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메이지 슬레이어-176화 (176/279)

32. 명장 ( 4 )

콰르시 둔전촌.

주둔병과 농민이 같이 밭을 일구기에 제일 먼저 민병이 징집된 곳이었다. 변방치고는 꽤나 풍요로워서 마을 중심에 커다란 풍차도 세차게 돌아갔던 땅이건만, 지금 그 곳에 발을 내 딛은 사람들의 눈에 보이는 것은 폐허였다. 자랑하던 풍차는 무너진 벽돌에 파묻혀 날개가 새까맣게 그슬렸고, 검게 불탄 논밭과 잔해에선 건져낼 삭정이 하나 없었다. 자신을 콰르시 둔전촌의 촌장이라고 소개한 남자는 마을 어귀에서 무릎을 꿇고 엎드렸다. 다리에 힘이 풀려 쓰러진 것이었다.

"이건, 이건..."

포로까지 먹일 군량이 기나센에겐 없었다. 의논 끝에, 생포한 포로는 내년 농사를 위해 비축했을 종자 절반을 받고 풀어주기로 결론을 내렸다. 말도 안 되게 저렴한 몸값이었고, 자비로운 조치에 포로들은 연신 머리를 조아려 통령을 칭송했다. 자신보다 훨씬 나이가 많은 자들이 줄지어 엎드린 모습을 보고 있자니 입맛이 썼다. 아이는 품에서 담배를 꺼내, 치익, 불을 붙여 입에 물었다.

"니엘! 루이사!"

촌장은 짐승처럼 괴성을 지르며 잔해로 불탄 마을을 헤매었다. 아이는 무심히 그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몸값을 받기 위해 그들은 가장 가까운 마을인 콰르시 둔전촌에 들렀고, 그리고 이 참상을 목격한 것이었다. 미친 사람처럼 텅 빈 마을을 헤매던 촌장은 곧 서까래 밑에 깔린 백골을 발견했다. 손에서 피가 나도록 힘을 주어 서까래를 밀어내자, 백골이 가득 담긴 구덩이가 드러났다. 아마도 이 구덩이에 아녀자와 노약자를 몰아넣고 불을 지른 모양이었다.

"누가, 누가 이런 짓을... 당신들이오?"

촌장은 자리에서 일어나 누구에게랄것도 없이 소리질렀다. 아이의 옆에 서 있던, 시사이드의 가주는 눈살을 찌푸렸다.

"머리가 달려 있으면 생각을 해라. 우리는 진군해서 이 곳에 왔다. 어떻게 우리가 여기 불을 지른단 말이냐?"

"그럼 누가... 왜? 어째서?"

촌장과 같은 의문을 가진 자들이 절규했다. 아이가 그저께 부순 군진은 대부분이 이 콰르시 둔전촌 출신이었다. 시사이드의 가주는 매몰차게 말했다.

"아마도 너희들의 장군일 터다. 이 곳을 놔두면 우리가 약탈해서 군량을 보급할 것이라고 생각해서, 우리가 손에 넣기 전에 부숴버린 거겠지. 둔전촌이라 거주민의 삼 할은 직업 군인 아닌가? 아마도 너희들이 징집된 직후에 이 꼴이 되었을 거다."

그것 말고는 답이 없었다. 눈이 붉게 달아오른 촌장은 짐승처럼 울부짖었다. 다른 민병은 날붙이를 찾는 촌장에게 매달려서, 촌장, 촌장을 연호하며 말렸다. 아이는 문득 그 촌장이라는 칭호가 우습다고 생각했다. 그는 대표할 마을이 없는 촌장이었다. 시사이드의 가주는 그 광경에서 눈을 돌려 아이에게 물었다.

"그래서 통령, 이 자들을 어쩔 생각이시오."

아이는 기둥이 불타 없어진 주춧돌에 넓게 앉아서 고민했다. 입에서 순한 연기가 흘러 폐허가 된 마을을 휘돌았다.

"이들에게 몸값으로 받을 군량도 없고, 이들에게 내어 줄 군량은 더더욱 없소. 처리가 곤란해졌군."

"우리를 선봉에 세워주시오!"

촌장이 또 울부짖듯이 말했다. 그 핏발선 눈에는 분노가 일렁이고 있었다.

"어차피 뒈진 목숨, 나리들을 위해 싸우겠소. 제발 우리를 받아주시오!"

"군량은 빠듯하게 반 년치밖에 없는데. 아마도 이런 일은 계속 반복될 것이오. 저들을 받아주면 앞으로 만날 모든 자칭 병사들을 받아주어야 하오."

가주는 우회적으로 거절을 권하고 있었다. 아이는 폐부에서 연기를 크게 쏟아냈다. 연기 사이로 통령의 결정이 들려왔다.

"받아줘야 합니다."

"통령, 저들이 먹은 알곡 값을 할 거 같소?"

"군량 따위 필요 없소! 풀을 씹고 쥐새끼를 잡아서라도 우리 밥벌이는 우리가 알아서 하겠소!"

잇달아 외치는 촌장의 말을 들으며, 아이는 자신의 결정을 알렸다.

"한 번 맡은 목숨을 쉽게 저버릴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어쨌든 저들 역시, 핏줄을 타고 올라가면 기나센과 같은 탯줄을 자르고 태어나지 않았습니까. 받아 주어야 합니다."

"그럼, 군량은..."

"이미 먹어치운 군량 때문에, 텅 빈 수레를 끌고 있는 말과 소가 꽤 있는 걸로 압니다. 장교에게 지급되는 식사를 반으로 줄이고, 그 말과 소를 잡으면 어느 정도는 벌충이 될 겁니다."

"그렇게까지?"

"물론, 장교에는 저도 포함됩니다."

말을 마친 아이는 어느새 검지손톱 바로 앞까지 타오른 담배를 버리고 비벼 껐다. 시사이드의 가주는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물론 이 결정으로 얻는 것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이들은 곧 맹렬한 복수자가 되어 전장의 지리와 샛길을 알려줄 것이고, 길잡이가 되어 줄 것이며, 여차하면 여론전과 사기에도 도움이 될 것이다. 하지만 그의 상식으로 공성전에서 그런 것들은 부가적인 요소들이었다. 제일 중요한 것은 급양이었다.

여기서 이 이상주의적인 통령을 가로막는 것이 자신의 소임일 수도 있지 않은가? 그것을 가주가 고민하던 차에 끽연을 마친 아이는 자리에서 일어나 자신의 막사로 돌아갔다. 손에는 블로어를 쥔 채였다.

*

카이베크는 한숨을 내쉬며 검을 닦았다. 피로 묻은 검이었다. 지금 그는, 인근 구리광산의 권리를 쥐고 있는 일가의 집에서, 가장을 죽이고 검을 닦는 중이었다. 그가 원해서는 아니었다.

"뇌물을 위해 이런 일까지 시킬 줄은..."

그가 접선한 제국 내부의 실세. 그가 6개월 후에 원군을 파견하는 조건으로, 개인적인 뇌물을 요청했기 때문이었다. 벌써 세 번째 바치는 뇌물이었다. 파병이 이루어지고 나면 이 땅 일대는 자치령이 되어 제국에 병탄될 것이었다. 그러면 수도와 거래를 틀 수 있는 금속 광산들은 가치가 치솟을 것이 분명했다. 그러니 국경 요새 인근의 구리 광산을 넘겨달라는 것이 그의 요구였다. 광산에는 정당한 주인이 있었다. 다른 이의 광산을 뇌물로 바칠 방법은 하나밖에 없었다.

"찾았습니다! 딸의 초상화 뒤에 금고가 있습니다!"

광산의 주인은 국경 요새 안에 피난중이었다. 카이베크를 반갑게 맞은 그는, 느닷없이 구리 광산을 몰수한다는 말에 격분했고, 처음부터 살해를 준비했던 카이베크의 손 아래 차가운 시신이 되었다.

"거기에 광산의 권리 문서가 있나?"

"예!"

"좋다. 그대로 묶어서 제도로 보내도록."

광산 주인의 살찐 시체는 카페트 위에 널브러져 있었다. 그 텅 빈 시선은 천장에서 흔들리는 샹들리에를 바라보고 있었다. 카이베크는 그를 따라 샹들리에를 바라보았다. 유리 촛대마다 자신의 얼굴이 담겨 있었다. 굴곡진 유리면을 따라 왜곡된 자신의 얼굴을 들여다보며, 카이베크는 조용히 생각했다.

얼마나 많은 국민을 내 손으로 죽이고 있는가... 그에 대한 생각이었다. 이 일을 치르기 직전, 그는 첩보를 들었다. 기나센의 청년 통령이 군진의 민병을 죽이지 않고, 폐허가 된 마을에 내버리지도 않고, 말과 소를 잡아 그들을 먹이며 느릿하게 전진하고 있다는 첩보였다. 전략적으로는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는 행보였다. 그런 일을 해서 얻는 이득을 알 수가 없었다. 고민 끝에 카이베크는, 아마도 그 통령의 마음 여림과 미숙함에서 비롯된 결정일 것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그러나 결국 그 미숙함은 국민을 살렸고, 나는 내 손으로 국민을 죽이고 있지 않은가. 그런 답 없는 고민이 두개골 속에서 일렁였다. 씻어내고 싶을 만큼 머릿속이 가려웠다. 이 나라를 죽이려고 다가오는 적은 국민을 살리고 있었고, 나라를 살리려는 자신은 국민을 죽이고 있었다. 그 어지럽게 교차된 삶과 죽음 사이의 불분명한 어딘가에서 조국은 숨쉬고 있을 터였다. 지금 저 불빛 아래서, 그 숨소리는 더없이 흐리고 아득하게 느껴졌다.

"장군!"

피에 젖은 칼을 든 채로, 망연히 천장을 쳐다보고 있는 카이베크를 전령의 외침이 일깨웠다. 망념에서 벗어난 카이베크는 평소의 무심한 어조로 물었다.

"무슨 일인가."

"급하게 전달해야 할 두 가지 소식이 있습니다."

"더 급한 쪽부터 말해라."

고민하던 전령은 곧 이야기를 풀어놓았다.

"귀빈에게서 연락이 왔습니다. 한 달을 더 기다려야 할 것 같다는 연락입니다."

"뭐?"

카이베크의 굵은 눈썹이 꿈틀거렸다. 전령은 자신의 책임이 아닌데도 당황해서 황급히 말을 늘어놓았다.

"보내주신 선물에 대한 대가 없는 후의로..."

"듣는 자가 없으니 비유는 집어쳐라."

"예. 지금까지 보낸 뇌물과 대가로 위원회를 매수해서 졸속으로 6개월 후 파병을 결의했는데, 그 과정에 누군가가 이의를 제기했다는 소식입니다."

"뇌물을 더 쥐어짜내려는 자작극 아닌가? 이게 마지막이다. 더는 쥐어짜내려 해도 쥐어짜낼 뇌물조차 없다고 전해라. 덧붙여 말해라. 우리가 패전하게 되면, 이 구리 광산에 관한 문서도 휴지조각이 된다고 말이다."

"아니, 그 누군가가 범상치 않은 사람입니다."

"누구인가."

"그게, 저, 라달라리아의 호노레 블뢰유 성녀입니다."

그 이름이 왜 여기에서 나오는가. 카이베크의 눈썹은 더욱 더 일그러졌다.

"자신은 정치적 판단을 할 입장은 아니지만, 절차를 검토할 입장은 된다고... 파병이라는 중대 사안에도 불구하고 절차적 하자가 너무 많고 사전 합의의 기색이 보인다면서, 자신의 직권으로 재조사를 실시하겠다고 통보했다고 합니다. 그 기간이 한 달입니다."

"그래서 한 달 미루어졌단 말인가?"

"예에, 아마도 귀빈들께서도 예상하지 못한 내용인 듯 싶습니다만..."

"왜 말꼬리를 흐리는가."

"동시에, 저, 라달라리아의 사원에서, 기부금을 요청받았습니다."

"뭐?"

"명목상으로는 전쟁이 끝났을 때 엉망이 된 귀국의 영토를 돌봐주기 위해 필요한 비용이라고 합니다만..."

"허 참. 그러니까, 사실상 성녀를 내세워서 그 쪽도 뇌물을 받아먹고 싶다는 뜻 아닌가?"

"그렇게도 해석할 수 있다고 사료됩니다."

카이베크는 의자 위에 쓰러지듯 걸터앉았다. 머릿속이 터질 듯 가려웠다. 라달라리아는 정말로 뇌물을 바라는 것인가? 여기서 기부금을 내지 않으면, 또 '절차상의 문제'를 이유로 군대를 늦추겠노라고 협박하는 것인가.

"한 달... 한 달의 기한을 늘리려면, 청야전의 배후지를 더 넓혀야 한다."

배후지를 넓힌다. 그 말인즉슨, 아직 약탈하지 않은 마을을 더 찾아서 더 약탈하고 불태워야 한다는 뜻이었다. 이 전쟁터의 어딘가에서 숨쉬고 있을 자신의 조국이란 놈은, 얼마나 더 많은 자국민을 죽여야 만족할 것인지 의뭉스러웠다. 그러나 그렇게 고민하는 사이에도 카이베크의 머리는 자연스럽게 청야전의 내용을 검토하고 있었다. 청년 통령은 군진에 발목을 잡혀 예상보다 훨씬 더 느리게 진군하고 있었다. 그러니 한 달 치의 약탈을 더 하는 데에 시간적 여유는 있었다. 하려면 할 수는 있다, 하지만 해야 할 것인가... 그렇게 고민하고 있는 카이베크에게 전령이 두 번째 소식을 들려주기 시작했다.

"그리고 두 번째 소식입니다. 기나센의 선봉대에서, 협정을 제의했습니다."

"뭐?"

이것도 예상 밖의 소식이었다. 전령은 계속해서 말을 늘어놓았다.

"파종을 막 시작해야 할 시기에 군사를 몰고 쳐들어온 점이 미안해서, 가을걷이가 끝난 후까지 전쟁을 미루자는 것이 그 내용입니다만."

"명분치곤 지나치게 고전적이군."

"어쩔까요. 우리에게는 천운입니다. 저들이 군세를 물려준다면, 한 달 기한 정도는 여유롭게..."

카이베크는 손마디를 두들기며 그 협정의 이유를 찾아내려 애썼다. 한참이나 두들기던 그의 손떨림이 멎었다.

"거절해라."

"예?"

"영악한 놈이 붙어 있는 모양이군. 하지만 통령이 지나치게 순수해서 발목을 잡혔어."

영문을 몰라 눈을 껌뻑이는 전령에게 카이베크는 천천히 말해주었다.

"지금까지 놈들은 우리가 지연전용으로 설치한 열일곱 개의 군진을 격파했다. 군진이래봐야 징집한 어중이떠중이에 괴물 하나 던져놓은 초라한 진일 뿐이지만, 군진이라는 명사에 그 세세한 정보가 담기지는 않는 법이지. 거기에 우리는 청야전을 치렀고, 그 군진에서 거둔 포로들은 증오와 분노로 가득할 터다. 이 두 가지를 이용해서, 놈은 회군해서 여론전을 하려는 거다."

대대적인 승전으로, 자신의 치적으로 만들기에 어렵지 않은 소재들이 모였다. 카이베크는 그것을 읽을 수 있었다.

"그런데 이렇게 급하게, 또 맥락 없이 협정을 제의해온 이유. 그건 놈들이 우리의 생각보다도 더 심하게 군량 부족에 시달리고 있다는 뜻일 터다."

"군량 부족 말입니까?"

"놈들의 통령은 지나친 자비를 발휘해서, 아무짝에 쓸모 없는 민병들을 모두 먹여살리고 있다고 들었다. 군량이 일찍 동나지 않을 수가 없었겠지. 맥락 없는 협정은 그들의 조급함을 증명한다."

"아!"

전령은 입을 벌렸다. 카이베크는 머릿속이 맑아지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잇달아 들어온 정보가 자신이 나아갈 길을 제시해주는 기분이었다.

"협정이라는 구실 없이 놈들은 퇴각할 수 없다. 그랬다간 정치적 자살이 될 테니 말이다. 그러니 응해주지 않는다. 놈들이 이 요새 앞에 당도해서, 스스로 불러일으킨 기갈로 쇠잔해질 때까지 기다린다. 놈들에게 전해라. 농민을 신경써서 무슨 전쟁이 되겠느냐고 말이다. 싸움이 무서워서 개새끼처럼 도망치지 말고 얌전히 목을 내밀라고도 덧붙여라"

"그,그렇게까지 모욕적으로 말입니까?"

"그래야 도망칠 수 없다. 도망치면 서신을 공개해서, 놈이 절대로 자신을 포장할 수 없게 만들 거다."

전령은 혀를 내둘렀다. 카이베크는 순식간에 적의 의중을 읽어내고, 자신의 계획을 지켜내기 위한 임기응변을 선보이고 있었다. 그의 군략에는 틈이 없었다. 적어도 전령이 보기엔 그랬다. 그러나, 잠시 후 그 말이 내포한 뜻을 파악한 전령은 표정을 무겁게 굳혔다.

"장군, 그럼 그 말 뜻은..."

"당연히 원군이 올 때까지의 군량 벌이도 해야겠지. 청야전을 확대한다. 내 투구를 가져와라."

이번이 정말로, 마지막이 되길 바라면서. 카이베크는 검을 집어넣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

"저, 저, 협정을 거부한다는 내용의 문서가 왔습니다만..."

차마 그 내용을 보여줄 수 없어서 손을 떠는 에길론에게서 아이는 문서를 빼앗아들었다. 에길론은 사색이 되어 얼굴을 굳혔다. 그 문서의 내용은 지나치게 모욕적이었다. 에길론조차 화가 날 정도였다. 하지만 아이는 그 문서를 보고, 오히려 빙그레 웃을 뿐이었다.

"그렇군요. 그럼 들어가 쉬십시오."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한 표정을 짓고 에길론은 물러섰다. 자신의 그물침대에 푹 앉은 아이는 카이베크가 보낸 문서를 곱씹으며, 블로어를 불러냈다. 얘기를 나누기 위해서였다. 그 때, 카이베크는 투구를 쓰고 말에 올라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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