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메이지 슬레이어-175화 (175/279)

32. 명장 ( 3 )

여인은 쌀독을 끌어안고 죽었다.

열어보니 쌀 세 줌이 들어 있었다. 세 줌 때문에 죽은 것이었다. 여인의 가슴에서 칼을 뽑아낸 부관은 몸을 심하게 떨었다. 카이베크는 태연하게 텅 빈 듯 보이는 쌀독에 손을 밀어넣어서, 생쌀을 입에 집어넣었다. 쌀은 말라 있었다. 단단한 겉면이 이빨에 부서지며 풋내가 목구멍으로 쏟아졌다. 그들은 지금, 자국민의 민가를 약탈하는 중이었다.

"서둘러라. 아직도 들러야 하는 지점이 많다."

지점. 그는 약탈할 마을을 지점이라고 표현했다. 부관은 심하게 떨며 쌀독의 바닥을 긁어 자루에 털어넣었다. 민가 밖에서는 수레가 기다리고 있었고, 그 위에는 이렇게 약탈한 물자가 가득 쌓여 있었다. 작센군, 국경 요새의 군세가 들리는 마을마다 불길이 치솟고 죽음이 일렁였다. 노인과 어린아이들은 한 구석에 퀭하니 모여 앉아서, 허물어지는 그들의 마을을 바라보았다.

"비켜라."

도리깨를 들고 저항하는 농부가 있었다. 카이베크는 직접 칼을 휘둘러 자루를 부수고 목을 베어냈다. 보리이삭 위로 뜨끈한 피가 쏟아졌다. 그 피 묻은 보리를 주워든 카이베크는 앞니로 껍질을 부수고 목 너머로 삼켰다. 더운 피의 비린내와 풋것의 비린내가 목구멍 속에서 뒤엉켰다.

"저, 장군..."

고개를 돌리니 부관이었다. 그는 심하게 떨며 물었다.

"이렇게 해야만 하는 이유가 있는 겁니까?"

카이베크, 그는 군인의 귀감으로 불리던 자였다. 부관은 자신이 카이베크의 부관임을 자랑스럽게 여겼다. 얼마 전부터 반복되고 있는 이 참상은, 그 자아를 산산조각내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우리는 그들을 지키기 위해 그들이 낸 세금으로 살아가는 것 아니었습니까? 도리어 이런 짓을 해야만 할 정도로 상황이 위중합니까?"

"아니, 그렇지는 않다."

"그렇다면 어째서! 왜 이런 길을 택하셨습니까?"

그 항명에 가까운 절규를 듣고 카이베크는 천천히 자신의 부관을 돌아보았다. 아들뻘이었다. 자신을 따라하기 위해 억세게 기른 수염이 턱 끝에서 푸들대고 있었다.

"섬멸을 위해서다."

"섬멸? 무슨 섬멸 말입니까? 국경의 모든 민촌의 섬멸 말입니까?"

"경고다. 상관을 대하는 예를 갖춰라."

부관의 수염은 더욱 심하게 떨렸다. 태연하게 걸어가는 카이베크의 옆에서 불길이 화륵 치솟았다. 밭에 불을 지른 것이었다. 매캐한 연기 사이로 그의 목소리가 울렸다.

"이미 이 나라의 정세는 혼탁해졌다. 조디악이 마각을 드러낸 이후로, 민의는 정부를 의심하고 원망하고 있다."

불똥이 눈 앞에서 크게 튀어올랐다. 카이베크는 눈살을 찌푸리며 계속 걸었다.

"국경 요새는 이 나라의 가장 중요한 요새다. 지원을 끌어모으면, 어떻게든 버티는 것 정도는 할 수 있겠지. 하지만 말이야, 우리가 너무 태세를 견고하게 만들면, 그 애송이 통령이 이끄는 군세는 일찌감치 회군할 테다. 안 그런가?"

"그렇...습니다. 그럼 좋은 것 아닙니까?"

"좋지 않아. 그들은 재침할 것이기 때문이다. 내년? 아니면 내후년이 될지도 모르겠군. 그 애송이의 임기는 막 시작되었다. 조국을 정복하는 것은 그 애송이의 숙원이 될 것이야. 아마도 그 임기 내내 걸쳐 재침해오겠지. 그리고, 이 난장판이 된 조국은 날이 갈수록 엉크러질 것이다."

통곡 사이로 발소리가 크게 울렸다. 카이베크는 읊조렸다.

"내 피폐한 조국은, 그 재침을 막아내지 못하겠지."

"그럼..."

"나는 이 전쟁을, 아니 이 전투가 조국의 실질적인 마지막 전투가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물에 빠진 자가 살기 위해서 못할 것이 없듯이, 나의 조국도 그러하다."

카이베크는 군인의 귀감이라 불리는 명장이었다. 그는 백오십 명으로 일만여 명이 공성하는 성채를 지켜내어 유명해졌고, 축성술에도 높은 식견을 가지고 있었다.

"나는 적들의 군세와 진군의 속도로부터 대략적인 작전 기간을 유추해냈다. 적들은 6개월 이상의 장기전은 계획하지 않고 있어."

전쟁이 터졌을 때, 조디악에게 장악당한 왕실은 군권을 카이베크에게 넘겼다. 이 난국에서 믿을 수 있는 자가 그밖에 없기 때문이었다. 공성을 잘 한다는 것은, 포위된 상황에서 살아남는 데에 능하다는 뜻이었다. 그는 급양의 전문가나 다름없었다. 그런 그이기에 유추해낼 수 있던 것이었다.

"그러니 청야전을 펼쳐야 한다. 적군이 영리하다면 금세 눈치채겠지. 이런 극단적인 수단을 사용할 정도로 우리의 급양이 좋지 않다는 사실을 말이야."

"그게... 그게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만약 우리가 삼 년, 사 년어치의 군량을 확보하고 여유롭게 성채를 지키기만 한다면, 저들은 한 달도 되지 않아 돌아갈 것이다. 그 후미를 우리가 들이쳐 부술 수 있는가? 불가능하다. 그 애송이가 후미를 지킬 테고, 우리는 그보다 강한 무력을 준비할 수 없기 때문이다."

부관은 어느새 카이베크의 말에 빠져들어 있었다. 아무래도 이 청야전은, 한 두가지가 아니라 수많은 변수를 고려한 끝에 종합적으로 선택된 모양이었다. 카이베크의 말은 거침이 없었다.

"하지만 청야전을 펼쳐서, 이런 좁쌀 한 줌 보리 한 줌까지 긁어가는 모습을 보여준다면? 적들은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기대할 것이다. 서로 군량이 없다면, 풀뿌리조차 캐먹을 수 없는 성 내부가 더욱 불리하니 말이다. 우리의 성채를 포위하고 기약없이 기다리겠지."

부관의 등에서 식은땀이 흘렀다. 그렇게 정밀하게 모든 것을 계획하는 카이베크의 깊이에 놀랐기 떄문이었다.

"그럼, 적이 미련을 가지고 퇴각하지 못하게 붙들어두기 위해서..."

"맞다. 이제야 내 부관답군. 서로 밑독의 바가지까지 긁어먹을 정도로 궁핍하고 쇠약해질 때까지 버틴다. 그리고 그 쇠약해진 군세를 섬멸한다. 첫 전쟁부터 군세를 섬멸당한다면, 그 애송이 통령은 정치적 기반을 잃고 실각하겠지. 재침은 없어진다."

그것이 카이베크가 이 잔혹한 내핍정책을 지휘하는 이유였다. 부관은 눈썹을 떨며 물었다.

"그렇게 유도대로 잘 되겠습니까?"

"나는 이미 단서를 여기저기 뿌려두었다. 우리가 확보할 수 있는 성채의 총 군량이, 약 6개월치라는 정보다. 적들의 군량과 정확히 일치하는 양이지."

그렇게까지 설계해두었는가... 군관은 침묵했다. 카이베크의 계획에는 빈틈이 없어 보였다. 아니, 빈틈이 있다. 부관은 머리를 들고 물었다.

"그렇다면 장군의 말씀대로 쌍방이 쇠약해진다면, 대체 그들을 어떻게 섬멸할 생각이십니까?"

"방책이 있다."

"방책이라니, 하늘에서 구원군이라도 떨어진다는... 아."

그리고 부관은 입을 크게 벌리고 소리쳤다.

"제국을 끌어들이실 생각입니까?"

카이베크는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부관을 노려보았다. 그러나 부관은 충격으로 그 낌새를 알아채지 못하고 떠들 뿐이었다.

"그렇지요, 적들이 군세를 일으킨 명분은, 작센과 기나센을 통합해서 제국에게 저항하겠다는 것이지요. 장군의 계획대로라면, 6개월 후 적의 군세는 사기와 전력이 형편없이 깎여 있는 약군이 됩니다. 그 뒤를 제국이 망치가 되어 후려친다면, 그래서 기나센의 의지를 꺾어둘 수 있다면, 제국 측에서도 참전하지 않을 이유가 없지요."

"부관, 입을 다물어라. 경고다."

"그럼 대가는 무엇입니까? 대가... 설마?"

자신의 말에 빠진 부관은 카이베크의 안색을 살피지 못했다.

"설마? 이 국경 일대 전부입니까?"

"나는 이미 수없이 경고했다. 입을 다물어라."

"그렇군요. 그러니 이렇게 잔혹하게 청야전을 치룰 수 있는 것이군요. 어차피 이 전쟁이 끝나면 우리의 땅이 아니라 제국의 자치령이 될 테니 말입니다. 방금 제가 죽인 아낙도 작센의 아낙이 아니라 자치령의 이름 없는 아낙이 되는 것이겠지요?"

"부관!"

"당신은 쓰레기입니다!"

카이베크가 발걸음을 멈추고 소리지르자, 부관은 마주 악을 내질렀다.

"자치령이 어떤 꼴로 운영되는지는 이미 잘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지켜야 할 국민들을 도탄에 몰아넣는 것도 모자라서, 영영 대물림되는 노예로 만들 생각입니까? 그렇게 지켜낸 나라에 대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군인은 정무적 판단을 하지 않는다. 조국의 안위와 역사를 지켜낼 뿐이다."

"인간은 정무적 판단을 해야 합니다! 당신은 인간이 아닙니까?"

부관은 칼까지 뽑아들었다. 불똥이 튀어 칼 위에서 번쩍거렸다. 카이베크의 굳은 얼굴이 검면 위에서 일렁거렸다.

"자국민을 수탈하고 자국민을 노예로 팔아넘기는 걸 대가로, 허울뿐인 나라를 지키는 일 따위 나는 못하겠습니다. 장군, 이 짓거리를 멈추십시오."

"멈춰야 하는 건 그대의 하극상이다."

카이베크는 마주 검을 뽑아들었다. 둘이서 한참을 걸어온 탓에, 사방에는 지키는 사람 하나 없었다. 먼 밭과 과수원으로부터 옮겨붙은 들불만이 두 사람을 벽처럼 둥글게 감쌀 뿐이었다. 부관은 기합을 내지르며 달려들었고, 세 합 만에 승부는 났다. 카이베크는 얼굴에 난 긴 상처로 피를 흘리며, 자신의 발 아래 쓰러진 부관을 바라보았다. 부관의 가슴에는, 아까 빼앗은 좁쌀 주머니가 들어 있던 모양이었다. 칼에 꿰뚫려 쏟아진 좁쌀은 피웅덩이 위에 섬처럼 떠 있었다. 카이베크는 무릎을 굽혀 그 쌀알을, 지독한 비린내를 어금니로 깨물었다. 그것이 그가 타인을 기억하는 방식이었다.

"명장... 명장이라."

그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아지랑이가 피어오르는 길로 멀어져갔다.

*

아이의 천막 안에서, 아이와 륜은 여전히 블로어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ㅡ조디악의 목적은 기나센과 작센을 통합하는 것. 그리고 미리 확보해둔 사소필렌의 성물, 컨쿼러를 이용해서 세계의 멸망을 견뎌내는 것일세. 막는 것이 아니라, 견뎌내는 것.

"하필 기나센과 작센을 확보해야 하는 이유는, 그 컨쿼러를 운용하기 위해선 기나센과 작센에 가득한 용병들이 필요해서라고 그랬죠."

컨쿼러는 먼 옛날 사소필렌의 7위계가 만들어낸 성물이었다. 7위계의 마술사는 그 성물의 강력함을 염려했다. 자신들의 후예가 상인과 혁신의 마술사에서 벗어나서, 전쟁광이 되지나 않을까 하는 염려였다. 그래서 그는 컨쿼러에게 제약을 걸었다. 신기를 사용하며 마술사가 아닌 자들의 무리가 의지를 함께할 때에만 가동할 수 있다는 제약이었다. 신기를 사용하며 마술사가 아닌 자들로는 용병, 성기사, 집행관이 있었다. 모두 사소필렌과는 연관이 없는 집단이었다. 즉, 사소필렌이 자의적으로 전쟁을 일으키지 못하게 통제하려는 제약이었다.

ㅡ그래. 조디악은 기나센과 작센을 장악해서, 컨쿼러의 힘으로 아발랑센 산맥 일대를 지켜내고, 거기에 자신들의 나라를 세울 생각이었지.

"그리고 우리의 목적은..."

ㅡ그 계획을 위해 안배한 모든 것을 탈취해서, 컨쿼러를 다르게 사용하는 것.

"기나센과 작센을 통합하고, 컨쿼러를 탈취해서... 멸망의 원인을 제거하기 위해 맞서 싸우는 것."

두 사람은 각자의 방에서 계획을 곱씹었다. 이것이 륜이 세운 계획의 골자였다. 그리고 그 계획을 위해서, 카이베크 아인샤프. 그 자는 반드시 이 국경 요새로 와야만 했다. 륜은 자신의 방에서 작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가 온 것이 확실하다면, 읽을 수 없었던 조디악의 심계에도 불구하고 첫 단추는 제대로 꿰어진 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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