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화
쿨럭!
피가 뒤섞인 기침을 토하는 금태석의 신형을 천일영이 편안히 옆으로 기울였다.
목뼈를 타고 들어가 척추를 헤집은 상처 때문에 편히 눕히지도 못하는 것이 천일영의 마음을 찢었다.
그러나 금태석은 죽어 가는 와중에도 천일영의 얼굴을 보자 웃음을 지었다. 금태석은 만류하는 천일영의 손길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커헉…… 무림맹…… 찾는 것…… 바로 단주님…….”
덜컥.
금태석의 고개가 땅으로 떨어졌다. 이 말을 남기기 위해 그는 여태 목숨을 버리지 못하고 끔찍한 고통을 견디며 목숨을 이어 왔던 것이었다.
“금태석…….”
천일영의 뺨을 타고 눈물이 흘러내렸다. 곁에 두고 아끼던 수하. 비록 목숨을 맡았지만 이렇게 비참한 죽음을 바란 기억은 없을 터다.
“수고했다. 바보같이 빨리 편안해질 것이지, 나 같은 놈에게 말을 전하려고……. 이제 너는 무명암살대의 모든 임무에서 해방되었구나. 좋은 곳에서 편안히 쉬길 바라마.”
천일영의 손길이 차마 감지 못하고 죽으면서도 떠져 있는 금태석의 눈을 감겼다. 그리고 이내 천일영은 찢길 듯한 심정으로 수십 조각이 되어 있는 창희문에게 눈길을 돌렸다.
수많은 검로에 베어지며 얼굴조차 반만 남았지만, 창희문 역시 눈을 감지 못하고 걱정 어린 눈매로 육신의 조각들과 함께 땅바닥을 구르고 있다.
죽으면서도 안과 혜를 걱정하듯이.
천일영은 창희문의 반 조각만 남은 머리를 들어 올려 눈을 감겼다. 비통한 심정이 심장을 파고들었지만, 천일영은 끝내 이를 악물고 창희문의 머리를 품에 안았다.
“도현의 상태는 어떠하냐.”
“지금 당장은 죽지 않겠지만…….”
천일영은 들것에 실려 있는 도현의 손을 잡았다. 도현은 피를 한 움큼 토하며 입을 열었다.
“쿨럭, 안과…… 혜는 죽지 않았…….”
“그래, 네 덕분이구나. 수고했다.”
“노…… 놈들은 어찌 되었…….”
“신경 쓰지 말고 빨리 낫기나 하거라. 네 녀석의 잔소리를 듣지 않으면 잠이 오지 않으니.”
힘없이 웃는 도현이 실려 나가자 무명암살대 제1대대 조장 탄무흠이 고개를 숙였다.
이미 숨을 쉴 때마다 피가 튀어나오는 도현의 폐를 돌이킬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 말을 전해야만 했기에 탄무흠은 입을 열었다.
“아마도 도현은 며칠을 견디지 못할 것입니다.”
“천마신교의 모든 의원을 부르거라.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도현을 살려라.”
“하는 데까지는 해 보겠습니다. 그러나 그동안 무명암살대는 납치당한 아이들로 만들어진 비천한 살수라는 이유로 치료가 쉽지 않았습니다. 하물며 마왕들에게는 눈엣가시 같은 도현이라면…….”
“그래도 해야만 한다. 뒷일을 내가 알아서 할 터이니 강제로라도 의원들에게 도현을 보이거라. 또한 즉시 천마신교 외의 의원들도 알아보거라.”
“알겠습니다.”
천일영은 고개를 숙이고 급히 도현의 뒤를 쫓는 탄무흠이 사라지자 땅바닥에 주저앉았다.
아무리 무명암살대의 수하들이라고 해도 약한 모습을 보여 줄 수는 없는 법이었다. 천일영이 무너지면 그들도 무너지니까 말이다. 천일영은 손으로 머리를 감싸 안았다.
‘젠장, 무림맹이 찾는 정보가 나였다는 말인가. 극마의 경지에 오른 것을 숨기고 또 숨겼건만, 어디에서 새어 나간 것인가. 아니, 추자룡이 나를 빌미로 무림맹과 거래를 한 것인지도 모르겠군.’
너무도 많은 희생이 있었다. 많은 목숨을 잃었지만 결국 아무것도 모른 채 당하기만 했다.
천일영은 마르지 않고 흘러내리는 눈물을 손등으로 지워 냈다. 붉어진 눈가는 아직도 눈물이 시야를 흐리게 만들었지만, 시선의 끝에 반짝이는 것이 보인 천일영은 애써 몸을 일으켜 발걸음을 내디뎠다.
“이것도 두고 간 것이냐.”
비룡맹검과 별학맹검.
천일영은 검집을 찾아 비룡맹검과 별학맹검을 곱게 넣었다. 검의 손잡이에서 안과 혜의 냄새가 났다.
“안, 혜. 어디에 있는 것이냐. 이렇게 될까 걱정하여 그리도 말렸건만.”
천일영은 하늘을 바라보았다. 애꿎게도 날이 너무도 좋았다. 비라도 내리면 눈에서 자꾸만 흐르는 눈물을 가리기라도 할 텐데.
“사천당문은 무명암살대의 단원들에게 마비침을 날렸지만, 귀천명에 사는 사람들에게는 독침을 날렸다. 혼란을 만들려고 했던 것이지만 이미 귀천명에서 살고 있던 사람들이 이백이 넘게 죽었구나. 정마대전의 명분은 피하고 천마신교에서 나오는 돈으로 먹고사는 사람들의 목숨은 거두어 또 하나의 명분까지 챙겨 간 것인가.”
천일영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안과 혜가 돌아온다 해도 귀천명에서 살고 있던 사람들의 죽음에 대한 책임을 어찌할지 눈앞이 캄캄했다. 안과 혜에게 책임을 물리려는 것이 아니다. 그 아이들 스스로가 이 일을 감당할 수 있을지가 걱정이었다.
“모든 원인은 하나인가.”
천일영은 비룡맹검과 별학맹검을 들고 천마신교의 성채 안으로 들어섰다.
반 시진 후.
천일영은 허리에 비룡맹검을 끼우고 오른손에는 별학맹검을 든 채 천마신교의 본문 제일 위층을 걸었다.
길고도 긴 복도를 지나가는 동안, 많은 사람이 천일영의 모습을 보았지만 아무도 말을 걸지 못했다.
무명암살대의 단주여서가 아니었다. 그의 표정에서 나오는 살기와 풍기는 매서운 기운에 모든 사람이 겁을 먹고 발걸음을 뒤로했다.
그만큼이나 천일영의 위압감과 살기는 사람들의 오금을 저리게 만들었다.
그때.
묵묵히 복도를 걷는 천일영의 앞을 가로막는 사람이 나타났다. 파천마왕 패범휘였다.
“천마가 계시는 방으로 가는 복도에서는 무기의 소지가 금지되어 있다. 그것을 모르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습니까? 비천한 살수 놈이라 기억하지 못합니다만 파천마왕께서는 저에게서 검을 빼앗아 가실 것입니까?”
잠시의 정적이 흘렀다.
패범휘가 굳은 얼굴로 천일영의 얼굴을 자세히 들여다보는 사이, 단 한 번도 보이지 않았던 무명암살대의 단주가 보이는 서늘함에 패범휘의 표정도 조금씩 굳어 갔다.
마왕들 앞에서는 본심을 뒤로하고 언제나 웃기만 하던 무명암살대 단주의 얼굴에는 위로 올라간 입꼬리 대신 살기만이 가득했다.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패범휘는 발걸음을 뒤로 물렀다. 딱 한 걸음. 그 이상은 그의 자존심 때문에 더는 뒤로 무르지 않을 것이지만, 이 정도라면 마왕이라는 입장상 상당한 양보를 한 것이었다.
패범휘는 조용히 웃음을 흘리며 입을 열었다.
“아니, 빼앗지 않겠다.”
“파천마왕님은 예전부터 상황 판단이 빠르셨지요. 그 점만은 감사드립니다.”
천일영은 패범휘의 앞을 가로질러 또다시 복도를 걸었다. 이내 잠시의 발걸음 이후 명천마왕 소초련이 복도를 지나다 천일영과 마주쳤다.
“날이 선 검이 두 자루구나. 그것이 네 뜻이더냐.”
“그렇습니다.”
소초련은 검을 들고 있는 천일영의 얼굴을 한번 바라보고는 이내 걸음을 뒤로 물렀다. 속 깊은 소초련의 표정에 무거움이 떠올랐다. 천일영은 소초련에게 고개 한 번을 끄덕이고는 복도를 걸었다.
그리고 기어이 도착한 천마의 방.
“무명암살대 단주 천일영은 천마의 방에 무슨 볼일인가?”
“딱히 용무가 있어서 온 것은 아니다.”
천마의 방문을 지키는 천검마왕 목천향의 직속 수하 왕소일이 서슬이 퍼런 기운을 뿜어내며 검을 뽑아 천일영의 목에 들이대며 입을 열었다.
스으으윽!
그러나 천일영은 왕소일의 존재조차 신경을 쓰지 않고 기운을 흩었다. 마치 상대할 가치도 없다는 듯.
왕소일은 기운이 흩어지는 것에 자존심이 상한 듯 인상을 찌푸렸다. 분명 그가 알기로는 무명암살대 단장의 무공이 자신보다 못했다. 그리고 천마의 방을 지킬 정도라면 천마신교에서도 최고수의 반열에 올라야 할 수 있는 일이다.
당연히 기운을 흩고 검을 든 모습은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일. 왕소일이 더욱 기운을 끌어 올리며 천일영의 목에 검을 밀착했다.
“용무가 무엇인지 물었다. 검을 들고 천마의 방이 있는 복도를 걸은 것만으로도 중죄인데 용무도 없이 방에 들어간다? 네놈이 제정신인 것이냐. 감히 팔려 온 살수 따위가!”
“네놈도 겨우 그 정도의 놈일 뿐인가. 마치 어제의 나처럼 아무것도 보지 못하는구나.”
쿠우우웅!
뼈와 살을 찢을 듯한 압력이 왕소일의 머리 위로 떨어졌다. 분명 손끝만 움직이면 목을 벨 위치에 검을 대고 있었건만, 왕소일은 복도의 바닥에 처박혀 구르고 있는 자신이 순간 이해가 가지 않았다.
“크흐흑! 이게 무슨!”
“잠시 닥치고 있으면 목숨만은 살려 주겠다.”
뿌득! 빠드득!
두꺼운 나무로 만든 복도와 함께 삐걱대고 부러질 듯한 소리가 나는 자신의 뒤틀릴 듯한 뼈에 왕소일은 버텨 보려 했지만 손가락 하나 까딱이지 못했다.
분명 무명암살대의 단주 천일영의 무위는 초절정 고수. 하지만 이 거대한 힘의 정체를 아직 눈치채지 못한 왕소일은 급히 천마의 방을 바라보았다.
‘하다못해 천마님에게 경고라도!’
하지만 입이 열리지 않았다. 그만큼 큰 압력에 몸은커녕 혓바닥 한번 놀리는 것도 불가했다.
뚜두두둑!
왕소일의 몸에서 나는 뼈 소리뿐만 아니라 몇 겹을 덧대어 만든 복도에서 큰 소리가 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쿠웅. 콰지지직.
순간 복도의 바닥이 뚫리며 왕소일의 신형이 아래층 바닥으로 내리꽂혔다. 조금의 몸도 움직이지 않은 채 거대한 내공에 짓눌린 왕소일의 입에서 외마디 비명이 터져 나왔다.
“크아아악.”
왕소일은 꺾이고 휘어 버린 등을 누이고 천장을 바라보았다. 천마의 방문이 열린다.
“천……!”
왕소일은 입을 열어 천마에게 경고를 보내려 했지만 이내 숨을 들이켜고 혀를 멈췄다. 자신이 감당할 수 없는 일.
우습게 보았던 살수가 다름 아닌 자신을 아득히 뛰어넘은 사람임을 이제야 눈치챈 것이었다.
벌컥.
천마의 방문이 열리자 천일영은 인상을 지었다. 천마의 손에 들려 있는 나신의 여인.
갓 스물이나 되었을 법한 여인은 천마에게 목덜미가 잡힌 채 허공에 매달려 있었다.
이미 배가 갈라져 내장과 장기가 쏟아져 바닥에 구르고 있었고, 눈은 천마의 손아귀에 터져 안구조차 존재하지 않은 끔찍한 모습이었다.
천마는 황홀한 표정을 지으며 여인의 배 속에 넣었던 손을 꺼내 한 움큼의 피를 핥으려 했다.
“천마, 이제 그만이다. 자리에서 내려오거라.”
“뭐…… 뭐라고? 아니? 그보다 너는 누구냐? 내가 즐기고 있을 때는 방문을 열지 말라 했거늘?”
“이제는 나도 알아보지 못하는 것이냐. 무명암살대 단주다.”
“무명암살대? 그게 무엇이지? 마…… 마염지는 어디에 있느냐? 그가 설명을 해 줘야 하는데?”
천일영의 얼굴에 씁쓸함과 안쓰러운 표정이 교차했다.
한때 공포에 가까운 무위로 천마신교를 몇 번이나 위기에서 살린 인물. 그랬던 그가 살심으로 인해 사리 분별을 하지 못할 정도로 망가졌다.
극살태마신공으로 천마의 자리에까지 올랐지만, 이제 또다시 극살태마신공으로 그의 명운이 갈리고 있는 것을 지금의 그가 알고 있을까. 천일영은 손에 들고 있는 별학맹검을 뽑아 들고 천마에게 다가갔다.
“하다못해 전에 같이 술을 마셨을 때만이라도 기억해 주길 바랐는데.”
“내가 너하고 술을? 마염지는 어디 있느냐? 그가 아니라고 이야기를 해 줄 것이다.”
“기억까지 모두 맡겨 버린 것이냐.”
휘이이잉!
별학맹검이 천마의 머리 중간을 가로로 절단하기 위하여 날아갔다. 그러나 아무리 살심에 취해 있어도 천마라는 자리에 오른 사람의 속도는 상상을 초월했다.
빠르게 검이 날아오는 사이, 천마는 검을 뽑아 천일영의 검을 막았다.
채애애앵!
그러나 거기까지였다.
천마는 주마등을 보는 듯 자신의 검이 깨끗하게 잘리는 것을 두 눈으로 보았다.
어째서인지 느리게 보이는 검날은 자신이 막고 있는 검을 자르는 것뿐만 아니라 관자놀이를 파고들어 눈동자가 잘리는 것까지 모두 보였다.
첫 번째의 눈동자가 잘리고, 이내 두 번째의 눈동자가 잘려 나갈 때 천마의 입이 조용히 열렸다.
“고맙다, 단주.”
촤아아악!
가로로 공간을 자른 곳에 있던 천마의 머리는 이내 신형과 함께 바닥으로 떨어졌다. 천일영은 울컥거리며 쓰린 속에서 튀어나오는 소리를 조용히 입에 담았다.
“고맙긴. 지옥에 먼저 가서 내가 좋아하는 술이나 빚고 있거라. 곧 따라갈 터이니.”
터지던 내공으로 인해 천마의 피가 안개로 변해 방 안을 가득 메우고, 씁쓸히 들고 있던 별학맹검에 걸려 있던 천마의 핏방울이 바닥으로 떨어질 때, 소란이 일어났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은 마왕들이 천마의 방으로 뛰쳐 들어왔다.
“이…… 이게 무슨 일인가? 어찌하여 무명암살대 단주가 천마를? 네놈 따위가 천마를 죽이다니!”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런 짓을! 정신이 나간 것인가? 단주!”
마염지와 목천향이 소리 높여 고함을 지르며 천마의 시신을 바라볼 때, 천일영의 악귀 같은 목소리가 거대한 기운을 품고 두 마왕의 귓가를 파고들었다.
“닥쳐라. 이제부터 내가 천마다.”
쿠웅!
살기와 함께 울려 퍼지는 기운. 마염지와 목천향은 다리에 기운이 풀리면서 주저앉으려는 것을 겨우 견뎌 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