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화
마음속으로 깊이 빌기를, 제발 이제는 천주가 정신을 차리고 도망가기를 바라는 마음.
그 시간을 벌기 위해 이 육신 하나 던져 피를 뿌리는 것으로 그 목숨을 잃는다 할지언정 그것이 아깝겠는가…….
“내 비록 노쇠한 몸이지만 끝까지 막아설 것이다. 이 앞으로는 가지 못하네.”
“그런가. 허나 길이라는 것은 만들기 나름이지.”
파아앙!
노병천을 향한 장권.
그러나 천일영은 굳이 단전을 부수지 않고 노병천을 쓰러트린다.
이 노인의 무공이라고 해 봐야 겨우 삼류 무인 정도의 실력.
병법을 다루는 자가 무공을 알고 있는 것이 오히려 이상한 일이지만, 흑도 조직에 몸을 담을 정도라면 무공 또한 알고 있어야 하는 것이 당연한 일.
그러나 이 노인은 현청으로 잡혀 간다고 해도 아마 하루를 넘기지 못하고 죽을 터다.
고문을 버티기에는 너무 나이가 많았다.
쿠당탕!
삐걱대는 소리가 나는 복도에 처박히는 신형. 노병천이 한 움큼 피를 토해 냈다.
“쿨럭! 크으으으.”
그러나 천일영이 발걸음을 다시 옮기려 하자 신음 소리를 토해 내며 노병천은 다시 몸을 일으켰다.
쓰러지기 전보다 더 굳은 눈빛을 하며.
이미 고통은 정신에 억눌린 듯, 방금 맞은 장권에 가슴팍이 움푹 파인 것도 마다하고 또다시 길을 막아섰다.
“크으으윽. 이놈, 이 앞은 절대로 못 지나…… 크악!”
쿠당탕탕.
다시 한번 장권에 쓰러지는 노병천이다.
이미 만신창이가 된 몸이지만 그는 손가락을 부들대며 복도의 마루를 다시 움켜쥔다. 또다시 일어나려는 것이다.
아무리 사정을 염두에 두고 힘을 조절하여 때린 것이지만 보통의 젊은 남자라도 사지가 뒤틀려 다시 몸을 일으키기 힘들 터.
그런데 육신이 쇠한 노인이 피를 토하며 기어이 두 번이나 몸을 일으켜 세웠다.
‘대단한 충정심이군. 왜 흑도 조직에 있는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아깝구나. 더 넓은 곳으로 나갔어야 할 사람인데.’
그러나 충정심이 강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그 사정을 봐주겠는가.
천일영은 원래부터 눈앞의 적은 철저히 부수고 다시는 올라서지 못하게 만드는 사람이다.
설사 그것이 악명을 만들고 그를 유계(幽界)에서 내려온 사자로 불리게 만들지라도.
“어째서 이 노부를 한 번에 죽이지 않는가! 나는 방금 전 자네를 죽이려고 했다네. 또한 지금 길을 막고 있는 것이 보이지 않는가. 자네가 이 노부를 죽이면 내가 죽는 소리에 천주가 깨달음을 얻고 운신을 보존할 터. 그런데 어찌하여!”
“노인, 이름이 무엇인가?”
“적에게 이름이 불려질 바에는 이름 없는 노인으로 죽는 게 낫네.”
“그런가. 아쉽군.”
퍼억!
또다시 날아가는 장권에 노병천의 몸이 밀려났다.
그러나 남아 있는 모든 힘을 다하여 막아선 탓에 이번만큼은 노병천의 신형이 마룻바닥으로 처박히지 않고 온전히 서 있다.
통증을 견디며 주인을 지키겠다는 결의로 가득 찬 마음.
그것이 노병천을 쓰러지지 않고 버티게 만들었다.
천일영이 가까이 다가가도 그 신형이 움직이지 않고 양팔을 벌린 채 그대로 서 있다.
“선 채로 기절을 한 것인가. 정말로 대단하구나.”
노인을 상대로 목숨을 끊어 내지 않으려 했지만, 내공이 실린 장권을 무려 세 번이나 맞고도 끝내 길을 막아선 사람이다.
천일영은 이내 노인의 몸을 바닥에 조용히 눕혔다.
이대로 서 있다가는 기도가 전부 막히며 곧 죽을 것이기 때문이다.
스스로 생각해도 이 노인에게 사사로운 정이 쌓일 만큼의 시간이 지나지 않았는데 무너트리고 밟는 것이 내키지 않는다.
“내가 돌아오기 전에 정신이 든다면 도망가거라. 네가 도망을 친다면 눈은 감아 주겠다.”
이제 열 걸음이면 천주의 방.
기감에 천주 강일택의 기운이 느껴진다.
마지막 남은 왕을 잡기 위해 왕이 움직이는 것은 드문 일이지만 천일영은 기꺼이 발걸음을 옮겼다.
아끼는 제자들에게 이런 위험한 일을 시킬 수는 없으니까.
* * *
쿠우웅! 콰아아앙!
천주 강일택의 방문이 폭발하듯 사방으로 터져 나간다.
각각의 창문과 방에는 애써 암기가 튀어 나가도록 기관 장치를 설치한 것도 소용없이 벽까지 모두 터져 나가는 것이었다.
후두두둑.
파편이 모두 방 안으로 쓸려 들어가며 자욱한 연기를 남긴다.
그러나 천주 강일택은 눈썹 하나 움직이지 않고 여유 있는 웃음을 지어 보였다.
손에는 제법 고가의 술까지 따라져 있는 잔을 들고 향을 음미하며 목으로 넘긴다.
“여기까지 오느라 수고가 많아…… 크아아악!”
콰광!
눈에 보이지도 않았는데 가슴 정가운데를 찌르고 들어오는 장권에 강일택은 피를 토하며 바닥에 처박혔다.
그것은 그야말로 잠시의 틈도 주지 않겠다는 천일영의 분노였다.
천일영은 온몸이 떨릴 정도로 화가 나 있었다.
드물게 그 이성을 잃을 정도. 천일영의 눈에서 혈광이 빛을 발하며 강일택의 머리채를 휘어잡고 거칠게 들어 올렸다.
강일택의 머리에서 머리카락이 한 움큼 빠지는 소리가 난다.
“크아아악. 끄으으윽! 네…… 네놈! 으으으윽.”
“겨우 이 정도 가지고 아픈 소리 내지 마라. 네놈이 방 안에서 술이나 처마시고 있을 때 너 같은 놈을 구하기 위해 세 번이나 덤벼들고 기절을 한 사람이 있다.”
“원래 패왕의 자리라는 것은…… 많은 사람들을 밟고 올라서…… 있는…… 큭윽…… 것이다. 놈들은 내…… 소유다. 네놈은 모르겠지만 말이다.”
퍼어어억!
순간 내공을 담아 놓은 단전이 산산조각이 나며 부서진다.
단 일격.
그것에 몇십 년 치의 내공이 깨진 단전 사이로 흘러 나갔다.
“끄아아아악! 아아아악!”
강일택은 단 한 번의 힘도 써 보지 못하고 모든 내공이 허무하게 흩어지는 것을 느껴야만 했다.
게다가 이후 바로 찾아오는 극심한 고통.
강일택은 태어나서 단 한 번도 이런 고통을 느껴 보지 못했다.
바로 정신을 잃는다 해도 상관이 없을 정도의 고통.
그러나 고통보다 더 거친 일갈이 귓가를 찢을 듯 파고들며 잃어 가던 정신을 다시 일깨운다.
“모름지기 패왕이라는 것은 편한 자리에서 놀고먹는 것이 아니라 내 수하들이 다칠까 염려를 하는 자리다! 그것을 모르는 자는 패왕이라는 말을 입에 올릴 자격도 없다. 네 밑에서 얼마나 많은 피가 흐르든지 네놈의 안위만 생각을 하는 것이 패왕인 것이냐? 네놈은 어디에 있었느냐. 네 밑에 있는 수많은 수하들이 다치고 쓰러지는데, 네놈은 무엇을 하고 있었냐는 말이다!”
우드드득! 우드득! 우드드득!
순간 강일택의 척추뼈가 마디마디 으스러져 나간다.
이제는 내공을 잃은 것도 모자라 다시는 서지도, 앉지도 못하는 몸이 되어 버린 것이다.
그러나 신경의 마디마디가 절단이 되는 그 고통은 조금 전의 고통과는 비할 것이 못 된다.
“으으으아아악. 아아아아…… 네…… 놈, 차라리 죽…… 이거라. 커허허헉!”
“죽고 싶다고? 그것이 네놈 마음처럼 될 듯싶으냐.”
파바바밧.
순간 정신을 잃지 않게 만드는 혈도를 찍어 누르는 천일영이다.
이놈은 정신을 잃지도 못한 채 고문까지 받아 가며 이 모든 고통을 견뎌 내야 할 것이었다.
그러나 천주라는 이름 아래 있던 수많은 수하들이 다치고 쓰러져 나간 고통에 비하면 별것 아니다.
죽지 않고 앞으로 몇 년 동안 이 고통을 견뎌야 겨우 한 사람분의 고통 정도일 뿐.
천일영은 강일택의 목줄을 움켜쥐고 밖으로 끌어냈다.
“이 광경이 보이느냐! 네놈은 이렇게 되기 전에 나왔어야 했다. 그래서 부하들이 죽고 고통을 당하지 않도록 해야 했다. 네 목을 내놓는 한이 있어도 말이다. 그것이 패왕이라는 자가 해야 하는 일이다!”
“끄으으으윽…….”
이미 제대로 된 대답조차 하지 못하는 강일택이다.
그러나 그런 그의 눈에서 한 줄기 눈물이 흐른다.
그것이 고통 때문인지, 아니면 뒤늦은 후회 때문인지는 알 수 없지만 눈물은 계속 흘러내렸다.
쿠당당탕.
신음과 비명을 번갈아 지르는 강일택을 백오십의 무인들이 병법에 맞춰 움직이던 연병장으로 집어 던지자, 이내 때를 맞추듯 현령이 포졸들을 이끌고 장원 안으로 들어섰다.
“으윽…… 이…… 이건……!”
그러나 잠시 눈앞의 모습을 보고 얼어붙는 듯한 태문탁이다.
팔과 다리가 모조리 잘려 나가 땅바닥을 뒹구는 무인들과, 단전이 부서진 극심한 고통에 몸부림치는 사람들이 마치 지옥도(地獄圖)를 그리는 듯한 모습.
이 광경은 꿈에서라도 나올까 무서운 모습이었다.
그리고 수많은 사람들이 흘린 피 웅덩이가 사방에 깔려 짙은 혈향을 피워 내는 것 또한 현령의 속을 울렁이게 만들었다.
그러나 이보다 훨씬 더 무서운 것이 있었으니, 현령은 눈앞의 세 명을 바라보며 소름이 끼쳐 오르는 것을 참을 수 없었다.
‘수백의 사람들을 이렇게 만든 것이 단 세 명이란 말이냐.’
실로 무서운 일이다.
아무리 무공이 고강하다 하여도 단 세 명이 이런 지옥도를 만들어 냈다고 한다면 그 누가 믿겠는가.
특히 별유천지의 공자.
태문탁은 그를 잠시 무신(武神)이라고 생각했던 적도 있었다.
그러나 이 광경을 보고 태문탁은 고개를 저었다.
이것은 무신이 아니라 마신(魔神)이었다.
‘빨리 일을 끝내고 떠나고 싶군.’
태문탁은 잠시 목청을 다듬고 큰소리를 높이 외쳤다.
“이놈들을 모두 포박하라!”
“네!”
무려 사십 명의 포졸들을 끌고 왔다.
오는 길은 그야말로 기분 좋았던 행차였다.
그도 그럴 것이 무려 미흑천의 본문을 모조리 잡아들이는 일이다.
출셋길이 열리는 자리인데 어찌 신이 나지 않겠는가.
그러나 이곳에 와서 보니 이 끔찍한 광경에 예전처럼 포박을 시킬 때 몸속을 파고드는 쾌감이 더 이상 생기지 않는다.
“이놈들, 가만히 있어라!”
“동아줄이 모자란다. 누가 더 가져와라. 이 미흑천 놈들 더럽게 많군.”
세상을 무섭고 떨게 만들었던 흑도들의 조직은 생각보다 빠르게 그 존재가 지워졌다.
그리고 눈앞에서 비명을 계속 지르고 있는 남자.
그를 보고 있으니 현령은 눈을 질끈 감을 수밖에 없었다.
바로 미흑천의 천주 강일택.
“이놈은 계속 비명을 지를 테니 재갈을 물리고 가는 것이 좋을 것이다.”
“공자님, 고생이 많으셨습니다. 이곳에 있는 모든 재물은 제가 정리하여 가져다드리겠습니다.”
“그렇군. 제법 양이 많을 테니 그렇게 하지. 그리고…….”
“말씀하십시오. 공자님과 제 사이에 말 못 할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음…… 이것도 주었으면 하네.”
공자의 손에 들려 있는 한 명의 노인. 정신을 잃고 늘어져 있어 처음에는 알아보지 못했지만 자세히 보니 노병천이라는 흑도 조직의 책사다.
무공이 강하지는 못하지만 용모파기에는 무려 은자 70냥이 걸려 있는 거물이었다.
“혹 따로 고문을 하시려는 것입니까?”
“아니다. 이 사람과 차 한잔하고 싶어서 데려가는 것뿐이다.”
“네에? 차를 마신다고요?”
“나중에 혹 이 사람을 보거든 체포하지 말고 그냥 놓아주게.”
“공자님 말씀이라면 제가 못 들어 드릴 것은 없지만 그냥 놓아주는 것은 아무래도…….”
“방금 내가 말하기를 그냥 놓아주라고 했다.”
공자의 말과 함께, 자신의 머리 위로 내리꽂히는 듯한 무서운 기운을 느낀 순간, 태문탁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저 공자에게 감히 의문을 표하는 것 자체가 죽을지도 모를 일.
태문탁은 얼른 고개를 숙이며 급히 말을 이어 갔다.
“아닙니다. 그런 뜻이 아닙니다. 알겠습니다. 공자님의 말씀인데 당연히 그래야죠.”
“이해해 주니 고맙군. 그럼 나는 먼저 내려가지.”
“네네, 조심히 살펴 가십시오”
이해를 한 것이 아니라 이해를 당했다.
태문탁은 식은땀이 솟아올랐다.
땅바닥에서 구르고 있는 무인들을 계속 보고 있어서 감각이 무뎌진 것인지, 말도 안 되는 실수를 저질렀다는 생각에 당황한 것인지 속까지 울렁거린다.
그러나 그때 눈앞에 또 한 명의 여인이 태문탁 앞으로 튀어나오는 바람에, 가뜩이나 울렁거리는 속이 내장째 밖으로 튀어나올 뻔했다.
“으…… 으힉!”
“많은 도움 감사합니다, 현령님.”
“아…… 아닙니다. 도움이랄 것까지야 있겠습니까. 당연히 해야 하는 일인 것을요.”
순간 자신의 손을 꼭 잡고 말을 하는 여인. 바로 금채홍이다.
그런데 맞잡은 손이 어찌나 곱고 부드러운지 이것이 검을 쥐는 여인의 손인가 싶을 정도다.
게다가 코앞으로 다가와 얼굴을 들이밀고 말하는데, 향기와 함께 그 미모에 같이 취해 버릴 지경.
“먼저 내려가겠습니다.”
“조…… 조심히 내려가시오…….”
조신하게 고개를 숙이고 총총걸음으로 발길을 돌리는 금채홍을 보자 방금 맞잡은 손이 다시 한번 떠오른다.
살면서 이렇게 고운 손을 잡아 본 적이 있던가 싶다.
태문탁은 금채홍이 잡았던 손을 바라보며 웃음을 지었다.
부드럽고 예쁜 손.
현령의 손이 자연스럽게 뒤춤으로 옮겨진다.
그리고 옷에 박박 문질러 닦아 내기 시작했다.
그 흔적을 조금도 남기지 않겠다는 듯이.
‘무서워 죽겠는데 왜 손을 잡고 난리인지 모르겠다. 이 소름은 도대체 어쩔 거야. 아, 속 울렁거려.’
태문탁은 옷이 닳도록 손을 문지르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