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마신귀환기-114화 (115/270)

114화

세하월은 작은 손아귀를 꽉 쥐며 입을 열었다.

“세상에 존재하는 것이라면 응당 그 실체가 있어야 하는 법입니다. 헌데 그 어디에서도 실체를 찾을 수 없었습니다. 또한 그들의 목적과 이유조차도 알아낼 수 없었습니다. 명계(冥界)의 귀신이 아니라면 이렇게까지 숨지는 못합니다.”

“존재하지 않는데 존재한다는 말인가. 하오문에서조차 찾지 못하다니.”

천일영은 세하월에게 과거의 기억 한 자락을 떠올리며 입을 열었다.

“절강성의 유의선 승선포정사사가 지천번회의 실마리를 가지고 있다. 다리를 놓아 줄 터이니 그에게 자료를 받도록 하거라.”

“정말입니까?”

“커다란 실마리까지는 아니어도 지천번회의 단서가 끊어지는 것만큼은 모면할 수 있을 것이다.”

“감사합니다.”

세하월은 천일영의 말에 크게 기뻐하며 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그 웃음은 조금 전의 요염한 세하월의 미소와는 전혀 다른 것이었기에 문득 천일영의 눈길을 끌었다.

요부의 옷차림을 하고 있지만 해맑은 웃음을 짓는 세하월의 모습에 낙차를 느끼던 천일영.

그러다 하나의 생각이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재미있는 생각이 하나 떠올랐다. 나와 같이 일을 해 볼 생각이 없느냐?”

“같이 일을 해 보겠느냐고 제 의견을 물으시는 것입니까? 잘못된 말씀입니다. 천마님은 제 주인이 되셨으니 마음껏 하셔도 될 것입니다.”

“주인은 됐다. 그냥 장난을 친 것이니. 그보다는 제법 재미있는 생각이 떠올랐으니 한번 들어 보거라.”

떠올린 생각을 이야기하는 천일영의 입술에 세하월의 시선이 고정되었다.

그리고 이야기가 계속되는 동안 세하월의 눈길은 점점 천일영의 눈으로 옮겨져 갔다.

‘이분은 이 무슨 터무니없는 계획을!’

세하월은 천일영의 이야기가 끝나자 감탄을 토해 냈다.

“어찌 그런 생각을 하셨는지요. 역시 제가 인정한 중원 제일의 책략가입니다.”

“쓸데없는 말은 됐다. 그보다 네 생각은 어떠하냐.”

“무조건 할 것입니다.”

“잘 생각했구나. 이 계획이 시작되면 하오문의 미래는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그럼 무림맹의 발목을 묶고 난 후 바로 시작하도록 하지.”

“아……. 무림맹의 이야기가 나오니 생각났습니다. 무림맹에서 천마님을 찾아 달라고 했습니다. 천마님의 정체는 모르지만, 해남도에서 당추필에게 독을 넣은 사람을 찾아 달라는 의뢰입니다.”

“호오, 의뢰받은 내용을 나한테 말해도 되는 것이냐.”

“이미 윤의강에게 들으셨으면서 시침을 떼십니까? 허나 제 성의는 유의선 승선포정사사를 연결해 주시었으니 그 갚음 정도라고 생각하시면 될 것입니다.”

“알았다.”

“하나 더 있습니다. 이것은 윤의강도 모르는 것으로, 무림맹에서 제갈현의 행방을 쫓고 있습니다.”

“제갈현을?”

“아마도 제갈현이 무림맹에서 저지른 짓을 눈치챈 것이겠지요. 무림맹은 제갈현을 제거하려는 것일 것입니다. 이것으로 무림은 또 한 번의 태풍에 휘말리겠지요.”

천일영은 세하월의 말에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됐으니 하오문에서 받은 의뢰이니만큼 함부로 말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천일영은 몸을 일으키며 입을 열었다.

“제갈현은 정강산의 별유천지 분점에 있다.”

“천마님? 천마님은 제갈현이 어디에 있는지 알고 계신 것이었습니까? 그것을 제게 말씀하셔도 되는 것입니까? 제가 무림맹에 그 사실을 알리면 어쩌시려…….”

순간 세하월은 입을 멈췄다.

어찌 천마가 하는 말의 의미를 모를까.

세하월은 천일영의 의도를 바로 알아차렸다.

“알겠습니다. 돈을 받은 만큼 무림맹에 정보를 넘기겠습니다.”

“조만간 또 보도록 하지.”

“네.”

세하월은 천일영이 객실을 가로막는 문으로 걸어가자 배웅을 하기 위해 몸을 일으켰다.

얇은 옷이 스치는 소리가 방 안에 작게 울리며 기묘한 느낌을 또다시 퍼트린다.

그러나 조금 전은 천일영을 유혹하기 위한 옷차림이었지만, 지금은 그 마음이 변하여 이미 얇은 옷이 온몸을 그대로 보이는 것조차 신경을 쓰지 않는 걸음걸이.

그때, 세하월은 자신의 나신이 비치는 옷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한 가지 생각을 떠올렸다.

자신이 입술에 바른 미혼약은 화경의 경지에 오른 사람까지 그 약효가 듣는다.

그렇다면 어째서? 세하월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입을 열었다.

“어째서 극마인 천마님이 미혼약의 영향을 받지 않은 것이지? 설마?”

그때, 천일영이 잠시 고개를 돌려 말없이 검지를 입에 가져다 대었다.

잠시 눈이 마주친 천일영과 세하월.

천일영은 손가락을 내리고 더는 말을 꺼내지 않은 채 조용히 객실 밖으로 나섰다.

세하월은 천일영이 밖으로 나서자, 다리에 힘이 풀려 비틀거리며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세상에. 설마 극마가 아니라 탈마의 경지까지 올라가셨다니.”

세하월은 쿵쾅거리는 가슴을 움켜쥐며 잠시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 생각해도 아찔한 일이다.

분명 세상이 뒤집힐 만한 천마의 비밀을 알아챘다면 그 자리에서 죽임을 당해도 할 말이 없을 터다.

다름 아닌 이 정보를 거금을 받고 팔 수 있는 하오문의 문주이니.

“목숨을 맡아 놓겠다는 의미인가. 진짜로 내 주인이 되어 버렸네. 푸훗.”

세하월은 자신의 방 끝 침상 위에 놓인 미혼약의 병을 바라보았다.

이것은 다름 아닌 세하월의 아버지 세강협이 만든 것이었다.

아버지가 살아생전에 끔찍이도 좋아했던 어머니가 아무리 쫓아다녀도 넘어올 생각을 안 하자 일 년 동안 잠도 줄여 가며 만들었다고 했다.

그러나 원래는 사랑에 빠지는 약을 만들려고 했는데 실패해서 그 결과물이 엉뚱하게도 미혼약이었다고 했던가.

세하월은 사실 이 미혼약을 싫어했다.

‘아버지가 어머니의 마음을 무시하고 사랑에 빠지는 약을 만든 것에 대한 반성으로 남겨 놨었지.’

미혼약이 만들어지고 나서야 아버지는 자신의 실수를 깨달았다.

하늘이 나무라듯 사랑에 빠지는 약이 아닌 미혼약이 만들어지고서야 정신을 차린 것이었다.

아버지는 미혼약을 사용하지 않은 채 밀봉했다.

그리고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은 진심이라는 것을 잊지 않기 위해 눈에 잘 띄는 곳에 미혼약을 놓고 항상 바라보곤 했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아버지가 사랑에 빠지는 약을 만들려 했다는 것을 후회하고 반성하는 모습에 어머니가 마음을 열었지. 이런 사람이라면 믿어도 좋다고.’

아버지와 어머니는 평생을 금실 좋게 살았다.

하지만 그래도 세하월은 미혼약을 좋아하지 않았다.

언제든 나쁜 짓을 할 수 있게 만드는 것이니까.

이번에 급한 마음으로 미혼약을 사용했던 세하월도 이제는 반성하는 의미로 매일같이 이 약을 바라보게 될까.

작은 웃음이 세하월의 입가에 걸렸다.

“그래도 고마워요, 아버지. 이 약 덕분에 저도 믿을 수 있는 좋은 분을 만난 것 같아요. 약효는 전혀 없었지만.”

세하월은 그토록 싫어했던 미혼약을 눈에 잘 보이는 곳에 놓았다.

* * *

한 달 뒤.

사천당문이 종남파와 함께 전국에 구호소를 만들고 난 이후 많은 것이 변하기 시작했다.

깨끗한 옷과 검을 차고 친절하게 빈민들을 대하는 종남의 이름은 천하에 울려 퍼지기 시작했고, 사천당문이 의원들과 함께 지어 주는 약은 많은 사람의 목숨을 구했다.

약 한번 써 보지 못하고 죽어 나가는 사람들에게 아낌없이 비싼 약재를 사용하여 주니, 빈민 중에서는 백번씩 절을 하는 사람까지 나올 정도였다.

“좋구나. 종남의 이름이 알려지는 것도 좋지만 사람들을 돌보는 것이 이렇게나 좋은 것일 줄은 몰랐다.”

“그렇네요. 저도 처음 알았습니다.”

종남의 청운과 사천당문의 당가별은 맑은 하늘을 쳐다보며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았다.

사실 초절정 고수인 청운은 체온을 조절하여 땀을 흘리지 않을 수 있지만, 당가별과 함께 있으려고 일부러 땀을 흘리고 있었다.

딸 같은 당가별이 걱정되기 때문이었다.

“이제 거의 끝났습니다. 남은 약재 상자는 얼마 되지 않습니다.”

“나에게 맡기고 당 소저는 일을 보시지요. 제가 책임지고 전부 나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처음에는 호위만 하던 청운도 빈민가의 사람들을 바라보는 동안 마음이 바뀌어 물건을 나르는 힘든 일까지 마다하지 않았다.

청운은 이마의 땀이 식자 종종걸음으로 또다시 빈민들에게 달려가는 당가별을 보며 기특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삼십 대 중반의 여인.

사천당문에서도 약재에 통달하여 비록 분가지만 총애를 받는 사람이라고 한다.

청운은 처음에는 당가의 성을 가진 사람이기에 의심하고 그녀의 일거수일투족을 유심히 살폈다.

무엇인가 함정을 파서 종남파를 헤어 나올 수 없는 구렁텅이로 밀어 넣는 것은 아닌가 해서였다.

그러나 한 달이 조금 넘는 시간 동안 같이 지내며 청운의 생각은 바뀌었다.

‘참으로 좋은 사람들이다. 과거의 일을 생각하자면 가끔 울화가 치솟을 때도 있지만 지금은 모두 잊어야 할 때. 이렇게 열심히 빈민을 구제하는 사람들을 의심하는 것조차 실례가 될 것이다.’

청운은 고개를 옆으로 꺾으며 몸을 풀고 약재 상자를 들어 올렸다.

한가득 쌓여 있는 약재는 돈으로 환산하자면 금화 다섯 냥어치는 될 정도.

청운은 마황, 목단피, 부용, 지각 등 수백 가지의 약재 상자를 옮겼다.

청운의 깨끗한 새 도복이 땀으로 얼룩졌다.

“영차. 이제 거의 다 날랐구나.”

청운은 마지막으로 남은 단삼과 작약을 들어 올렸다.

흐르는 땀 사이로 나르는 마지막의 상자.

그 안에 들어 있는 단삼과 작약의 의미를 청운은 몰랐다.

그저 당가별이 건네주는 시원한 물 한잔만이 청운에게는 더욱 의미가 컸을 뿐.

* * *

같은 날 하남성(河南省) 무림맹.

남궁천은 맹주의 자리에 앉아 구파일방과 오대 세가의 문주들을 바라보았다.

그중에는 사천당문을 대신해 새롭게 오대 세가에 이름을 올린 단목세가도 포함되어 있었다.

게다가 화산파에서는 장문인인 천백도사뿐만 아니라 천량도사까지 참석을 하여 분위기를 더욱 무겁게 만들었다.

남궁천은 오늘 무림을 좌우할 만큼 명망 높은 사람들이 모인 이유를 떠올리며 마음속으로 독니를 드러냈다.

“오늘 모이신 이유는 제가 용납하지 못할 것입니다. 무림의 협과 도리를 가장 먼저 생각하셔야 할 분들이 어째서 이런 말씀들을 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흐음…….”

남궁천의 목소리가 방 안에 울려 퍼지자 장문인들과 문주들은 잠시의 침음을 삼켰다.

하지만 남궁천의 타박과 같은 말에도 어찌 그들이 아무 말을 하지 않는 것일까.

이유는 그들의 대부분이 모두 같은 죄를 지었기 때문이었다.

사천당문의 무인을 빼돌린 죄.

비록 알려지지 않은 죄이기는 하지만, 그들은 잠시의 어색한 침묵이 지난 후 하나씩 입을 열기 시작했다.

“맹주님의 말씀을 모르는 것은 아니오. 그러나 우리로서도 더는 어찌할 수 없는 일입니다.”

“맞습니다. 처음부터 반대할 이야기였지만 맹주님의 결정이었기에 저희는 모두 말없이 따랐지요. 허나 불과 몇 달 사이에 생각보다 사태가 심각하다는 것을 모두가 뼈저리게 느끼고 있는 바입니다.”

“모든 것이 전과 같을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절실하게 필요하다고 모두 같은 생각을 하고 있소이다. 맹주를 제외한 나머지 문파들이 모두 이렇게 말을 하니 뜻을 꺾어 주시지요.”

소림사의 방장과 모용세가의 모세룡, 그리고 무당파의 명선까지 연이어 말을 꺼내자, 남궁천의 맹주 같은 위세가 점점 무인의 위압감으로 바뀌어 갔다.

남궁천은 양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이를 갈 듯 입을 열었다.

“사천당문을 다시 받아들이자는 말이오? 그리되면 무림맹은 한번 뱉은 말을 번복하는 신용 없는 곳이 됩니다. 절대로 번복될 일이 없으니 이제 말씀들을 거두십시오!”

남궁천의 기가 가득 실린 무거운 목소리.

그러나 포효와 같은 말에도 구파일방과 오대 세가는 꿈쩍도 하지 않고 침묵으로 항의의 뜻을 표했다.

이내 잠시의 시간이 지나고, 침묵의 끝에서 소림사 방장 태사명진이 무거운 목소리를 꺼냈다.

“사천당문이 무림맹에서 십 년이라는 제재를 받은 이후 쉰다섯 명의 무인이 죽었소이다. 모두 독을 해독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해독하는 곳은 사천당문뿐이 아닙니다. 비록 모자란 실력이기는 하나, 사천당문 이외에도 해독하는 곳은 있는 법이니 그것으로 대처할 것입니다. 또한 사천당문은 무림맹의 제재를 거역하고 종남파와 손을 잡았습니다. 더욱 강한 제재를 가하고, 사천당문과 똑같을 만큼의 벌을 종남에 주지는 못할망정 이 무슨 기괴한 말씀을 하신단 말이오.”

그러나 태사명진은 남궁천의 기운 섞인 말에도 고개를 가로저었다.

“종남은 좋은 일을 하는 것이 아닙니까. 어찌 벌을 내릴 수 있겠소. 또한 이것은 단순히 벌을 주고 말고의 문제가 아닙니다. 지금의 문제는 약재를 구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약재?”

“그렇소이다. 해독에 꼭 필요한 도인, 목단피, 맹충, 아교, 애엽, 당귀, 천궁은 이미 시장에서 찾아보기가 어렵소. 그리고 해독에 가장 중요하고 필요한 약재가 또 있소.”

“또 필요한 약재? 그것이 어쨌단 말입니까. 필요하다면 백금을 주어서라도 살 뿐입니다.”

“그것이 말처럼 쉬운 것이 아니라오. 단삼과 작약은 모두 사천당문이 구호 활동을 위해 매입을 하여 백금이 아니라 천금을 준다고 하더라도 구할 수 없소이다. 그러니 그것을 가진 사천당문을 품을 수밖에 없다는 말이오.”

“뭐…… 뭐라고요?”

태사명진의 말에 남궁천은 하마터면 탁자를 손으로 내리쳐 부술 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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