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화
순식간이었다. 머리가 이렇게 맑고 하나의 생각이 선명하게 떠오르는 것은 태어나서 난생처음이었다.
당용택은 마른 입술을 피가 배어 나오도록 깨물었다. 눈앞의 공자가 자신의 죽음을 언급하는 순간 깨달았다. 이놈이 원하는 것은 돈이나 명성, 혹은 사천당문의 일부 따위가 아니라는 것을.
‘이놈이 원하는 것은 사천당문 그 자체다.’
“놈!”
당용택이 순간 앉은 자리에서 추혼비접(追魂飛蝶)을 펼쳤다. 순식간에 수십의 암기가 내공을 가득 싣고 날아갔다.
이미 당용택은 기관 장치를 사용하든 직접 손으로 날리든 그의 몸에서 나가는 비침에는 모두 내공을 실을 수 있는 경지다.
피피피피핏! 피비비빗!
엄청난 속도로 암기는 곧바로 천일영의 온몸을 향해 날아갔다. 단 한 곳만을 향하거나 기관 장치가 날리는 방향에 의지하는 것은 당용택에게 수치심이 들 만큼이나 저열한 무공.
당용택은 원하는 대로 마음껏 방향까지 바꾸기 때문에 눈앞의 적이 몸을 움직이는 것을 대비하여 비침을 주시했다.
놈이 몸을 피하면 그대로 비침의 방향을 틀어 뒤통수를 꿰뚫어 버릴 요량이었다.
그러나 당용택은 순간 눈앞에서 벌어진 일에 이를 악물었다.
후우우웅!
자신이 날린 비침이 모두 허공에 멈춰 섰다. 단 한 번 공자가 손을 내뻗었을 뿐이다.
겨우 그것뿐인데 내공이 가득 실려 빠르게 앞으로 나가야 할 비침은 더 이상 나아가지를 못했다.
이것이 가능한 일인가. 당용택은 안광을 흘리며 허공에 멈춰선 비침을 회수하기 위해 만류귀종(萬流歸宗)을 펼쳤다. 그러나.
‘이런 망할! 만류귀종을 펼치는데도 비침이 허공에 뜬 채 그대로라니!’
당용택의 목울대로 침이 넘어갔다. 지금에서야 머릿속에 떠오르는 생각 하나.
아들 당추필로는 이자를 감당하지 못하는 게 당연했다. 당용택은 아들이 이자에게 당했을 모습을 상상하며 도반삼양귀원공(導反三陽歸元功)으로 몸을 뒤로 빼내고 자세를 다시 잡았다.
보통의 방법으로는 이자를 죽이지 못할 터. 당용택은 순간적으로 오른손으로 다시 한번 만류귀종을 펼치는 척하며 왼손으로 폭우이화정(暴雨梨花釘)을 뿜어내었다.
피이비비핑! 피비비비빗!
이제는 수십이 아니라 수백의 비침. 그것도 사천당문에서 자랑하는 최고의 독이 발라져 있는 비침이다.
수백의 비침에 내공을 실어 상상을 초월하는 속도로 날아간다. 이 비침은 실처럼 가늘고 눈에 보이지도 않을 만큼 방향을 비틀어 가며 고속으로 날아가기에 무림맹 맹주라 할지라도 이 정도의 근거리라면 피하지 못할 터다.
그러나 비침을 날린 후에도 당용택은 도반삼양귀원공을 다시 한번 사용하여 몸을 일 장 거리만큼 더 벌린 후 다음 공격을 준비했다. 빈틈없이 상대의 목숨을 끊을 요량이었다.
당용택은 또 한 번 독이 발린 비침 통 다섯 개를 손가락에 끼웠다.
‘이놈은 보통이 아니다. 폭우이화정을 피할 것으로 생각지는 않지만 만약을 위해서 한 번 더 공격한다. 이번에는 만천화우(滿天花雨). 일천오백 개의 비침을 날릴 것이다!’
당용택이 비침에 내공과 속도를 실으려고 오른손을 허공으로 들어 아래를 향해 팔을 날렸다.
그 순간.
천일영의 손에서 무극지검이 뽑혀 나왔다. 무극지검은 오묘한 기운을 품고 바람을 가르며 가로 방향으로 사천당문 본가를 가로질렀다. 순간 사천당문 본가의 오 층 벽면 전체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찌지지직. 쩌적!
그리고 이내 벽면에서 터지듯 거대한 소리가 울렸다.
쿠웅. 쿠와와와왕!
당용택은 방금 뽑아 든 비침이 채 손을 떠나기도 전 놀란 눈으로 침음을 삼켰다. 사천당문 본가의 오 층이 지금 통째로 잘리는 것을 본 것이었다.
쿠과과과광!
비스듬히 잘린 벽의 면이, 마치 잘 다듬은 검의 면처럼 깨끗하다. 본가의 오 층은 잘린 면을 따라 위에서 아래로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처음부터 천일영은 전각의 위를 날려 바닥으로 떨어트릴 요량으로 비스듬히 자른 것이었다. 전각은 상단이 천장과 함께 통째로 바닥을 향해 추락하기 시작했다.
쿠웅. 콰아아아앙!
당용택은 자신의 눈이 직접 보고도 눈앞에서 벌어진 일을 믿을 수 없었다.
건물을 잘랐기 때문이 아니다. 무림에, 아니 중원 전체를 다 털어도 이렇게 깨끗하게 벽면을 잘라 낼 수 있는 무인이 있는가.
없다. 최소한 몇십 년을 무림에 몸담은 당용택조차 본 적이 있기는커녕 소문조차 들어 보지 못했다.
또한 전각의 면적이 가로세로 이십 장씩이다. 헌데 그것을 한꺼번에 잘라 내는 것이 가능한가. 검강을 이십 장 길이로 만드는 무인이라면.
“망할 놈. 과연 홀로 적지로 찾아올 만한 실력이구나.”
주륵.
순간 당용택의 입에서 핏줄기가 흘러내렸다. 그리고 당용택의 가슴에서 피가 터져 나오듯 뿜어져 나왔다.
촤아아악!
스르르륵.
당용택의 가슴께가 비스듬히 잘린 면을 따라 사천당문의 본가처럼 가로로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다리는 땅을 지탱하고 있다.
허나 오른쪽 어깨부터 왼쪽 옆구리가 미끄러지듯 움직이더니, 기어이 상체와 하체가 분리되어 당용택의 윗몸이 땅바닥으로 떨어졌다. 손에는 비침 통을 끼운 채 그대로.
툭.
땅바닥에 떨어진 당용택의 상체에 붙은 머리가 눈 한 번 깜박이자 꺼져 내리듯 떨어졌다. 사천당문 문주의 죽음이었다. 그리고 그 순간.
“와아아아아아.”
“사천당문의 명예를 떨어뜨린 본가를 친다. 잃어버린 사천당문의 명예는 우리가 되찾겠다!”
본가의 밖에서 수백 명의 고함이 들려왔다. 천일영이 사천당문 본가의 오 층을 날려 버린 것은 당용택을 죽이기 위한 것이었지만 신호이기도 했다.
이것을 기점으로 준비를 거듭하고 있던 분가의 무인들이 일제히 일어선 것이었다.
사천당문의 상징과도 같은 본가의 거대한 전각 오 층이 무너지며 거대한 소리가 울려 퍼지자, 사천당문 안에서 수백 명의 무인이 비침을 날리기 시작했다. 같은 사천당문의 무인들을 향해서.
“본가의 사람보다 분가의 사람들이 훨씬 많습니다. 때문에 패배하지는 않을 것이지만 같은 사천당문의 무인들끼리 싸우는 것은 마음 아픈 일입니다.”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다 같이 죽는 것보다는 나으니 말이다.”
당강용은 오 층의 반만 남은 벽면으로 머리를 내밀고 수만의 비침이 허공으로 날아오르는 것을 보며 씁쓸한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비록 사천당문 본가 사람이라 할지라도 같은 한 식구. 그 때문에 죽이지 말 것을 당부하며 독문암기를 금하고 마비침을 사용하라 명했었다.
허나 이렇게 많은 사람이 뒤엉키면 분명 사망자가 나올 터다. 당강용은 눈앞의 참극에 잠시 눈을 감았다.
‘내가 무너지면 안 된다. 이 싸움을 빨리 끝내야 한다.’
당강용은 굳은 결의를 떠올리며 당용택의 시신이 있는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자신의 형님. 같은 어머니의 배 속에서 태어나 어릴 적부터 그를 아껴 주었던 사람이다.
당강용의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이렇게 되기를 바란 적은 꿈에서조차 없는 일이다.
그러나 당강용은 자신의 형님인 당용택의 시신을 들어 올렸다. 분리된 상체에서 핏물이 쏟아져 나오고 있었지만 굳은 결의는 지금의 슬픔에서 고개를 돌리게 했다.
터벅. 터벅. 터벅.
당강용은 당용택의 잘린 상반신을 들고 오 층의 벽면에 섰다. 그리고 당용택의 시신을 들어 올리며 내공을 가득 싣고 크게 고함을 질렀다.
“모두 들으라! 사천당문 문주 당용택은 죽었다. 지금부터 사천당문의 법도에 따라 일 분가의 내가 사천당문의 문주가 되었음을 알린다. 본가의 떡고물을 먹고 살았던 사람들은 지금 즉시 싸움을 멈추거라. 그리하면 목숨은 보전하게 될 것이다!”
“와아아아아!”
당용택의 고함에 분가의 사람들이 환호성을 외치기 시작했다. 반대로 본가의 사람들과 소속된 무인들은 크게 낙심하며 얼굴빛이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본가의 무인들은 자신들이 불리해진 만큼 더욱 많은 양의 비침을 날리기 시작했다.
피비비빗! 피비비빗!
수만의 비침이 하늘을 새까맣게 뒤덮는 가운데, 본가의 진형에서 큰 목소리가 내공을 싣고 퍼져 나갔다.
“이것은 반란이다. 감히 분가의 분주 따위가 본가의 문주를 치다니, 천인공노할 짓임을 잊지 말거라. 본가에 소속된 자들은 분가의 씨를 말릴 때까지 싸움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
본가의 사람들이 사생결단의 눈빛을 띠기 시작했다. 싸움의 끝은 그 행방을 모르기에 그들은 흔들리지 않는 결의를 내세우며 비침을 날려 댔다. 그리고 같은 사천당문의 무인으로서는 절대 하지 말해야 할 짓을 저질렀다.
휘이이익!
본가의 무인이 허공으로 던진 천뢰구(天雷球) 다섯 개가 떠올랐다. 파공강침은 폭발과 함께 어디로 날아갈지 예측조차 하지 못하기 때문에 허공에서 터진다면 적과 아군을 가리지 않고 집어삼킬 것이었다.
이것은 본가의 무인들이 자신의 목숨조차 개의치 않는 결의를 그대로 담아 마지막 방편으로 날린 것이었다.
그때, 천일영의 곁으로 바람이 몰려왔다.
쿠콰아아아아!
뜨겁고 데일 듯한 바람.
그것은 마치 형태가 있는 것처럼 주위의 먼지와 모래를 빨아들이고 하나의 용과 같은 모습으로 천뢰구를 향해 뻗어 나갔다.
바람은 천뢰구를 집어삼키며 하늘로 솟아올랐다.
수십 장의 길이로 용의 모습을 한 바람이 하늘로 치솟고, 바람의 끝자락이 용의 꼬리처럼 보일 때, 하늘에서 번쩍이는 빛과 함께 다섯 개의 천뢰구가 터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쿠웅. 쿠웅. 쿠웅. 쿠웅. 쿠웅.
허공에서 터진 천뢰구에서 사방으로 퍼져 나간 파공강침은 멀리까지 퍼져 나갔으나, 높은 허공에서 지상에 있는 사람들을 죽이기에는 금세 힘이 떨어졌다. 그만큼 천뢰구는 하늘 높이 올라갔던 것이었다.
투둑. 투두둑. 투두둑.
파공강침이 마치 비가 오듯 하나씩 땅으로 떨어졌다. 이 모습을 본 본가의 무인들은 크게 낙담하여 고개를 숙였다.
자신들의 목숨까지 걸어 가며 터트린 천뢰구다. 이것은 본가 무인들의 결의를 상징하는 것이기도 했지만 분가에게는 용서받기 힘든 죄를 짓는 것과 마찬가지이기도 했다.
천뢰구가 어떤 원리로 하늘로 솟구쳤는지는 알지 못하지만, 이미 마지막 수단으로 여겼던 천뢰구마저 소용이 없다면 본가의 사람들은 더는 손을 쓸 방법이 없었다.
하지만 그때 크나큰 소리가 들려오자 본가 무인들의 얼굴에 화색이 돌기 시작했다.
쿠우우우우웅.
사천당문의 넓은 땅 중에서도 가장 끝자락에 위치한 곳. 그곳에서 거대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 소리가 울림과 동시에 이번에는 분가 무인들의 표정이 어둡게 돌변했다.
그것은 이제 막 사천당문의 문주가 된 당강용도 마찬가지였다.
“기어이 모습을 드러내는군요. 그대로 계셔 주었으면 좋았을 것을.”
“어차피 처음부터 예상하던 일이다.”
“하지만 이상한 일입니다. 이리도 빠르게 알아차리고 움직일 리는 없을 터인데.”
“아직도 눈치를 채지 못한 것이냐.”
“네?”
“배신자가 있다는 뜻이다.”
천일영은 당강용과 함께 소리가 울려 퍼진 곳으로 신형을 날렸다. 정확히는 천일영이 당강용을 들어 허리춤에 끼우고 천지일축공으로 달려간 것이었다.
천일영은 눈 두 번 깜박할 사이에 소리가 울려 퍼진 곳에 도착하여 당강용을 내려놓았다. 눈앞에서 뿌옇게 돌먼지가 날리는 곳. 먼지 사이에 세 사람의 신형이 그림자처럼 일렁였다.
“이렇게 되는 것만은 피하고 싶었거늘…….”
당강용의 입에서 침음과도 같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조금씩 돌먼지가 사라지고 세 사람의 신형이 드러나자 당강용은 침통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그때 먼지를 흩으며 목소리가 울렸다.
“이 소란은 네놈이 벌인 짓이냐!”
거구의 남자에게서 서늘하게 날이 서 있는 거대한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 등에는 거대한 도(刀)를 맨 그가 날카로운 안광으로 당강용을 찌를 듯 훑어보았다.
나이를 가늠할 수 없고, 온몸에 피 냄새가 배어 있는 남자. 그는 사천당문의 실소유주나 다름없는 사람이었다.
당왕귀.
바로 당용택과 당강용의 아버지이자 사천당문의 잃어버린 무공을 찾기 위하여 십오 년 전부터 폐관 수련에 들어간 남자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