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3화
세하월은 입술보다 더 붉은 혀를 내밀어 입가를 핥았다.
비록 나른한 표정이고 눈은 흐리멍덩해 보였지만, 천일영은 세하월의 눈동자 너머에 숨어 있는 날카로움을 직시했다.
“이곳에 존재해서는 안 되는 사람이다. 이 정도면 대답이 되었느냐.”
“역시 그랬군요. 하지만 저는 공자님의 입으로 이름을 듣고 싶답니다.”
“하오문의 문주답게 눈치가 빠르구나. 언제 알아차린 것이냐.”
“방금이랍니다. 예상은 했지만 직접 눈으로 보기 전까지는 확신하지 못했었지요.”
“꽤나 조용히 움직이고 있었다고 생각한다만.”
“하오문에서 사천당문과 해남도, 그리고 무림맹에 대한 정보를 팔 때였습니다. 윤의강은 훌륭한 회주지만 그 정도의 사건을 캐낼 만큼은 아니지요. 그래서 저희도 그 정보의 진짜 주인이 누구인지 알아보았습니다. 그리고 여인 둘이 정보의 주인인 것을 알게 되었지요.”
“그것만으로 내가 누구인지 알았다는 것이냐.”
세하월은 천일영의 얼굴로 자신의 입술이 거의 닿을 만큼 밀착했다.
조금 전보다 더욱 단내가 강하게 풍겨 왔다.
“기묘하게도 그동안 모습을 보이지 않은 과거의 여인 둘이 떠올랐습니다. 그래서 무림 전체로 시선을 넓게 펼쳐서 봤지요. 그랬더니 사천당문과 무림맹, 해남파와 종남파까지 여러 가지가 보였습니다. 무림에서 가장 책략에 능한 사람은 무림맹의 제갈현, 사마정, 그리고 사혈련의 채주란, 손대법, 또한 천마신교의 마염지가 있지요. 그리고 이름이 크게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안과 혜가 있습니다.”
“그렇군.”
“하지만 많은 사람이 생각지 못하는 인물이 하나 더 있습니다. 그 사람은 무공도 천하제일이지만 머리 좋기로도 당할 자가 없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건 바로 천마신교의 천마 천일영이죠.”
“…….”
세하월은 천일영에게 조금 더 얼굴을 밀착시켰다.
이제는 입술이 조금씩 서로 맞닿을 정도. 세하월이 다시 한번 입술을 핥자, 이내 혀가 천일영의 입술에 습한 자국을 남기고 입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소문의 주인은 안과 혜가 분명했습니다. 정보를 다루는 실력, 그리고 이 정도의 계략을 짜낼 수 있는 사람은 흔치 않으니까요. 그리고 그 아이들이 나타난 이후 무림에서는 정신을 차리기 힘들 정도로 빠르게 일이 일어났습니다. 사천당문의 문주가 바뀌고, 무림맹은 속절없는 상황으로 몰렸지요. 과연 누가 이 정도의 일을 해낼 수 있을까요? 안과 혜를 움직일 수 있는 사람이 누구일까요? 그러니 이제 그 입으로 이름을 말씀해 주시겠어요? 천마님?”
“훗, 제법이구나.”
천일영은 세하월과 얼굴을 맞댄 채로 입을 열었다.
“내 정체를 알아낸 것은 칭찬할 만하나, 천마의 이름은 버린 지 오래다. 그보다는 나를 만나고 싶은 이유가 있을 것이다.”
“이유 같은 건 없습니다.”
순간 천일영과 맞닿아 있던 세하월의 입술이 조용히 포개졌다.
입안으로 빨려 들어갔던 세하월의 혀가 천일영의 입속으로 들어가고, 눈 두 번 깜박일 시간만큼 맞닿아 있던 입술이 끈적한 줄을 남기며 떨어지자 세하월의 얼굴이 조금 붉어졌다.
“처음에는 그저 가지고 싶었지요. 제 것으로 만들 수 없을까 했습니다. 그러나 포기했습니다.”
“어째서이냐.”
“천하에 그 누가 천마님을 당해 낼 수 있겠습니까. 마음만 먹으신다면 하오문 같은 건 반나절 만에 세상에서 사라질 것을.”
“그것뿐이더냐?”
천일영은 세하월에게 빙긋 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러나 눈은 웃지 않고 입꼬리만 올라간 표정. 세하월은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제 입술에는 미혼약이 발라져 있습니다. 이것을 입에 대는 순간 아무리 훌륭한 인품을 가진 자라도 즉시 욕정이 동하여 참을 수 없을 지경이 됩니다. 옆에 있는 사람이 그 누구라 할지라도 덤벼들지 않고는 견딜 수 없지요. 헌데 천마님은 표정 하나 변하질 않는군요.”
“제법 발칙한 계략이군.”
“저를 내어 주고 천마님을 가지려 했습니다. 그만큼 절실하게 가지고 싶었습니다. 천하제일의 무력. 중원 제일의 머리. 어찌 가지고 싶지 않겠습니까. 천마님만 가진다면 하오문의 미래는 보장된 것이나 마찬가지. 원하신다면 몸뿐만이 아니라 제 마음까지도 내어 드리려 했습니다.”
“그렇군.”
작은 천일영의 목소리가 세하월의 마음속으로 파고든다.
단 한마디, ‘그렇군.’으로 모든 것이 마무리되는 듯한 천일영의 목소리는, 세하월이 계획한 이 모든 일이 끝났음을 알려 주었다.
원하는 것을 가지지 못한 세하월의 흐린 눈길이 바닥으로 향했지만, 이내 잠시를 견디지 못하고 천일영의 얼굴로 다시 옮겨졌다.
마음에 넘치는 아쉬움을 어찌할 수 없었으니까. 그런데.
“아무래도 하오문 문주가 내게 준 미혼약의 효과가 이제야 도는 모양이군. 몹시 흥분된다. 참으면 안 되겠군.”
“흐에?”
“자, 그럼 빨리 원하는 대로 해 줘 볼까? 그 몸과 마음의 주인이 되어 보도록 하지.”
“자…… 잠깐마…… 꺄악!”
성큼성큼 다가와 자신의 몸을 번쩍 들어 올리자 세하월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비명을 질렀다.
고운 손이지만, 우악스럽게 번쩍 들어 올린 행동은 외모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거친 기색이 가득하다.
‘분명 거짓말이다. 미혼약에 당한 사람은 식은땀을 흘리고 얼굴이 붉어지며 심장이 거칠게 뛰어야 하건만, 저런 멀쩡한 얼굴로 흥분했다고 해 봐야!’
세하월은 심장이 터져 나갈 것만 같았다.
그러나 당황하는 것도 잠시, 잠시의 반항할 틈도 없이 천일영의 손길에 세하월은 침상으로 뉘어졌다.
그리고 세하월의 시선이 천장으로 옮겨졌다가 빠르게 천일영의 얼굴로 이동하는 사이, 천일영은 세하월의 양 손목을 잡아 거칠게 들어 올려 꼼짝도 못 하게 만들고 조금 전에 세하월이 했던 것처럼 얼굴을 가까이 밀착시켰다.
그리고 천일영의 입술이 세하월의 입가를 덮었다.
“읍읍읍! 으으읍!”
“입술에 남은 미혼약이 또다시 내 입으로 들어왔으니 이를 어쩔까. 더욱 흥분되는구나.”
“잠깐만요! 천마님!”
“응? 웬 잠깐?”
“정말로 미혼약의 효과가 나온 것입니까?”
“온몸에 절절히 퍼져 미혼약이 시키는 대로 행동하는 것이다. 이것은 내 뜻이 아니니 큰일이구나.”
“거짓말!”
“진짜다.”
천일영의 손길이 세하월의 옷자락으로 파고들었다.
허리에 감겨 있는 옷자락을 천일영이 빼내자 세하월의 하얀 가슴이 거의 드러난다.
“이제부터 시작이다. 맛있게 잘 먹게…….”
“기다려 주세요, 잠깐만!”
세하월이 절박한 표정으로 울부짖는다.
그러나 천일영은 세하월의 안간힘을 다한 표정을 보면서도 그만둘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세하월은 눈물을 글썽거리며 구슬픈 눈길을 애타게 보냈다.
천일영은 세하월의 눈동자에 자신의 눈을 고정하고 입을 열었다.
그 표정이 제법 짓궂다.
“자, 이제 말해 보아라. 너의 주인이 누구이냐. 너냐? 아니면 나이겠느냐.”
“흑, 처…… 천마님이십니다.”
“뭐라고? 잘 들리지 않는구나.”
“천마님이라고요! 제 주인은 천마님이십니다! 이제 됐습니까?”
“아직도 잘 안 들리는 것 같은데?”
“크흑, 이런 굴욕을. 제 주인님은 천일영 천마님이십…….”
그때, 천일영은 눈물을 흘리며 비명에 가까운 고함을 지르는 세하월의 입을 막았다.
“이제 됐다. 여자를 괴롭히는 취미는 없으니. 장난이 지나쳤다.”
“흐흑, 역시 미혼약의 효과가 돌았다는 말은 거짓말이었군요.”
“뭐, 그렇지. 예전에 그런 종류의 약은 질릴 정도로 다뤄 봤어서.”
천일영은 그제야 눈까지 웃으며 가슴이 보이는 세하월의 옷깃을 원래대로 돌렸다.
옷을 입으나 안 입으나 사실상 그것이 그것이지만 세하월은 양손을 들어 올려 교차하며 어깨를 잡고 팔로 가슴을 가렸다.
“무리하고 있다 싶었다. 바보 같은 짓을 했구나.”
“그렇다면 처음부터 전부 알고 계셨던 것입니까?”
“알다마다. 그러나 나를 함정으로 빠트리려 했으니 그 죗값은 치러야겠지.”
그때, 천일영의 주먹이 세하월의 머리 위로 올라갔다.
천마라는 위치에까지 오른 사람을 가지고 놀려 했던 응징이 시작될 것으로 생각한 세하월은 입을 꾹 다물고 눈을 질끈 감았다.
‘죽는다!’
세하월의 눈가에 다시 한번 눈물이 맺혔다.
천하의 천마를 우롱한 죄.
어찌 곱게 넘어가겠는가.
그때, 천일영의 주먹이 세하월의 머리로 내리꽂혔다.
콩.
‘응? 꿀밤?’
내공이 실리지 않은 부드러운 손길.
사실은 하나도 아프지 않을 만큼의 꿀밤이었지만 세하월은 머리를 문지르며 눈을 끔벅였다.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는 일이었다.
“어째서입니까? 아이에게도 통하지 않을 만큼의 꿀밤입니다.”
“그렇게나 떨고 있는데 어찌 때리겠느냐. 그리고 처음부터 때릴 생각도 없었다. 그보다는 어째서 이런 짓을 했는지 그것부터 듣고 싶구나.”
“그것은…….”
몇 번의 망설임이 세하월의 목울대를 스쳐 지나갔다.
진실을 이야기하자면 천마가 진정으로 벌을 내릴지도 모른다.
하지만 세하월은 하오문의 문주.
상대가 어떤 사람인지 파악하는 데 탁월한 눈과 감을 가지고 있었다.
방금 겪어 본 천마는 분명 도량과 그릇이 큰 사람.
세하월은 망설임을 가슴속에 접어 두고 입을 열었다.
“저희 아버님인 세강협은 원래 구심점도 없이 점조직으로 뿔뿔이 흩어져 있는 하오문을 하나로 모으신 분입니다. 하오문의 본문을 만들고, 중원의 각지에 지회를 만드신 것도 저희 아버님이셨지요.”
“그랬지.”
천일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오문의 전 문주 세강협.
천일영도 그가 살아생전에 몇 번 만나 본 적이 있었다.
수완이 좋고 하오문의 사람답지 않게 무공도 뛰어난 걸물.
호탕하고 자신의 사람을 지극히 아낄 줄 아는 대인이기도 하여 하오문의 사람이지만 하오문과는 참으로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아버님이 돌아가시고 제가 하오문의 문주 자리를 맡았지만 저는 무공도 뛰어나지 못하고 정보를 다루는 능력도 아버님처럼은 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능력이 탄로 나지 않도록 최측근조차 얼굴을 보이지 않고 몸까지 가리며 생활했습니다. 철저히 가리고 또 숨겨서 비밀이 많은 것처럼 가장하고 있었던 것이지요. 그러던 참에 천마님이 세상에 나와 계신다는 것을 알고는 제 편으로 끌어들이려고 한 것입니다. 지금의 하오문은 아버님의 영향력이 사라져 과거처럼 구심점이 없는 상태로 돌아가려 하기에.”
“생각 자체는 나쁘지 않았던 것 같구나. 헌데 그것뿐이냐.”
“죄송합니다. 아버님의 죽음에도 여러 가지 의문이 있었기에 공자님의 힘을 빌리려 했습니다.”
“세강협의 죽음?”
“네, 칠 년 전 아버님이 돌아가셨을 때, 그것은 참으로 이상한 일이었습니다. 온몸이 터져서 돌아가셨으니까요.”
“온몸이 터져? 마치 그것은 사천당문의 독인 반고일독 비슷하구나.”
천일영의 말에 세하월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녀도 충격적인 아버지의 죽음 앞에서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하여 조사했었다.
아버지는 독에 당한 것이 아니었다.
사천당문에서 사용한 반고일독도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난 후에 당용택이 당강용과 함께 만들어 낸 것이니까.
아버지의 죽음에 대한 원인은 지금도 도무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아버지는 중원에서 이상함을 느끼고 뭔가를 조사하시던 중이었습니다. 그러던 중에 신변에 문제가 생긴 것은 아닐까 합니다.”
“무엇을 조사하던 중이었느냐. 세강협을 죽일 정도라면 보통의 일이 아닐 터.”
“신기한 일이었습니다. 저도 아버지가 조사하던 것을 찾아내려 했지만 찾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허상의 존재가 아닐까 의심을 한 적도 있었습니다. 윤의강의 입에서 그 말이 다시 나오기 전까지는요.”
“윤의강?”
“천마님께서 맡기신 일이라고 들었습니다.”
“설마!”
“지천번회(地天飜會)입니다.”
순간 천일영의 눈꼬리가 치켜 올라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