오던 여분의 힘을 떠올렸다. 단테처럼 강인한 사람에게도, 세계의 운명과 맞서 싸워야 한다는 짐은 무거웠다. 스스로의 몸도 가누기 힘든 륜에게 그 짐은 더욱 무거울 것이었다.
"혹시 그 서약이 깨진다면, 새로운 파계 율사를 찾아서라도 백 번이고 천 번이고 맹세할게요. 절대로 당신을 이용하지 않을게요."
아이가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자 륜은 울먹이며 덧붙였다. 문득 안쓰러웠다. 신뢰를 얻기 위해 자신의 목줄을 쥐어주려 하는 점이 더더욱 그랬다. 태생적으로, 이 사람은 이런 방식으로밖에 사고할 수 없는 운명인 것 같았다.
"미안합니다."
"그리고, 그리고, 원한다면... 아."
륜은 조용히 말을 멈추었다. 아이가 자신을 마주 안아주었기 때문이었다. 가슴 가득히 달아올라 있던 조바심이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그런 걱정을 하게 만들어서 미안해요."
"그럼...그럼, 버리지 않아 주실 건가요?"
"예. 이 운명의 마지막까지."
다행이다, 륜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단단한 등판을 더욱 세게 끌어안았다.
*
2층, 다나의 방.
어느새 아침이었다. 창밖으로 들이치는 햇살에 눈을 뜬 다나는 행복한 표정으로 침대를 더듬었다. 그리고, 침대가 텅 빈 것을 깨닫자마자 번개처럼 일어났다. 부스스한 머리로 사방을 두리번거리던 다나는, 자신의 옆에서 자던 아이가 없어진 걸 깨닫자마자 울상을 지었다.
"뭐야...뭐야. 어디갔어? 어디 갔어요?"
거의 울 것 같은 얼굴이었다. 그 때였다. 방에서 다급한 말소리가 들려왔다. 한 번 들은 것이 다지만, 결코 잊을 수 없는 목소리, 그녀의 연적의 목소리였다. 버리지 말아 주세요, 그런 흐느낌이 들렸다. 다나는 벌떡 창가로 달려가 마당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마당의 상황을 본 다나는 얼굴을 귀신처럼 일그러뜨렸다. 멀거니 서 있는 아이에게, 륜이 매미처럼 매달려 있었다.
"저 민폐덩어리 여자가 지금 뭘 하는?"
그리고 다음 순간 빠르게 방 밖으로 달려나갔다. 그 꼬리침에 당하고 만 것인지, 아이가 륜을 마주 끌어안으며 무언가 속삭이는 장면이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그 속도는 마술을 사용한 것처럼 빨랐다. 지나간 자리의 촛불이 흔들거리고, 막 저택에 들어온 호노레가 눈이 휘둥그레질 정도였다. 다나는 순식간에 마당에 도착했다.
"고마워요. 더없이 고맙다네. 절대, 마지막까지, 실망시키는 일이 없도록 하겠네..."
"잠깐! 당신 지금 남의 집 마당에서 뭘 하는 건가요!"
아이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훌쩍이는 륜을 보자마자, 다나는 거세게 소리질렀다. 얼른 아이에게 매달리듯이 오른팔을 감싸안은 다나는 험악하게 륜을 노려보았다.
"내조를 개판으로 해서 신랑을 이 꼴로 돌아다니게 만든 자격 미달 인성 파탄자 주제에 어디서 불쌍한 척이에요? 아, 가짜 약혼자니까 애초에 신랑도 아니죠?"
엉겁결에 밀쳐진 륜은 다나를 바라보고 어이없다는 듯 물었다.
"자네는 뭔가?"
"저는, 어, 그러니까..."
대답할 말이 궁했다. 어물쩍 주변에는 연인 비슷한 관계로 소개되어 있지만, 공식적인 관계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평소라면 재치를 발휘해서 어떻게든 빠져나갔겠지만 지금 다나는 그럴 여유가 없었다.
"무관계한 타인이라는 뜻이군?"
"아,아닙니다!"
"우리는 지금 약혼자간의 가정사를 처리하는 중인데, 끼어들지 말아줬으면 좋겠네만?"
"가짜잖아요!"
"누가 가짜라고 그러던가?"
그 말과 함께 륜은 다른 쪽 팔에 달라붙었다. 다나는 머리끝까지 얼굴이 새빨개져서 중얼거렸다.
"아이 씨가 그, 그 너무 착하고 순진해서, 당신한테 속아서! 그 가문을 재건하기 위해서 약혼해준 거잖아요, 누가 모를 줄 알아요?"
"아, 그래, 처음에는 분명 그렇게 시작했지. 하지만 그렇게 시작한 가짜 약혼이 진짜가 되는 경우는 수두룩하지 않나? 그렇죠?"
이렇게까지 다나가 말로 밀리는 경우는 처음이었다. 궁지에 몰린 다나는 입술을 푸들거리며 중얼거렸다.
"내, 내가 먼저였는데, 나중에 끼어든 주제에..."
"먼저 나중을 따질거면 경마장에나 가는 게 어떻겠나?"
"머리! 당신 때문에 그 예쁜 머리가 개판으로 잘려 있던 거, 제가 다 다듬었거든요! 아내 된 사람이 그렇게 무관심해서야, 평생 불행할 거에요!"
"어머, 아내라는 건 인정하는 건가요?"
"아."
다나의 얼굴이 이번에는 파랗게 질렸다. 그 천변만화하는 표정을 보고 있던 아이는 문득 웃음을 터뜨렸다. 그 말다툼에서 아이는 오랜만에 활기를 느꼈다. 다나는, 이 앞에 도사린 운명을 모르기 때문에, 자신과 북서 자치령에서 헤어질 때의 상태 그대로 남아 있던 모양이었다. 그 사실은 정말로 큰 위안이 되었다.
청명한 웃음소리는 마른 공기 속에서 크게 퍼졌다. 통령이 죽은 뒤로 정말 오랜만에 지어보는 웃음이었다. 그 사실을 알고 있는 륜은 놀라서 이 쪽을 바라보았다.
"어차피 오늘 여기 찾아온 성녀 일행과 나눠야 할 이야기가 있지 않나요. 일찍 방문했다 치고, 들어가죠."
순식간에 그 지리멸렬한 싸움을 진정시킨 아이는 저택 안으로 걸어들어갔다. 어린아이처럼 얼굴을 일그러뜨린 채, 팔꿈치로 륜을 쿡쿡 찍으면서 다나는 뒤따랐다. 그 모습을 흘깃 쳐다보며 아이는 속으로 질문해보았다. 만약 자신과 륜이 짊어진 짐을 누나가 알게 되면, 누나는 계속 저렇게 있을 수 있을까. 아마 힘들겠지.
'그러니.'
아이는 맹세했다. 저 모습을 지켜주기로. 종말이 임박했다는 사실을, 누나에게는 절대로 들려주지 않기로.
*
그래서, 앞으로의 계획에 대한 대화는 다나를 배제한 채 이루어졌다.
호노레, 단테, 아이, 그리고 륜이 모인 회담은 성공적이었다.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서 륜은 놀랄 만큼 정교한 청사진을 지니고 있었고, 성녀와 단테는 협조적이었다. 대담의 결과는 양피지에 기록되었다. 아우렐리우스에게, 그리고 믿을 만한 어포슬의 회원들에게 전달하기 위해서였다.
'이 정도라면 걱정할 것도 없겠어.'
호노레는 대담의 내용을 곱씹으며 중얼거렸다. 수천 번은 다시 고쳐 쓴 소설처럼 륜의 계획은 정교했다. 그 계획을 준수하기만 한다면 종말을 막아내는 건 물론 제국을 재건하는 것도 가능해 보였다. 단테를 올려다보며 미소를 지은 호노레는 다른 사람들이 전부 마차에 올라타기를 기다렸다. 짧은 휴가가 끝나서, 지금 성녀 일행은 돌아가기 위한 마차에 올라타는 중이었다. 그리고 호노레는 눈살을 찌푸렸다.
"아이 씨, 같이 가면 안 될까요?"
다나가 아이의 손을 붙잡고 간청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눈에는 눈물이 글썽글썽 맺혀 있었지만, 호노레는 직전에 고개를 돌린 다나가 자신의 눈을 찌르는 것을 보았다.
"요즘 제도는 너무 흉흉하고 무서워서, 그래서, 누가 옆에 있어줬으면 좋겠어요. 아주 강하고 똑똑하고 현명한 사람이..."
아마도 얼마 전의 싸움으로 위기감을 느낀 나머지, 륜을 따라해서 아이를 끌고가려는 모양이었다. 아이는 난처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호노레는 한숨을 내쉬며 뒤에서 다나의 목덜미를 붙잡았다.
"어머, 그건 당신의 스승인 저를 뜻하는 말이겠군요. 그렇죠?"
"윽!"
"어린애처럼 투정은 그만 부리고 이제 갑시다."
"잠, 잠깐만요! 마지막으로, 이 꽃이라도...!"
버둥거리며 마차로 끌려가던 다나는 자신의 머리에 꽂혀 있던 흰 수국을 꺼내어 아이에게 건넸다. 그런데 흰 손이 그 꽃을 가로챘다. 륜이었다. 만면에 미소를 지으며 그 꽃을 빼앗은 륜은 자신의 머리에 수국을 꽂고 말했다.
"선물 잘 받겠네. 어때, 예쁜가?"
"아니, 당신한테 준 게 아닌데!"
그 항변도 무색하게, 다나를 태운 마차는 히히힝 하는 말소리와 함께 출발해버렸다. 호노레는 차창에 붙어서 격렬하게 항의하는 자신의 제자를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이걸로 이제 정말로 작별이군요."
그리고 호노레는 예전부터 준비해두었던 것을 건넸다. 수정으로 이루어진 종달새였다. 그것을 받아든 아이는 눈을 크게 떴다.
"이건?"
"라달라리아의 고위직에게 주어지는 통신 수단입니다. 수정새라고 하지요. 앞으로 긴밀하게 이야기를 나누어야 할 일이 많을 테니, 이번에 건네두려고 준비했습니다."
"이건 함부로 남에게 줄 수 있는 물건이 아닌 걸로 아는데..."
륜이 되물었다. 그 말대로였다. 수정새는 원래 성녀가 자신의 집행관에게만 선물할 수 있는 것이었다. 단테도 이미 수정새를 가지고 있을 테니, 이건 여분의 수정새를 슬쩍해서 건네준 것이라는 뜻이 되었다. 들킨다면 어마어마한 후폭풍이 일어날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호노레는 장난스러운 표정으로 말할 뿐이었다.
"안 들키면 되잖아요?"
"저 말괄량이가 누구한테 배운 건지는 대충 알겠군요."
륜은 질렸다는 듯 말했다. 하지만 호노레는 입을 가리고 웃으며, 진짜 이유를 들려주었다.
"농담이에요. 당신들의 예지대로라면, 이제부터 제국 내부는 아지프의 발호로 난장판이 되겠죠. 어쩌면 긴급하게 제국 내부에서 당신들의 도움이 필요할 지도 몰라요. 그 때 사용하기 위해 마련한 거랍니다."
이어 덧붙였다.
"물론, 당신들이 도움이 필요할 때 쓸 수도 있고 말이죠. 언제든 힘 닿는 데까지 도와드리죠."
그 말을 마치고 호노레 역시 마차에 올라탔다. 작별이었다. 수정새를 아이에게서 건네받은 륜은, 이건 좋은 사용법이 있을지도 모르겠다며 연구하기 위해 먼저 집으로 돌아갔다. 아이는 언덕에 홀로 남아 있었다.
그녀를 태운 마차가 멀어졌을 때였다. 갑자기 천갈궁이 지이잉 울렸다. 그 부름에 응해 천갈궁을 뽑아들자, 그 검끝에서 선주가 구름처럼 쏟아져나왔다. 선주의 그림자는 호노레의 마차가 사라진 언덕을 바라보며 해를 등지고 섰다. 노을이 비치는 그 등은 넓고 쓸쓸해보였다.
"갔군."
"아쉬운가요?"
"가버렸군."
그렇게 중얼거리던 선주는, 갑자기 고개를 홱 돌리고 물었다.
"너, 블뢰유의 연인이라는 그 자식보다 약한가?"
아마도 단테를 뜻하는 것일 터였다. 아이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선주는 복잡한 표정을 짓더니 툭 내뱉었다.
"그 꼴은 못 견디겠군."
"예?"
"지옥도를 그리라고 했던 그 조건은 취소하겠다. 도와주마. 네가 강해질 수 있도록."
아이는 눈을 크게 떴다. 이어서 선주는 조건을 덧붙였다.
"단, 새로운 조건이 있다."
"그게 뭡니까?"
그리고 아이는 선주의 조건을 듣고 피식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언젠가 그 자식을 처참하게 쓰러뜨리겠다고 약속해라."
수락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그러나 그렇게 말하는 선주의 어조는 더없이 진지해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