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메이지 슬레이어-174화 (174/279)

32. 명장 ( 2 )

"이거 놔, 이익, 놔!"

"한번만 더 발버둥치면 기절시킬 거다."

"윽..."

아이의 손에 매달려 발버둥치던 꼬마는 그 말을 듣자 축 늘어졌다. 막사에 돌아오니 저녁이었다. 서산에선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었다. 거침없이 걸어가는 아이의 뒤로 전령들이 황급히 따라붙어서 보고를 늘어놓았다.

ㅡ먼 곳에서 잇달아 불이 오르고 있습니다. 봉화는 아닌 듯합니다

ㅡ여덟 개의 군진이 깊고 길게 늘어서서 진로를 막고 있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ㅡ작센의 수도, 몬첸에서 외교적 중재를 연설하던 은행가가 참살당했습니다. 적들의 내부 여론은 극히 악화되었지만, 온건파들과의 접선 역시 대거 끊어졌습니다.

아이는 블로어를 불러내어 손에 쥔 채로 그 이야기를 들었다. 그 모든 정보는 륜에게 흘러들어갔다. 조디악 측에서 무슨 수작을 부린 것인지, 아직도 그들의 계획은 읽히지 않는다고 했다. 그 읽히지 않는 계획을 간파하려면 모든 정보를 건네주어야만 했다. 마지막 전령의 긴 보고를 끝으로, 아이는 막사의 중심으로 들어갔다. 눈먼지를 품은 바람이 귀밑머리를 뒤흔들고 어둠 속으로 스러졌다. 비스듬한 깃대 끝에서 깃발은 석양에 비끼어 펄럭거렸다. 중앙에 멈춰 서서 잠시 사방을 돌아보던 아이는, 정갈한 군막으로 들어섰다.

"젊은 가주, 무슨 일이시오?"

선봉에 청년 통령만을 보내는 것이 못미더워서, 감시역이자 조력자로 시사이드의 가주는 따라붙었다. 그가 있는 군막이었다. 시사이드는 레이븐사이드와 오랜 우호를 다진 용병단이었다. 그래서인지, 시사이드의 가주는 아이를 젊은 가주라고 불렀다. 짧게 목례한 아이는 손에 축 늘어진 꼬마를 시사이드의 가주 앞에 내려놓았다.

"이 꼬마는?"

"오늘 적진에서 주운 녀석입니다."

"행색을 보니 알겠소. 그런데 왜 내게 데려온 것이오?"

"이 녀석을 에페 바체로 삼으시면 어떨까, 제안을 드리기 위해서입니다."

중년인의 눈이 자그맣게 찌푸러졌다. 그는 말을 고르고 골라서, 엄하면서도 존중하는 투로 말했다.

"젊은 가주, 가주가 최근 연달아 혁혁한 전공을 세우고 있는 것은 알겠소. 그러나 그 사실이 불필요한 온정을 베풀어도 된다는 뜻은 아니오. 온정은 마음의 여유라고 나는 생각하오. 전쟁에서는 늘 여유를 가진 쪽이 패배하기 마련이오."

"온정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아이는 꼬마의 뒷목을 붙잡고 들어올렸다.

"이 꼬마는 제 목 바로 뒤까지 기척을 숨기고 덮쳐왔습니다. 훌륭한 암살 시도였죠. 멸문당한 명가의 자손인 듯한데, 괜찮은 무골입니다. 기르는 쪽이 낫겠다고 생각했을 뿐입니다."

"암살? 그럼 젊은 가주는 본인을 암살하려 한 꼬마에게 그런 기회를 주고 싶다는 말이오?"

아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시사이드의 가주는 더 이상 거절하지 않았다. 시종을 불러 아이를 씻기도록 시킬 뿐이었다. 들어올 때와 마찬가지로 꾸벅 목례하고 아이는 천막을 나섰다. 바람은 멎어 있었다.

자신의 군막으로 들어온 아이는 그물침대에 엉덩이를 깊이 파묻었다. 기름 타는 냄새가 심하게 났다. 광원은 자그맣게 매달린 등불뿐이었다. 작은 불꽃을 멍하니 들여다보던 아이는 문득 담배를 꺼냈고, 광원은 둘로 늘었다. 아이는 가슴 깊숙이 연기를 빨아들이고 또 내뱉었다. 손을 떨어 검은 재를 털고 아이는 말했다.

"들어오세요."

방문자를 눈치챘기 때문이었다. 그건 에길론이었다. 에페 바체 시험에서 보여주었던 그 영민한 두뇌를 인정받아서, 참모 자격으로 따라온 것이었다. 머뭇거리던 에길론은 아이의 손짓을 보고 결심한 듯 방 안으로 들어와 이야기를 풀어놓기 시작했다.

"각하, 오늘 거둔 포로를 전부 죽여야 합니다."

그게 에길론이 꺼낸 첫 마디였다. 순한 연기가 피어오르는 담배를 문 채로, 아이는 물끄러미 그런 말을 하는 에길론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에길론은 이어 말했다. 오래 생각한 것인지 거침이 없었고 막힘도 없었다.

"제가 방금 전까지 뭘 하고 왔는지 아십니까? 포로의 인계 작업과 명부 작성, 그리고 방첩 작업입니다. 모든 인력이 그 작업을 처리하느라 결국 여기 발이 묶인 채 오늘도 숙영하게 됐지요. 각하께서는 오늘 흠 잡을 곳 없는 승리를 거뒀습니다만, 그럼에도 군대는 하루 멈춰서고 말았습니다."

"그렇습니까."

"그리고 고작 민병 500을 소모해서 하루의 여유를 벌었다는 점에서, 오늘의 궁극적인 승리자는 오히려 적군이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에길론이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인지 알 수 있었다.

"첩보를 들었습니다. 오늘 마주한 것과 같은 군진이, 깊은 종심을 이루며 요새 바로 앞까지 이미 형성되어 있다고 하더군요. 저들의 목적은 지연전입니다."

"알고 있습니다. 뻔한 의도니까."

"그럼 지연전에 어울려주어서는 안 됩니다!"

에길론은 격정적으로 말했다. 아무리 개인적인 친분이 있더라도, 통령의 앞이라는 걸 생각하면 무례한 태도였다. 그러나 흥분한 에길론의 말은 멈출 줄을 몰랐다.

"각하, 이대로 적의 지연책에 놀아나게 된다면, 눈 앞의 희생보다 더욱 큰 희생을 마주하게 될 겁니다. 작센인의 입장에서 바라보아도 그렇습니다."

"왜죠."

"또 다른 첩보 때문입니다. 적들의 농지와 민가에서 잇달아 불길이 치솟고 있다고 합니다. 십 년은 쓰지 못하도록 새까맣게 타오른 농토에서, 수색자는 완전히 불탄 기름통을 주워왔습니다. 누군가가 고의적으로 농지를 파괴하고 있다는 뜻이죠. 그건,"

심호흡을 한 에길론은 선언하듯 말했다.

"적이 청야전을 준비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선봉대를 최대한 늦추는 이유는, 우리의 목표인 국경요새를 둘러싼 배후지 전체를 불태우고 약탈할 시간을 벌기 위해서겠지요."

청야전. 아이는 중얼거렸다. 그 뜻은 잘 알고 있었다. 성이나 천혜의 협곡과 같은, 우수한 방어 거점을 가진 측이 상대의 현지조달을 막기 위해서 전쟁터 인근의 농토와 민가를 전부 파괴하는 전술을 뜻했다. 지금 선봉대의 목적인 국경요새는 지난 삼백년 간 함락된 적이 없는 곳이었다. 속공을 목표로 별다른 전쟁 준비 없이 밀고들어오는 기나센의 군세는 지구전을 치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청야전은 효과적인 전술입니다만, 실행하는 자를 정치적인 죽음과 장기적인 파멸로 이끄는 전술입니다. 당연하지요. 자국의 군대가 지켜야 할 자국민을 학살하고 약탈한 끝에 터전마저 파괴해버리는 이율배반을 저질러야 하니 말입니다. 어떤 지휘관도 이런 걸 하고 싶어하진 않을 겁니다."

"그런데도 적들은 그걸 실행하고 있다, 그 말이지요. 그럼 참모는 그 이유가 뭐라고 생각합니까."

에길론은 천천히 말했다.

"수성전은 기본적으로, 성 안에 도사린 자들의 급양 능력이 공성하는 측의 급양 능력을 웃돌 때 성립합니다. 속공을 목표로 편성된 우리 군은 급양 능력이 좋은 편이 아닙니다. 그런데도 적이 굳이 청야전 같은 극단적인 전략을 택한 것은, 수성전을 이룰 기본 조건이 안 된다는 뜻입니다. 즉, 지금 국경 요새의 급양 사정이 좋지 않다는 뜻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일리 있는 말이었고, 번뜩이는 통찰이었다. 작년과 재작년, 작센의 변방에는 심한 흉년이 있었다. 설마 기나센과 전쟁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못한 성주는 거듭해서 군량고를 풀어 난민을 구휼했다. 그 당시에는 칭송받은 결정이었지만, 그 결정이 지금 국경 요새의 목을 죄여오고 있었다. 에길론의 통찰은 륜이 사전에 들려준 것과 같은 것이었다. 륜이 세밀한 자료조사 끝에 알아낸 것을, 에길론은 그저 적의 동태를 역산하는 것으로 파악해낸 것이었다. 아이는 새 담배를 꺼내 불을 붙이며 물었다.

"그래서?"

"민가와 농지를 약탈해서 그 급양력을 성 안에 보태고, 우리의 현지조달을 막아서 급양 능력을 깎아야만 수성전이 성립될 정도로 적들이 위태롭다는 뜻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취해야 할 일은 간단합니다. 군진을 전부 쳐부수고 속공으로 진군해서, 적의 보급로를 끊어내야만 합니다."

"그렇지만 저 군진들을 그냥 지나칠 수는 없지 않습니까."

에길론은 표정을 굳히고 말했다.

"그러니, 오늘 거둔 포로를 전부 처형하십시오."

아이는 말 없이 에길론의 표정을 들여다보았다. 그 입꼬리가 흔들리는 것이 보였다.

"이유는?"

"지연전을 위해 급조된 저 군진들은 종심이 깊을 뿐 두께가 얕습니다. 각하께서는 계속해서 적의 군진에게, 군진의 민병들에게 온정을 보이셨죠. 그게 그 얇은 두께에도 불구하고 군진들을 유지시키는 원동력이 되고 있습니다."

"조금 더 직설적으로 말하십시오."

"각하와 맞서 싸우더라도 우리가 죽지는 않는다, 그러니 탈영하거나 저항하느니 얌전히 기다리다가 싸워보고 투항하자. 그런 간사한 생각이 민병의 가슴 깊숙이 도사리고 있다는 뜻입니다."

인간은 그런 생물이라고 에길론은 덧붙였다.

"아까 군진에서 있었던 일은 저도 들었습니다. 어떤 겁 없는 꼬마가 암살을 기도했다고 하더군요. 여론을 신경쓰시는 것이라면, 그건 좋은 명분이 됩니다. 생포한 포로 500명을 전부 몰살하고 풍편에 그 소식을 싣어 보내십시오. 그러면 군진들은 사기 저하와 탈영으로 알아서 무너질 것이고, 우리는 국경 요새가 청야전을 마치기 전에 요새에 당도할 수 있을 겁니다."

아이의 입 끝에서 담뱃불이 뻐끔거렸다. 어둠 속에서, 그 담뱃불은 짐승의 눈동자처럼 보였다. 에길론은 그 담뱃불을 정면으로 바라보며 직언했다.

"압니다. 각하께서는 이런 종류의 결정을 내리는 사람이 아니시지요. 하지만 누군가가 짊어져야만 하는 죄입니다. 제가 짊어지겠습니다."

아이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널찍하게 펼쳐진 등이 에길론의 등 앞에 펼쳐졌다.

"의견은 잘 들었습니다. 밤이 깊었으니 돌아가십시오."

"각하..."

"죄는 다른 사람이 대신 짊어질 수 없는 겁니다. 벌은 짊어질 수 있을지언정."

명백한 거부였다. 하긴, 애초에 이런 사람이었으니 성좌 자리에 오른 것이겠지. 에길론은 한숨을 내쉬고 천막을 빠져나갔다. 텅 빈 천막에는 곧 아이 혼자 남았다. 그물 침대에 걸터앉은 아이는 블로어를 꺼내들었다. 륜과 대화를 나누기 위해서였다.

"의견은 잘 들으셨습니까?"

ㅡ놀랍군. 저 녀석을 참모로 딸려보내길 잘 했다는 생각이 드니 말일세.

"그 말뜻은, 당신도 포로를 전부 죽이라는 말에 동의한다는 건가요."

ㅡ글쎄, 내가 동의하면 그대가 하겠는가?

"안 하죠."

블로어 너머로 웃음이 터져나왔다.

ㅡ나도 물론 그런 제안을 할 생각은 없었다네. 저 아이의 걱정은 타당하지만, 그건 기나센의 참모로서 보았을 때 타당한 것이지. 우리의 입장에서 타당한 것은 아니지 않나.

아이는 블로어의 서늘한 검면에 이마를 대고 중얼거렸다.

"그렇죠."

ㅡ우리의 목표는, 작센을 정복하는 게 아니라...

"작센을 통합하는 거니까."

이 군세 안에 모인 기나센 사람들의 목적은 작센을 정복하는 것이지만, 두 사람에게는 달랐다. 작센은 기나센과 평화롭게 통합되어야 했고, 이어서 제국과의 전쟁에 나서주어야만 했다. 그래야만 세계의 멸망을 막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고로 증오와 반목을 낳는 승리는 이 두 사람에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ㅡ예상대로 청야전을 펼치는 것을 보면, 우리의 계획이 절반은 성공한 것이나 다름없군.

블로어가 울리며 륜의 목소리를 전해주었다.

ㅡ저 멀리서 작전을 지휘하고 있는 것은, 우리의 예상대로 그 사람이겠지.

청야전은 어중간한 권위로는 실행할 수 없는 전략이다. 조디악 때문에 민심이 혼란해진 작센에서, 이토록 우직하게 전술을 밀어붙일 수 있는 자는 단 하나밖에 없었다. 아이의 눈에 먼 들판이 불타오르는 환영이 어른거렸다. 불길이 치솟고 있다는 것은, 그가 왔다는 뜻일 터였다.

우국의 명장, 카이베크.

기나센에 비해 모든 것이 열세라고 평가받는 작센이 배출한 유일한 희망, 수성의 명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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