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 예고되지 않은 것 ( 2 )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연하게 빛나는 금발이었다.
전장의 먼지 속에서도 머리카락은 깃발처럼 길게 나부꼈다. 어찌나 맑은지, 흰 빛마저 감도는 갑옷과 붉은 어깨망토도 보였다. 아름다움, 그리고 늠름함. 공존하기 힘든 두 가지를 동시에 품고 있는 인상의 여기사였다. 이신은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하지만, 순식간에 그 정체를 알아챌 수 있었다. 그 여기사의 팔 한쪽이 텅 비어있었기 때문이었다.
"인마궁!"
외팔의 성기사, 인마궁 아셀라이 클라릿체. 그녀가 틀림없었다. 그녀의 뒤에서 사금처럼 반짝거리며, 괴물들을 도륙내고 있는 작은 단검들만 보아도 명확했다. 이신은 수염을 푸들거리며 코끼리를 두들겼다. 이신과 레고르를 태운 코끼리는 큰 소리를 내지르고 움직였다. 순식간에 아셀라이의 모습, 그리고 그 옆에 선 통령의 모습이 가까이 다가왔다.
"무슨 볼일인지?"
갈기 푸른 백마 위에 앉은 채로 그녀는 팔을 척 옆으로 펼쳤다. 수천 개의 나비검들이 지휘를 받듯 날아들어 그녀의 목에 휘감기더니 이윽고 망토처럼 변했다. 이신은 분노를 삭이기 위해 이를 잘근잘근 씹으며 말했다.
"무슨 볼일인지가 아니오. 당신은 아탕칼리 소속이지 않소? 왜 엉뚱한 전장에 있는 거요?"
그 말대로였다. 기나센의 뒤를 치고, 아지프에게 죄를 떠넘긴다는 이신의 계획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증인이 될 만한 다른 세력이 현장에 있어서는 안 됐다. 그것을 위해 공들여서 합류 시점을 골랐고, 정보를 풀어 군세를 원하는 대로 갈랐다. 사소한 반발쯤은 힘으로 억누를 자신이 있었다. 이제 그 계획이 거의 성공하기 직전이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그랬다. 하지만, 이 여자 하나 때문에 상황은 달라졌다. 지금 눈 앞에 나타난 이 성좌는 기나센에게 있어서는 최고의, 자신에게 있어서는 최악의 증인이었다.
"내가 여기 있으면 안 되는 이유라도 있나?"
"당신의 동료들은 이미 동쪽으로 떠났소. 당신은 동료를 저버리고도 아무렇지도 않다는 것이오?"
아셀라이는 그 말에 피식 웃으며 통령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꽤나 친근하지 않고서야 나올 수 없는 자세였다. 그리곤 당당하게 외쳤다.
"여기 있는 이 소년은 내 제자나 다름없다! 제자가 옳은 일을 위해 고난에 빠져 있을 때, 돕지 않는 것이야말로 수치 아닌가!"
"뭐?"
망치로 머리를 한 대 후려맞은 느낌이었다. 들어본 적 없는 이야기였다. 이신은 멍한 가운데서도, 더듬거리며 어떻게든 말을 붙여보려 했다.
"그럼 사사로운 인연 때문에 군령을 어겼단 말이오? 당신의 우두머리는 이미 동의했소. 동쪽으로 군사를 몰리는 것을 말이오. 어찌...!"
"내가 어긴 군령 따윈 없다!"
그 말과 함께, 그녀는 품에서 어떤 휘장을 꺼내 보여주었다. 끝부분이 핏녹으로 물든, 십자가 휘장이었다.
"나는 이 자리에 데스티노 라디오소, 광휘의 기사단의 일원으로 왔다. 광휘의 기사단에게는 특례가 있다! 십자군과 같이, 인류를 위한 군세에 봉사할 때에는, 상관이 아니라 인류에 대한 신념으로 자유롭게 움직여도 괜찮다는 특례다!"
"무, 무슨, 그건 이미 애저녁에 해체된 지 오래..."
"소식이 느리군. 부활했다."
"그럼, 당신의 동료들은 어디 있소? 다른 자는?"
"아직 없다, 나 혼자다!"
그리곤 아셀라이는 가슴을 쭉 폈다. 유쾌한 장난이라도 치는 듯 씩 웃고 있는 그 낯빛은,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 같지 않았다. 이신은 부들부들 떨었다. 아셀라이의 웃는 얼굴 위로, 회의 때 보았던 륜의 미소가 겹쳐 보였기 때문이었다.
"더 이상 할 말은 없나보군. 그럼 나는 전투에 복귀하겠다."
아셀라이는 그 말을 마치고, 다시 말을 몰아 앞으로 달려나갔다. 아이 역시 흘깃 뒤를 보더니 그 뒤를 따랐다. 함성과 칼 부딪는 소리가 퍼져나가는 전장의 뒤편에서, 이신은 복잡한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속으로는 신음을 흘리는 채였다. 장죽 끝을 잘근잘근 씹던 이신은 한숨을 내쉬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처음부터..."
처음부터 이걸 믿고 있었나. 아셀라이의 합류는 갑작스러웠다. 그 회담에서 아탕칼리는 아직 고위층이 도착하지 않아서, 이름모를 여주교가 대표 역할을 맡고 있었다. 그 이후론 쭉 진군이었으므로 이런 일을 꾸밀 겨를 이 없었다. 즉 그 회담 이전에 이미 그녀가 합류하도록 부탁해 두었다는 얘기였고, 이미 이런 전개를 예측해두었다는 얘기였다.
'굳이, 그 회담장에서 날 의심한다는 말을 꺼낸 것도...'
군세만 치우면 증인이 없어지는 것이라고, 은연중에 암시해서 방심을 유도하기 위해서였을 터였다. 그러나 사실은 준비하고 있었다. 한 사람 뿐이지만, 수만 명보다도 든든한 증인을. 웬만한 증인이라면 죽이거나 입을 막을 수 있겠지만, 상대는 성도 8궁이었다. 협잡이 가능한 위치가 아니었다.
'아니, 잠깐만.'
이신은 휙 뒤를 돌아보았다. 거기에는 차갑게 가라앉은 눈으로, 아이와 이야기를 나누는 아셀라이를 노려보는 레고르가 있었다. 품에는 백양궁을 꽉 끌어안은 채였다.
'우리한테도 성좌는 있다. 그렇다면, 죽일 수 있을까.'
그렇게 생각하며 다시 앞을 돌아본 순간, 수백 개의 나비검이 뭉쳐 괴물의 목을 가르고 피분수가 튀어올랐다. 불가능하겠군. 이신은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보통 때라면, 그가 할 리가 없는 생각이었다. 그러나 지금 이신은 궁지에 몰려 있었다. 이 전쟁에서 응당 자신들이 맡았어야 할 중심 역할을 빼앗긴 데다가, 그 대처로 마련했던 계획조차 분쇄당한 마당이었다. 이런 극단적인 생각이라도 고려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오늘은 정말 최악의 하루로군. 불가능해, 불가능해..."
"아뇨. 불가능하지 않습니다."
"응?"
이신이 가슴에 쌓인 먼지를 토해내듯 연기를 토해낼 때, 옆에서 이런 목소리가 들려왔다. 석상처럼 앉아 있던 레고르가 꺼낸 말이었다. 이신은 놀란 표정으로 레고르의 옆얼굴을 바라보았다.
"무엇이 말인가?"
"저 여자가 등장한 이상, 원래 하려던 일을 할 수는 없을 겁니다. 하지만, 조금 더 작은 규모로 하는 건 가능할 겁니다."
그 말과 함께, 레고르는 백양궁을 스윽 꺼내 어딘가를 가리켰다. 이신은 고개를 돌렸다. 그 칼끝은, 레바테인을 크게 휘두르는 아이를 지목하고 있었다. 그 몸짓만으로 이신은 레고르가 하고자 하는 말을 대충 이해했다. 하지만, 짐짓 딱딱한 표정을 지으며 되물었다.
"더 작은 규모로 한다면?"
"지금 기나센은 기형적으로 저 통령 하나에게 의존하는 상태입니다. 저 녀석 하나만, 아지프에게 죽은 것으로 떠넘겨도, 효과는 별반 다르지 않을 겁니다."
이신의 예상대로였다. 아셀라이 때문에 기나센 전체를 괴멸시키는 것은 불가능해졌다 하더라도, 아이는 죽여야 한다는 소리였다. 그리고 그 다음부터는 예상하지 못한 내용이 흘러나왔다.
"이미 알고 계실 거라 생각해서 말씀드립니다. 저는 저 녀석의 사형이었습니다. 그리고 통령은, 엄밀히 말하면 레이븐사이드라는 가문의 가주로서 통령직을 수행하고 있는 거지요. 그리고 그 가문에 저와 저 녀석을 제외한 계승자는 없습니다."
"그 말뜻은..."
"학장님의 정치력이면, 저 녀석만 죽으면, 위기 상황을 틈타 저 녀석 대신 저를 저 자리에 세우는 것쯤은 얼마든지 가능하지 않습니까."
"으음..."
이신은 짐짓 눈살을 찌푸리며 수염을 쓰다듬었다. 솔깃했다. 적어도 방금 전까지 자신이 생각하던 것보다는 훨씬 말이 되는 계획이었다.
"그래서, 구체적으로 어떻게 그걸 한단 말인가? 기나센의 통령도 만만히 볼 수 없는 강자라고 알고 있는데 말일세."
"하지만 어리죠. 그리고 멍청할 정도로 순진합니다."
레고르는 그 말과 동시에 저 멀리를 가리켰다. 이번에 레고르가 지목한 것은, 아지프의 마탑이었다. 점점 더 전장에 가까워짐에 따라, 멀었던 탑은 이제 지평을 가득 메울 듯 드러나고 있었다.
"약간의 연극이면, 녀석을 인마궁으로부터 분리해서 남들의 눈이 닿지 않는 곳으로 꾀어낼 수 있을 겁니다. 마탑이 좋은 장소가 되겠군요. 군단을 몰아서 상황을 만드는 것 정도는 쉽겠죠. 그리고 희생을 줄이려면 강한 자들이 솔선해서 들어가야 한다고, 우는 소리 좀 하면 들어줄 겁니다. 그런 녀석이니까요."
"흠... 그럼 자네 혼자서 저 자를 처리할 수 있단 말인가?"
"그건 무리입니다."
"그럼?"
"학장님이 저를 조금 도와주셔야 할 것 같습니다."
즉, 상황을 유도해서 아이와 이신, 그리고 레고르. 세 명이 바깥 사람들의 눈이 닿지 않는 마탑으로 들어가자는 소리였다. 그리고 힘을 합쳐 기나센의 통령을 죽인 다음, 기나센 통령 자리를 이어받자는 말이었고. 이신의 머리는 빠르게 돌아갔다. 그런 상황을 유도할 수 있는 방법은 수백 가지도 넘게 떠올랐다. 방법 자체는 지금 상황에서 매우 괜찮은 것처럼 보였다. 한 가지를 제외하고.
"흐음."
이신은 자신을 들여다보는 레고르의 눈을 마주 들여다보았다. 이 자를 믿을 수 있는가. 그것이 가장 큰 문제였다. 레고르, 그리고 아이와 함께 외부의 시선이 닿지 않는 탑 안쪽으로 걸어들어가야 한다는 것은, 이신 역시 큰 위험부담을 짊어져야 한다는 뜻이었기 때문이었다. 그 작은 숨소리에서 그 의심을 읽어냈는지, 레고르는 눈을 내리깔고 말을 이어갔다.
"혹시 결정적인 상황에 저 녀석이 제 제안을 거부할지도 모른다고 걱정하신다면, 염려는 놓으셔도 괜찮습니다. 이미 약속을 해 두었으니까요."
"약속?"
"일이 뜻대로 돌아가지 못할 때를 대비해서, 작은 포석을 깔아두었습니다. 전장에서 결정적인 때에 함께 돌입하는 걸, 거절하지 말아달라고 부탁했죠."
그게 그런 의미였나. 사실 이신도 알고 있는 내용이었다. 레고르가 잠들었을 때, 몰래 그 귀에 도청용으로 가공한 벌레를 심어두었기 때문이었다. 레고르는 몰랐을 사실이었다. 그런데도 한 치의 거짓말 없이 그 사실을 전해주자, 드디어 마지막 망설임이 사라졌다.
"물론, 학장님께서 다른 방법이 있으시다면 그걸 우선하셔도 괜찮습니다."
"놈. 대단하군. 사실 처음부터 이렇게 되는 걸 바라고 있었나?"
"예?"
"통령 직을 건네받으면, 더 이상 칼 하나밖에 의탁할 곳이 없는 객장 역할에선 벗어나도 되니 말일세. 이것을 예상하고 있었으면서도 내게 말하지 않고, 뒤에서 그런 수나 쓰고 있었다니."
레고르는 침묵했다. 그리곤 고개를 끄덕였다.
"부정은 하지 않겠습니다."
"자네는 정말로... 정말로."
그리고 이신은 레고르의 어깨를 꽉 움켜쥐었다.
"내 손서에 걸맞는 사람일세. 사내가 그 정도 심계는 있어야지."
레고르의 제안을 받아들인다는 소리였다. 그 말을 마치고, 이신은 검지로 세게 손가락을 튕겼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다음 순간, 허공에서 맴돌던 수십 마리의 용들이 벼락처럼 쏟아지기 시작했다. 굉음과 포효가 사방에 울려퍼지고, 망루가 무너지고 대열이 부서지며 불길이 치솟았다. 레고르가 말한 상황을 갖추어주기 위해서, 전투를 일부러 난장판으로 만들기 시작한 것이었다. 그 선봉에는 거대한 뿔을 칼처럼 앞세운 채 전장을 휩쓰는 타스하가 있었다.
"십오 분 정도 있으면, 자네의 제안은 실현될 걸세. 움직이게."
그 말을 신호로 레고르 역시 꾸벅 인사하곤 코끼리 위에서 뛰어내려서, 칼 부딪는 소리가 울려퍼지는 전장으로 뛰쳐나갔다. 그 멀어지는 뒷모습을 보며 이신은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분명히 방금 전까지는, 오늘 하루가 그의 인생에서 최악의 하루가 될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지금 기분은 전혀 나쁘지 않았다. 늙어서 박동마저 줄어든 심장이, 다시금 희열로 끓어오르는 기분이었다. 가끔은 모험을 해볼 만도 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설마, 저 놈이 가족의 등에 칼을 찌르기라도 하겠나."
멋쩍은 듯 유얀의 머리를 쓰다듬던 레고르의 모습을 떠올리고, 이신은 마지막까지 남아 있던 자그마한 불안도 털어넘겼다.
*푸슥!
칼이 뱃가죽을 가르는 소리는 섬뜩했다. 칼을 뽑자, 피는 크게 솟구쳐서 벽에 다섯 줄의 흔적을 남겼다. 털썩, 이신은 앞으로 쓰러지면서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네놈, 네놈이..."
"생각보다 명이 질기군."
게획은 레고르의 말대로 돌아갔다. 아지프의 마탑에 아이와 레고르, 이신 세 명이 돌입하고, 지금은 막 그 탑을 지휘하던 탑주를 죽인 후였다. 싸움을 막 끝마치고 방심한 아이를 죽이기 위해 칼을 빼들었을 때, 이신은 강렬한 통증을 느끼고 앞으로 고꾸라졌다.
"사냥감을 잡을 때는, 그 사냥감이 사냥할 때를 노리는 게 사냥꾼의 상식이겠지. 잊었나."
백양궁의 피를 흩뿌리고 레고르는 차갑게 말했다. 눈물이 흘러나와 흐릿해진 시야로, 저 벽에 등을 기댄 통령의 모습이 있었다. 개입하지 않겠다는 듯 팔짱을 낀 채였다. 이신은 발악하듯 외쳤다.
"이 무슨! 이게 대체 무슨 짓인가! 왜, 이런 짓을?"
"당신은 모르겠지만, 앞으로의 무대에 당신 같은 평범한 사람들이 올라설 자리는 없소. 더 방해하기 전에 무대에서 치워주는 게 내 나름대로의 자비요."
"평, 평범, 내가?"
"운명에 저항할 힘이 없는 사람들을 윗대가리에 데리고서는, 이 멸망의 위기를 헤쳐나갈 수 없다는 뜻이오."
"너, 설마..."
쿨럭, 핏물을 토하고 이신은 믿을 수 없다는 듯 레고르를 쳐다보았다. 레고르가 진정으로 노리던 자리가 무엇인지를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그건 기나센의 통령 자리가 아니었다. 그가 노리던 것은, 카나기의 수장의 자리였다.
"이제 깨달았군. 나는 진심으로 이 세게의 위기를 막아낼 생각이오. 그리고 당신은 방해꾼이지만, 당신이 이룩한 세력은 꽤나 도움이 되지. 난 이대로 돌아가서 당권을 장악할 거요."
"가능할 것, 같은가! 쿨럭, 우리는, 가족을 무엇보다도 사랑하도록 배웠다! 그런데, 가족을 배신한 네놈이...!"
"그래서 상간을 저질렀소?"
"뭐?"
이신은 다시 한 번 뒤통수를 후려맞은 기분이었다. 이 세상에서도 몇 명만 알고 있을 자신의 비밀을 어떻게 알고 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이어서, 녀석이 어떻게 당권을 장악할 생각인지도 불현듯 이해할 수 있었다. 동시에, 두려워졌다. 이 자는 말없이 이용당하는 객장 흉내를 내면서, 대체 언제부터인지도 모를 때부터 이 날을 고대하고 있었다.
"괴물... 괴물을...들였어."
이신의 망연한 중얼거림을 들으며, 레고르는 피식 웃었다. 백양궁을 손에 든 채로 그는 천천히 이신에게 다가갔다. 텅 빈 마탑의 꼭대기 층에서는, 그 발걸음이 유난히 크게 메아리쳤다.
"상황 파악은 끝난 모양이군. 당신은 가족을 중히 여긴다고 하니 기회를 주겠소. 타스하를 부르지 마시오."
이신은 숨을 헐떡거리며 눈을 부릅떴다. 레고르는 자세를 낮추어 핏기가 사라져가는 이신의 얼굴을 바라보며 말했다.
"만약 타스하를 부르지 않고 조용히 운명한다면, 당신의 덜떨어진 아들과 손녀는 내가 잘 돌봐주겠소. 하지만 부른다면, 그런 자비는 기대할 수 없을 거요."
천교룡 타스하, 카나기가 존재하기 전부터 있었던 그 해묵은 용은 학장의 권위를 증명하는 영물이었다. 아무것도 두렵지 않은 듯 했던 레고르도 그것만은 두려운 모양이었다. 그런가, 이신은 핏물을 쿨럭이면서 손가락을 입에 가져갔다. 레고르는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그만두라고 했을 텐데."
휘이익! 이어, 마력을 담은 소리가 예리하게 퍼져나갔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이에 화답하듯, 멀리서 큰 울부짖음이 터져나왔다. 마탑의 유리창이 전부 깨져나갈 정도로 거대한 굉음이었다. 방금 이신의 휘파람은 천교룡을 부르는 휘파람이었다. 설사 자신이 죽더라도 레고르는 저승 길동무로 데려가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상황이 그렇게 돌아가는데도, 레고르는 당황하지 않았다. 오히려 피식 웃으며 몸을 일으킬 뿐이었다.
"결국 거짓말이었군."
쿠슥! 다시 한 번 핏물이 터져나왔다. 백양궁으로 이신의 목을 찔러 확실하게 절명시킨 것이었다. 푹, 이신의 고개가 떨어졌다. 칼을 뽑아 핏물을 바닥에 흩뿌리고, 레고르는 아이에게 말했다.
"사제야, 상황은 보는 대로다. 조금 도와줄 수 있겠나."
"도와주지 않으면요?"
"뭐, 너도 나도 같이 저놈의 밥이 되는거지."
그렇게 말하며 레고르는 탑의 벽을 가리켰다. 쾅! 굉음과 함께 탑의 벽이 무너진 것은 다음 순간이었다. 검을 벼려 만든 것 같은 예리한 뿔이 벽면을 가득 뚫고 튀어나오더니, 다음 순간 벽이 우르르 무너지며 웅장한 용의 얼굴이 드러났다. 천교룡 타스하, 그것이 주인의 부름을 받고 전장을 벗어나 날아든 것이었다.
"참 예전부터 제대로 부탁할 줄을 모르는 머저리군요, 사형은."
아이는 쓴웃음을 지으며 천갈궁을 뽑아들었다. 주인의 차디찬 시체를 발견한 천교룡이 노성을 내지른 것은 그와 동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