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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신귀환기-116화 (117/270)

116화

하늘이 높고 햇살도 좋은 날.

천일영은 별유천지의 분점으로 가는 길을 휘적거리며 천천히 걸었다.

제법 기분이 좋고 더할 나위 없는 웃음도 지어졌다.

이제 거의 모든 일이 다 끝났다.

온갖 귀찮은 일로부터의 해방.

사천당문은 안과 혜에게 맡기면 될 것이고 문제가 생기면 하오문에서 알려 줄 것이다.

물론 객잔도 평수찬이 알아서 운영할 테니 하나도 신경 쓸 게 없다.

‘무림맹과 사천당문의 일은 참으로 지겨웠지. 꽤나 길었던 일이기도 하고.’

하지만 사천당문의 일은 앞으로 크나큰 돈을 안겨 줄 것이고, 당분간 무림맹은 꼼짝도 못 할 테니 상당한 이익을 얻었다.

모든 일을 끝내고 달콤하게 휴식을 취하게 되어 마음이 들뜬다.

어찌 좋지 않겠는가.

“오늘은 별유천지 분점을 둘러보고 내일은 집으로 가서 이영이하고 혜령이랑 놀아야겠다.”

“에? 공자님? 그럼 저는요?”

천일영의 혼잣말에 금채홍이 조금 삐친 얼굴로 바라본다.

그동안 금채홍도 안과 혜에게 무공을 가르치느라 고생을 했기에 잠시의 휴가차 데리고 왔다는 것을 잊어 먹은 천일영은 조금 뻘쭘하게 눈길을 피했다.

“큼큼, 당연히 채홍이하고도 놀아 줘야지.”

“으음? 뭔가 수상한데요? 설마 저를 잊고 계셨던 것은 아니겠지요?”

“그럴 리가 있느냐.”

“정말요?”

순간 금채홍이 천일영의 팔을 와락 껴안는다.

천일영은 금채홍의 행동에 흠칫하며 깜짝 놀랐다.

다름 아닌 금채홍의 가슴이 물컹하며 선명하게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전에는 기도와 혈도가 잘못되어 가슴을 동여매지 않아도 알아보지 못할 지경이었지만, 천일영이 치료한 이후로 금채홍의 가슴은 상당히 커졌다.

천일영은 조금 얼굴이 붉어지며 헛기침을 했다.

“네 녀석은 어째 날이 갈수록 대담해지는구나.”

“하지만 공자님이 곤란해하시는 얼굴을 보는 게 좋은걸요?”

“날이 갈수록 못된 취미가 생기는 것도 같고.”

하지만 천일영은 금채홍이 매달린 채 걸어도 별반 뭐라고 하지는 않았다.

평소라면 한마디쯤 했을지도 모른다.

천일영 스스로 생각해도 조금은 이상한 기분.

‘세하월이 유혹을 할 때도 아무렇지 않았는데 어째서?’

조금은 빨리 뛰는 심장.

기묘한 기분이 든다.

‘꼬맹이같이 색기라고는 하나도 없던 금채홍이 여자 같은 모습으로 바뀌어서 그런가?’

뭔가 가슴이 답답하고, 동시에 간질간질한 느낌이 파고들었다.

그러나 천일영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가끔 찾아오는 이 감정이 가슴에 속삭이는 말보다는 오랜만에 백수가 된 자유를 마음껏 누리고 싶었으니까.

천일영은 이 미묘한 감정이 안과 혜, 그리고 도현이나 무명암살대 천 명에게 느꼈던 감정과 비슷한 것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뭐, 상관없겠지. 귀여워하는 녀석이니.’

마음이 정리되니 다시 머리가 맑아진다.

천일영은 금채홍과 함께 또다시 기분 좋은 발걸음을 계속했다.

그리고 객잔이 멀지 않고 산길이 정강산 초입으로 접어들 때, 눈앞에서 제법 볼만하고도 희귀한 광경이 펼쳐지기 시작했다.

“이놈들아, 거기는 그렇게 일하는 게 아니다.”

“죄송합니다.”

“에이, 이래서 초보 놈들은. 내가 하는 것을 잘 보아라.”

거구의 덩치가 곡괭이를 휘둘러 솟아오른 땅을 파고 이내 길을 평평하게 다듬는다.

제법 일이 능숙하고 힘도 잘 쓰며 거침없이 길을 만드는 사람은 바로 산적이자 고자인 송여악.

‘녀석, 제법이군.’

한눈에도 일을 잘하는 송여악의 모습은 한동안 그를 데리고 있던 건청의 마음에도 제법 들었는지, 나무를 심는 일이 끝난 이후에도 현청으로 넘기지 않고 새로운 일을 맡긴 모양이다.

그것은 바로 새로 붙잡은 산적 삼백 명과 호북성에서 별유천지 분점으로 길을 잇는 공사.

천일영은 송여악의 곁으로 다가갔다.

“놀지 않고 열심히 하는구나.”

“끼아아아악! 공자님?! 어째서 여기에?”

“지나던 길에 들렀다. 그나저나 몸이 제법 좋아졌구나.”

송여악은 거구이기는 하나 피둥피둥했던 전과는 달리 제법 근육이 잡히고 반듯한 몸을 가지고 있었다.

몇 개월 동안 나무를 옮겨 심고 죽도록 일을 했더니, 술에 찌들어 살던 때와는 달리 온몸의 지방이 전부 빠져 버린 것이었다.

게다가 원래 힘도 좋았기에 송여악은 새로운 삼백의 산적들 사이에서도 두목이 된 모양.

딱히 건청이 신경을 쓰지 않아도 알아서 통솔하고 길을 만들 정도의 책임감까지 생긴 듯했다.

“고생이 많았으니 맛있는 거라도 사 먹어라.”

천일영은 금화 한 개를 꺼내 송여악의 손에 쥐여 줬다.

하지만 송여악은 돈을 받았음에도 기겁을 하며 걸음을 뒤로 뺐다.

“히익! 어째서 이런 거금을? 또 무슨 당치도 않은 일을 시키시려고. 이거 안 받으면 안 됩니까? 아니! 제발 다시 가져가십시오!”

“그냥 하던 일이나 하면 된다. 전과는 달리 시간도 넉넉한 공사가 아니더냐.”

“저…… 정말입니까? 호수를 만들고 바다와 연결하라거나 그런 거 아니죠?”

전과는 달리 제법 쓸 만한 인재가 된 송여악에게 천일영은 고개를 한 번 끄덕이고는 등을 돌렸다.

그리고 천일영의 나직한 목소리가 송여악의 귀에 박히듯 울렸다.

“여악아, 목소리가 고와졌구나.”

“끼아아아악! 제발 그 말만은!”

천일영은 송여악의 날카로운 비명을 들으며 객잔으로 향했다.

* * *

객잔으로 들어서는 천일영의 발걸음은 가볍고도 경쾌했다.

분명 제갈현이 자신을 기다리느라 눈이 퀭해 있을 것을 생각하니 제법 볼만할 터.

얄밉고 과거에 수많은 악연으로 이어진 그가 불행해하는 모습은 천일영이 정말로 기대한 것이었다.

천일영은 빠르게 객잔의 문을 열었다.

끼이익.

“……!”

그러나 순간, 천일영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상상했던 제갈현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그러고 보니 노병천을 생각 못 했군. 둘 다 군사와 책사의 역할을 하는 사람들이니 서로 죽이 잘 맞겠지.’

종이를 펼치고 일일이 붓으로 그려 가며 진형에 관해 이야기하는 두 명.

아주 좋아 죽는다.

그뿐인가.

절강성에 있어야 할 도지휘사 척계광까지 그 곁에서 입에 침을 튀기며 이야기를 한다.

물 만난 고기처럼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이야기를 나누는 세 명의 모습에 천일영의 얼굴이 울퉁불퉁 심술로 부풀어 올랐다.

죽도록 자신이 고생하는 사이에 이렇게 좋은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니.

천일영은 싸늘한 표정으로 노병천의 곁에 섰다.

“생각보다 팔팔하구나. 노병천은 허리가 이제 아프지 않은 모양이군.”

“으헛? 공자님 이제 오셨습니까? 허리는 지금도 아파서 죽을 지경입니다.”

천일영은 실눈을 뜨고 제갈현을 노려보았다.

두 달 사이에 얼마나 잘 먹고 잘 쉬었는지 피둥피둥하게 살이 올라 있었다.

‘송여악의 살이 어디로 갔나 했더니 죄다 제갈현에게 옮겨 붙었군.’

천일영은 짜증이 가득한 얼굴로 슬그머니 노병천의 허리에 손을 올렸다.

감히 기쁨을 방해한 것에 대한 응징!

“으으윽! 어째서 허리가 더!”

“호오? 제갈현과 열심히 놀기만 하더니 허리가 더 안 좋아진 게로구나.”

“끄으윽. 아닌 것 같습니다? 혹시 공자님께서?”

“글쎄?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천일영은 한겨울에 부는 북풍(北風)과도 같은 찬바람을 남기고 금채홍과 객실로 올라가 버렸다.

* * *

그날 늦은 밤.

객잔을 밝히던 불도 일부만 남기고 꺼져 숲의 기운이 몰려들 때였다.

천일영은 누워서 읽던 책을 잠시 내려놓았다.

‘열 명인가? 아무래도 하오문이 잘 알려 준 모양이군.’

그러나 그뿐이었다.

다가오는 기운을 감지했건만 천일영은 아무 일도 없다는 듯 읽던 책을 다시 들어 올렸다.

별반 이 일에 대해서 관여할 이유도 없고, 또한 읽고 있던 책도 재미있어서 방해를 받고 싶지도 않았다.

‘알아서 살아나면 다행인 거고, 죽으면 그뿐이지.’

과거 제갈현 때문에 몇 명이나 되는 무명암살대의 단원들이 죽었던가.

천일영은 지금도 죽은 단원들의 이름과 얼굴까지 선명하게 떠올릴 수 있었다.

그러니 딱히 도와야 할 의리 따위 있을 리 없음이다.

또한 지금의 제갈현은 공중에 뜬 사람과 마찬가지.

무림맹의 표적이 된 사람을 도와 봐야 피곤한 일에 휘말리는 것이기에 천일영은 다음의 책장을 넘기길 주저하지 않았다.

그리고 일각 동안 책을 읽어 내려가던 그때.

똑똑.

자신의 방을 두들기는 소리에 천일영은 몸을 일으켜 문을 열었다.

문밖에 서 있는 사람은 다름 아닌 금채홍.

천일영은 금채홍의 옷차림을 바라보며 피식 웃음을 지었다.

“옷차림이 자다 일어난 혜령보다 더 심하구나.”

“에? 그 정도로 엉망인가요? 에헤헤헤.”

금채홍은 머리에 까치집을 지은 채 눈을 비비며 하품을 했다.

아마도 잠이 들어 있다가 깬 모양이다.

“헌데 어쩐 일이냐.”

“아, 그것이 누가 오고 있는데요? 살기 가득한 사람 열 명쯤 되는 것 같습니다.”

깊이 잠이 든 와중에도 금채홍은 적의 기운을 느끼고 눈을 뜬 모양이었다.

순간 일의 사정을 알고 있는 천일영으로서는 금채홍에게 뭐라고 이야기를 할까 잠시 망설였다.

“으음, 아마 지나가던 살수가 아닐까? 별일 없을 거다.”

“그래도 살수가 공자님을 덮치면 어찌합니까. 제가 지켜야지요.”

금채홍이 배시시 웃으며 천일영을 바라본다.

천일영은 그 모습이 왠지 귀엽다고 생각하며 금채홍의 머리에 손을 올렸다.

부드럽게 쓰다듬는 손길. 금채홍의 얼굴이 조금 붉어졌다.

“잠이나 자거라. 네가 내 걱정을 하느니 내가 네 걱정을 하는 것이 나을 것이다. 채홍이, 너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내가 지켜 주마.”

“에엣? 그래도 제가 공자님을 지켜야 하는데……. 그래도 공자님이 지켜 주신다고 하니 왠지 기쁩니다.”

“그러냐.”

천일영은 머리를 계속 쓰다듬으며 금채홍의 방으로 들어섰다.

지켜 준다는 말에 연신 웃음을 짓는 금채홍은 천일영이 대충 얼버무린 것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침상에 누웠다.

천일영은 금채홍의 가슴께에 손을 올리고 따뜻한 진기를 집어넣었다.

그러자 금채홍은 어느새 스르륵 잠에 빠져들었다.

“이런 더러운 일까지 알 필요는 없다. 채홍아, 너는 몰라도 되는 일이거늘.”

깨끗하고 윤기가 흐르는 금채홍의 이마에 스며든 땀을 손으로 훔쳐 낸다.

천일영의 얼굴에 조금 착잡한 감정이 스며들었다.

따그닥. 따그닥. 드르르륵.

그때, 천일영의 귀에 제갈현이 있는 객실의 창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남들은 듣지 못하는 아주 작은 소리.

‘왔군. 서투르게 몸을 먼저 빼낸 것이 제갈현답지 않은 행동이었지. 그 대가가 죽음이라면…….’

천일영은 문을 따는 소리에 누워 있는 금채홍을 뒤로하고 밖으로 나왔다.

제갈현의 객실은 천일영이 묶는 객실에서 두 칸 떨어진 곳.

금채홍의 방으로부터 세 칸 떨어진 곳이다.

은자 열 냥짜리 객실이 전부 만실이 되어 천일영과 금채홍도 동전 두 냥짜리 객실에서 쉬던 중이었니 이 불편한 상황을 그대로 마주할 수밖에 없었다.

천일영은 제갈현이 있는 객실을 바라보며 합장을 했다.

‘잘 가라. 다시는 보지 말자. 죽어서도 나타나지 말고 무간업화(無間業火)에서 몸에 낀 비계나 잘 태우거라.’

천일영은 이제 길을 떠날 제갈현에게 마지막 인사를 남기고 과거의 악연을 모두 흘려보냈다.

이제 방문을 열고 들어가 다시 책을 읽으면 되는 일.

천일영이 자신의 방문을 열었다.

그리고 그때.

챙챙. 콰당당당.

순간 제갈현이 검을 든 채 문을 뚫고 밖으로 패대기쳐졌다.

산산이 부서진 문의 파면이 복도에 흩어지고, 제갈현은 왼쪽 어깨에서 피를 흘리며 오른손으로는 검을 바닥에 꽂고 몸을 일으켰다.

그때 흑의를 입고 두건으로 얼굴을 가린 살수 다섯이 복도로 튀어나와 제갈현에게 덤벼들었다.

챙챙. 채챙. 채애앵. 촤아아악.

일류 고수 중에서도 중간 정도의 실력인 제갈현.

그가 살수의 검을 제대로 막을 리 없었다.

제갈현의 베인 옆구리에서 피가 사방으로 튀었다.

그 기회를 놓치지 않은 살수 하나가 제갈현의 머리로 검을 날렸다.

하지만 그때, 옆구리가 베인 제갈현의 신형이 무너지듯 바닥으로 주저앉고, 살수가 날린 검은 어이없이 제갈현의 머리를 스치며 지나가 벽에 박혔다.

콰아악.

살수는 깊숙이 박힌 검을 뽑기 위해 발로 벽을 짚었다.

살수가 발에 힘을 주니 나무로 만든 벽면에서 ‘찌걱’ 하는 소리가 들리며 나뭇결이 부서진다.

그때였다.

휘이이잉! 빠악!

검을 뽑던 살수가 허공에서 열 바퀴나 돌고 바닥으로 처박혔다.

그리고 한겨울에 내리는 눈처럼 싸늘하고 살기 어린 목소리가 서늘하게 울려 퍼졌다.

“이 새끼들이 감히 객잔을 부숴?”

빠직.

이마에서 핏발이 곤두서는 소리가 살수의 귀에 박혀 들었다.

그 소리는 천일영이 객잔이 부서지고 더럽혀져 열이 받은 소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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