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9화
“허억, 허억.”
제갈현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또한 제갈현은 다친 몸에도 불구하고 숨이 차도록 허리를 움직였다.
그동안 제법 많은 미녀를 만나 왔었지만, 제갈현은 별유천지 분점에서 난생처음 진정한 미인들을 만났다.
그것만으로도 새로운 세상이 펼쳐지는 것만 같았다.
그런데 지금 눈앞에 자신을 바라보는 또 한 명의 절세 미녀 백유화.
제갈현은 그녀를 위해서 정신을 차리기 힘들 정도로 땀을 흘리며 움직이고 또 움직였다.
제갈현이 빠르게 몸을 움직일 때마다 백유화의 표정이 점점 황홀경으로 빠져들어 갔고, 제갈현은 그에 맞춰 몸 안의 모든 기운이 고갈이 될 정도로 숨을 헐떡거리며 더욱 빨리 움직였다.
그리고 지금, 제갈현은 모든 기운을 쏟아 내며 입에서 터져 나오는 신음과 함께 몸을 부르르 떨었다.
“크으윽, 하아아…….”
온 힘을 다한 제갈현의 몸이 앞으로 기울어졌다.
그때, 황홀한 표정을 지으며 제갈현을 바라보던 백유화의 입에서 색기 어린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더 빨리 못 뛰냐, 이 돼지 새끼야. 인제 겨우 네 시진 뛰어 놓고 뭘 다 뛴 것처럼 신음을 터트리고 지랄이야.”
“헉, 헉. 소저, 더 뛰다간 저 죽습니다.”
“얼굴을 바꾸려면 살을 빼야 할 거 아냐! 앞으로 두 시진 더 뛸 테니 발을 멈추지 말아! 특히 달리면서 더 빨리 좌우로 허리를 흔들어. 그래야 허리가 생기니까.”
“사…… 살려 주시오.”
짜아아악.
백유화는 나무로 깎아 만든 목검을 들고 제갈현의 등짝을 후려갈겼다.
별유천지 뒤에 있는 산에는 제법 큰 연무장이 만들어져 있었는데, 그곳에서 이미 닷새 동안 제갈현은 백유화의 감시하에 하루 네 시진씩 죽도록 몸을 움직이고 있었다.
그런데 오늘은 이미 네 시진을 뛰었는데 두 시진을 더 뛰라고 말하는 백유화.
분명 저 미모의 여인은 남자를 괴롭히며 쾌락을 얻는 사람임이 분명하다고 제갈현은 생각했다.
아직 살수에게 당한 몸도 성치 않은데 말이다.
그러나 제갈현은 억지로 다시 몸을 움직였다.
살아남아 남궁천에게 복수를 해야 했으니까.
그때, 천일영이 백유화의 곁으로 다가왔다.
“제갈현의 상태는 어떠하냐.”
“얼굴을 바꾸기 전에 체형부터 바꿔야 합니다. 가까이에 있던 사람은 의외로 몸에서 나오는 느낌만으로도 알아차리는 법입니다. 특히나 제갈현처럼 무공을 그만뒀지만 내공이 있고, 의자에 앉아 서류만 보던 사람은 더욱 그렇습니다. 저런 놈들을 많이 해체해 봐서 압니다.”
“흠……. 역시 제갈세가의 기운을 흐리게 만들어야겠구나. 저 사람을 어디에 쓸지 이미 생각해 두었으니.”
“앞으로 열흘이면 봐 줄 만한 몸이 될 것이니 조금만 기다려 주십시오. 하악, 하악. 저 돼지 새끼 정파 놈을 괴롭히는 게 좋아서 죽을 것 같습니다.”
“그 부분은 드물게 너하고 생각이 같구나.”
천일영은 제법 기분 좋은 웃음을 백유화에게 남겼다.
“하나 더 부탁할 것이 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내 조카 혜령을 봤을 것이다. 아침저녁으로 그 아이가 학당에 다녀올 때 지켜 주지 않겠느냐. 제갈현이 이곳에 있으니만큼 문제가 생겼을 때 지켜 줄 사람이 필요하다.”
“저 같은 살인귀에게 시키실 일은 아닌 것 같습니다?”
“바보 같은 녀석. 네가 아무나 죽이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부탁하는 것 아니냐.”
“헤헷, 천마님. 이럴 때는 부탁이 아니라 명령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또한 죽이지 말라 한 번만 말씀하시면 그대로 따를 것인데요.”
“명령으로 사람을 옥죄고 싶지는 않다, 더는.”
백유화는 천일영과 똑같이 기분 좋은 웃음을 남겼다.
하지만 천일영은 그 웃음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몰랐다.
천일영의 방금 말 때문에 백유화가 항주로 이사 올 생각을 굳혔다는 것을.
* * *
오랜만의 여유롭고 행복한 시간.
혜령은 제법 오랜만에 삼촌과 함께 한껏 재미있는 시간을 보냈다.
학당을 쉬는 이틀 동안 삼촌의 손길에 이끌려 온갖 맛있는 것을 먹으러 다녔고, 산속에 있는 커다란 폭포에 도착했을 때는 난생처음 보는 웅장한 광경에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뿐인가.
산속에 있는 객잔에서 배를 타고 낚시를 하는 동안에는 삼촌에 대해 서운함이 눈 녹듯 사라져 있었다.
혜령은 삼촌과 함께 보낸 시간이 정말로 꿈만 같았다.
항상 같이 다니던 예랑도 그것은 마찬가지인 듯 제법 만족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으니 분명 이 세상에서 이만큼이나 즐거운 일은 없을 것이 분명했다.
혜령은 행복했지만, 그럼에도 지금은 조금 인상을 찌푸리고 있었다.
‘내일은 학당에 가야 하는구나.’
학당에 가는 것이 싫지는 않았다.
아니, 오히려 재미있었다.
그런데도 삼촌과 너무도 재미있는 시간을 보낸 탓에 지금만큼은 가기 싫었다.
그때, 천일영이 혜령의 뺨에 얼굴을 비비며 들어 올렸다.
“우리 혜령이, 잠이 안 오니? 많이 늦었구나.”
“힝, 삼촌이랑 더 놀고 싶어요.”
“내일 학당에 다녀온 다음 또 놀면 되지 않으냐.”
“진짜요?”
“그럼. 내일도, 모레도 재미있게 놀자. 그러니 이제 자야지.”
“알았어요.”
혜령은 천일영의 손길에 의해 이불 속으로 뉘어졌다.
따스한 손길이 이마를 훔쳐 내고, 이내 몸 위로 덮인 이불 위를 부드럽게 두드린다.
혜령은 아쉬운 마음에 조금 더 눈을 뜨고 있으려 했지만 이내 눈꺼풀이 스르륵 내려온다.
너무도 좋아하는 삼촌의 애정이 가득 담긴 손길이 꿈속으로 이끌었기에, 조금은 더 삼촌의 얼굴을 보고 싶었지만 이내 혜령은 안심한 얼굴로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 * *
다음 날.
혜령은 자신과 서란 언니를 학당에 데려다주는 사람에게 오늘따라 유난히 관심이 생겼다.
‘우와…….’
혜령은 처음 만났을 때도 무척이나 놀랐지만, 오늘 유심히 다시 한번 살펴보며 새삼 감탄을 했다.
키는 작지만 아름다움을 머금은 몸에서 눈을 뗄 수 없었고, 얼굴은 마치 이 세상의 사람이 아닌 것 같았다.
맞잡은 손도 얼마나 작고 부드러운지 혜령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 예쁜 언니에게 끌려 들어가는 듯한 착각까지 일었다.
왼쪽으로는 백유화와 손을 잡고, 오른쪽으로는 예서란의 손을 맞잡은 채 학당으로 가는 길.
혜령은 배시시 웃음을 지었다.
예쁜 사람들 사이에서 걸으니, 마치 자신도 이들과 같지 않을까 하는 착각도 들었다.
잠시의 발걸음이 이어지고 학당에 도착한 혜령은 아쉬운 마음이지만 애써 손을 놓으며 입을 열었다.
“데려다주셔서 감사해요.”
“학당 잘 다녀오렴. 이따 끝날 때쯤에 또 데리러 오마.”
“네, 언니!”
웃는 얼굴로 손을 흔들고, 예랑과 함께 객잔으로 돌아가는 예쁜 언니를 한동안 바라보다 혜령은 학당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평소와 다름없이 천자문을 배우고 친구들과 재미있게 놀기 시작했다.
오늘도 그 여느 때처럼 행복하고 재미있는 하루였다.
그러나 혜령은 남자아이들과 여자아이들에 섞여 학당의 마당을 뛰어놀다 문득 기묘한 위화감을 느꼈다.
‘평소에는 잘 몰랐는데 친구들의 얼굴이…….’
신기한 일이었다.
모두 친한 아이들이다.
딱히 평소 이상하다고 생각해 본 적은 없었다.
그런데 오늘따라 이상하게 친구들의 얼굴이 지나칠 정도로 평범해 보였다.
‘코를 흘리고 있는 친구들의 모습이 하루 이틀도 아닌데 왜 오늘따라 자꾸 신경 쓰이는 걸까?’
멍하니 잠시 서 있는 사이, 한 아이가 자신의 손을 잡고 놀이가 한창 진행되는 곳으로 이끈다.
혜령은 아이를 따라가면서도 맞잡은 꼬질꼬질한 손을 잠시 내려다보았다.
‘이상하네. 평소에는 내 손을 잡아 주는 아이들이 반갑고 고마웠는데, 오늘은 왜 평범한 느낌이 들까? 너무 행복해서 내가 고마움을 느끼지 못하는 걸까?’
혜령은 잠시 생각을 하다 고개를 가로저었다.
불과 일 년 전만 해도 매일같이 할아버지에게 얻어맞고 길거리에서 구걸하며 살았다.
지금은 이미 분에 넘칠 정도로 행복하다.
혜령은 지금의 행복이 평범하게 느껴지는 다른 이유가 있으리라 생각하고, 자신이 왜 이런 생각을 하는지 원인을 찾기 위하여 주변을 세심히 둘러보았다.
‘그러고 보니…….’
혜령은 예서란 주변으로 몰려드는 남자아이들이 다른 아이들과는 조금 다르다는 것을 발견했다.
얼굴이 조금 붉은 것이 유달리 눈에 보일 정도였으니까.
‘자세히 생각해 본 적은 없지만 서란 언니도 아주 예쁘지.’
혜령은 자신보다 두 살 정도 많은 남자아이 사이에 둘러싸여 있는 예서란에게 조금 부럽다는 기분을 느꼈다.
그런데 남자아이들 사이에 앉아 있는 예서란의 표정은 냉랭하기 그지없다.
차가운 기운을 풍기고 책만 들여다보는 그 모습이 낯설지 않지만, 오늘만큼은 이상하게 보였다.
“자, 늦기 전에 오늘은 다들 집으로 돌아가거라.”
“예.”
따스하고 좋은 훈장님.
언제나처럼 해가 지기 전에 나오셔서 돌아가라고 말씀하신다.
혜령이 예서란의 손을 잡고 밖으로 나오자 아침에 자신을 데려다준 예쁜 언니가 예랑과 함께 서 있다.
혜령은 예쁜 언니를 보자 왠지 조금 기분이 가라앉았다.
삼촌과 함께 있는 것을 몇 번이고 봤고, 자신에게 잘 대해 주는 이 언니를 좋아한다.
그런데도 이상하리만치 마음 한구석이 아려 왔다.
그때, 백유화가 혜령의 표정을 보고 웃음을 지었다.
“혜령이가 어쩐지 기분이 안 좋은가 보네? 훈장님한테 혼이라도 났어?”
“아니요. 천자문도 잘 외우고 있어서 칭찬받았어요.”
“그래? 그런데 왜 이렇게 시무룩할까? 배가 고파서 그러려나? 당과라도 사 먹을까?”
힘없이 고개를 끄덕인 혜령은 백유화와 손을 잡고 당과를 사 먹은 이후 객잔으로 들어섰다.
그때, 혜령은 건청이 곁으로 지나가자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순간, 혜령은 또다시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학당에서 본 아이들과 달리 건청 삼촌을 보자 비교가 되었다.
‘그동안 몰랐는데 건청 삼촌도 진짜 멋지네.’
그리고 그때, 혜령의 눈에 삼촌의 모습이 들어왔다.
혜령은 순간 지금까지 해 왔던 생각이 한순간에 날아가는 것을 느꼈다.
‘그랬구나. 학당의 아이들이 이상하게 느껴지는 것은 내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너무 멋졌기 때문이구나. 그래서 비교가 됐던 거야. 그중에서도 우리 삼촌은 진짜…….’
모든 것이 납득이 가자 고개가 끄덕여진다.
혜령은 삼촌의 얼굴을 보자 떠올랐던 생각을 입으로 꺼냈다.
그래야만 현실이 될 것 같았으니까.
“응, 나는 역시 삼촌한테 시집갈래.”
“으응? 하하하. 우리 혜령이, 삼촌한테 시집오려고?”
“지금 막 결정했어요.”
“그래, 나중에 삼촌한테 시집 꼭 와야 해? 약속?”
천일영은 배시시 웃는 혜령과 약지로 약속까지 하고는 밖으로 나섰다.
원래는 노병천과 일이 있어 함께 나가기로 했는데 혜령의 얼굴을 보고 갈 생각으로 기다린 것이었다.
천일영이 밖으로 나가자 백유화가 혜령의 볼을 손가락으로 쓰다듬으며 짓궂은 웃음을 한가득 지었다.
“이거 큰일 났네. 혜령이, 삼촌한테 시집가려고? 나도 혜령이 삼촌에게 시집갈 건데?”
“에엣?”
당황하는 혜령의 목소리가 깜짝 놀란 표정과 함께 객잔 내에 울려 퍼지자, 대낮부터 객잔에서 술병을 끼고 있던 유향설이 재미있는 일을 감지하고 은근슬쩍 다가와 입을 열었다.
“어쩌나? 나도 혜령이 삼촌한테 시집가려고 했는데.”
“에에엣?”
그때였다.
천일영과 약속한 두 달을 조금 넘겨 막 객잔에 도착한 서하린이 인상을 지으며 유향설과 백유화의 사이를 가로막았다.
“아니, 이건 혜령이와 나의 싸움이야. 나와 혜령이 둘 중의 한 명이 공자님과 혼례를 올리는 것이니 새로 참전한 여인 둘은 빠져.”
“에에에엣?”
서하린의 등장으로 백유화의 눈매가 찌그러졌다.
백유화는 서하린의 말에 이죽거리는 표정을 지었다.
“아니, 이건 나와 혜령이의 싸움이지. 눈만 시커멓게 칠한 너구리 주제에 감히 공자님과 혼례를 올리겠다고? 공자님은 너구리를 별로 좋아하지 않으시거든?”
“뭐라고? 나는 이미 오래전부터 공자님과 혼례 약속이 되어 있는 몸이야. 이 난쟁이 똥자루 족제비 같은 것아. 이 기회에 다시 학당으로 돌아가는 몸이 되고 싶어? 일곱 살짜리 애들이랑 딱 어울리겠는데?”
화르르르륵.
갑자기 뜨거운 분위기가 객잔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그때, 객잔 안을 둘러보던 금채홍이 이상함을 느끼고 급히 모두가 있는 곳으로 달려왔다.
금채홍은 서로 노려보며 손톱을 세우고 있는 두 명의 모습을 보며 급히 앞으로 가로막았다.
“저기! 싸우시면 안 돼요.”
“채홍이는 일단 빠지거라. 아무래도 이 입버릇 나쁜 아이에게는 새로운 화장법을 알려 줄 필요가 있을 듯싶으니.”
백유화의 말에 서하린도 날카로운 눈매를 빛내며 맞섰다.
“채홍이는 멀리 피해 있어라. 내 오늘, 이 여자의 키를 잡아 늘일 것이니.”
순간, 서하린의 기운이 솟아올랐다.
아무래도 처음 보는 여인을 상대로 기선을 제압하기로 마음먹은 것이었다.
그때, 백유화 역시 기운을 끌어 올렸다.
금채홍만이 안절부절못할 뿐, 유향설은 안고 있던 술병을 입에 가져다 대며 이 싸움의 행방을 흐뭇하게 지켜보고 있었다.
그때였다.
휘이이잉!
갑자기 금채홍이 눈을 질끈 감고 금룡참월하검을 뽑아 들고 소리를 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