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 순례 ( 5 )
흰 갈대밭 위로 뿌연 달빛이 쏟아지고 있었다.
소금기를 머금은 서풍이 밀려올 때마다, 담백색의 이삭은 달빛을 이지러뜨리며 길게 나부꼈다. 구름 사이로 흐릿하게 쏟아진 달빛은 갈대밭의 표면 위에서 부옇게 끓어올랐다. 진주를 녹여 붓칠한 것처럼, 지평은 허여멀건했다. 사람의 기척은 보이지 않았다.
불러놓고 기다리게 만드는 건가. 레고르는 가볍게 중얼거리며 갈대밭을 헤치고, 중심을 향해 걸어갔다. 마른 갈대잎이 버석거리는 소리와 바람 소리가 귓전에서 교대로 울려왔다. 마침내, 몸을 앉힐 만한 공터를 찾았다. 반질반질한 바위 위에 걸터앉아서, 레고르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세계는 고요했다.
레고르 보르지아, 그는 진정으로 혼자인 이런 시간이 낯설었다. 담배를 꺼냈다. 주홍색 겉불꽃은 짙은 연기를 피워올렸다. 연기를 들여다보는 것은 공허했다. 스스로의 망막을 들여다보는 것과 진배없는 일이었다. 그것은 레고르의 시야에 새겨진 가장 익숙한 무늬를 그려냈다. 잘려나간 살결의 무늬였다.
레고르는 깨어 있는 시간 동안, 늘 근면하게 무언가를 살육해왔다. 그 눈에는 칼로 저며낸 살결의 무늬가, 생의 붉은 단면이 깊게 새겨져 있었다. 레고르는 그것을 들여다볼 때마다 자신의 내면을 상상해보곤 했다. 죽여온 모든 것을 덧대어 그려낸 희고 붉은 단면을. 힘있게 썰어낸 자국과, 그 죽음의 단순성과, 그럼에도 자그맣게 솟아오르는 슬픔에 대해서 생각했다. 쏴아아, 다시 한 번 거센 바람이 불어 연기를 몰아내고 갈대밭을 흔들었다. 레고르는 상념에서 깨어났다. 귀에서 울려온 어떤 목소리 때문이었다.
'그럼 사형은 뭔데요, 자기가 검이라고 생각하는 정신병자입니까?'
그 말이 어쩌면 맞을지도.
하지만, 돌이나 식물이라고 생각하는 것보다는 낫지 않겠느냐, 사제야.
들려주지도 못할 혼잣말을 끝으로, 레고르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를 이 자리에 부른 사람이 드디어 도착했기 때문이었다. 갈대밭 끝에서 은색 머리를 나부끼며 걸어오는 그의 사제를 보며, 레고르는 나직하게 말했다.
"왔군."
대답은 없었다. 천갈궁을 한 손으로 치켜 잡은 채로, 아이는 말없이 다가올 뿐이었다. 레고르는 비꼬듯이 말을 이어갔다.
"내가 안 오면 어쩔 생각이었느냐. 지금의 나는 왕이고, 너는 부랑자다. 인질이라도 잡아야 오지 않았겠나."
아이는 두 척 거리 앞에서 멈춰섰다. 한때는 여자아이처럼 솜털에 덮여 있던 그 얼굴은, 지금은 메마른 연안처럼 피폐해져 있었다. 망가져 있었다. 한 때는, 이것이 자신과 동류가 되어줄 것이라고, 언젠가 자신을 벌해줄 것이라고 기대한 적이 있었다. 무슨 기대였을까, 이런 얼간이에게.
한참이나 레고르를 고요히 쳐다보던 아이는 짧게 답했다.
"필요 없지요, 그런 건."
"왜냐."
"약속했으니까."
언제 했던 약속을 말하는 것인가. 그 연기로 덮인 방에서 나누었던 약속을 말하는 것인가, 망가진 성벽에서 나누었던 약속을 말하는 것인가... 분명하지 않았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아니었다. 레고르가 이 자리에 혼자 걸어나온 이유는, 확실히 그것이었으니까. 레고르는 불 꺼진 담배를 바닥에 뱉고, 길다란 대태도를 뽑아들었다. 한때는 아이의 손에 들려 있던 검, 유혼이었다. 그 검날은 그윽한 어둠 속에서 예리하게 빛났다.
"당신이 모시는 신은, 그 에단은 어떻게 했지요."
"잠재웠다. 이 자리에 나오는 것을 반대하길래."
"그런..."
"이건 너와 나의 싸움이다. 망령 따위가 끼어들게 두지 않아."
레고르는 당연하다는 듯 말했다. 바람이 불어 갈대밭을, 두 사람의 옷자락을, 그리고 머리칼을 크게 뒤흔들었다. 이내 바람이 잦아들었을 때, 그들은 신호라도 떨어진 듯 칼을 부딪기 시작했다.
쨍, 쇳날과 쇳날이 부딪는 소리는 날카로웠다. 레고르는 유혼을 원래 자신의 것이었던 것처럼 날카롭게 휘둘렀다. 레고르가 유혼을 휘두를 때마다, 피를 탄 먹같은 잔영이 선명하게 남아서 아이를 덮쳐왔다. 반면 아이의 검세는 초라했다. 모든 초상적인 힘, 인간의 운명에 허락되지 않은 힘을 잃고, 천갈궁 하나만 남은 아이에게 믿을 것이라곤 정직한 검격밖에 없었다.
"윽!"
검은 잔영에 어깨를 파먹히면서, 아이는 신음을 흘렸다. 하지만 아이의 몸은 멈추지 않았다. 피를 흘리면서도 달려나가서, 레고르의 허리춤을 양단할 듯 검을 휘둘러댔다. 레고르는 몸을 뒤로 빼어서 피했다. 애꿎게 잘린 갈대만이 나풀거리며 무수하게 피어올랐다.
*몇 시간 후, 갈대숲은 엉망진창으로 변했다.
대지에는 지진이라도 난 듯 거대한 상흔이 여럿 새겨져 있었고, 이불처럼 언덕을 덮던 갈대들은 거진 반이 잘려나갔다. 바람이 불 때마다 흰 갈대들이 어지럽게 날아다녔다. 그리고 이 갈대밭에 새겨진 상처만큼이나, 아이의 상처도 깊었다.
팔뚝은 잘려나가지 않은 것이 신기할 정도로 깊은 상처를 입어서, 하얀 뼈를 드러내고 있고. 배에는 깊은 검상이 새겨져서 푸르고 붉은 내장이 언뜻 들여다보이고. 왼 얼굴은 뭉개져서 완전히 피로 물들어서 눈조차 제대로 뜨지 못하고 있었다. 은백색 머리칼은 피에 젖어 옷과 어깨에 남루하게 달라붙은 채였다.
반대로, 레고르는 평온했다. 그 팔과 얼굴에는 한 점의 상처조차 없었다. 하지만, 그 승자는 아이였다. 아이는 만신창이가 된 상태로, 레고르의 몸을 깔아뭉개고, 그 심장에 유혼을 꽂아넣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레고르는 그 검의 사용법을 제대로 알지 못했다. 느닷없이 신기를 빨아들여 붉게 빛나는 유혼을 통제하지 못하고, 아이에게 빼앗겨 심장을 내주고 말았던 것이었다. 아이는 무릎으로 그런 레고르의 배를 깔아뭉개고, 하얀 숨을 연신 토하면서 레고르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시야가 가물거려서 잘 보이지 않았다.
"결국 이렇게 되는 건가."
그 엷은 입술에서는 핏물이 새어나오고 있었다. 그럼에도 그 목소리는 평온했다. 쏴아아... 갈대밭이 소슬한 바람에 몸을 떠는 소리가 길게 울려퍼졌다. 아이는 천천히 유혼을 뽑아들었다. 그리고, 레고르의 허리춤에서 백양궁을 뽑아들어 천갈궁에 겹쳤다. 포개진 두 개의 날은 원래 하나였던 것처럼 합쳐졌다. 마침내, 여덟 개의 성도 8궁을 모두 모아서, 베루스는 완성되었다. 아이는 천천히 그 검날을 바라보았다. 핏물로 붉게 물든 시야에서, 베루스의 검날 역시 피를 머금은 것처럼 보였다.
"그 검을 가지고 어디로 갈 생각이냐."
레고르는 물끄러미 그런 아이를 쳐다보다 물었다. 허리춤에 천갈궁을 차고, 아이는 작게 대답했다.
"아무도 모르는 장소로요."
"가서 무엇을 할 생각이냐."
레고르는 끈질기게 물어보았다. 이런 끈질김은, 그의 성격과는 맞지 않는 것이었다. 아이는 대답을 망설였다. 핏물을 뱉어내어 발음을 고른 레고르는 툭 물어보았다.
"죽을 생각이냐."
어째서일까. 아이를 잘 아는 사람들은, 당연하다는 듯이 자신의 의도를 추론해왔다. 어떻게 그럴 수 있는지를 모르는 까닭은, 내가 바보이기 때문일까. 아이는 대답하지 못하고 입술을 깨물었다. 그 모습은, 곧 긍정이나 다름없었다. 레고르는 비릿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 대신에, 그 검을 들고 내 왕좌에 찾아가는 게 어떻겠나."
"그건, 무슨 소리죠."
"왕이 되는 거다. 내 대신."
아이는 잠시 멍하니 레고르를 쳐다보았다. 무슨 권유를 하는 것인지, 잘 이해하기 힘들었다. 레고르는 핏물을 다시 한 번 게워내고, 씹어뱉듯이 말했다.
"멍청한, 쿨럭, 놈. 살라고 말하고 있는 거다."
"어째서... 그런 말을."
"너와 나는 동류다."
레고르는 언젠가 꺼냈던 말을 다시 꺼내왔다.
"괴물이다."
그 꼴로도 살아 움직이면서 괴물이 아니라고 부정할 순 없겠지. 레고르는 피식 웃으면서 말했다.
"괴물이 인간과 더불어 살아가는 법은, 왕이 되거나, 가축이 되거나. 둘 중 하나 뿐인 걸. 너는 왕이 될 각오가 없어서 지금 헤매고 있는 거다."
이것이 레고르의 생각인가. 평생 레고르를 사로잡고 있었던 마음인가. 스스로를 괴물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이 목적 없는 세상을 끝없이 견뎌왔던 레고르의 마음이 갈대 내음을 타고 아이의 귀에 전해져왔다. 레고르는 마지막으로, 단순하고, 짧고 분명하게 말했다.
"살아라."
그 기이한 격려를 아이는 눈을 감고 음미했다. 그 짧은 세 음절이 자신의 마음에 일으킨 파문을 바라보았다. 분명히, 너무나 증오스럽고, 또 원수인 데도. 자신의 마음은 이 비뚤어진 사람에게 연민을 느끼고 있었다. 용서하라고, 말하고 있었다.
"아니요."
"거부하는 거냐?"
"괴물이 아니에요. 당신도, 나도."
아이는 레고르의 이마를 쓰다듬으며, 조용하지만 분명하게 말했다.
"모두 사람의 아들인 걸요."
레고르는 다시 한 번 피가 섞인 밭은기침을 뱉어냈다. 손발의 말단이 파랗게 젖어드는 것이 보였다. 남은 시간이 길지 않은 듯했다.
"헛소리를."
그리고 레고르는 눈을 감았다. 레고르의 눈꺼풀이 닫히고, 긴 속눈썹에 달빛이 맺혀 글썽였다. 그 가물어지는 목소리를 들으면서, 아이는 아직 해주어야 할 말이 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쿠르누이 보르지아. 그 자가 전해주길 부탁했던 유언이었다. 아이는 그 어깨에 손을 짚어 레고르의 의식을 붙들고, 힘을 주어 말했다.
"꼭 해 주어야 할 말이 있어요."
레고르는 대답하지 않았다. 아이는 더듬거리며, 들었던 말을 짜내기 시작했다.
"당신의 아버지가..."
아버지가 되어주지 못해서 미안하다고 전해 달래요. 말을 하려던 아이는 혓바닥을 멈추었다. 망설임이 마음을 가득 메웠다. 아무리 유언이라지만, 그런 슬픈 말을 마지막으로 듣게 해주고 싶지는 않았다. 말을 고르던 아이는 익숙하지 않은 선택을 했다. 거짓말이었다.
"아버지가, 당신의 아버지여서, 자랑스러웠다고. 훌륭한 어른으로 자라 주어서 고마웠다고... 사랑했었다고. 전해 달래요."
레고르는 대답 없이 침묵했다. 까만 먹장구름을 뚫고 나온 달빛이 세차게 두 사람의 얼굴을 비추었다. 한참 동안이나 대답이 없었다. 아이는 어쩌면 이 말을 듣지 못하고, 이미 의식이 없어져버린 걸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니었다. 레고르는 마지막 힘으로 조소하듯이, 입가를 비틀며, 작게 중얼거렸다.
"멍청한 놈. 나는 아버지가 없어."
그것이 레고르 보르지아의 유언이었다.
아이는 밤이 깊을 때까지, 차갑게 식어가는 레고르의 유해 곁을 지켰다. 마침내 길고 길었던 밤이 끝나고, 뿌옇게 깔린 어스름을 녹이며 여명이 밝아오는 것을 기다렸다. 천갈궁을 들고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레고르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 얼굴은 황금빛 햇살에 젖어, 살아 있는 것처럼 빛나고 있었다.
늘 전장의 포연 같은 희뿌연 안개에 덮여 있던 그의 얼굴은, 마침내.
마침내 평화를 찾은 것처럼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