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 사자궁 ( 3 )
왕성의 습격 소식을 들었을 때, 드미트리는 생각했다.
'애초부터 우리는 바라는 것이 같았죠.'
기나센과 작센을 통합해서, 컨쿼러를 이끌고 세상의 멸망에 맞서는 것. 그 목적은 멸망을 막는 것과 키레넨의 나라를 건국하는 것으로 달랐으나, 선결해야 할 조건은 같았던 셈이다. 조디악은 기나센에서 대산맥파를 추동해 작센과의 통합을 이루려 했으나, 실패했다. 사전에 그려 놓은 그림이 어그러졌고, 조디악이라는 세력의 마각이 드러난 시점에서 두 국가의 자연스러운 통합은 불가능해 보였다.
'그렇다면 우리가 기꺼이 악역을 맡아주죠.'
그래서 조디악은 노골적인 침략자의 모습으로 작센에 그림자를 드리웠다. 왕실을 장악해 괴물로 만들었으며, 어떤 여론전이나 정치적 세력관리 없이 기나센과의 전쟁으로 작센인들을 내몰았다. 카이베크는 이 쪽에서도 희생양으로 던졌던 것이었다. 어떤 식으로 카이베크를 옭아맬지는 몰랐으나, 소니아와 드미트리의 계획도 쳐부순 적이 카이베크 따위에게 막힐 것이라고는 처음부터 기대하지 않았다.
'그리고, 당신들은 감탄이 나올 만큼 훌륭하게 그를 제물 삼아 통합을 이뤄냈고 말이죠.'
그렇게 형성된 통일 기나센의 칼자루를 쥔다. 그리고 그 칼자루의 이름은 아이 우르드가 될 것이었다.
그것이 조디악의 의도였다. 애초부터 그들은 양지에선 언제나 차별받고 공격받았던 이들이었다. 아이의 뒤에 숨어서 막후에서 아이를 조종하는 것이 그들에게 더 잘 어울리는 역할이었다.
걱정은 하나뿐이었다. 륜, 아마도 아이의 옆에서 모략을 세우고 있을 여자. 드미트리는 까드득 이를 씹었다. 그녀에게 속아서 기나센의 기반 전부를 잃은 것을 생각하면 자다가도 이가 갈렸다.
'하지만, 지금은, 내가 그 사람을 더 잘 이해하고 있어요.'
그녀는 이제 조디악에게 남은 역전의 수단이 아이를 이용하는 것 뿐이라는 걸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러니 변수를 줄이기 위해서, 아이가 아예 칼을 잡아도 되지 않도록 왕도 전체를 말려죽이려 들 것이다. 하지만 드미트리는 알고 있었다.
'그 사람은 그럴 수 있는 사람이 아닌데 말입니다.'
아이는 전쟁과 세계의 역사에 비하면 자그맣기 그지없을 카이베크 일가의 희생조차, 겨우겨우 감내할 수 있을 만큼 상냥한 사람이었다. 스스로를 위험에 내던져서 수십만의 생명을 구할 길을 보여준다면, 그는 망설임 없이 직진하는 사람이었다. 그러니 그를 포획하기 위해서는 영웅적으로 싸울 자리를 준비하면 된다. 드미트리의 계획은 그것이었다.
아이를 상대할 수 있도록, 아이와 관련된 기억과 몇 가지 기억만을 남긴 드미트리는 그 사실을 누구보다 확신할 수 있었다.
"왔군요."
그리고 문이 열렸을 때, 혼자 저벅저벅 걸어들어오는 아이를 보며 드미트리는 미소를 지었다. 아이의 손에선 천갈궁이 기름등의 불빛을 받아 찬란하게 빛나고 있었다. 아이는 알현실의 왕좌를 서성거리는 드미트리를 보고 얼굴을 딱딱하게 굳혔다. 검끝을 곧게 세워 드미트리의 가면 같은 미소를 겨누며 말한다.
"이미 당신들은 패배했습니다. 쓸모 없는 저항은 희생을 늘릴 뿐입니다. 저희에게 협력하십시오."
"패배? 왜 저희가 패배했다는 거죠?"
"당신들의 목적은 이 왕성의 어딘가에 보호되어 있을 컨쿼러를 가지고, 기나센과 작센의 병력과 함께 전쟁을 하는 것이지 않습니까. 이미 그건 이룰 수 없는 꿈이 되었습니다."
"호오오..."
빙글빙글 웃는 드미트리에게, 아이는 심호흡을 하고 말한다.
"그 꿈은 저희가 대신 이루어드리죠. 얌전히 협력하십시오."
됐다. 드미트리는 속으로 득의의 미소를 지었으나, 겉으로는 화난 척 말을 이어갔다.
"그게 무슨 헛소린지 모르겠군요. 꿈을 대행받는 민족도 있습니까?"
"당신들이 컨쿼러를 우리에게 넘기고 앞으로 얌전히 협조할 것을 맹세한다면, 우리는 그걸로 당신들도 익히 알고 있을 세상의 위기를 막을 겁니다."
"호오, 그래서요?"
비꼬는 듯한 드미트리의 어조에도 아이는 냉정을 잃지 않았다.
"당신들이 제국에 가진 원한은 이해합니다. 그러나, 제국 내에도 제국을 바꾸고 싶어하는 자들이 많습니다. 멸망의 위기가 사라지고 나면, 이것을 기회로 다시는 이런 위기가 닥치지 않도록 제국을 개혁하는 것이 그들의 목표입니다."
아이는 심호흡을 하고 말했다.
"맹세합니다. 당신들이 협조해주면, 제국이 개혁될 때에, 다시는 당신의 민족이 부당한 차별을 받지 않도록 만들겠습니다."
아이의 목소리는 진지했다. 그리고 그 제안의 내용도 드미트리가 익히 예상하던 것이었다. 드미트리는 피식 웃으며 답했다.
"참 믿을 길 없는 소리군요."
아이가 얼굴을 찌푸려도 드미트리의 냉소는 끝날 줄을 몰랐다.
"그 말을 믿을 수도 없거니와, 당신의 목표 역시 허황되기 그지없습니다. 우리라고 이기적이고 못되어 쳐먹어서 당신처럼, 그리고 당신의 건방진 약혼자처럼 세상 전체의 멸망을 막으려고 하지 않은 건 줄 아십니까?"
"무슨, 말입니까."
"이미 이 세계의 신들은 이 세상이 존재하지 않는 편이 낫다고 결론지었어요. 온 세계에 외신들이 끓어넘치게 된 데에는 다 이유가 있다 이겁니다. 아지프의 마술사를 막아내고 나면, 또 무언가가 나타나서 세상을 멸망시키겠죠. 현실적인 대안은 딱 나라 하나만큼의 땅을 지켜내는 겁니다. 그리고, 그 나라 하나만큼의 땅을 지켜낼 거면 우리 민족을 그 나라 가득 태우자. 이게 우리의 결론이었을 뿐입니다."
드미트리의 말을 곱씹던 아이는 눈살을 찌푸렸다. 드미트리는 능글맞게 웃으며 말했다.
"오히려 제 쪽에서 제안을 드리고 싶은데요. 허황된 싸움은 그만두고, 우리와 함께 키레넨의 개국 공신이 되어보는 건 어떻습니까. 어차피 우리의 나라를 제외한 세계가 전부 죽음이 들끓는 망한 땅이 된다면, 우리의 나라야말로 세계니까 말입니다. 당신은 결국 세계를 지킨 셈이 되겠지요."
"궤변이군요."
"제게는 당신의 요구가 궤변으로 들립니다. 자, 어쩌시겠습니까, 그 칼을 제 목에 들이대고 협박이라도 해 보시겠습니까?"
드미트리의 지시에 따라, 멀찍이 숨어서 그 광경을 지켜보던 사자궁은 신음성을 흘렸다. 자신이라면 바로 칼을 들이대고 드미트리에게 윽박을 지를 터였다. 하지만 아이는 잘도 그 도발을 참아내고 있었다. 경이로운 인내심이군. 사자궁이 고개를 주억거리며 감탄하는 가운데, 가만히 드미트리를 쳐다보던 아이는 제안을 꺼냈다.
"그럼 결국 당신의 장기를 발휘할 수밖에 없겠군요. 내기를 준비하십시오."
"호오, 무슨 내기 말입니까?"
됐다. 드미트리는 속으로 득의의 미소를 지었다. 아이가 이렇게 나설 것을 예측했기 때문에, 드미트리는 이 자리에서 아이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었다.
"어차피 이대로 서로 대립하다간 양쪽 다 목적을 이루지 못하고 파멸하겠죠. 그러니 당신이 여기 준비해놓은 대전사를 꺼내십시오. 그것과 제가 승부를 겨루어서, 이기면 컨쿼러를 넘겨주십시오."
"지면?"
"당신의 말을 따르겠습니다."
그 말과 함께 아이는 입을 다물었다. 드미트리는 속으로 쾌재를 내지르면서도, 그것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으려 애쓰면서 아이를 떠보기 시작했다.
"준비해놓은 대전사?"
"시치미떼지 마십시오. 왕이 있어야 할 자리에 왕이 없는데, 제가 눈치채지 못했을 거라고 생각했습니까?"
역시 아이는 지금 이 알현실에 준비되어 있는 것이 레버넌트 렉스가 전부라고 착각하고 있는 듯했다. 기둥 뒤에 기척을 죽이고 숨어 있는 사자궁은 눈치채지 못한 모양이었다. 미리 설치해둔 장치로 아이의 혼잣말을 들었을 때부터 반쯤 확신했지만, 이것으로 드디어 확신하게 되었다. 드미트리는 혼신의 힘을 다해서 연기를 계속했다.
"그럼 내기의 균형을 좀 맞추어야겠죠. 죄송한 얘기지만 당신은 웬만해선 막아세울 수 없는 괴물 아닙니까. 당신이 이길 게 뻔한 내기에 제가 왜 응해야 하죠? 저는 바보가 아닌데 말입니다."
드미트리의 말에 아이는 빠르게 대답했다.
"제약을 걸라는 소리입니까?"
"당신의 아나테마로서의 힘. 그걸 사용하지 않겠다는 조건을 달면 당신의 제안에 응하죠."
드미트리는 푸들푸들 떨리는 입꼬리를 억누르며 말했다. 아이는 심각하게 고민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어린 순례자야, 정말로 그래도 괜찮겠느냐?'
아이의 뒤에서 날개를 퍼덕이던 림은 놀라서 물었다. 림의 걱정스러운 질문에도 아이는 변함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드미트리는 그 말을 듣고 아이에게 다가와 동전을 내밀며 내기의 조건을 확인했다.
"자, 당신과 '내가 알현실에 준비해둔 대전사'가 승부를 치릅니다. 당신은 내 대전사를 죽여야 승리, 나는 당신이 패배를 선언하면 승리입니다. 단, 당신은 아나테마로서의 힘을 사용하지 않습니다. 이걸로 내기의 조건을 확정해도 괜찮겠습니까?"
이 문장을 듣던 사자궁은 쓴웃음을 지었다. 이게 목적이었나. 드미트리는 컨쿼러를 희생 없이 확보하고 싶은 아이가 자신에게 찾아와서, 이런 식의 내기를 제안할 것을 예측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 내기에 사용하기 위한 패로 자신을 확보해 숨기고 있던 것이었다. 그리고 파계 율사로서의 자질을 사용해서, 교묘하게 아무렇지 않은 척 아이를 속여넘기려 하고 있었다. 왕의 레버넌트를 생각하고 제약을 받아들인 아이는, 실제로는 사자궁과 결투를 진행하게 될 것이었다. 드미트리의 말을 곱씹던 아이는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이 동전을 던지면 시작입니다?"
드미트리는 생긋 웃으며 엄지 위에 동전을 내던졌다. 그녀가 항상 들고 다니는, 앞뒷면이 똑같은 계약용의 동전이었다. 휙, 세 바퀴를 돌고 손바닥에 동전이 내려앉았을 때, 사자궁 빌헬름 흐레스베인은 드디어 알현실에 모습을 드러내었다.
"이야, 간단한 얘기를 굉장히 길게 했군, 안 그래?"
천갈궁을 뽑아든 아이는 갑작스럽게 등장한 사내를 보고 경직되었다. 사자의 갈기처럼 야성미 넘치게 자라난 적발이 불빛을 받아 번쩍였다. 그의 어깨에는 큼지막한 도끼가 올려져 있었다.
"당신은?"
"아탕칼리의 늙은이들이 인정한 천갈궁의 주인이 데몬스폰이라길래, 무슨 흰 소리를 하나 했는데. 이렇게 보니 정말이었군."
그 말과 도끼의 머릿부분을 감싸는 사자 모양의 장식을 보고 아이도 드디어 눈 앞의 사람이 누구인지 눈치채었다.
"그럼 한 판 놀아보자고. 말은 길었지만 간단하군. 이긴 놈이 모든 걸 갖는다, 그걸로 끝이겠지."
그 말을 들은 아이가 드미트리를 바라보자, 득의만만한 미소를 지은 드미트리는 어깨를 으쓱할 뿐이었다.
"왜요? 당신은 분명 제가 준비한 대전사와 싸우겠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제가 설마 일개 괴물딱지 따위를 당신의 대적자로 내세울 것 같았습니까?"
그리고 아이의 얼굴을 마주본 드미트리도 표정이 경직되었다. 아이가 분노하기는커녕, 미소를 짓고 있기 때문이었다.
"다행히 백양궁과 사자궁, 둘을 동시에 준비하진 못했군요."
"예?"
이미 성좌가 준비되어 있을 것을 예측했다는 듯한 얼굴이었다. 설마, 거꾸로 내가 유도당한 건가? 당혹한 드미트리를 뒤로 하고, 아이는 기합을 내지르며 알현실의 붉은 카펫을 박차고 사자궁에게 달려들었다. 쇠와 쇠가 부딪히는 금속음이 알현실 가득 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