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 예고되지 않은 것 ( 1 )
전장의 하늘은 자줏빛으로 저물었다.
교목은 앙상하게 불타 있었다. 수백 갈래로 나뉜 잔가지는 작은 바람에도 세차게 떨었다. 노을이 지평 너머로 스러질 때, 잔가지에 가려진 하늘은 수백 조각으로 부서져 어지럽게 녹아내렸다. 보초를 서던 병사는 그 몽환적인 광경을 멍하니 지켜보고 있었다. 해가 완전히 저물었을 때, 눈동자에 비치던 일몰도 끝났다. 그 순간이었다.
"읍!"
세상이 어두워지는 순간을 노리고, 누군가가 나무에서 뛰쳐내려 병사의 목을 휘감았다. 소리가 새나가지 못하도록 두꺼운 천으로 입을 막았다. 병사가 당황해서 몸부림칠 때, 그 자는 귀에 자그맣게 속삭였다.
"네 통령이 있는 곳으로 안내해라."
그건 레고르였다. 그 손에선 팔뚝만한 단검이 병사의 목젖을 위협하고 있었다. 안색이 창백해진 병사는, 입을 막힌 채로 정신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때였다.
"정말로 여기 있었군요."
챙! 칼 부딪는 소리가 크게 울렸다. 레고르는 다급하게 자신의 얼굴을 쪼갤 기세로 날아든 검날을 막아내고, 뒤로 물러섰다. 그 일격을 날린 자는 아이였다. 안도한 병사의 얼굴이 환하게 변했다. 그 목을 여전히 움켜쥔 채로, 레고르는 단검을 내던지고 손을 번쩍 들었다.
"밤귀가 대단히 좋군. 적의는 없다. 믿어다오. 그저 만나러 왔을 뿐이다."
"암살하러 온 게 아니라요?"
"오늘이 끝나면 바로 진군을 시작하기로 하지 않았나. 그러니 오늘이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유일한 기회 아닌가. 한가하게 면회를 잡을 수는 없었다. 좀 출세했다고 이렇게 사형을 면박주는 거냐, 사제야."
"닥치세요."
그러나 말과는 다르게 아이는 천갈궁을 검집에 밀어넣었다. 탁, 검을 밀어넣고도 언짢은 표정은 끝나지 않았다.
"어디서 얘기하면 됩니까?"
"인적이 없는 곳이 좋겠군."
승낙의 뜻으로 알아들은 레고르는 내던진 단검을 다시 주워들었다.
"뭐 하는 겁니까?"
"그야, 목격자를 없애야지."
병사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아이는 다시금 스릉, 검을 뽑아들고 말했다.
"그걸 막으려고 여기 온 겁니다. 내려놓으세요."
"여전하군."
레고르는 질렸다는 듯 말하며 병사를 놓아주었다. 목뒤를 쳐서 기절시킨 후였다.
레고르가 아이를 이끌고 간 곳은 무너진 우물터였다. 버려진 지 오래된 듯, 주변에는 흰 갈대가 무성히 자라 우물터를 감싸고 있었다. 이따금씩 바람이 불 떄마다 갈대는 머리터럭처럼 흔들렸다. 털썩, 레고르는 물결치는 갈대밭에 주저앉았다. 아이는 조심스럽게 그 맞은편에 앉았다. 먼저 말을 꺼낸 것은 아이였다.
"그래서, 대체 어떻게 살아있는 겁니까?"
이게 제일 궁금했다. 분명, 레고르는 그 아라딘폴에서, 환골탑에 먹혀 헤카톤 케이레스의 일부가 되었을 터였다. 눈 앞에서 직접 보았으니 무엇보다도 확실했다. 대체 어떤 경위로 이렇게 재회하게 된 것인지 궁금하기 그지없었다. 그러나 레고르는 짧게 일축했다.
"글쎄, 대답할 이유가 있을까. 회포라도 풀고 싶은 건 아니겠지?"
"윽."
아이는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곧 성난 목소리로 말했다. 기세에서 지고 싶지 않았다.
"그럼 무슨 일로 보자고 한 겁니까?"
"부탁을 하러 왔다."
"부탁?"
아이는 눈을 가늘게 떴다. 그러나 레고르는 동요 없이, 담담한 어조로 말을 이어갔다.
"우선 말해둬야겠군. 나는 너희들의 주장을 믿는다."
"무슨 주장 말입니까?"
"이 세계가 곧 완전히 끝장날지도 모른다는 소리 말이다. 학장은 그 말을 알아들은 척 했지만 믿지 않아. 십자군을 일으킬 때 흔히 주워섬기던 것처럼, 흔히 내세우는 수사라고만 생각하지. 대부분 그럴 게다."
레고르는 잠시 뜸들이고 말했다.
"하지만 나는 진심으로 믿는다."
"왜죠?"
"이게 알려줬기 때문에."
딱, 레고르는 손을 튕겼다. 다음 순간, 아이의 얼굴은 딱딱하게 굳었다. 검은 머리의 여자가 유령처럼 떠올라서, 레고르의 목을 끌어안았기 때문이었다. 오른쪽 눈 밑에는 흐릿한 눈물점이 보였다.
"이건?"
"역시 보이는 모양이군. 역시, 네 그 말도 안 되는 힘은 아나테마의 힘을 빌린 거였나?"
그 말에, 더 이상 모습을 숨길 이유가 없어진 림도 우물 속에서 튀어나왔다. 림은 뼈 날개를 퍼덕이며 아이의 뒤에 섰다. 바람을 따라 흔들리는 갈대밭을 사이에 두고, 긴장된 분위기가 흘렀다. 일촉즉발이었다. 침묵을 깬 것은 레고르였다.
"금기의 에단. 스스로를 그렇게 불러주길 바라는 망령이다. 이게 알려주었다. 너희들이 주장하는 바가, 진실이라는 것을."
"에단... 설마!"
아이는 칼을 뽑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곤 림에게 눈짓으로 확인을 요구했다.
"맞지?"
'네가 생각하는 게 맞을 거다, 어린 순례자야.'
기억에 있었다. 림의 신전에서 보았던 이름이 그것이었고, 나하트가 외치면서 죽어간 이름이 그것이었고, 또 선주를 지금처럼 이름조차 빼앗기고 잊혀지게 만들었던 자의 이름이 그것이었다. 레고르는 의외라는 듯 눈썹을 찌푸리고 말했다.
"뭐냐, 왜 호들갑이냐, 사제야."
"당신은 아예 모르는 겁니까?"
아이는 간단하게 에단에 대해서 들은 얘기를 들려주었다. 림의 모습을 지금과 같은 꼴로 만든 게 저 에단이고, 림의 힘을 훔쳐서 연명하고 있는 것도 저 여자라는 사실을. 즉, 서로 죽여야 할 이유가 하나 더 늘어난 셈이었다. 하지만 레고르는 너털웃음을 터뜨리더니 갈대 하나를 꺾을 뿐이었다.
"그런가? 참 더럽게도 묶여 있군. 인연이라는 게."
레고르의 손 안에서도, 갈대는 바람에 따라 이리저리 흔들렸다. 훅 내던지고, 레고르는 하려던 말을 이어갔다.
"그럼 내가 왜 그 말을 믿는지 이해시키기는 더 쉽겠군. 나 역시 이 세계의 멸망을 두고 볼 수는 없다고 생각하는 입장이다. 진심으로 막고 싶다. 하지만 아마도, 학장에게는 나만큼의 협조를 바랄 순 없을 거다."
"왜죠?"
"그런 종류의 인간들에게는 인류니 세계니, 부질없는 얘기다. 정치에 골몰한 인간들은 일상적으로 그런 단어들을 주워삼기기 때문에, 정작 정말로 필요할 땐 그게 얼마나 무거운 단어인지 잊어버리기 마련이라서."
레고르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에단은 여전히 그 목에 목도리처럼 매달려 있었다. 일어선 레고르는 아이와 눈싸움을 할 수 있을 정도로 가까이 다가왔다. 그 목소리는 지금까지 중 가장 진중했다.
"나는 내 자리에서, 진심으로 그 멸망에 맞서고 싶다."
"그렇게 하시죠."
"야멸차구나, 사제야. 내 기억으로는, 너는 이런 사람을 맨 입으로 보내는 성격이 아니지 않았나?"
"헛소리 그만 하시죠. 사제라는 말 한 번만 더 하면 그냥 갈 거에요. 그래서, 부탁하고 싶은 게 뭡니까?"
레고르는 피식 웃으며 뜸을 들였다.
"이 더럽게 묶인 인연에 대고, 하나 부탁하자. 혹시, 전쟁 중에, 너와 나, 그리고 학장만이 함께 마탑에 돌입할 일이 생긴다면 말이다. 얌전히 내 제안에 따라줄 수 있겠나?"
"예?"
아이는 으르렁거리듯 되물었다.
"구체적인 목적을 밝히시죠. 그런 뜬구름 잡는 소리 말고."
"이 정도면 충분히 구체적이지 않나."
그리고 레고르는 귀를 툭툭 쳤다. 그 다음에는, 손가락으로 벌레가 꿈틀대는 듯한 흉내를 냈다. 무슨 뜻인지는 금세 눈치챌 수 있었다. 도청을 위한 벌레가 귀에 숨겨져 있다는 뜻이었다.
"내 맹세에도 가치가 있다면 말이지, 맹세하겠다. 이게 이 세계를 위한 일이라는 걸."
아이는 침묵했다. 어느새 떠오른 달빛이 갈대밭을 희게 비추고 있었다. 이렇게 달빛이 밝았던 밤이 떠올랐다. 도린과 함꼐 축제에 나가서, 대태도를 걸머진 레고르를 처음 만났던 날에, 밤하늘이 딱 이랬었다. 죽지 않고 돌아왔다면, 해야 할 일은 정해져 있어. 어차피 내 손으로 죽여야 할 사람이다. 하지만, 지금 진지한 표정을 짓고 있는 레고르는,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알았어요."
아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레고르의 말대로, 마탑에 돌입할 일이 있으면 군말없이 함께 들어가주겠다는 승낙이었다. 레고르는 안심한 듯 표정을 풀더니, 인사도 없이 갈대밭을 헤치며 저 멀리로 멀어져갔다. 옷자락이 갈대와 부딪혀 사락거리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울렸다. 검을 납도하고, 자리에 앉아서, 아이는 멍하니 무성한 갈대밭을 바라보았다.
*그로부터 일주일 후, 카나기와 기나센의 군세는 마탑에 당도했다.
전투가 곧 다가온다는 것은 공기로도 알 수 있었다. 시큰한 살 썩는 냄새와, 비릿한 화약 냄새가 벌써부터 진동했기 때문이었다. 이신의 늙은 후각에도, 그 냄새는 불쾌하게 스며들었다. 눈살을 찌푸린 그는 장죽에 불을 붙여 한 모금 빨아들였다. 그는 지금, 코끼리 등 위에 차려진 지휘소에 올라타서 전장으로 향하는 중이었다. 옆에는 레고르가 양반다리를 한 채 앉아 있었다.
"허허, 예상보다도 빨리 도착했군."
이신은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드넓게 펼쳐진 전장을 둘러보았다. 구원군의 소식을 들은 마탑은, 내전을 위해 준비한 인골귀를 모두 꺼내 진을 치고 기다리고 있었다. 머릿수를 헤아릴 수도 없을 정도로 많은 수의 해골들이 병장기를 꼬나쥔 채, 지평을 가득 메울 기세로 모여 있었다. 놈들이 가진 우위라곤 머릿수밖에 없었다. 그러니 최대한 넓은 자리에서, 회전을 유도한 다음, 용병의 시체를 일으켜서 이겨보겠다는 심사가 틀림없었다.
"하지만 저게 통할 리가 없지."
이신은 흐뭇하게 웃으며, 저 앞에서 위풍당당하게 걷고 있는 황금색의 거인을 바라보았다. 그건 컨쿼러였다. 쿵! 한 걸음 한 걸음을 내딛을 때마다, 지진이라도 일어난 것처럼 울렸다. 대체 어떻게 구한 것인지, 신통하기 그지없는 저 사소필렌의 성물이 인골귀로부터 용병들을 지켜낼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 선봉에서, 칼을 빼들고 겁없이 나아가고 있는 흰 머리의 검사도 어렴풋이 눈에 들어왔다. 기나센의 통령이었다.
"통할 리가 없지... 우리가 개입하지 않는다면."
"무슨 말씀이십니까?"
"알면서 모르는 척 하지 말게. 곧 사소필렌의 성물은 우리의 차지가 될 걸세."
이신은 레고르의 반문에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레고르는 조용히 물었다.
"그 말씀은, 역시...?"
"그래. 그 계집의 말이 맞았다네. 그러니 이렇게 후방에 우리 군을 배치한 게지. 전투가 시작되고, 저 통령과 성물이 정신없이 싸울 때, 우리는 놈들의 뒤를 친다."
그리고 이신은 레고르의 어깨를 툭툭 치며 말했다.
"저 아지프의 해골 무리가 모루가, 우리가 망치가 되어 놈들을 으깨버리는 게야."
"저 쪽에서 대비를 하지 않았겠습니까?"
"나도 그래서 긴장하고 있었다네. 그런데 보게, 아무런 대비도 없지 않나? 저렇게 순진하게 등을 드러내고 있는데, 이래서야 흑심이 없던 사람이라도 회가 동해서 덮치겠군."
이신은 유쾌하게 웃었다. 그 말대로였다. 증인이 되어줄 아탕칼리와 라달라리아의 세력은 이미 저 멀리 떠난지 오래였고, 일단 난전이 벌어지면 기나센의 군대가 배후로부터의 습격을 버텨낼 방법은 전무했다. 이것을 예측했으면서도, 도대체 왜 이렇게 무방비하게 구는지, 그것만이 유일한 의문점이었다. 이신은 스스로를 납득시키려는 듯 중얼거렸다.
"설마 정말로 배후를 치겠나, 그렇게 생각하고 있겠지. 설마 짚어두기까지 했는데 정말로 그런 명예 없는 짓을 하겠나, 그렇게 생각할 지도 모르겠군. 그 설마야말로 천재와 범인을 가르는 분계선이라는 걸, 깨닫기에는 너무 어린 나이니까 말이야."
레고르는 조용히 입을 다물고 이신의 말을 경청했다. 그러나 이신은 그 설명으로 납득한 것 같지가 않았다. 그렇게 중얼거리던 도중, 그는 한 가지 가설을 만들어낸 듯싶었다. 그는 심각한 표정으로 레고르를 바라보며 말했다.
"어쩌면, 난전이 시작되면 저 기나센의 통령이 나를 덮쳐서 인질로 삼을 수 있다, 그리고 군을 물리게 만들면 된다, 이런 순진한 생각을 하고 있는 걸지도 모르겠군. 그 때에는 자네의 역할이 중요하다네. 나를 지켜주게, 손서."
"당연한 말씀을."
레고르가 백양궁을 툭툭 치는 것을 보고, 이신은 드디어 마지막 걱정마저 털어냈다. 다시금 고개를 돌려서, 망원경으로 저 멀리 전장의 선두를 바라보았다. 뒤에서 이런 음모를 꾸미고 있다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통령은 싸움에 열심이었다. 이 잠깐 순간에도 인골귀 일곱을 종횡무진으로 베고, 으깨고, 부수고, 박살내고 있었다. 그 순진한 뒷모습을 보며 이신은 가슴 밑바닥에서 희열이 들끓는 것을 느꼈다. 저 늠름한 표정이 절망과 분노로 물들 때, 어떤 색으로 물들어갈지, 그것이 기대되어서 참을 수가 없었다.
언제 시작할까, 지금? 아니면 지금? 그렇게 고민하고 있을 때였다. 유난히 커다란 인골귀 하나가, 통령의 등을 노리고 커다란 언월도를 휘둘렀다. 통령은 앞에서 인골귀 셋과 칼을 나누느라 미처 대처할 틈이 없는 것 같았다. 처음으로 맞은 위기였다. 망원경을 들여다보던 이신은 눈살을 찌푸렸다. 그리고 다음 순간, 놀라서 망원경을 내던지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이건, 무슨!"
전혀 의외의 광경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어디선가 날아온 금색의 작은 검들이, 떼를 지어 날아들어 언월도를 쳐부수는 광경이었다. 레고르는 놀란 표정으로, 이신의 돌발 행동을 지켜보았다. 이신은 이를 악물고 채찍을 휘둘러 코끼리를 앞으로 몰아갔다. 인파를 헤치고 나아가서, 선두가 육안으로 보이게 되었을 즈음, 이신은 노호를 내질렀다.
"당신이 왜 여기에 있소!"
그 말에, 통령과 어깨동무를 하고 있던 그 사람은 휙 고개를 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