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4화
사천당문 본가로 가는 길.
당강용의 심장은 미친 듯이 뛰었다. 그 누가 보아도 용서하기 힘든 미친 짓을 벌이고 있기 때문이다.
평소의 당강용이라면 공자의 제안에 말도 되지 않는다며 역정을 내고 심장에 비침을 꽂으려 했을 것이었다.
하지만 딸아이의 말과 다루에서 직접 보았던 공자의 모습에 결국은 일을 도모하기로 마음먹었다.
하지만 정녕 그것 때문만일까. 아니다. 당강용은 천천히 눈을 감고 기억을 떠올렸다.
처음부터 길은 오직 하나뿐이었다.
당용택의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이 공자에게 협력해야 사천당문이 무림에 이름을 보존할 수 있다고 가리켰다.
하지만 공자의 맘대로 일이 돌아가도록 할 수는 없는 법.
당강용은 다른 길이 있을까 찾고 또 찾았다. 그러나 길은 공자의 말대로 오직 하나뿐이었다.
그리고 무림맹에서까지 버림을 받은 사천당문은 하나 남았던 길마저 좁아지기 시작했다. 멸문이 눈앞에 있었던 것이었다.
어쩔 수 없었다. 모든 것을 포기해야 했다. 마음은 속절없이 꺾여 나가고, 살아남을 수 있는 방향을 향해 애원하며 뛰어가야만 했다.
그러나.
지금 당강용의 머릿속에 한 가지 생각이 떠오른다. 사천당문이 처해 있는 위기와 눈에 보이는 모든 위협까지, 이것들은 모두 공자가 사천당문이 가야 할 길을 미리 만든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실로 무서운 사람이다. 내가 쉽게 결정을 내릴 수 있도록 모든 길을 공자가 만들어 놓은 것이라니.’
때늦은 깨달음도 소용없이, 더 이상의 방법이 없음을 잘 아는 당강용은 사천당문의 본가 전각으로 향했다. 그리고 전각이 십 장 거리쯤 남았을 때였다.
‘크윽! 이 무슨!’
급작스럽게 주변으로 퍼지는 커다란 기운이 사천당문 전체를 잠식했다. 실로 엄청난 기운. 당강용은 자신의 다리에서 힘이 빠지는 것을 느꼈다.
자신 역시 초절정 고수인데 후들거리는 다리를 진정시키기 어려운 것이었다. 순간 기운을 타고 커다란 목소리가 기운을 뿜으며 사천당문 안에 울려 퍼졌다. 그것은 한 명의 노인에게서 나오는 것이었다.
“천인공노할 일이로다. 사천당문의 문주는 잘못을 저지른 것을 인정도 하지 않고, 이 노부를 쫓아내기까지 하는구나. 무림에 말세가 찾아온 것인가. 어찌 도리와 협이 무너졌단 말인가!”
노한 목소리로 불쾌한 표정을 지으며 정문을 향해 걸어 나가는 노인은 불만을 표하듯 더욱 강한 기운을 뿜어냈다.
몸은 노인의 것이지만 기운은 그 누구에게서도 느껴 보지 못했을 만큼 거대한 것.
이 정도의 고수가 사천당문으로 찾아와 직접 항의하는 지경까지 몰린 것을 느낀 당강용은, 노인과 스쳐 지나가는 동안 어두운 그림자가 얼굴에 드러났다.
이런 사람은 자신이 감당할 수 없는 자이기에. 그러나.
“저 망할 노인네는 무공은 연마하지 않고 수명만 연마한 모양이군. 죽지도 않거니와 모습도 그대로라니.”
옆에서 공자가 중얼거리는 소리에 당강용은 가슴이 얼어붙는 듯했다. 공자는 강대한 무공을 가진 노인의 정체를 알고 있거니와 심지어 오래전부터 알고 있기까지 한 듯했다.
사천당문의 본문까지 찾아와 큰소리를 칠 수 있는 사람은 무림 전체를 뒤져도 몇 명 없다. 그런데 어찌 이런 무림의 거물을 안단 말인가.
터덕. 터덕. 터덕!
하지만 그때, 곁을 지나던 노인이 발걸음을 멈추고 천일영을 향해 몸을 돌렸다.
비록 노인의 인자한 외관을 지니고 있었지만 서늘한 안광만큼은 온몸을 핥듯 천일영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잠시 천일영을 노려보던 노인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던 기운이 서서히 살기에 가깝게 변하고, 이내 온통 주변에 서리를 내리듯 차가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혹시 해서 묻는 것이다. 우리가 전에 만난 적이 있었더냐? 기이하게도 분명 처음 보는 얼굴이지만 오랫동안 살아온 노인의 직감은 그렇지 않다고 하는구나.”
“넓지만 생각보다 작은 것이 중원입니다. 오가며 한두 번 스쳤을지도 모르지요.”
천일영은 노인의 살기에도 웃음을 지었다. 그 모습이 답답한 노인의 마음을 더욱 부채질했다. 부정하는 말을 꺼낸 남자의 말에 노인은 더욱 강한 살기를 흘리며 입을 열었다.
“처음 만나지만 두 번째 보는 것과 같은 사람은 일백 년이 넘는 세월 동안 한 번도 없었던 일이다. 다시 한번 묻지만, 정녕 오늘 처음 만난 것이 맞더냐.”
“지나온 세월을 거슬러 생각하신다면 분명 기억 속에 제가 있을 것입니다. 허나 큰 인연은 아니었기에 생각이 나지 않는 것은 아닐까 하는군요.”
“크흠…….”
흘리듯 말을 넘기는 남자에게 노인은 석연치 않은 느낌이 들었지만, 이내 살기를 풀기 시작했다. 눈앞의 남자가 보통이 아님은 알고 있다.
곁에 있는 사천당문의 초절정 고수조차 자신이 흘리는 살기에 다리를 떨고 있을 정도다.
하지만 이 젊은 남자는 기운을 받아 내듯 혹은 흘려보내듯 묵묵히 웃음만 짓고 있다.
순간 노인의 눈에서 안광이 잦아들었다. 느낌이 이상하다는 이유로 처음 만나는 사람을 겁박할 수는 없는 법이니.
“내 신경이 곤두서 실례를 저지른 것 같구먼. 마저 볼일 보시게.”
“그러지요.”
천일영은 여전히 모호한 웃음을 지으며 사천당문의 본가로 발걸음을 돌렸다. 그때 당강용이 식은땀을 흘리며 작은 목소리로 속삭이듯 말을 꺼냈다.
“저 노인은 누구입니까? 대단한 기운이었습니다.”
“노인이 아니라 노괴다. 화산파의 천량도사지.”
“처! 천량도사! 저런 거물이 어찌! 아니지. 그보다 천량도사가 있으면 지금부터 저희가 할 일이 꼬이는 것 아닙니까? 이미 당용택 문주가 기다리고 있는데 이를 어찌합니까.”
“걱정 말거라. 이미 이야기했을 것이다. 모든 준비는 다 끝마쳐 있다.”
당강용은 천일영이 하는 이야기가 무엇을 뜻하는지 전혀 알 수 없었다. 준비가 끝마쳐 있다는 말이 도대체 무슨 뜻인가.
당강용은 공자의 괴상한 말에, 그렇지 않아도 걷잡을 수 없이 뛰던 심장은 이내 입 밖으로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한편.
불길한 느낌이 가슴 한편을 휘저으며 마음이 편치 않은 천량도사는 당용택의 불편한 이야기도 잠시 잊은 채 사천당문의 정문 밖을 나섰다.
‘보통의 놈은 분명 아닐 터. 헌데 도무지 어디에서 봤는지 기억이 나질 않는구먼. 내 오늘은 주변에서 이놈을 주시해야겠다.’
사천당문에 기거해도 되지만 문제가 있는 곳에서 하루를 묵으면 나쁜 소문이 날 수 있다.
천량도사는 문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화산파 무인들 다섯과 함께 객잔으로 들어섰다. 문주 당용택과 내일 다시 이야기하기로 되어 있었기에, 몇십 걸음만 하면 다시 사천당문으로 들어설 수 있는 코앞에 객잔을 잡은 것이다.
하지만 지금에 와서 천량도사는 방금 만난 공자에게 온통 관심이 쏠려 있었다.
‘아주 작은 소란이라도 일어난다면 바로 놈의 꼬리를 잡기 위하여 사천당문으로 뛰어 들어갈 것이다. 네놈이 나에게서 도망갈 수 있을 것 같으냐.’
천량도사는 객잔에서 보이는 사천당문의 검을 곁에 두고 한잔의 차를 마시기 시작했다.
그러나 순간 급작스럽게 주변으로 어지러운 기운들이 몰려들었다. 언뜻 코에 스쳐 지나가는 피 냄새. 천량도사는 급히 몸을 일으켰다.
그 순간이었다. 객잔의 문이 벌컥 열리며 온몸에 피를 흘리고, 조금만 움직여도 나신이 보일 만큼 찢긴 옷을 입은 중년 여인 두 명이 들어섰다. 두 여인은 눈물을 흘리며 고함을 질렀다.
“제발 도와주십시오. 산에서 제 가족들과 아이들이 잡혀갔습니다. 혹시 여기에 무인은 안 계십니까? 돈이든 그 무엇이든 대가를 치르겠습니다. 부디 도움을 주십시오.”
“뭐라고?”
순간 천량도사의 인상이 구겨졌다. 잔뜩 긴장하고 있던 몸에서 뭔가가 끊어지는 듯한 느낌.
“이런 일은 현청을 찾아가야 할 것이 아니냐. 어찌 객잔으로 온 것이냐.”
“이미 현청에 도움을 청했습니다. 하지만 포졸들은 이미 산에서 이십이나 죽었습니다.”
“포졸 이십이 죽었다니? 산속에서 일을 당한 것인데 산적의 짓이 아니더냐.”
“흐흑, 아닙니다. 놈들은 큰 잘못을 저지른 무림인이라고 했습니다.”
“무림인? 그것이 정녕 사실이더냐.”
천량도사의 얼굴에 의심의 빛이 떠올랐다. 잘못을 저지른 무인이라면 응당 어두운 암흑세계로 들어가 살수가 되기 마련이었다.
그런데 산속에서 도적질이라니 말이 되지 않았다. 그리고 또 하나 의심스러운 부분이 있었다.
“너희들은 어찌 무림인들에게서 도망을 칠 수 있었단 말이냐. 무림인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닐 터다.”
“흐흑, 그리도 믿지 못하시면 다른 곳을 찾겠습니다. 수십 번 겁탈당하고 놈들이 잠든 사이에 겨우 도망친 몸입니다. 그러나 아이들은 따로 묶어서 데리고 나올 수 없었습니다. 제 아이들은 이제 겨우 열다섯, 열여섯입니다.”
또 한 명의 여인도 몸을 가리고 눈물을 흘리며 울부짖었다.
“제 아이도 이제 열일곱입니다. 흐흐흑.”
여인 둘은 사타구니를 움켜쥐며 주저앉았다. 그때 천량도사의 예민한 코에 피 냄새 말고도 다른 냄새가 스쳐 지나갔다. 남자의 정액 냄새였다. 천량도사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놈들이 말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사람을 죽이러 가는 길에 잠시 산에서 긴장을 푸는 것이라고요. 놈들은 돈이나 그런 것은 상관하지 않았습니다. 오직 몸만이 목적이었습니다. 그것을 말리던 남편은 목이 잘려서 이미…….”
“이…… 이런 일이. 어떤 무인이더냐. 어떤 천인공노할 미친놈들이더냐!”
“저희는 무림에 대해서는 잘 모릅니다. 그러나 한 남자가 사혈련을 나와서 마음대로 겁탈하고 살인을 저지르며 사는 게 정말 마음에 든다고……. 제 얼굴을 핥고 가슴을 움켜쥐며 겁탈을 하는 동안 그런 말을 했습니다.”
“사혈련!”
천량도사의 얼굴에 분노가 떠올랐다. 그때였다. 천량도사의 기감에 걸린 기운 하나가 속에서 불같은 화를 솟구치게 했다.
그것은 다름 아닌 바로 사혈련 무인의 기운. 그것도 보통의 고수가 아니다. 기감에 느껴진 기운은 약 일 리 떨어진 성도의 입구에서 빠르게 움직이고 있었다. 마치 무엇인가 찾는 것처럼.
‘이 망할 놈들이, 이 불쌍한 여인들을 노리개로 만든 것도 모자라 죽이려고 찾으러 왔구나. 사천당문이 있는데도 악행을 숨기려 성도까지 숨어들어 온 것인가. 아니다. 사천당문이 멸문의 길에 들어서는 것을 알고 당당히 들어온 것이다.’
천량도사는 검을 집어 들고 노한 목소리로 고함을 질렀다.
“이 여인 둘을 객잔에서는 잘 보살펴야 할 것이다. 내가 놈들의 목을 가져오면 여인들을 보살핀 비용은 낼 터이니, 화산파의 무인들은 나를 따르라.”
“네!”
천량도사가 빠르게 객잔 밖으로 나설 때 뒤에서 울부짖는 여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감사합니다. 이 은혜는 반드시 갚겠습니다. 부디 저희 아이들을!”
천량도사는 여인들의 목소리를 뒤로하고 다섯의 화산파 무인들과 함께 신속히 몸을 날렸다. 놈들의 목을 베고, 비록 더럽혀진 몸이나 겁탈당한 아이들을 찾아야 했기에. 천량도사는 굳은 얼굴로 신형을 날렸다.
* * *
사천당문 본가 오 층 전각의 제일 위층.
당용택은 긴 한숨을 쉬었다. 눈앞에서 빛을 반사하고 있는 물건 하나. 당강용이 천에 싸서 보낸 물건이었다. 당용택은 이 물건을 보는 순간 잠시 숨을 쉬는 것조차 잊었었다.
있어서는 안 될 물건. 바로 해남도에서 사천당문이 쓰던 비침이다. 그것도 천마신교의 비침 모양을 따라 만들어 아들 당추필에게 설의룡을 죽이라고 편지에 함께 보낸 것.
이것을 가지고 온 자가 당강용을 통해 자신에게 보인 이유가 무엇인가.
그리고 지금.
눈앞에 앉아 있는 젊은 공자를 보는 순간 당용택을 직감할 수 있었다.
바로 이자가 아들을 죽인 사람이자 또한 해남도의 일을 망친 원흉이라는 것을.
당용택은 한쪽 입꼬리만 올린 채 비웃음을 지었다. 이놈은 원하는 것이 있으니 당당히 찾아왔을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적의 소굴에 찾아올 리 없다.
‘놈이 원하는 것을 주면 해남도에서 사천당문이 했던 일이 사실이 아니라는 증거 같은 것을 내놓겠지. 무엇이 목적인가? 돈? 권력? 아니면 사천당문의 일부? 네놈이 제시하는 것에 따라 내 무엇이든 해 줄 것이다.’
이것으로 사천당문이 다시 무림맹의 품 안으로 돌아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
비록 아들의 원수이지만 사천당문의 멸문을 막아 내는 것이 먼저다. 놈이 원하는 것을 주고, 사천당문의 위치를 되찾은 다음 놈을 죽여도 늦지는 않을 터다.
당용택은 피곤으로 갈라진 입술을 비틀어 열었다.
“원하는 것이 무엇이냐.”
“사천당문 문주의 죽음.”
순간 당용택의 웃던 입꼬리가 내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