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화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거꾸로 매달린 나무에서 풀려난 설려온이 매호란과 같이 고개를 땅에 처박고 떨리는 목소리로 사죄의 말을 천일영에게 전했다.
그러나 그 옆에 서 있는 사귀진과 유향설의 눈빛은 아직도 표독스럽기만 했다. 원래 정파인들을 보면 그다지 기분이 좋아지지 않는 두 사람이었으니까.
“망할 놈 같으니.”
“그래도 저 모습은 재미있는데요?”
객잔을 개점하기 전, 술기운을 모두 몸 밖으로 배출하고 속도 풀 겸 이른 식사를 하려고 할 때, 금채홍이 달려와 드디어 비가 내렸다는 말을 하자 모두 다 같이 구경 삼아 밖으로 나왔다.
오랜 시간 나무에 거꾸로 매달려 있던 설려온은 참을 때까지 견디다가 이내 허공에서 실례를 하고 온몸이 젖은 채로 풀려 나와 냄새를 풍기며 고개를 조아린 것이었다.
“죽을죄까지는 아니다. 이미 지난 일이니 이제 잊거라.”
“가…… 감사합니다, 천마님.”
빠악!
순간 사귀진이 내공은 잔뜩 싣고 설려온의 머리를 쥐어박았다. 이후 유향설도 손을 걷어붙이며 설려온을 밟을 준비를 했다.
“그러니까 그 이름을 입에 담지 말라고, 이 멍충아!”
“역시 가죽을 벗겨야 정신을 차릴 모양이네요.”
“아…….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천일영은 사귀진과 유향설이 자신을 위해 하는 행동인 것을 잘 알지만, 반면 머리가 쪼개질 만큼이나 아플 터인데 어쩌지도 못하고 눈물만 뚝뚝 흘리며 용서를 비는 설려온이 가엽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역시 사혈련의 무인이라 그런지 인정사정 봐주는 것이 없다.
천일영은 손을 내밀어 설려온을 밟으려고 발을 들어 올리는 유향설부터 진정시켰다.
“여기까지 나를 다시 찾아온 이유가 있을 것이다. 분명 내가 누구인지 알고 있다면 그 말은 설의룡이 너를 다시 보낸 것일 터.”
“아버님께서 천…… 아니, 공자님께 편지를 보내셨기에 급히 달려왔습니다.”
“알았다. 편지를 보이거라.”
“네.”
천일영의 말에 따라 품 안을 뒤지던 설려온의 표정이 급격하게 굳어졌다. 그 표정이 마치 하늘이 무너져 내린 것이라도 되는 듯한 표정이다.
“그…… 공자님…….”
“왜 그러느냐.”
“편지가…….”
주섬주섬 품 안에서 꺼낸 편지가 노란색 빛을 띠고 있다. 그것을 바라본 사귀진은 슬그머니 몸을 뒤로 빼내었다.
물론 자신이 직접 설려온을 거꾸로 매달기 전에 물을 한 주전자나 먹이고 손수 동아줄로 몸을 꽁꽁 묶기는 했지만, 품 안에 편지가 들어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
“큼큼.”
“귀진아?”
“저…… 저는 몰랐습니다.”
설려온의 품에 있는 편지는 온통 젖어 글자조차 읽을 수 없었다.
비록 눈물을 흘리며 자신의 오줌에 젖은 종이를 찢어지지 않게 이리저리 펴 보기는 했지만, 가뜩이나 다급한 마음에 설의룡이 마구 쓴 글씨는 번질 대로 번진 후여서 설려온은 어쩔 줄 몰라 했다.
“으헝헝헝. 이를 어쩝니까. 아버지의 편지가 이렇게 되었으니 제가 아버님과 공자님 두 분을 뵐 면목이 없습니다.”
“하아…….”
천일영은 잠시 머리를 짚었다. 분명 설의룡이 설려온을 급히 보냈다는 것은 술이나 한잔하자고 편지를 쓴 것은 아닐 터다.
그렇다면 해남도에 무슨 일이 생겨서 도움을 요청했다고 생각해야 했다. 설려온이 한밤중에 객잔 문을 열고 급히 온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는 일이다.
“해남도에서 무슨 일이 생기고 있는 것인가? 이 편지에 있는 내용 중에서 짐작이 가는 것이 있으면 말해 보거라.”
“아는 대로 소상히 말씀드리겠습니다.”
설려온은 자신이 항주에 찾아왔던 일과 해남파에서 벌어지는 일을 모두 말했다. 그리고 아마도 아버지인 설의룡이 도움을 요청하는 편지를 보낸 것 같다는 자신의 생각도 이야기했다.
‘과연, 누군가가 뒤에서 조작한 냄새가 나는군.’
천일영의 고개가 끄덕여졌다. 한편으로 그 자존심 강하고 대쪽 같은 성품의 설의룡이 얼마나 급했으면 자신에게 편지를 보냈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가 아는 설의룡은 목에 칼이 들어와도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는 사람이다. 그런데 천마였던 자신에게 편지를 보낸 것이다.
“일단은 해남도로 가 봐야겠구나. 설의룡의 편지를 다시 받아 오려면 한 달은 족히 걸릴 터. 전서구를 날릴 수도 있지만, 이 또한 오 일 이상 걸릴 뿐만 아니라 해남파를 이 정도로 몰아넣을 정도의 세력이라면 전서구를 낚아채는 맹금류를 풀어 놓았을 것이다. 해남도는 이미 고립되었을 터다.”
“네에? 전서구를 낚아챈다고요?”
설려온의 놀란 음성에 사귀진이 대신 대답을 이어 갔다.
“상대편을 몰아넣을 때 연락책을 차단하는 것은 병법의 기본이다. 물론 맹금류를 피해 가는 전서구도 있지만 이곳에 그런 것이 있을 리가 없지 않느냐.”
“그렇다면…….”
“공자님이 말씀하신 대로 즉시 해남도를 향하는 것이 제일 빠른 길이지.”
“한시가 급한 것 같으니 즉시 해남도로 떠난다. 채홍아, 이번에는 너도 따라오거라.”
“네, 공자님. 그 말씀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건청아.”
“네, 공자님.”
“모든 것을 맡기고 자리를 비우겠다. 그 말이 무슨 뜻인지는 알고 있으리라 믿는다.”
“잠시 추태를 부렸지만 다시는 그럴 일이 없을 것입니다.”
건청의 얼굴이 더욱 믿음직하게 보인다. 스스로 마음속에서 짐을 털어 내고 결심을 굳힌 듯한 모습이다.
천일영은 은근히 사귀진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그리고 사악한 표정도 잊지 않았다.
“너도 같이 가야지, 귀진아.”
“크억. 쿨럭, 쿨럭. 아니,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제가 정파 놈들의 섬에 왜 갑니까.”
“편지가 그리된 것이 누구 때문이라고 생각하느냐.”
“그…… 그건 모르고 그런 것입니다. 정파 놈들 얼굴만 봐도 두드러기가 날 판국에 그놈들을 도우라는 말씀이십니까?”
“닥치고 따라와라.”
천일영의 고개가 유향설을 향했다. 유향설이 눈을 깜빡깜빡거리며 빛을 내는 것이 말을 걸어 주는 것만으로도 기쁘다는 표정이다.
“자네는 어찌할 것인가?”
“오호호호. 당연히 공자님께서 말씀하시면 가야죠. 감히 누구의 말씀이신데 제가 거절을 하겠습니까. 공자님의 부탁이라면 제가 오히려 영광입니다.”
천일영은 흡족한 표정을 지으며 비아냥을 사귀진에게 날렸다. 그러자 잠시 시선을 피하다가, 사귀진은 두 손을 들어 올리며 눈을 질끈 감았다.
“알겠습니다. 가겠습니다. 편지에 대한 책임은 져야겠죠. 그런데 공자님, 그나저나 말 몇 마디 해 보지도 않은 유향설을 언제 그렇게 꼬신 겁니까.”
“꼬신 적 없다. 유향설이 나를 좋아하는 것이지.”
“어머, 그럼요. 공자님 뭘 좀 아시네요. 오호호호.”
사귀진은 속으로 투덜거렸다. 예전부터 생각한 것이지만 이 사람은 정말로 사람을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데 뛰어났다. 그것도 자신이 딱히 의도를 하지 않고서 그런다.
유향설이 지금은 저렇게 웃으며 다정한 얼굴을 하고 있지만, 정말로 유향설이 얼마나 무서운 사람인지 이 자리에 있는 사람들은 모른다. 가끔은 사귀진 자신도 유향설의 잔혹함에 치를 떨 때가 있었으니까.
“채홍아, 일단 설려온을 씻기고 갈아입을 옷을 한 벌 빌려주거라.”
“알겠습니다, 공자님.”
금채홍은 설려온의 곁에서 살짝 떨어져 길을 걸었다. 풍겨 오는 냄새가 제법 코를 찌를 정도였기 때문이었다.
얼마나 오래 참다가 오줌을 지려 버린 것인지 옷은 젖지 않은 곳보다 젖은 곳이 훨씬 많았다.
설려온의 비참한 심정을 이해는 하겠지만 지금도 울음을 멈추지 못하는 것이 조금 이상하다고 생각되어 금채홍은 조용히 말을 걸었다.
“소저, 이제 그만 우는 것이 어떠신지요.”
“흑흑흑…… 끄윽. 나도 그만 울고 싶은데…… 흑…… 그게 워낙에 오래 참다가 실례를 저지른 거라서…… 끅끅…… 쏟아져 내릴 때 코에 막 들어가서…….”
“네…… 코에 들어가면 괴롭죠.”
“그게…… 코에 들어가니까 숨을 못 쉬게 되어서…….”
“그렇죠. 코에 들어가면 숨을 못 쉬죠.”
“그래서…… 끅끅…… 숨을 쉬려고 입을 벌렸다가…… 조금 먹었어. 으헝헝헝헝.”
“아…….”
금채홍은 안타까운 마음에 어깨를 두들겨 주려고 했지만 젖어 있는 옷깃을 보자니 차마 용기가 나지 않았다. 솔직히 옷도 빌려주고 싶지 않았다.
* * *
칠 일 후.
해남도의 항구인 해구(海口)에서 사천당문의 만살귀정(萬殺鬼淨) 소속 권석우는 출입을 하는 사람들의 면면(綿綿)을 빠짐없이 살펴보고 있었다.
사천당문의 첫째 아들이자 만살귀정의 직접적인 명령권을 가진 당추필의 명령에 의한 것이었다.
‘이십이 일 전에 해남파의 딸 설려온과 문주의 심복 매호란이 해남도를 떠났다. 언제 돌아올지 모르니 들어오는 자들을 모두 살펴야 뒤탈이 없을 터. 분명 지원을 요청하러 밖으로 나간 것일 테니 설려온과 같이 해남도에 들어오는 자들도 빠짐없이 조사하여 누구인지 알아내거라.’
당추필의 명령으로 권석우를 비롯하여 다섯의 만살귀정 무인들은 항구를 떠나지 않았다.
그러나 해남도의 항구인 해구는 원래 군항이다. 군함이 아닌 배가 정박하는 곳이 따로 있기는 하지만 출입구는 오직 하나. 그만큼 경계도 삼엄하다.
하지만 해남도의 도지휘사 오도문의 배려로 그들은 사람들이 오가는 것을 살피기 좋은 자리에서 감시를 하고 있었다.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으며 반대로 사람들을 살피기 좋은 자리이니 도지휘사 오도문의 기량이 범상치 않음을 기억하고 권석우는 내심 감탄을 금치 못했다.
“도지휘사 오도문도 대단한 사람이다. 이런 자리를 이미 눈여겨보고 우리에게 준 것도 대단하지만 군함을 보이지 않는 곳으로 옮기고 시치미를 떼고 있으니 말이다.”
“그 큰 군함을 어디로 옮긴단 말입니까? 숨길 데가 있기는 한 것입니까?”
“거기까지는 나도 모르겠구나. 그러나 해남파의 지원 요청을 끊을 요량으로 사십 척가량을 숨겼다고 알고 있다.”
“허……. 그 큰 배들을 숨기다니 그것참 신기한 일입니다.”
권석우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이야기를 하는 도중에도 눈빛만은 예리했다.
만살귀정은 그동안 몇 년에 걸쳐 계획을 실행시켜 왔다. 이제 얼마 후면 몇 년간의 고생이 끝이 나고 그 결실을 이룰 수 있을 테니 지금에 와서 사소한 실수로 대업을 그르칠 수는 없는 일.
권석우는 평소보다 더욱 긴장을 했다.
‘이제 거의 다 됐다. 그런데 요즘 들어서 왜 자꾸 불길한 느낌이 드는 것인가. 아무리 살펴도 대업이 실패할 만한 부분은 없거늘.’
권석우는 세차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세간에는 그 힘이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오대 세가와 구파일방을 전부 합쳐도 세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사천당문이 몇 년에 걸쳐 계획해 온 것이다. 실패를 할 리가 없는 것이다.
‘내 생각이 지나친 것이지. 분명 일 년 뒤에는 해남도의 후덥지근한 기온을 생각하며 시원한 술을 마시고 있을 터.’
권석우는 자신의 밑에 있는 수하 네 명에게 다시 한번 들어오는 사람들이 변장을 하지 않았는지 잘 살펴보라는 말을 하며, 그 자신도 눈에 힘을 주고 혹시라도 인피면구(人皮面具)의 흔적을 지닌 자가 없는지 살펴보기 시작했다.
* * *
권석우가 항구에 출입하는 사람들을 감시하는 사이.
작은 배 한 척이 빠르게 물살을 가로지르며 해남도의 안쪽으로 파고들었다.
해남도의 항구를 멀리 돌아 숨어드는 배는, 바다에서 항해를 하는 그 어떤 배들에게도 모습을 보이지 않고 섬의 한 지점을 향해 일직선으로 나아갔다.
“길을 잘 안내해 주어 몰래 들어올 수 있었구나.”
“아닙니다. 그저 해남도에 오래 살아서 물길과 육지 길을 잘 알고 있을 뿐입니다.”
매호란은 물길에 배가 없는 시간과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고 배를 댈 수 있는 장소를 잘 알고 있었다.
한 가지 천일영도 생각하지 못했던 것은 밤이 아니라 이른 낮에 배를 몰고 들어가야 다른 배들과 마주치지 않고 해남도로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이다.
오히려 밤에는 상당수의 배들이 각자의 음흉한 목적을 가지고 밤바다를 장악하고 있었다.
“하루에 물길이 비는 시간은 딱 일각뿐입니다. 이 시간이 지나면 군함과 고기잡이배들이 바다에 나옵니다.”
“어선은 물고기를 잡고 있느냐.”
“그것이 분명치 않습니다. 몇 년 전부터 새로운 배들이 많이 나타났습니다. 고기를 잡는 것처럼 보이기는 하지만 실제로 어떨지는 모릅니다.”
천일영은 해남도에서 일 리 떨어진 채 물길을 타고 있는 배에서 허공을 바라보았다.
예상대로 하늘은 이미 수십에 달하는 맹금류가 창공을 장악하고 서로를 견제하며 날아오르는 새들을 닥치는 대로 사냥하고 있었다. 생각대로 이미 해남도는 고립된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