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화
천일영은 미흑천의 본문을 떠나 붙잡힌 산적들이 있는 곳으로 돌아왔다.
나무가 베어져 있는 모습을 다시 확인하기 위함이었다.
‘다시 보아도 내가 좀 심하기는 했군.’
천일영은 슬쩍 뒷머리를 긁었다.
심하기는 심했다.
이 정도로 넓은 지역의 나무를 베어 버렸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별유천지의 크기를 생각했을 때 여러 곳에서 나눠 나무를 해야 하는 것이 맞았지만, 별유천지를 빠르게 짓는 것에만 온통 신경을 집중하느라 거기까지 생각하지 못한 탓이다.
‘이럴 줄 알았으면 다른 곳에서 나무를 할 걸 그랬군.’
천일영이 고민하는 이유는 미흑천으로 가는 여러 산길 중에서 이곳이 가장 빠르고 편한 길이었다.
그런데 나무가 하나도 없으니 미흑천의 본문까지 가는 길의 풍광이 나빠진 것이다.
천일영은 잠시 생각에 잠겨 있다가, 이윽고 묶여서 끙끙거리는 산적 두목 송여악에게 다가갔다.
“선택권을 주마. 저기 있는 소저를 겁탈하려 한 죄로 지금 죽는 것과 현청으로 끌려가는 것, 그리고 내가 시키는 일을 하는 것. 어떤 것을 하겠느냐.”
“사…… 살려만 주시다면 뭐든지 하겠습니다.”
천일영의 서슬 퍼런 표정에 가랑이를 부여잡고 있던 송여악이 큰 소리로 외쳤다.
망할 놈의 인간이 어차피 일을 시켜 먹으려고 하면서 참 어렵게도 말을 한다 싶다.
지금 죽는 것도 문제지만, 현청으로 넘겨져도 고문 끝에 죽거나, 옥에 갇혀 있다가 죄수가 넘치면 빈 감옥을 마련하기 위해 취조가 끝난 죄수는 죽이는 것이 보통이다.
이래도 죽고 저래도 죽고 무조건 죽는 것을 잘 알고 있는 송여악은 천일영에게 고개를 숙였다. 더럽고 치사하지만 어쩌겠는가.
비록 고자라 하더라도 남은 인생 잘 살고 싶은 게 사람의 마음인 것을.
“그래, 잘 생각했다.”
송여악은 조금 전까지의 서슬 퍼런 표정을 거두고 눈앞의 젊은 공자가 갑자기 친절한 표정을 지으며 동아줄을 풀어 주자 기묘한 기분이 들었다.
조금 전 선녀 같던 여자가 갑자기 악귀처럼 변하더니, 이번에는 악귀 같은 놈이 갑자기 친절하게 구는 것이었다.
아까부터 아주 쌍으로 돌아가면서 미친 지랄을 해 대니 더러운 기분이 드는 것도 사실.
그러나 송여악은 젊은 공자가 은자를 다섯 냥이나 손에 쥐여 주며 말하자 이번에는 기분이 더러운 정도가 아니라 소름이 끼쳐 오른다.
은자 다섯 냥의 의미를 모를 정도로 바보가 아니다.
“불쌍하게도 이렇게나 말랐구나. 이걸로 밥도 사 먹고 기운을 내거라.”
“고…… 공자님? 무슨 일을 시키시려고 이렇게…….”
피둥피둥 살이 찌고 덩치 큰 송여악에게 말랐다고 하자 평수찬은 하마터면 뿜을 뻔했다.
그러나 송여악을 풀어 준 것에 대해서 설려온은 상당히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자신을 겁탈하려고 했던 놈이었기에 그 표정은 눈에 보일 정도로 화가 나 있었지만, 천일영은 개의치 않고 송여악에게 다정한 말투를 이어 갔다.
“별것은 아니다. 그저 나무를 좀 심으면 되는 일이다.”
“나무…… 말입니까? 그것뿐입니까?”
“묘목을 심는 것이 아니다. 다른 곳에서 나무를 뽑아 옮겨 심으면 된다. 전과 같은 나무로.”
“……!”
송여악이 기절할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왜 이렇게 잘해 주나 했더니 나무를 심는 것도 아니고 나무를 옮기라는 말이었다.
그러나 그것이 어디 쉬운 일인가.
그것이 가능했다면 진작에 나무를 옮기고 산적질을 계속했을 터다.
“기간은 넉넉잡고 삼 개월 주마.”
“사…… 삼 개월은 너무 짧습니다.”
“못 하겠다면…….”
천일영의 검집에서 서늘한 날이 뽑혀 나오자 송여악은 즉시 머리를 조아렸다.
눈앞의 공자는 여전히 친절한 표정을 하고 있었지만 하는 짓은 그게 아니다.
그러나 얼추 세어도 천 그루 이상의 나무가 비었는데, 삼 개월이면 하루에 삼십에서 사십 그루의 나무를 옮겨야 한다는 말이었다.
그런데 이런 일을 시키는 데 꼴랑 은자 다섯 냥이다.
송여악은 속으로 세상의 모든 욕을 퍼부었다.
“현령에게 말해서 특별히 너희는 건드리지 말라고 전하마.”
“그…… 그건 감사합니다. 공자님.”
“그건?”
“아니요. 아닙니다. 말이 헛나왔습니다. ‘그건’이 아니라 ‘그저’ 감사합니다요, 공자님.”
“그리고 혹시나 해서 하는 말이지만…….”
상냥하게 웃으며 검을 잡는 것을 보니 송여악은 또다시 속으로 욕이 튀어나왔지만 겉으로는 절대 웃음을 잃지 않았다.
웃으며 개 같은 일을 시키니 정말로 미칠 노릇이지만 목숨은 언제나 소중한 법.
이 자리만 모면하면 그다음은 일사천리다.
송여악의 머릿속은 이미 도망갈 생각으로 가득했다. 그때.
휘이이이익. 콰과과과과광.
“히힉!”
송여악은 눈앞의 광경을 보고 뒤로 자빠져 오줌을 지릴 뻔했다.
공자가 칼을 한번 휘두르자 땅속 깊숙이 박혀 있는 나무 밑동 수백 개가 뽑혀 허공으로 날아가는 것이 아닌가.
십 장에서 십오 장에 이르는 나무들의 뿌리였기 때문에 그 깊이가 상당했다.
장정 열 명이 붙어도 두 시진에 하나 정도 뽑아낼 만한 뿌리들이다.
“기간은 꼭 지키거라. 일하기 편하라고 사정을 봐주었으니 맡기고 가겠다.”
“네! 네. 그러믄입쇼.”
송여악은 미친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방금 눈앞에서 본 것은 일을 편하게 하라는 친절 따위가 아니다.
이것은 도망가면 죽는다는 경고였다.
저 무공의 신위를 보니 도망가 봐야 하루도 안 되어 잡힐 것이 뻔하다.
송여악의 앞날은 이젠 죽으나 사나 천 그루의 나무를 옮겨 심는 것뿐.
그러나 울컥하는 마음을 어찌 참으랴. 심지어 여유 있게 산길을 내려가는 공자의 등을 바라보자니 더 그렇다.
고자가 된 판에 미인을 두 명이나 데리고 가는 모습을 보니 배알이 꼴릴 수밖에 없다.
송여악은 조용히 나직하게 속마음을 씨불여 댔다.
“이런 망할 놈의 X부럴 새끼.”
쿠웅!
“으힉!”
그때 거대한 나무 밑동 하나가 날아와 송여악의 앞에 처박힌다.
눈을 들어 보니 공자가 검으로 나무 밑동 하나를 날린 것이었다.
근데 저 낯짝은 어떻게 안 되는지 아직도 친절한 얼굴이다.
“그…… 아직 자빠져 있는 놈들한테 한 말입니다. 오해이십니다. 이놈들아, 빨리 못 일어나냐. 할 일이 태산이다.”
“음…… 그렇지. 친절하게 대해 주는 나한테 그런 말을 할 이유가 없기는 하군.”
괜히 묶여 있는 산적들에게 발길질을 하는 송여악이 식은땀을 흘려 댄다.
제발 좀 빨리 가라고 빌면서.
그러나 항주로 돌아가는 길, 여전히 송여악을 풀어 준 데 대한 감정 때문인지 설려온의 표정은 잔뜩 화가 나 있었다. 그때.
“수찬아, 저놈들 목에 걸린 금액이 얼마나 되느냐.”
“음……. 정확하지는 않아도 삼십 명이니 은자 다섯 냥은 족히 될 겁니다.”
“그러냐. 손해는 보지 않았군.”
천일영이 씨익 웃는다.
시킬 일은 시키고 넘길 때는 넘기고.
그 뜻을 이해한 설려온의 얼굴이 활짝 밝아진다.
그러나 신이 난 마음에 폴짝폴짝 뛰는 설려온과는 달리 평수찬의 얼굴은 의외로 담담했다.
마치 처음부터 그럴 줄 알았다는 표정.
가장 효율적이고 돈을 적게 들이는 방도를 생각해 내라면 이것이 최상의 방법이다.
‘하지만 감사한 것 또한 사실이다. 이제서야 제대로 된 주인을 만났구나.’
향시를 보러 가는 길에 송여악을 만나고, 가진 것 다 털린 후에도 머리가 좋다는 이유로 송여악이 곁에 묶어 둔 지 벌써 10년.
드디어 저 지긋지긋한 산적 무리들로부터 나오게 되었으니 평수찬은 새로운 주인에 대한 기대감이 가슴속을 채우기 시작했다.
* * *
항주까지 오는 길 내내 기분이 좋아진 설려온은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했지만, 항주가 눈에 보일 정도로 가까워져 오자 말수가 급격히 줄어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항주의 성채를 통과하여 번성하고 있는 시내를 바라보자 아예 입을 다물었다.
‘벌써…….’
이제 헤어질 시간이다.
이미 항주에 들어서며 점소이 옷을 입은 사람과 화려한 검을 안고 있던 여인이 급히 어딘가로 발걸음을 돌리고, 목적지까지 길을 잃지 않도록 따라와 준 공자와 산적만 곁에 남아 있다.
이제 조금만 더 가면 다시 만날 수 있다는 보장이 없으니 마음이 애가 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
설려온은 침을 한 번 삼키고 용기를 내어 입을 열었다.
“다시 한번 묻지. 그대는 누구인가? 은혜를 입은 자로서 마땅히 알아야 한다.”
설려온은 이 말을 오랫동안 생각했다.
몇 번을 물어도 말을 돌리는 공자에게, 하다못해 이름만이라도 듣고 싶어서 궁리 끝에 나온 말이다.
그러나 최소한 은혜를 입은 입장을 전하면 공자의 마음이 움직일지도 모를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돌아온 대답은 설려온의 기대를 여지없이 무너뜨렸다.
“은퇴한 백수다.”
“공자! 내가 물은 것은 그것이 아니라…….”
당황한 설려온의 머리 위로 쓰다듬는 손길이 느껴진다.
마치 아이의 머리를 만지는 것처럼 공자의 손길이 부드럽다.
그 생소한 모습에 설려온의 얼굴은 창피함으로 붉어졌지만, 왠지 그리운 느낌도 들어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오늘 만난 사람의 손길이지만 왜인지 낯설게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설의룡에게 안부 전하거라.”
훅.
“잠깐만, 공자!”
순식간에 사라진 천일영의 신형을 잡으려 했던 손이, 아무도 없는 허공에서 멈추었다.
그리고 한참의 시간이 흘러 천일영이 있던 자리에는 이내 다른 사람들의 발걸음으로 들어찼다.
설려온은 허공에 멈춘 손을 거두어 자신의 머리를 만졌다.
아직도 온기가 남아 있는 것만 같다.
“이름 하나 알려 주는 것이 그리도 어려우냐…….”
처음부터 이상했다.
처음 보는 자신에게 여러 가지로 신경을 써 주는 것도 마음에 걸렸고, 자신에게 깨달음을 주기 위해 무공을 보여 주는 것도 이상했다.
분명 설려온이 모르는 연결 고리가 있었다.
“하지만…….”
그러나 언제까지 아쉬운 마음을 안고 서 있을까.
방금 저 공자의 입에서 아버지의 이름이 나왔다.
그것만으로도 저 공자가 누구인지 알 수 있는 단초가 생긴 것이다.
설려온은 이번에 맡은 해남파의 임무를 빨리 끝마치고 돌아갈 생각으로 빠르게 발걸음을 옮겼다.
보통의 사람은 보름에서 이십 일 정도가 걸리는 해남도까지, 이번에는 한 달 안에 도착하는 것을 목표로 계획도 세우면서.
어서 빨리 아버지에게 물어보고 싶었다.
저 공자가 누구인지. 설려온의 아버지 해남파 문주 설의룡이라면 분명 저 사람에 대해서 알고 있을 테니까.
* * *
“욱…… 우욱…….”
예고도 없이 천일영의 손에 끌려 빠른 속도로 객잔 앞까지 온 평수찬은 울렁거리는 속을 주체하기 힘들었다.
축지인지 경공인지는 모르겠지만 너무 빠른 속도로 이동을 하는 바람에 토할 뻔했는데, 이번에는 10층이나 되는 높은 전각에 화려한 객잔까지 보니 속이 더욱 울렁거리기 시작한다.
“당분간 이곳에서 일을 배우거라.”
“객잔 일 말입니까?”
“아니, 객잔을 운영하는 법이다.”
평수찬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분명 이 공자가 미흑천의 본문을 탐욕스러운 표정으로 바라본 것을 아직 기억하고 있었다.
또한 미흑천의 본문으로 가는 길목에 송여악을 시켜 나무를 심기로 한 것이 조금 전이다.
그 순간 평수찬의 머릿속에서 미래에 있을 법한 일들이 모두 그려지고, 여러 상황을 종합하여 하나의 사실로 만들어 기억 속에 담아 둘 때였다.
“그전에 하나 물어보지.”
“말씀하십시오, 공자님.”
“충성을 맹약시키고 어기면 목숨을 거둬 간다는 것과 그저 급여를 받으며 맡은 일을 게을리하지 않는 것 중에서 어떤 것을 선택하겠느냐.”
평수찬은 자신이 그렸던 미래의 일을 급히 수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방금의 질문은 미래의 예정에 없었다.
그러나 평수찬은 그 와중에도 질문의 의도를 끝없이 생각했다.
둘 다 틀리지 않은 선택이었다.
목숨을 걸고 충성을 다해 주인을 모시는 것과 급료를 받으며 열심히 일을 하는 것은 어찌 보면 같은 말이다.
충성을 다해도 급여는 나오기 때문이고, 돈에 고용되어도 맡은 일을 충실히 하다 보면 목숨을 걸게 될 때도 있다.
즉 목숨을 걸고 충심으로 주인을 대할 것이냐, 아니면 돈으로 너의 목숨과 충심을 살 수 있느냐라는 질문이었다.
잠시 생각하던 평수찬은 대답 대신 진심을 내놓았다.
“질문이 틀리셨습니다, 공자님.”
“질문이 틀렸다? 그것은 모두 정답이 아니라고 하는 말이군. 어째서 그렇게 생각했는지 설명해 보거라.”
“제 목숨은 이미 공자님에게 맡겼기 때문입니다. 공자님의 뜻대로 사용하십시오.”
천일영의 입가에 작은 미소가 걸렸다.
그것은 평수찬도 보지 못할 만큼 아주 작은 미소였다.
천일영은 평수찬의 어깨를 짚으며 객잔으로 이끌었다.
“우리 객잔의 음식은 천하일품이다. 어서 오너라.”
천일영과 평수찬이 객잔으로 들어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