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메이지 슬레이어-203화 (203/279)

37. 동료 ( 2 )

공허한 원무는 계속되고 있었다.

이 신새벽에도 레버넌트 수천 마리는 델로른을 감싼 채 끊임없이 맴돌았다. 이 무의미한 노동이 그들의 늑골을 앙상하게 만들고 쓰러지게 만들어도, 그 회전은 멈추지 않았다. 길쭉한 풀벌레가 날아가며 아래를 훑어보았다. 그것들은 고기에 들러붙은 구더기처럼 들끓고 있었다. 그들이 서성이며 흘린 체액으로, 풀들은 누렇게 말라죽어 황폐했다. 그 때였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

긴 비명이 어둠 속에 퍼져나갔다. 등에 드미트리를 짊어진 아이가, 그 두꺼운 포위망에 어깨를 들이받고 돌파를 시작한 것이다. 불시에 습격당한 레버넌트는 공처럼 저 멀리로 날아가며 다른 레버넌트들과 마구 부딪혔다. 아이는 그 덕에 열린 공간으로 몸을 던졌다.

"큭!"

포위망은 꽤나 두터웠다.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알지 못한 채 여전히 맴돌려 움직이는 레버넌트들, 아이를 알아채고 이빨을 들이미는 놈들, 주먹을 내지르는 놈들이 뒤얽혀서 삽시간에 난장판이 벌어졌다.

드미트리 때문에 양 팔이 묶여 있어서 아이의 대응법은 제한될 수밖에 없었다. 얼굴로 레버넌트의 주먹이 날아들었다. 고개를 숙여 피하고, 오른쪽 어깨로 놈의 뺨을 들이받았다. 이빨과 피가 깨져 흩날리고, 그 비산하는 잔해들 뒤에서 또 공격이 짓쳐들어왔다. 빠악! 무릎으로 놈들 중 하나를 쳐올린 아이는 쓰러지는 레버넌트의 등을 밟고 도약했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무릎을 얻어맞고 바닥에 쓰러진 레버넌트가 거대한 비명을 내질렀다. 어슴푸레한 달빛 아래서, 수천의 레버넌트들이 일제히 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것을 신호로 무의미한 걸음을 옮기던 레버넌트들은 아이에게 달려들기 시작했다.

퍽! 레버넌트를 짓밟아 뛰어넘던 아이는 발목을 붙잡혀 바닥을 굴렀다. 뒤에 매달려 있던 드미트리에게서도 작은 신음이 흘러나왔다. 등에 얼얼한 충격이 느껴졌다.

"꺼져!"

팔뚝을 물어뜯으려 달려드는 레버넌트를 팔꿈치로 후려쳐 부수고, 아이는 정신없이 싸움을 시작했다. 등에 사람을 태우고 있어 제약이 있는 상태인데도, 아이의 동작에선 한 치의 불편함도 느껴지지 않았다. 박치기로 한 놈을 넘어뜨리고, 발 뒤축으로 또 다른 놈을 부수고, 피하고, 단단한 어깨로 들이받아 두 놈을 한 번에 날려버리고, 사방으로 쓰러진 레버넌트들 때문에 일순 원형의 공간이 생길 정도였다. 아이는 재빨리 틈을 타 놈들의 사이를 뚫고 달려나갔다. 스산한 공기 사이로 부패한 냄새가 역하게 피어올라 코를 간질였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그러나 얼마 나아가지 못하고 또 발목을 붙잡혔다. 널브러진 레버넌트들이 끈질기게 일어나 다시 덮쳐왔기 때문이었다. 하단을 노리고 덮쳐드는 놈의 손목을 짓밟고 뛰어올라 피하면서, 아이는 드미트리에게 말했다.

"아무래도 칼을 안 쓰고 여길 돌파하는 건 힘들 것 같습니다. 떨어지지 않고 잘 매달려 있을 수 있겠어요?"

말할 겨를이 없던 드미트리는 아이의 목을 붙잡은 팔에 힘을 더하는 것으로 대답했다. 그 때, 눈 앞에선 레버넌트 한 마리가 뛰쳐들고 있었다. 흉물스럽게 벌린 입과 치아가 똑똑히 눈에 들어왔다.

"미제리코드!"

푹! 외침과 동시에 솟아난 십자 단검이 그 입을 찢어발겼다. 검붉은 핏물을 흩뿌리며 나동그라진 레버넌트는, 이번엔 다시는 일어나지 못하고 추욱 늘어졌다. 재생을 막는 독검의 효과 떄문이었다. 희미한 새벽빛으로 시리게 빛나는 미제리코드를 바짝 움켜쥐고, 아이는 그렇게 길을 뚫기 시작했다.

목덜미를 꼭 붙잡은 채로 드미트리는 눈을 질끈 감았다. 떨어지지 않기 위해 몸을 붙잡는 것만으로도 온 몸의 기력이 빨려나가는 느낌이었다. 숨소리, 절삭음, 비명, 그리고 숨소리가 파도처럼 귓전에서 일렁였다. 그러던 와중이었다

'으윽!'

옆구리 쪽에서 화끈한 통증이 터져나왔다. 용암을 혈관에 들이부은 듯한 격통이었다. 흘깃 쳐다보니, 레버넌트 한 마리가 자신의 옆구리를 크게 물어뜯고 있었다. 순간적으로 팔에 힘이 풀려 떨어질 뻔했고, 입에서 신음이 새어나왔다.

"괜찮습니까?"

빡! 칼날이 치솟아 레버넌트의 아랫턱부터 정수리까지 쪼갰다. 아이의 단단한 목에 팔을 감고 경련하는 드미트리의 귀에 걱정스런 목소리가 들렸다. 생전 겪어본 적 없는 고통이 몸을 가득 채우고 있었지만, 방해하고 싶지 않았고 의존하고 싶지도 않았다. 드미트리는 억지로 신음을 억누르고 말했다.

"언제부터, 절, 걱정했다고, 그러십니까?"

일부러 비웃는 듯한 미소까지 지어주었다. 이런 소리를 할 정도면 상태가 괜찮다고 생각한 듯, 아이는 재빨리 레버넌트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푹! 가죽북을 찢는 듯한 소리와 함께, 미제리코드의 예리한 칼날이 뱃가죽을 찢고 내동댕이쳤다. 그렇게 길을 뚫기 시작한 지 10여분, 레버넌트들의 공세는 눈에 띄게 약해졌다. 쓰러진 레버넌트들의 시체가 장애물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그 고깃더미를 밟고 뛰쳐올라서, 아이는 아상하게 마른 나무를 타고 오르기 시작했다.

"꽉 잡아요!"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격렬한 움직임 때문에 드미트리의 몸도 쉴새없이 흔들렸다. 동앗줄을 붙잡듯 온 힘을 다해 매달렸다. 매달리기만 해도 땀이 흥건하게 흐를 정도였다. 뒤에서는 비명 같은 괴성이 해일처럼 덮쳐오고 있었다. 어느새 나무 끝에 다다른 아이는, 나뭇가지 끝까지 달려가 도약했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레버넌트들 역시 나무를 타고 뒤쫓아다가, 그 커다란 도약 때문에 방향을 잃고 추락했다. 너무 많은 망자들이 올라탄 탓에 나무는 하중을 견디지 못하고 우지끈 부러지고 있었다. 쿵! 결국 거대한 충돌음과 함께 먼지가 치솟아오르고, 레버넌트들은 서로 짓뭉개고 나무에 깔려서 비명을 내지르기 시작했다. 그 난리통에, 레버넌트들은 아이의 모습을 순간적으로 놓치고 말았다. 그것으로 포위는 끝이었다.

"후우."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아이는 피로 젖은 미제리코드를 짐어넣고 달리기 시작했다. 드미트리가 일러준 곳으로, 마즈눈이 기다리는 곳으로.

*마즈눈이 머무르게 되어 있는 곳, 그것은 인근에 설치되어 있었던 조디악의 거점이었다. 꽤 큰 거점이었는지, 외곽에서부터 정갈하게 깔린 포석과 팻말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이미 아침이었다. 먼 지평선에서 해가 떠오르고 있었다. 강렬한 햇살이 눈을 간지럽혀서, 아이는 눈살을 찌푸리고 보폭을 줄였다.

"이제 도착했는데요. 그만 자고 일어나야죠?"

처음에 등에 올라탈 때에는 내려달라고 떼를 썼던 드미트리지만, 어느 순간부터 쥐죽은 듯 한 마디도 흘리지 않았다. 레버넌트들의 포위를 뚫고 여기까지 달려오는 긴 시간동안 죽 그랬다. 아이는 아마도 긴장하고 피곤한 탓에 잠에 빠진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가볍게 핀잔을 주려 고개를 돌린 순간, 놀라서 입을 벌렸다.

"언제 이렇게 크게 다쳤습니까?"

"조용히... 하세요. 머리가 울리니까... 별 거 아닙니다."

"별 거 아니기는요!"

그녀의 상태는 척 보기에도 위중했다. 아까 레버넌트에게 물어뜯긴 상처가 굉장히 깊게 남아 있었던 것이다. 그 두껍게 입은 옷이 피로 젖어 축축하게 달라붙어 있었다. 어두운 탓에, 그리고 드미트리가 악착같이 신음을 참고 있던 탓에 등에 업은 채로도 눈치채지 못했다.

"우선 응급치료라도 빨리 끝내야!"

"아뇨. 그것보다...일을 끝마쳐야, 소니아가, 무슨 일이 벌어질 지 모르는 데, 시간 낭비할 수는..."

횡설수설하는 드미트리의 말을 무시하고, 아이는 얼른 근처의 민가로 뛰쳐들어갔다. 드미트리를 구석에 눕혀두고, 얼른 치료할 만한 도구를 찾아내서 치료를 시작했다. 검붉게 달라붙은 천조각을 가위로 절개해 떼어내고 보니 상처는 생각보다도 더 깊었다. 손가락을 푹 집어넣으면 반 뼘까지 들어갈 정도였다.

"이걸 어떻게 참았습니까?"

그만큼 폐를 끼치기 싫었던 것일까, 아니면 모종의 책임감일까. 놀라울 정도의 인내력이었다. 육체는 이미 한계에 달했는지, 드미트리는 반쯤 초점이 나간 눈으로 연신 헐떡였다. 그런데 그 입에서 나온 말은 전혀 딴판이었다.

"이렇게... 낭비할 시간이 있습니까? 변수가, 발생하기 전에, 빨리 처리를... 끄아악!"

"헛소리 말고 일단 참으세요. 아까 제 이름을 걸고 약속했으니까."

"무슨, 약속 말입니까?"

아이는 상처를 꿰멜 실을 입으로 끊으면서 단호하게 말했다.

"당신을 지킨다는 약속 말입니다."

그리고 바늘이 살끝에 파고들었다. 고통, 그리고 어쩐지 눈물이 핑 돌았다. 더 고집을 부려봤자 소용 없을 것 같았다. 결국 더 이상 저항하지 못하고 상처를 어루만지는 손길에 몸을 내맡길 수밖에 없었다.

*치료가 끝났을 때에는 이미 한낮이 다 되어서였다.

'이 계집, 죽은 게 아니냐?'

치료 중간부터 드미트리가 의식을 잃었기 때문에, 림이 이런 말을 꺼낼 정도로 위험한 고비를 넘기기도 했다. 피를 너무 많이 흘린 탓이었다. 하지만 이런 응급한 부상을 수없이 손봤던 아이의 경험에 비추었을 때, 이 정도면 일단 생명에는 지장이 없을 것 같았다.

"재수 없는 소리 하지 마."

'아니, 입술이 파랗게 질린 게 말이지. 죽은 것 같은데.'

피로 얼룩진 손을 씻어내던 아이는 그 말에 놀라서 뛰쳐나왔다. 드미트리는 햇살이 들이치는 창가 맞은편의 침대에 누워 있었고, 림은 그 앞에서 날개를 퍼덕이고 있었다. 후욱! 다급하게 이불을 걷어젖히고, 붕대로 칭칭 감긴 가슴에 귀를 들이댔다. 심장 박동 소리를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귀와 뺨 가득히 전해지는 체온은 여전히 따뜻했다...

"당신 지금 뭐 합니까?"

그리고 귀에 들려오는 소리도 심장 박동 소리가 아니라 다른 소리였다. 부끄러움, 그리고 어처구니없음이 섞인 목소리였다.

"림!"

'이런, 안 죽었구나. 다행이군.'

아이는 림을 홱 돌아보며 원망조로 말했다. 림은 킬킬대며 웃고 있었다. 아무래도 오랜만에 장난을 치고 싶었던 모양이었다. 그 영문을 모르는 드미트리는 얼굴이 새빨개진 채로 이불을 끌어안고 있을 뿐이었다. 두 사람이 대화를 할 수 있게 된 건 오해를 풀고 나서였다.

"상대의 의중이 뭔지, 계획이 뭐고 안배가 뭔지, 전혀 모르는 상황입니다. 속전속결로 나서야 변수를 최소한으로 줄일 수 있어요."

드미트리는 의식을 회복하자마자, 바로 마즈눈을 함께 잡으러 가자고 나섰다. 만류하는 건 오히려 아이 쪽이었다.

"그 몸상태로 괜찮겠습니까? 조금만 치료가 늦었으면 당신, 죽었어도 이상하지 않았습니다."

"지금 무시하는 겁니까? 애초에 이깟 상처, 이렇게 대단한 치료가 필요하지도 않았어요."

헛기침을 한 드미트리는 목소리를 가다듬고 말했다.

"말했다시피, 이 레버넌트들의 장군인 마즈눈의 통제권은 저한테 있습니다. 그러니 이미 가장 어려운 난관은 돌파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 마즈눈이 있는 곳을 찾아서, 제 얼굴을 비추기만 하면 모든 일이 끝난다 이 말이죠. 빠르게 일을 끝마치는 편이..."

하지만 말을 끝마치기도 전에, 드미트리는 크게 휘청하더니 뒤로 쓰러지고 말았다. 침대맡에 머리를 부딪히지 않도록 아이가 뛰쳐나가 부축해야 할 정도였다. 빈혈에 의한 증상이 틀림없었다. 잠시 정신을 잃은 주제에 스스로는 자각하지도 못한 듯, 걱정스러운 얼굴로 자신을 내려다보는 아이를 올려다보곤 이렇게 중얼거릴 정도였다.

"어라? 제가, 왜, 누워 있죠?"

아이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아무래도 이 사람은 책임감이나 사명감 따위가 앞서면 놀랄 정도로 스스로를 등한시하는 성격인 듯싶었다. 키가 작은 탓인지 손끝 전체에 전해지는 체중은 덧없을 정도로 가벼웠고, 이런 상태인 드미트리를 억지로 싸움으로 끌고 가고 싶지 않았다.

"일단 당신은 여기서 쉬고 계시죠."

"그렇지만, 빨리 일을 끝마쳐야...!"

"그 마즈눈이라는 놈과 당신이 얼굴만 마주치면 되는 거 아닙니까. 여기서 쉬고 있으면, 그 놈을 잡아서 데려오겠습니다."

드미트리가 항변하려 했지만 또다시 현기증이 찾아와서 그러지 못했다. 단호하게 말을 마치고, 아이는 뒤돌아서서 방을 나섰다. 어느새 정오였다. 가장 높은 곳에 떠오른 태양이, 문을 박차고 나온 아이의 은발을 찬란하게 비추었다. 그 때였다.

"윽!"

'무슨 일이냐, 어린 순례자야?'

림이 놀라서 아이에게 물었다. 아이가 자신의 어깨를 붙잡고 신음성을 흘린 탓이었다. 잠시 어깨를 붙잡고 문지르던 아이는, 고개를 갸웃하고 자리에서 일어나 다시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아니, 근육통인가? 갑자기 이 근처가 이상할 정도로 시려서..."

'헛, 벌써 몸에 골병이 들었나 보군.'

"뼈밖에 안 남은 너한테 그런 말 듣기 싫은데."

그 불길한 통증의 원인은 아이를 추론하지 못했다.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사자궁과 싸운 후로, 너무 많은 일들이 일어났으니까.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