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 순례 ( 6 )
잊혀진 숲은 텅 비어 있었다.
북서 자치령의 최북단에 있는 앙상한 숲. 이 곳을 떠난 이후로 그토록 많은 일이 있었는데도, 이 숲은 어떤 시간 속에 정지한 것처럼 그대로였다. 그 숲을 향해 한 발자국 내딛은 아이는 잠시 발걸음을 멈추고 나무를 매만졌다. 갑옷처럼 두텁게 자란 나무껍질의 감촉이 손 가득 번져왔다.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날카로운 가지와 메마른 잎새에 조각난 빛이 아이의 얼굴 위에 얼룩덜룩한 무늬를 그렸다.
레고르에게 말했던 대로, 아이는 지금 아무도 모르는 장소를 향해 걸어가는 중이었다. 그 장소는 바로 림의 신전이었다. 7위계에 근접한 마술사였던 나하트 칼벨레인, 그가 심혈을 기울인 연구 끝에 도달한 장소이자, 또 자료를 철저하게 인멸한 장소. 그 곳이라면 누군가가 찾아올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조용히, 모든 것을 마무리짓기에 딱 알맞은 장소라고 생각했다.
언젠가 노예의 목줄을 차고, 유령마가 끄는 마차를 탄 채 달렸던 길을 아이는 자신의 발로 걸었다. 낙엽과 진흙으로 덮인 길은 밟을 때마다 질퍽거렸다. 그 길을 한참이나 걸어가던 아이는 우뚝 멈춰섰다. 구덩이를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먼 옛날, 나하트가 굉혈포를 쏘아서 만들었던 거대한 구덩이였다. 어찌나 지나다니는 사람이 없었던지, 그 구덩이가 그저 낙엽과 썩은 물이 고인 채로 그대로 남아 있었다. 아이는 쓴웃음을 짓고 그 구덩이를 풀쩍 뛰어넘었다. 그리고 계속 걸어갔다.
걷는 동안, 베루스는 등 뒤에서 계속 쩔렁거렸다. 혹여나 몸에 닿지 않도록, 그 손잡이에는 두꺼운 천이 둘둘 말려 있었다. 성도 8궁의 여덟 조각을 모두 모아 완성된 베루스는, 아이를 주인으로 완전히 받아들이지는 않았다. 손잡이를 잡고 신기를 불어넣으면, 검날에 예기를 더하는 대신 불을 일으켜 아이를 공격해왔다. 거부였다. 어차피 더 이상 이 검을 쓸 일이 없었으므로, 아이는 차라리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베루스로 목숨을 끊을 생각이었기 때문이었다. 자신의 목숨을.
스산한 바람이 숲을 휩쓸었다. 조용한 소로는 구불거리며 끝없이 늘어져 있었다. 생명 하나 없는 듯, 숲은 소름끼치도록 고요했다. 하늘 높이 떴던 해가 저물어갈 무렵이 되어서야, 아이는 마침내 그 숲을 빠져나와 목적한 장소에 도착할 수 있었다. 호수였다. 아이는 천천히 호숫가로 걸어가, 무릎을 꿇고 수면을 바라보았다.
노을이 저물고 있었다. 이 호수의 수면은 기름처럼 어두웠다. 수면에 비친 노을은 이끼와 부패한 잔여물과 뒤섞여서 탁한 주홍빛으로 일렁였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아이는 문득 단테의 말을 떠올렸다. 자신의 죽음이 자연물의 소멸과 같기를 바란다던 그의 말을 떠올렸다. 석양은 흔적도 없이 호수에 잠겨 스러졌다. 어스름을 흩뿌리며 어둠이 내려앉았다. 아이는 가만히 수면에 비치는 자신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세상을 가득 메우던 빛들이 얼마나 찰나간에 사라지는지, 어둠은 또 얼마나 갑작스럽게 자신을 에워싸는지에 대해 생각했다. 잠시 멍하니 사색하던 아이는, 곧 결심을 마쳤다. 심호흡을 하고, 호수 속으로 뛰어들었다.
호수 속은 여전했다. 저수된 물 대신, 하나의 세계가 펼쳐져 있었다. 잠시 하늘에 일렁거리는 수면을 바라본 아이는,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돌벽을 깎아 만든 림의 신전 역시 그대로 남아 있었다. 이곳 역시 시간이 정지된 것처럼 보였다. 자신이 다나를 질질 끌다시피 데리고 나왔을 때 생긴 자국이, 그대로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아이는 그 길을 따라 신전 속으로 걸어들어갔다.
단 한 번 보았지만, 잊을 수 없는 공간이 펼쳐졌다. 자신의 몸이 커졌기 때문일까, 높고 커다랗게만 느껴졌던 신전의 통로는 지금은 좁게 느껴졌다. 아이는 차가운 돌바닥을 밟고 계속해서 안으로 걸어들어갔다. 머리를 잃은 세 개의 조각상을 지나서, 안으로, 또 안으로. 그리고 마침내, 꿈에서라도 잊을 리는 없는 방에 도착했다. 림의 신전이었다.
"아."
하루종일 입을 다물고 있던 아이는, 오늘 처음으로 입을 열어 탄식했다. 신전의 입구에 박혀 있는 것이 아이의 발목을 잡아챘다. 그것은 카드였다. 나하트가 운명에 저항하기 위해 점을 칠 때 사용했던 타로 카드. 아이는 천천히 그 카드를 집어들었다. 카드의 아르카나는 알고 있었다. 광대. 불탄 광대의 카드였다.
그을음과 불에 녹아서 윗단이 삭제된 그것은, 그저 공연을 하고 있는 듯싶었다. 무언가의 탄생을 축원하는 공연을.
아이는 멍하니 광대의 카드를 바라보았다. 언젠가 들었던 말이 머릿속에서 무의미하게 재생되었다.
"광대는 속아넘어가는 자... 멍청한 자."
갓 태어난 아이는 바보일 수밖에 없지 않겠느냐. 나하트의 말을 떠올렸다. 무언가의 탄생을 뜻한다고 했었지. 이 신전 안의 시간 역시 정지해 있던 것인지, 그토록 오랜 시간이 흘렀는데도 카드는 색 하나 바래지 않고 멀쩡했다. 이것에서부터 모든 것이 시작되었었나. 잠시 감상에 잠겼던 아이는, 곧 카드를 내던지고 앞으로 걸어나갔다.
"여기다."
불탄 흔적이 여럿 남은 고대의 제단. 그 표면을 쓸어올리며 아이는 중얼거렸다. 고개를 쳐들자, 얼굴 없는 동상이 보였다. 림의 동상이었다. 그동안 쭉 보아왔기 때문일까, 지금의 아이는 그 얼굴 없는 동상만으로도 이것이 림이라는 것을 알아볼 수 있었다. 어쩐지 그리웠다. 아이는 천천히 그 동상의 잘린 목의 단면을 쓰다듬다가, 꼭 끌어안았다. 표면은 차가웠다. 하지만, 어쩐지 아늑한 기분이 들었다.
"림, 돌아왔어."
혹시 어떤 기적이 일어나서, 림이 다시금 모습을 드러내 주지 않을까. 기대했다. 잠시 동상을 끌어안고 있던 아이는, 피식 웃고 등에서 베루스를 꺼내들었다. 손잡이를 붙잡자 마자 작은 불씨가 검면에 일렁거렸다. 아이는 베루스를 제단 위에 눕히고, 그 옆에 나란히 누웠다.
"림, 보고 있어?"
대답은 없었다. 아이는 천장을 바라보며 잠시 입을 다물었다. 무엇을 기대하고 있던 건지, 허탈함과 자기혐오가 조그맣게 솟아올랐다. 아이는 손을 더듬어, 이제는 베루스로 완성된 천갈궁의 손잡이를 감싼 천을 풀어냈다. 손잡이는 억세고 단단했다. 아이는 그 손잡이를 세게 움켜잡았다. 이것으로 무언가를 베려는 의념을 담자, 작은 불꽃이 검끝에서부터 휘몰아치기 시작했다.
그 일렁이는 홍염은 순식간에 번져서, 아이의 손을 태우고 주홍빛으로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먼 옛날이 떠올랐다. 이 제단에서 불타올랐던 때의 날이. 아이는 그 번뜩이는 홍염을 응시하면서, 스스로의 심장에 칼을 꽂아넣었다.
"쿨럭, 커헉."
심장이 터져나가며 핏물이 역류했다. 너무나 익숙한 아픔이 몸 전체에 번져 왔다. 검끝에서 불길이 번져나와서, 혈관을 따라 온 몸을 휘도는 것이 느껴졌다. 아이는 의식을 잠재우려 애쓰면서, 눈을 감았다. 중얼거렸다.
"이걸로, 끝인가."
가자. 레이븐사이드의 모두가 있는 곳으로.
그동안 어떤 일이 있었는지, 이야기를 나누자.
많이 혼나려나? 많이 혼나겠지.
하지만, 그래도, 이번에는 내가 란페이를 꼭 끌어안아 주자.
엉망진창으로 걸어온 길이었지만, 당신 덕분에 행복했노라고, 즐거웠노라고 말하자.
아아, 귓가에서는, 다시금 그 날 들었던 종소리가...
"성공이군. 아니, 대성공이라는 말이 더 어울리려나."
멎었다.
어째서인지, 가슴과 온몸을 불사르던 뜨거움도, 격통도, 모두 사라져 있었다. 그러나 목소리는 꺼낼 수 없었다. 잠든 채 일어난 듯한, 가위 눌린 듯한 상태로, 아이는 자신의 귓가에 음산하게 들려오는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아, 이것이 마술사를 살해하는 신의 결말인가? 그것에게 예비된 이야기는 이것으로 끝이었나? 아아... 마술이 계몽의 은유라면, 참으로 대단한 결과로군. 대단해."
그 목소리는 비꼬는 듯도 했고, 순수하게 경탄하고 있는 듯도 했다. 아이는 여전히 눈을 뜰 수 없었다. 어째서. 자신은 죽었을 텐데. 정신의 혼란과 혼탁 때문에 상황을 제대로 파악할 수 없었다. 아이는 필사적으로 지금의 상황을 해석하려 애썼다. 그리고 눈치챘다. 등에 전해져오는 차가운 석회질의 감촉, 그리고 비강을 가득히 간질이는 잿가루의 냄새로 알 수 있었다.
"아, 아직인가. 스스로 목숨을 끊는 와중에도 아직도 완전히 절망하지 않았단 말인가. 마지막까지 한 발자국이 남았군."
이 장소는 승강기였다.
즉, 지금 이 곳은 아이의 정신의 내부. 그 으스스한 장레탑의 최상층이 틀림없었다. 그렇다면, 눈 앞에서 미친 듯이 어떤 말을 중얼거리는 남자의 정체도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눈을 떠라. 내 최후의 걸작이여."
아이는 그 말에 따라, 허락이라도 받은 듯이 눈을 부릅떴다.
제일 먼저 시야 가득히 보인 것은, 길 아잘록의 미소였다.
*아이는 박제된 곤충의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
분명히 눈을 뜨고 있고 의식이 있는 데도, 두 팔과 다리중 어떤 것도 움직일 수 없었다. 발가락 하나조차 움직임을 거부했다. 혓바닥조차 움직이지 않았다. 장례탑의 최상층, 승강기에 얌전히 누운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은, 눈 앞의 광인이 떠드는 소리를 듣는 것 뿐이었다.
"그 동안 누차 설명했으니 알 테지. 나의 목적이 무엇인가?"
그것은 아이에게 물어보았다가, 아이가 대답할 수 없는 상태라는 걸 뒤늦게 깨달았는지 빙긋 웃으며 자문자답했다.
"나는 더 이상 어떤 인간도 스스로의 불완전성 때문에 고통받지 않도록, 부조리와 불안 때문에 스스로 노예의 운명을 선택하지 않도록..."
아잘록은 우뚝 멈춰서서 단언했다.
"인류를 종합한 초인의 외신을 만들려 했다."
이 덧없는 씨내림의 저주를 누군가는 끝내야 하지 않겠나. 아잘록은 중얼거렸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신의 재료가 필요했다. 신의 재료... 데몬스폰은 신이 되지 못한 찌꺼기들이지. 하지만 그것에 인간 중의 인간, 영웅을 접붙여 절망시킨다면, 초인의 외신을 만들 수 있겠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래서 재료로 영웅의 혼과 데몬스폰의 유해가 필요했어."
알고 있는 얘기였다. 귀르겐과 단테가 그 영웅이었고, 헤카톤 케이레스는 데몬스폰의 유해로서 선택받은 것이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은 자신이 이미 모두 부수었다. 부숴서 실패로 돌아갔을 터인데, 어째서 이런 이야기를 또 꺼내는 것인가.
"그리고 실패했다."
아잘록은 말했다. 아이의 마음의 소리를 듣는 듯한 대처였다. 하지만, 아잘록이 읊은 원인은 달랐다.
"내 재능이 달렸던 탓일 테지."
그리고, 아잘록은 아이의 앞에 저벅저벅 걸어왔다. 그리고 아이의 턱을 움켜쥐고,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리고, 최후에, 나는 발견하고 말았다네. 내 부족한 재능을 메꾸고도 남을, 최고의 재료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