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화
드르륵.
새파랗게 질린 얼굴. 기루의 여주인은 문을 열고 들어서자 이내 머리를 땅에 박았다.
뒤에 따라 들어온 지긋한 나이의 남자 역시 표정이 안 좋기는 매한가지다. 아마도 남자가 기루의 실제 소유주인 모양이었다.
“죄송합니다. 귀한 손님이 오셔서 가희와 체란이를 데리고 가야 할 듯합니다. 대신 다른 기녀 네 명을 넣어 드리고 술값 또한 일절 받지 않겠으니 가희와 체란이를 내어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어허, 우리는 손님이 아닌가? 주인, 이것은 너무하는 처사가 아닌가!”
윤의강이 제법 목소리를 높였다. 그도 천혜향루의 단골이자 귀천명에서 영향력이 높은 사람.
하오문의 회주라면 어디에서 밀리는 자리도 아니다.
헌데 기녀를 빼 간다고 하니 기분이 상한 것이다.
“저희의 목숨이 걸린 일입니다. 부디 부탁드립니다.”
“괜찮다. 데리고 가거라.”
천일영이 조용히 웃음을 지으며 손짓을 한다.
기녀 민가희는 마음에 들었던 손님 아니, 한눈에 반한 손님이 자리를 물러도 된다는 말에 뺨에 바람을 넣고 퉁퉁 부은 표정을 했지만, 간절함이 절실하게 묻어나는 주인의 얼굴을 보자 이내 바람 빠진 표정으로 몸을 일으켰다.
“기녀도 됐다. 한 명만 들여보내고 술값도 계산할 터이니 물러가거라.”
“그…… 그리하면 저희 천혜향루의 체면이 서지 않습니다. 부디 저희 성의를 무시하지 말아 주십시오.”
“그것도 그런가. 알았다.”
기녀와 주인이 물러나자 윤의강은 흥이 깨졌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로서는 천마를 모시고 제법 즐기려는 생각으로 나온 것이니 재미가 없어진 것이다.
윤의강은 천일영의 술잔을 가득 채우며 짓궂은 표정을 지었다.
“근데 언제 천마 자리의 후임을 정하셨습니까?”
“딱히 찍어 놓은 사람은 없었는데, 나 역시 궁금하구나.”
“어떤 놈인지 한번 볼까요? 이 정보를 팔아먹으면 제법 돈이 될 것 같은데요.”
“어차피 가짜가 아니겠느냐.”
“가짜라도 돈이 됩니다. 새로운 천마가 나타났다 하고 정보를 팔아 돈을 벌고, 알고 보니 가짜였다고 또 돈을 받고 정보를 팝니다. 그게 하오문이 하는 일 아닙니까. 으흐흐흐.”
윤의강이 손을 비비며 음흉한 표정을 지었다. 돈벌이라면 가리지 않는 그다.
허나 천일영이 천마 신교에 있을 당시 많은 도움을 준 사람이기도 했다.
이해관계가 일치하여 천일영은 중요하지 않은 정보를 얼마든지 던져 주어 돈을 만지게 하였고, 곧 알려질 정보도 조금 미리 흘리게 하여 또한 돈을 벌게 해 주었다.
어차피 며칠 지나 세상이 알게 될 정보를 금화에 팔아 큰돈을 만진 윤의강은 대신 천일영에게 무림맹이나 사혈련의 정보를 무료나 헐값에 넘겨주는 역할을 했던 것이다.
“어차피 이 기루에도 점소이나 기녀 중에 하오문의 사람이 있을 것 아니냐. 가만히 앉아서도 용모와 정체를 알게 될 것을.”
“하하하, 눈치채셨습니까. 이 정보는 금화 다섯 냥은 될 것입니다.”
윤의강이 짓궂은 얼굴로 웃음을 흘리는 사이, 방문이 열렸다.
드르르륵.
기루의 주인이 말했던 기녀 네 명이 각기 손에 술을 두 병씩 들고 방으로 들어왔다.
여덟 병의 술은 모두 양하대곡(洋河大曲). 황제도 마시는 비싼 술이다.
주인은 화대와 술값을 무료로 해 주는 것도 모자라 고가의 술을 여덟 병이나 사죄의 의미로 보냈다.
이 모습을 본 윤의강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나는 괜찮으니 모두 옆에 계신 대협에게 가거라.”
“아…… 공자님은 혼자 계실 것입니까?”
천일영의 말에 기녀 셋이 윤의강 옆에 앉았지만 한 명만은 망설이며 되묻는다.
아무래도 손님을 혼자 두는 것이 마음에 걸리는지 기녀는 잠시 눈치를 보다 결국 천일영의 곁에 앉았다.
“네 사람의 기녀는 아무리 대협이라고 해도 감당하시지 못할 것입니다. 저는 여기에 앉겠습니다.”
“제법 고집이 있구나.”
천일영이 내민 술잔에 고운 술 줄기가 내려앉았다. 그런데 천일영은 옆에 앉은 기녀와 눈이 마주친 순간 의아한 느낌이 들었다.
아까 방에 들어왔던 민가희와 송체란보다 이 기녀가 훨씬 예쁜 얼굴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또한 얼굴뿐만이 아니다. 자태도 훨씬 곱고 움직임 또한 우아하기가 아까의 기녀와는 비교도 되지 않았다.
“희한한 일이구나. 어째서 네가 천혜향루를 대표하는 기녀가 아닌 것이냐.”
“아…….”
기녀의 얼굴이 붉어진다. 조용히 술잔을 들어 올리는 얼굴에 고민의 흔적 역시 보였다. 말을 해야 하는지 말아야 하는지 망설이는 것이다.
하지만 기녀는 이내 한 잔의 술을 입안에 머금고 잠시 천장을 바라보다 곱게 삼키고는 입을 열었다.
“민망한 말이지만 제가 천혜향루를 대표하는 기녀가 아닌 것은 다름 아닌 손버릇이 나쁘기 때문입니다.”
“손버릇?”
“네, 아무리 기녀라고 하여도 몸을 파는 여자가 아닙니다. 그러나 술에 취하면 여인의 소중한 곳을 만지는 손님들도 있는 법입니다. 보통은 참고 웃어넘기는 것이 기녀의 자세이지만 저는 그것을 참지 못해서…….”
기녀는 손으로 뺨을 올려붙이는 흉내를 내며 웃었다.
지금까지 꽤나 많은 손님들의 얼굴에 손을 대었는지 미모가 뛰어나도 천혜향루를 대표하는 기녀는 되지 못한 것이었다.
“제법이구나. 이름이 무엇이냐.”
“은소혜라고 합니다, 공자님.”
제법 기녀의 기개가 마음에 들었던 천일영은, 한참을 이런저런 이야기꽃을 피우는 중에 은소혜에 대해서 감탄의 마음을 숨기지 못했다.
시를 짓는 실력과 앞을 내다보는 탁월한 눈, 정세를 읽는 은소혜의 혜안은 탁월하다 못해 감탄이 나오게 만들었다.
그리고 악기를 다루는 실력 또한 최고라 할 만했다.
천일영은 드물게 마음에 드는 사람이라고 생각하여 제법 기루에서의 시간을 즐기게 되었다.
“이번에는 노래 한 곡조 할까요? 제법 마셨는데도 공자님은 술에 취하시지 않으니 하다못해 노랫소리에 취해 보시지 않겠습니까?”
“해 보거라. 자신이 있는 모양이니.”
은소혜가 노래를 하자 방 안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입을 다물었다. 술에 취해 벌게진 얼굴의 윤의강은 물론이고, 같이 들어온 세 명의 기녀 역시 은소혜를 바라보며 노랫소리에 빠져들었다.
맑고 아름다우며 자상한 목소리. 천일영도 조용히 술잔을 기울이며 귀를 기울였다. 은소혜의 노랫소리는 점점 더 맑게 울리며 객잔 전체를 감싸기 시작했다.
헌데 노래가 시작된 지 반 다경이 지났을 때, 방문이 거칠게 열리며 은소혜의 노래가 끊겼다.
드르륵!
“천혜향루의 최고 기녀가 여기에 있었다는 말이냐. 감히 이런 기녀를 숨겨 두고 저딴 기녀를 들여보낸 것이냐!”
“그…… 그것이 아니라…….”
“노래에 홀려 와 보니 절세미인이 있구나!”
커다란 풍채를 휘두르며 목청을 높이는 인물. 뒤에는 여주인이 눈물을 글썽이며 고개를 조아리고 있었다.
제법 고급의 비단으로 온몸을 감은 남자는 방 안으로 들어와 은소혜의 가슴을 팔로 두르며 들어 올렸다.
“당장 내 방으로 데려가겠다. 지금 방에 있는 것들은 모두 내보내고 아무도 방에 들이지 말거라. 내 오늘 밤은 이 기녀와 보낼 것이다.”
“놔…… 놔주십시오!”
짜악!
가슴에 닿은 팔을 밀치며 상기된 얼굴로 소리를 지르던 은소혜의 손이 남자의 뺨을 강하게 때렸다.
하지만 은소혜는 떨었다.
몸을 지키기 위해서 때리기는 했지만 남자의 정체가 가늠된 순간, 목숨이 경각에 달리는 실수를 깨닫고 은소혜의 얼굴에 암운(暗雲)의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고개가 돌아간 남자는 야비한 웃음을 지으며 은소혜를 내려놓고 기운을 퍼트렸다.
“감히 천마의 얼굴에 손찌검을 하다니 네년, 정신이 나갔구나.”
“처…… 천마!”
“내 당장 기루를 부수고 이곳에 있는 자들을 모두 죽일 것이다.”
천마라고 자칭하는 자의 몸에서 더욱 강한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 무공을 모르는 기루의 사람들은 기운을 내리누르는 강한 힘에 모두 바닥에 주저앉기 시작했다.
은소혜 역시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바닥에 쓰러졌지만, 기운에 눌린 것보다 자신으로 인해 기루에 미칠 일을 상상하니 다리에 힘이 풀렸다.
그때 목소리 하나가 천마라고 칭하는 자의 기운을 흩트렸다. 내공을 내공으로 상쇄시킨 것이지만 눈치를 챈 사람은 없었다.
“천마라고 하는 분께서 어찌 아녀자의 손길을 피하지 못한 것인지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안 가는 일이군.”
“뭐…… 뭐라고? 네놈이 술에 취하더니 겁을 상실했구나. 감히 천마에게 그런 소리를 하고도 살아남을 것이라고 생각했느냐!”
“천마는 지금 폐관 수련 중이 아니었던가? 기루에서 술이나 마시고 있지는 않을 것 같은데.”
순간 천마라는 남자의 입에 비웃음이 걸렸다. 무림에서 천마가 폐관 수련에 들어갔다는 사실은 제법 알려진 일이다.
그러니 눈앞의 비실거리는 기생오라비 같은 놈은 천마가 폐관 수련에 들어갔다는 이야기를 주워듣고 가짜가 아닌가 의심을 하는 것이다.
분명 내공이 느껴지지 않는 것으로 보아 소문만 믿고 떠드는 입만 산 놈.
“폐관 수련은 사실 거짓말이다. 나는 몰래 다니면서 천마신교의 정세를 둘러보고 세상의 악당 놈들을 지옥으로 보내는 중이다. 너는 모르겠지만 이것도 수련의 일종이다.”
“수련의 일종? 수련인 것은 맞긴 하다. 허나 네가 말하는 것은 강호초출이 아닌가?”
“뭐라? 강호초출?”
천마라는 자의 얼굴이 터질 듯 붉어졌다. 귀까지 새빨개진 것으로 보아 자존심이 무척 상한 모양.
그러나 천일영은 그러든지 말든지 신경도 안 쓰고 술잔을 들어 올렸다.
천마를 지칭하는 자는 분명 무공이 약하지는 않다. 하지만 천마라는 이름에는 턱도 없이 부족한 실력인 것도 사실. 절정 고수 초입에 막 들어선 사람이다.
천일영은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풍기는 기운으로 보건대 오악검파 중 하나인 태산파(泰山派)인가. 정파 놈들이 천마에 대해 안 좋은 소문을 퍼트릴 목적이라면 너무 유치한데. 그냥 공짜 술이 목적인 놈인 듯하군.’
천마신교의 대문 같은 귀천명에서 천마를 사칭하는 이유는 등잔불 밑이 어둡기 때문일 터다.
이곳에서 천마를 사칭하는 일은 그 누구도 상상조차 하지 못할 일. 그러하니 기루 주인도 속아 넘어갔을 테고 말이다.
“네놈, 가만히 두지 않겠다. 네놈을 비롯하여 기루에 있는 모든 사람을 죽이고, 이 계집을 가질 것이다.”
“제발…… 부탁드립니다. 저 손님을 용서해 주시고 저도 용서해 주십시오. 소혜야, 무엇하느냐. 어서 천마님을 모시거라.”
바닥에 쓰러져 있던 은소혜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오늘 밤에 천마에게 당할 일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는다.
스물셋이 될 때까지 간직해 온 순결. 그것이 찢겨 나가고 비참하게 꺾여 나갈 것에 다리는 떨리고 움직이지 않았지만, 애써 발걸음을 옮겼다. 기루에 있는 사람들을 죽게 만들 수는 없었으니까.
천마라는 자는 다가오는 은소혜의 얼굴을 보며 콧김을 뿜었다. 절세미인. 노랫소리에 홀려서 방문을 열기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천마라는 자는 자신을 능멸한 놈보다는 기녀에게 빠져들었다. 아니, 애써 주인의 말을 듣고 참는 척을 하였다. 소란이 일어나면 문제가 되는 것은 바로 그였으니까.
“당장 이리 오거라.”
“아아아…….”
순간 가슴을 향해서 뻗어 나오는 천마의 손길. 은소혜는 눈을 질끈 감았다.
하다못해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몸을 농락당하는 것만은 피하고 싶었는데, 기루에 있는 사람들의 목숨이 걸려 있다 보니 피하지도 못하고 밀려드는 수치심에 눈이 감겼다.
‘……?’
수치심을 견디며 눈꺼풀이 파르르 떨리길 잠시. 이상하게도 어째서인지 다가오는 천마의 손길이 몸에 닿지 않았다.
은소혜는 살며시 떨리는 눈을 떴다.
“이…… 이것이…….”
눈앞에서는 공자가 천마의 팔을 잡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런데 이상했다. 공자의 표정은 무덤덤해 보이지만 오히려 천마라는 사람이 벌게진 얼굴로 아픈 듯이 떨고 있었다.
게다가 등 뒤에서 들려오는 한숨 소리. 공자와 같이 있던 사람이 흘리는 소리였다.
“하아……. 망했어. 내 금화 다섯 냥…….”
“에?”
윤의강은 양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한숨과 함께 한탄 소리를 흘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