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메이지 슬레이어-181화 (181/279)

33. 사자궁 ( 2 )

왕성의 경비는 허술했다.

이미 패배가 결정된 전쟁에서 고립된 채 처분을 기다리는 신세였기 때문이었다. 그들에게 싸울 의욕이 있을 리 없었다. 들이닥친 아이와 몇 명의 정예들을 마주한 경비병력은, 아이의 시리도록 빛나는 은발과 깊은 심홍색의 눈동자를 마주하자마자 얼어붙었다.

"천,천갈궁?"

특징적인 용모로 바로 정체를 알아챘기 때문이었다. 아이는 말없이 검을 꺼내 자신의 정체를 증명했다. 경비병들 사이에서 신음과 탄식이 터졌다. 눈 앞의 남자는 지금 이 나라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이었다. 그리고 그런 자가 자신의 눈 앞에 있다는 사실은, 왕성이 함락되었음을 알리는 소식으로 보였다.

"그대들의 목숨을 해하고 싶지 않습니다. 나는 이 자리에 담판을 지으러 왔습니다. 칼을 내려놓고 물러서십시오."

실제로는 그저 소수의 인원과 함께 불을 지르고 기습한 것 뿐이지만, 아이의 말이 갖는 위압감은 컸다. 설마 통령씩이나 되는 사람이 이렇게 과감하게 돌입할 것이란 예상을 하지 못했던 탓에, 경비병력들은 유순하게 투항했다. 그들의 창과 검을 거두어 부러뜨리던 아이는 마지막 창을 부러뜨리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여기까지는 예상한 대로 흘러가고 있었다.

지금 아이가 이렇게 과감하게 작센의 왕성으로 이동해 침투한 이유. 그건 담판을 짓기 위해서였다. 아마도 이 왕성의 안에서 기다리고 있을 드미트리와.

"늦어도 내일까지 모든 걸 처리하고 나올 테니까. 여기서 동태를 관리해 줘."

높다랗게 솟은 왕성의 문 앞에서 아이는 에바에게 말했다. 에바는 아이의 가장 믿음직한 동료로서 이 자리에 동행했다. 그러나 그녀는 드미트리와 적지 않은 연을 가지고 있었다. 그녀들이 서로 얼굴을 마주치게 해서 좋을 것이 없겠다는 판단을 한 아이는 에바에게 뒷처리를 맡기기로 했다.

"응, 알았어. 무사히 돌아와야 해."

에바는 입술을 앙다물고 고개를 끄덕였다. 더없이 믿음직한 표정이었다. 함께 온 특무국의 사람들 역시 일사분란하게 아이의 명령에 맞추어 움직이기 시작했다. 모두 4위계의 마술사에도 비견할 수 있는 실력자들이었다. 그들에게 뒤를 맡기고 아이는 혼자 돌입할 생각이었다. 심호흡을 한 아이가 성문을 베어넘기려 칼 손잡이에 손을 가져갔을 때, 뒤에서 누군가가 외쳤다.

"저, 저, 통령! 각하,라고 부르면 됩니까?"

방금 자신이 구속한 경비대의 대장이었다. 뺨까지 덮는 원뿔형 투구 밑으로 그의 망설이는 표정이 보였다.

"왜 부르셨습니까.":

"저, 저, 이런 말을 드려야 할 지 모르겠습니다만..."

그는 요 몇달간 이 왕성을 관리하는 책임자였으며, 동시에 작센의 왕실에 환멸을 느끼고 있던 자이기도 했다. 그래서 그는 적국의 수장임에도 통령에게 호감을 가졌고, 자신을 죽이지 않고 이렇게 살려서 구속한 통령에게 보답을 하고 싶었다. 그 낌새를 눈치챈 아이는 입을 닫고 경비대장의 말을 기다렸다.

"얼마 전부터, 성 내부는 위험합니다. 괴물들이 돌아다니는 지옥이 되어 있습니다. 말씀드려도 믿으실지 모르겠습니다만, 조심하십시오."

"그렇습니까, 감사합니다."

예상하던 것이었다. 경비대장은 담담한 아이의 반응에 외려 더 놀랐다. 뒤돌아선 아이는 칼집에서 천갈궁을 뽑아들어서 비스듬히 올려쳤다. 쾅! 재빠른 일격은 문을 두부처럼 부드럽게 갈라 문 너머의 빗장까지 베어넘겼고, 아이는 너덜너덜해진 문을 힘차게 걷어차서 왕성 안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내성 안으로 몇 발자국 들어서기도 전에, 경비대장이 말한 괴물 무리를 목도할 수 있었다.

"역시, 이미 작센의 왕실은 조디악의 꼭두각시로 전락했군."

레버넌트 데미우르고스. 부풀어오른 근육과 상체 탓에 마구 찢어진 시종의 옷을 입은 데미우르고스들을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자신의 계획을 들려주었을 때, 륜은 이미 왕성 안이 조디악에 의해 레버넌트 천지가 되어있을 것이라고 예측했다. 최후의 항전을 준비한다면 응당 그럴 것이라는 예측이었다. 그 예측이 틀리지 않았음을 깨달은 아이는 천갈궁을 예리하게 비껴 들고 데미우르고스를 겨눴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괴물이 되었음에도 생전의 습관을 잊지 않고 왕성을 배회하던 그들은, 손에 든 은쟁반과 텅 빈 술병을 내던지고 아이에게 들려들었다. 그들의 팔에 매달린 사슬이 절그럭거리는 소리와 돌바닥이 하중을 못 이기고 으깨지는 소리가 왕성 안에서 메아리쳤다.

"흡!"

선두에 섰던 데미우르고스는 번쩍 뛰어올라 아이의 머리를 노리고 덮쳐왔다. 아이는 매섭게 받아쳤다. 쩍! 천갈궁의 예리한 칼끝이 사슬을 쳐부수고, 이어서 흉물스럽게 일그러진 가면을 쪼갠다.

"하아압!"

완전한 호를 그리며 검을 회전시킨 아이는 디딤발을 뒤로 빼며 찌르기로 전환했다. 얼굴이 토막나 쓰러지는 데미우르고스의 뒤에서 두꺼운 팔이 덮쳐온다. 주먹과 천갈궁은 충격파를 일으키며 부딪혔다. 쿵! 번져나가는 충격파로 천장에 매달린 샹들리에가 깨져서 유리가 우수수 쏟아졌다. 팔이 찢겨나간 데미우르고스는 울부짖으며 뒤로 몸을 뺐다. 천갈궁에선 그림자가 뭉게뭉게 흘러나오고 있었다.

"이 괴물들과 또 싸움인가."

흘러나온 그림자는 선주의 모습을 이루었다. 선주는 사방을 훑어보더니 한심하다는 듯 말했다.

"이 따위 것들에게 왜 시간을 낭비하고 있는 게냐. 연자여, 그대는 왜 이렇게 재능없는 놈을 내 후예로 삼았단 말인가."

'글쎄. 그래도 너보단 귀여운 맛이 있기 때문이겠지.'

"림, 정신사나워."

킬킬거리며 웃는 림과 선주를 매섭게 노려보며 아이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 도발에 어울려주기로 한 것이었다 천갈궁을 허리춤의 검집에 수납한 아이는 유혼을 불러내어 손에 쥐었다.

"오 분 안에 끝내라. 지금까지 내가 알려준 걸 절반이라도 습득했다면 그 정도는 응당 할 수 있겠지."

유혼을 빼든 아이를 보며 선주는 말했다. 작센의 군진들을 돌파하면서, 아이는 선주에게 유혼을 다루는 법을 꽤나 세세하게 지도받았다. 한 달 전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유혼이라는 검에 대한 이해도가 늘어난 상태였다. 아이는 짧게 응수했다.

"삼 분으로 하죠."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아이를 둥글게 포위한 채 때를 노리던 데미우르고스들이 일제히 기합성을 내지른 것은 그 때였다. 혈류 가속이었다. 저 기합과 가슴을 두드리는 의식이 끝나면, 자신을 둘러싼 십여 마리의 데미우르고스들은 엄청난 속도와 힘으로 덮쳐들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아이는 평정을 잃지 않고 유혼을 날카롭게 쥐고 있을 뿐이었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공세가 시작되었다. 데미우르고스 한 마리가 상반신 전체로 덮쳐들었다. 피하고 몸통을 둘로 쪼갰다. 오른쪽에서 커다랗게 주먹을 내질러왔다. 숙여서 피하고 목을 베어냈다. 취익, 하얗게 드러난 목뼈 위로 피가 분수처럼 치솟았다. 사슬로 채찍처럼 하단을 덮쳐오는 놈도 보였다. 턱, 가볍게 뛰어 피하고 놈의 팔을 밟으며 달려든 뒤 얼굴을 후려쳤다. 가면과 놈의 아랫턱이 동시에 잘려서 바닥을 뒹굴었다. 얼마 지나지도 않아서 세 마리가 절명해서 흥건한 피바다 위에 쓰러졌다. 순식간이었다.

그러고도 아이는 평온했다. 숨소리 하나 변함이 없었고 안색은 맑았다. 달라진 점이 있다면 유혼이었다. 데미우르고스의 피를 흠뻑 먹은 유혼은, 일전의 그 모습으로, 선주가 사용하던 용의 어금니와 같은 형태로 변형되어 있었다.

"일 분 지났다."

엄하게 말하는 선주의 말을 뒤로 하고, 아이는 이번엔 자신부터 데미우르고스들에게 달려들었다. 스하악! 초승달처럼 큰 호를 그리는 유혼은 빈틈이 없었다. 한 번의 참격에 세 마리의 데미우르고스가 비스듬히 토막나서 피를 흩뿌렸다.

"ㅡㅡㅡㅡㅡㅡㅡ!!!"

벽에 장식된 초상화의 경직된 미소 위에 검은 피가 튀었다. 그로부터 일분 후, 열 마리의 데미우르고스는 나란히 바닥에 쓰러지게 되었다. 그 한가운데 선 아이의 손에선 유혼이 푸르스름한 빛을 내뿜고 있었다. 그것을 확인한 선주는 못마땅한 기색으로 천갈궁 속으로 빨려들어갔다.

'대단하구나, 어린 순례자야.'

"아직, 미숙해."

림은 뼈날개를 퍼덕이며 혀를 내둘렀다. 선주와 큰 차이를 느끼지 못할 정도로 대단한 솜씨라고 림은 생각했다. 하지만 아이는 어딘가가 불만족스러운 듯, 유혼의 칼등을 쓸어내리며 눈을 감고 복기를 하고 있었다. 잠시 후 눈을 뜬 아이는 유혼을 든 채 저벅저벅 방을 걸어서 왕성의 중앙으로 향했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

이따금씩 레버넌트와, 데미우르고스들이 아이를 노리고 덮쳐들었지만 상대가 되지 않았다. 늘어나는 것은 아이의 옷에 튄 핏자국 뿐이었다. 거침없이 전진하던 아이는 곧 어느 방 앞에서 멈추었다. 알현실, 왕을 접견하기 위한 방이었다.

"림, 너도 느끼지?"

'무엇을 말이냐.'

"이 안에는, 지금까지와 비교도 안 되는 괴물이 기다리고 있을 거야."

림은 얼굴을 딱딱하게 굳혔다. 아이는 심호흡을 하며 말했다.

"륜 씨와 함께 조사한 사실이야. 소니아 아바키렌의 마술, 레버넌트를 만드는 그 마술은 채무자를 재료로 괴물을 만드는 마술이지. 그런데, 그 레버넌트를 강하게 만드는 방법이 있어."

'강한 자를 재료로 쓰는 것 말이냐?'

"응. 하지만 그게 끝이 아니야."

'그게 무슨 말인지 모르겠구나.'

"만일 그게 끝이었다면, 이 왕성 안에는 이렇게 많은 데미우르고스들이 있지 못하겠지."

림은 눈을 크게 떴다. 확실히, 이 왕성의 데미우르고스들은 시종의 복장이나 하녀의 복장을 입고 있었다. 그들이 원래부터 강한 자들일 리는 없었다.

'그럼?'

"륜 씨가 알아낸, 강한 레버넌트를 만들기 위한 조건. 그건 빚이야."

'빚?'

"많은 채무를 진 자일수록, 소니아의 마력을 더 많이 받아들일 수 있게 되고, 결국 더 강해져."

심호흡을 한 아이는 이어서 말했다.

"이 왕성의 시종과 시녀들은 모두 작센 왕실에게 누대에 걸친 빚을 진 자들이야. 그리고 작센의 왕실을 인수한 조디악은, 그들을 채무자로 취급할 수 있었지."

'아아, 그래서...'

림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리고 이 앞에는, 이 나라에서 가장 많은 빚을 진 자가 기다리고 있어."

아이의 비유를 이해하지 못했던 림은 곧 그 뜻을 알아채고 되물었다.

'인간들의 왕 말이냐.'

"그래."

학정과 착취로 모은 국민들의 재산으로, 은행을 세워 돈놀이를 하다 조디악에게 전 재산을 빼앗긴 어리석은 왕. 그 왕이 진 빚은, 지금까지 작센이 용병 국가로서 흘린 피를 모두 합한 만큼이나 많을 것이었다. 그 사실을 깨달은 림은 얼굴을 딱딱하게 굳혔다.

'그럼, 어린 순례자야. 네 말은...'

"이 앞에는 그 왕을 재료로 한, 최강의 레버넌트가 기다리고 있을 거야."

레버넌트 렉스.

가설을 세운 륜이 지어준 이름이었다. 륜은 그 강함을 5위계에서 6위계 사이로 추정했다. 왕성으로 군세를 끌어들이고, 이 곳에서 그 괴물을 이용해 피해를 최대화하는 함정을 세우고 있을 것이라는 추정도 뒤따랐다.

"그러니 내가 부숴야 해."

그리고 그 정도의 괴물이라면, 분명히 강하지만 아이보다 강하지는 못했다. 지금 천갈궁까지 손에 넣은 아이는 피해 없이 무찌를 수 있을 것이라는 계산이 뒤따랐다. 작전에 돌입하기 전,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을 남김없이 공유한 아이는 심호흡을 하고 마지막 문을 열어젖혔다.

*

"아마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겟죠. 이 뒤에 기다리고 있는 게, 작센의 왕으로 만든 괴물일 거라고 말입니다."

드미트리는 뒷짐을 진 채 서성거리며 말했다. 끼이익, 문이 열린 것은 그 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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