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 동료 ( 3 )
흙먼지로 덮인 도시는 고요했다. 깨진 포석마다 잡초가 올라왔다.
바람에 살랑이는 풀줄기 너머에서는 붉은 눈동자가 사방을 훑어대고 있었다. 아이였다. 지금 아이는 바짝 엎드린 채 땅에 뺨을 대고 마즈눈의 흔적을 찾는 중이었다.
"이 도시가 텅 빈 이후로, 여기 전체가 그 놈의 서식지 비슷하게 쓰이고 있던 모양인데..."
난장판 속에서도 아이는 그걸 읽어낼 수 있었다. 오래 전에 깨진 포석 사이사이로, 망가진 지 오래되지 않은 포석들이 보였기 때문이었다. 그 파손은 다른 파손과는 명백히 결이 달랐다. 아무래도 마즈눈의 커다란 몸뚱이의 무게를 견뎌내지 못해 거미줄처럼 잔금을 일으키고 부서진 듯싶었다.
"흔적을 더듬어보면... 여기로 이어져 있는데."
고개를 드는 순간 세찬 바람이 아이의 머리를 쓸어내리고 떠나갔다. 메마른 풀줄기와 흙먼지가 바람에 쓸려 사라진 후에, 아이의 시야에 들어온 것은 술 저장고였다. 문이 부서져 바닥에 뒹굴고 있다는 것을 제외하면 꽤나 번듯했다.
"윽."
저장고 안에서는, 비릿한 알코올 냄새에 살이 썩는 구린내가 섞여 풍겨오고 있었다. 술을 보존하기 위해서일까, 일부러 빛이 들지 않게 만들어놓은 듯 내부는 한 치 앞을 보기 힘들 정도로 어두웠다. 스릉, 조용히 천갈궁을 빼들고 안으로 들어섰다. 돌바닥을 걷는 발소리만이 크게 울려퍼졌다.
"이건?"
발끝에 광물질의 무엇인가가 닿은 감각이 느껴졌다. 허리를 숙여 그 정체를 파악했을 때, 아이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건 깨끗하게 살을 발라낸 백골이었다. 사방을 살펴보니 유사한 백골이 조개무덤처럼 쌓여 있었다. 그 마즈눈이 끝마친 끔찍한 식사의 잔해가 틀림없었다. 아이는 천갈궁을 세게 쥐어잡은 채 벌떡 일어났다.
"여기가 그 놈의 소굴인 건 확실한 것 같은데."
그렇다면 지금 여기에서, 어쩌면 천장이나 저 술독 뒤에서 기습을 노리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아이는 긴장한 채 술 저장고 이곳저곳을 탐색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십여분 후, 모든 장소를 뒤진 후에도 마즈눈은 나타나지 않았다. 결국 아이는 고개를 저으며 술 저장고를 나설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소득이 없는 건 아니었다.
"그 녀석은 이렇게 어두운 곳을 거처로 삼고 있는 모양인데."
그 쌓인 백골의 양은, 드미트리에게 들었던 것처럼 거대한 괴물이 지금까지 먹어치운 총량이라기엔 너무 적었다. 아무래도 도시 곳곳에, 아마도 저 술 저장고처럼 햇빛이 닿지 않고 어두운 곳에 보금자리를 여럿 만들고 살아가는 것 같았다.
"그럼, 저 술 저장고만큼 어둡고 폐쇄된 곳은..."
대로를 따라 걷던 아이는 어느새 광장에 도달했다. 광장 한 가운데에는 아름드리 나무도 통째로 들어갈 법한 커다란 우물이 자리하고 있었다. 어디선가 차가운 바람이 불어와 다시 아이의 머리채를 훑고 지나갔다. 그 바람을 맞으며 아이는 뚜벅뚜벅 그 우물을 향해 걸어갔다. 원래 이 땅에 살던 수백 명의 식수를 모두 댔을 우물은, 얼굴을 들이밀어도 바닥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깊었다. 그 깊은 어둠을 응시하며 자그맣게 중얼거렸다.
"여기밖에 없는데."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그 순간, 우물 깊은 곳에서 거대한 괴물이 튀어올랐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지금까지 들었던 어떤 레버넌트의 포효보다도 길고 끔찍한 포효가 우물벽을 메아리치며 귓구멍을 파고들었다. 다음 순간, 집채만한 레버넌트가 검은 손톱을 내뻗어 아이에게 덤벼들었다. 일곱 가닥으로 갈라진 꼬리가 태양빛 아래서 번쩍였다.
"흡!"
마즈눈의 단검만한 발톱은 그러나 검붉은 대검에 가로막혔다. 기습을 예상한 아이가 재빨리 레바테인을 불러내 대응한 것이었다. 우물벽에 올라탄 채 아이를 힘으로 짓누르려 발악하던 마즈눈은, 그러나 오히려 힘에 밀려 뒷걸음질치고 말았다.
"어딜!"
검날에 힘을 더해 밀쳐내고 가슴팍을 크게 후려쳤다. 촤악, 정오의 햇빛을 받아 핏물이 구슬처럼 반짝였다. 일격에 가슴을 크게 베인 레버넌트는 휘청이며 우물 안으로 떨어졌다. 첨벙! 커다란 물소리와 함께 퀴퀴한 구정물이 높이 치솟았다. 그 구정물을 뒤집어쓴 림은 조용히 물었다.
'어린 순례자야, 저 놈을 죽여버리면 안 되지 않느냐?'
"알아. 그 사람이 있는 곳까지 유인해야지."
그렇게 말한 다음 순간이었다. 마즈눈은 다시 우물을 박차고 튀어올랐다. 그러나 이번에 마즈눈이 택한 것은 습격이 아니라, 도주였다. 거대한 주제에,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빠른 속도였다. 아이 역시 재빨리 뒤쫓기 시작했다.
"그 쪽으로 가면 안 돼."
어느새 아이의 손에는 레바테인 대신 천갈궁이 들려 있었다. 마즈눈이 대로를 따라 뛰어갈 때, 아이는 건물 벽을 박차고 지붕 위로 뛰어올라가 놈을 나란히 추적했다. 검을 수평으로 쳐들고 달려나갈 때, 천갈궁의 검끝에서 검은 그림자가 흐릿하게 쏟아져나오기 시작했다. 곧 그 그림자는 천갈궁을 손에 든 그림자의 형상으로 변했다.
"저 놈 앞으로 가서, 방향을 바꾸도록 유도해."
그림자는 곧 천갈궁에서 완전히 떨어져나가더니, 명령을 내린 대로 달려나가기 시작했다. 선주와 했던 수련의 성과였다. 이제 아이는 천갈궁에서 꺼낸 그림자를 자신의 의지대로, 제 2의 몸처럼 사용할 수 있었다.
"아마 다음 은신처인 술 저장고 쪽으로 달아나겠지. 그 직전에 방향을 두 번만 틀게 시키면 드미트리가 있는 곳으로 보낼 수 있어."
너구리를 사냥하듯 그렇게 마즈눈을 몰아가는 것이 아이의 계획이었다. 어느새 첫 번째 분기점에 도착했다. 자신을 뒤쫓는 아이에게 이따금씩 돌덩이를 투척하며 뛰던 마즈눈은, 골목에서 방향을 꺾자마자 뜻밖의 적을 발견하고 소스라치게 놀라 소리를 내질렀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지름길로 먼저 보내놓은 그림자가 천갈궁을 휘둘러왔기 때문이었다. 뒤로 쫓기듯 물러난 마즈눈은, 잠시 손톱을 세우고 싸우려 했으나, 뒤를 쫓아오는 아이를 흘깃 보고 의지를 꺾었다. 이 마즈눈은 지휘관으로 사용하기 위해 만들어진 레버넌트였다. 그리고 지휘관에게 최우선의 임무는 언제나 자신의 생존인 법이었다. 곧 놈은 방향을 꺾어 또다시 달아나기 시작했다. 아이가 예상한 대로였다.
"좋아. 한 번만 더 똑같이 하면 돼."
휙, 천갈궁을 휘두르자 순식간에 그림자는 아이의 곁으로 돌아왔다. 다시 그림자는 공간을 가로질러 지름길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아이 역시 지붕과 담장, 나무 위를 밟고 밟으며 레버넌트 추격을 계속했다. 이제 드미트리가 있는 곳에 거의 도달해서, 아이가 성공을 예감할 때였다.
"윽!"
다음 지붕으로 건너가려 뛰어오르던 아이는, 무언가에 발목을 붙잡혀 갑자기 바닥으로 추락하고 말았다. 담벼락 사이에 숨어 매복하던 무언가가 아이를 기습한 것이었다. 이어 뜨거운 통증이 어깨와 가슴 사이에 강렬하게 터져나왔다. 익숙한 통증이었다. 세검, 날붙이에 관통상을 입었을 때 이런 통증이 찾아온다는 걸 아이는 경험으로 알고 있었다. 흘긋 쳐다보니 과연 기다란 검날이 자신을 꿰뚫고 있었다.
"이걸로 끝이다."
비웃음이 섞인, 냉소적인 목소리가 들려나왔다. 아이는 격통 한 가운데에서도 반사적으로 그 목소리를 향해 주먹을 내질렀다. 빡! 무언가를 후려치는 소리가 들렸다. 자신에게 세검을 찔러넣은 그 자는 일격에 저만큼 튕겨나가 벽에 부딪혀 나뒹굴었다. 정신을 수습하고 천갈궁을 세워든 채 그 곳을 바라보았다. 익숙한 얼굴이었다.
"사자궁!"
작센에서의 일전으로 죽은 줄 알았던 사자궁, 그가 비열한 기습으로 자신을 덮쳐온 것이었다. 아이는 이빨을 드러내며 적의를 내비쳤다.
"그때, 안 죽었습니까?
"보면 알지 않나."
그렇게 말하는 사자궁 빌헬름은, 안면에 강타를 얻어맞아 시뻘건 자국이 남았는데도 태연했다. 손끝으로 사자궁의 검날을 쓸어내릴 정도였다. 아이의 피로 젖은 세검은 햇빛을 받아 요사스럽게 반짝였다.
"윽."
어째서인지, 그 광경을 보자 현기증이 치솟아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동시에 상처 부위를 중심으로 엄청난 이물감과 고통이 끼쳐왔다. 사자궁은 그 광경을 보며 입꼬리를 말아올렸다.
"나는 너 같은 족속들을 남겨두고 죽을 수 없다. 죽을 수 없는 운명이야."
"나 같은 족속, 이라면..."
"위선자. 명예욕을 위해 타인을 희생시킬 준비가 된 자. 독재자."
빌헬름은 칼을 들어 아이를 가리켰다.
"데몬스폰. 너희 족속들이 흔히 택하는 말로지. 나는 너 같은 놈들을 사냥하는 일족의 말예다. 내 아버지의 아버지부터 나에게 이르기까지, 우리 흐레스베인은 어둠 속에서 너희 같은 놈들을 사냥해왔다."
이상했다. 그 말을 듣자마자, 다시 한 번 상처 부위가 끓어오르듯 아파오는 것을 느꼈다. 순간적으로 어깨를 부여잡고 비틀거려야 할 정도였다. 그 모습을 본 빌헬름의 입꼬리가 다시 한 번 치솟는 것이 보였다.
"뭐, 저번의 싸움은 꽤 좋았다. 그래서 되도록이면 정당한 승부로 승리하고 싶었다만... 어쩌겠나, 이렇게 된 걸."
"시간을 끌고 싶은 겁니까?"
"응?"
빌헬름은 의외라는 듯 눈썹을 치켜세웠다. 아이가 정확히 자신의 의중을 읽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당신은 이렇게 수더분하게 말을 많이 하는 성격이 아니었는데요. 왜 시간을 끌려는, 겁니까? 윽..."
아이가 다시 한 번 휘청였다. 빌헬름은 빙그레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어갔다.
"그래. 너는 이미 죽은 거나 다름없다. 저번 싸움에서 나는 네놈에게 낙인을 박았지. 그건 부활하고자 하는 열망으로 가득한 데몬스폰의 유해다. 그건 데몬스폰의 피를 먹으면 미친 듯 생명력을 되찾아 그 피에 담긴 힘을 빼앗고 부활하려 애쓰지."
이렇게 길게 설명해주는 것 자체도 시간을 끌기 위한 수작이라는 걸, 아이 역시 눈치챌 수 있었으나, 별 도리가 없었다. 우선 정보를 얻을 때까지 얌전히 듣고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잠들어있던 그 놈을 꺠우는 게 바로 이 성유물, 사자궁이다. 오염된 영혼을 베어내는 힘을 가진 검이지. 방금 일격으로 네 몸의 영혼에 구멍을 뚫어서, 저 데몬스폰의 유해가 침투할 통로를 열었다. 오 분 뒤면 네놈은 그놈한테 파먹혀 처참한 괴물이 되겠지."
"윽..."
빌헬름의 말은 허언이 아니었다. 빌헬름에게 얻은 상처를 중심으로, 무언가가 살 밑에서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그리고 저 데몬스폰은 이 검을 만나면 무력하게 봉인될 수밖에 없는 저주를 받고 있지. 그러니 네놈이 완전히 파먹혀서 아기 데몬스폰이 되면, 이 검으로 다시 쳐죽여 수납한다. 그게 내가 지금까지 너희 종족을 사냥해온 방식이야. 대화하는 동안 3분이 지났군."
이제 슬슬 잠식이 끝날 시간이었다. 아이의 어깨는 눈에 띌 정도로 기괴하게 일렁이고 있었다. 마치 피부 밑에서 거대한 생물이 꿈틀대는 듯한 광경이었다.
"감사하게 생각해라. 나한테 죽은 데몬스폰 중에, 자기가 왜 죽는지 묘지명이라도 전해들은 놈은 네놈밖에 없으니까."
말을 끝마친 빌헬름이 사자궁을 들고 천천히 아이에게 접근할 때였다. 푹! 갑자기 핏물 한 방울이 튀어 빌헬름의 콧잔등에 닿았다. 그는 눈살을 찌푸리며 입을 벌렸다. 예상 외의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갑자기 아이가 기다란 십자형 단검을 꺼내더니, 낙인이 박힌 상처부위에 그 단검을 찔러넣은 것이었다.
"뭐지? 왠 자해인가?"
빌헬름은 경계하며 아이를 살펴보았다. 그 단검을 박아넣은 주변부의 살이 시꺼멓게 죽고, 다시 부글거리며 재생되고를 반복하는 것이 보였다. 그 덕분에 아이의 몸을 파먹던 잠식은 일단 멈춘 듯했다.
"그 단검, 재생을 막는 힘이 있는 거냐? 그걸로 데몬스폰이 네 몸을 빼앗는 걸 억누르려고?"
"예."
바닥에 쓰러져 있던 아이는, 여전히 어깨에 미제리코드를 꽂은 채로 비틀거리며 일어났다. 부상 때문에 한 팔을 쓰지 못하는 듯했다. 멀쩡한 팔에는 천갈궁을 집어들고 있었다. 빌헬름은 이죽거리며 물었다.
"그래봤자 오래가지 못할 텐데. 길어야 5분 정도 버티다 끝이다. 힘들게 죽는 쪽을 택하는군."
"아뇨. 5분이면 충분합니다."
아이는 입술을 깨물고 오른발을 내밀며, 천갈궁을 비껴 세웠다. 천갈궁의 검날을 그림자가 휘감으며 사방에 바람을 일으켰다. 어느새 형상을 갖춘 그림자의 부축을 받으며, 아이는 빌헬름을 노려보고 씹어뱉듯 말했다.
"5분 안에 그 사자궁을 빼앗아서, 내 몸에 들러붙은 이 놈을 제거하면... 해결 아닙니까."
"5분? 오만하군. 그 몸으로 날 5분 안에 처리하겠다고?"
"기습이나 하는 비겁자를 쳐부수기엔 충분하고도 남죠."
명백한 도발이었다. 아마도 그게 빌헬름의 자존심을 제대로 긁어놓은 모양이었다. 이대로 도망쳐서 시간을 끈다면, 승패와는 상관없이 빌헬름은 아이를 죽일 수 있었다. 하지만 이미 기습으로 우위를 점한 주제에, 도망치기까지 하는 건 그의 자존심이 허락하질 않았다. 빌헬름은 표정을 굳히고 사자궁을 비껴 잡으며 자세를 취하기 시작했다. 잠시 후, 두 사람은 굉음을 일으키며 격돌하기 시작했다.
쾅!
검과 검이 부딪혔다고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커다란 소리와 바람이 터져나오고, 검을 맞댄 두 사람의 앞머리가 미친 듯 휘날렸다. 그 거대한 소리는 도시 전체에 퍼질 정도였다.
"왜 이렇게... 늦게 오는 거죠."
그 때, 드미트리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창 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윽고 그녀는 주섬주섬 침대에서 내려와 밖을 나갈 채비를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