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0화
“안 돼요! 싸움은 그만해 주세요. 무섭게 왜들 이러세요!”
싸악.
그 순간, 주변에서는 그 깊이를 알 수 없을 만큼의 정적이 감돌았다.
백유화와 서하린은 그 자리에서 굳은 채 얼떨떨한 얼굴로 금채홍을 바라보았다.
“아니, 채홍아? 네가 제일 무섭거든?”
“그런 검을 뽑으면 아무리 나라고 해도 무서워.”
정적의 끝에 이 다급한 상황을 말렸다고 금채홍이 한숨을 내쉰 순간, 만류에도 불구하고 기어이 백유화와 서하린은 서로를 다시 노려보기 시작했다.
둘 사이에서 터져 나오는 기운에 금채홍은 노력한 대가조차 소용없자 바닥에 주저앉았다.
‘항주 제일의 미친년은 나인 줄 알았는데, 나로는 턱도 없구나.’
금채홍은 족제비와 너구리같이 서로를 원수처럼 바라보는 두 사람을 보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훗.”
백유화가 입술을 핥았다.
서하린도 손가락을 들어 올리며 공격의 자세를 취했다.
파지직.
순간, 서로의 약점이라고 생각된 부분을 공격하기 위해 두 사람이 신형을 날린다.
백유화의 손이 서하린의 목으로 날아가고, 서하린의 장권이 백유화의 턱으로 올라가는 사이.
“당장 그만두세요.”
순간 서리와 같이 차가운 기운이 퍼져 나가는 것에 백유화와 서하린은 본능적으로 위기를 직감하고 공격을 멈췄다.
무엇인가 절대로 반항하면 안 된다는 기운을 느낀 것이었다.
“지금 객잔에서 뭐 하시는 거예요?”
서늘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백유화와 서하린의 고개가 조금씩 목소리가 들린 방향으로 돌아갔다.
그곳에는 백유화와 서하린의 기운을 눌러 버릴 만큼이나 무서운 기운을 풍기는 여인이 서 있으니, 그 사람은 바로 천이영.
천이영은 눈을 가늘게 뜨고 호선을 그리며 한쪽 입꼬리만 올린 채 입을 열었다.
“호오? 지금 객잔에서 싸움하시는 건가요? 아주 간이 배 밖으로 나오셨네요?”
“아니…… 그게 아니라…….”
“게다가 혜령이도 있는데 주먹을 휘둘러요?”
“저기 그…… 혜령이한테는 피해를 안 줄 생각으로…….”
순간 천이영이 뜨고 있던 실눈이 느닷없이 커졌다.
“서하린 소저는 또 봇짐을 안 가지고 나갔었으니 당장 발과 몸을 씻으세요. 이번에는 두 달이나 나가 있었으니 씻기 전에는 방에 들어갈 생각도 하지 말고요. 그리고 신발은 버리세요. 두 달간이나 신고 있던 신발로 객잔을 돌아다니면 당장 내쫓을 거예요.”
“우와와왕. 알겠어요.”
서하린이 고개를 푹 숙이고 객잔 뒤편에 있는 우물가로 뛰쳐나갔다.
조금 울먹거리는 것 같기도 했지만, 천이영은 여전히 싸늘한 표정을 짓고 백유화를 바라보았다.
“백유화 소저는 연무장에서 달리다가 지쳐서 토하고 있는 남자의 토사물을 치우시고요. 물을 깨끗하게 뿌리고 흔적도 남기지 마세요. 완전히 치우기 전에는 밥도 안 줄 거예요. 당장 연무장으로 가세요.”
“아…… 알겠어요!”
백유화도 얼굴이 벌게진 채 후다닥 연무장을 뛰쳐나간다.
입에서 ‘제갈 놈, 이 자식.’이라며 살기를 풍기는 것에 살짝 오한이 끼쳐 올랐지만, 천이영은 이내 한숨을 내쉬고 머리를 손으로 짚었다.
그때 때마침 술병을 끼고 슬그머니 자리를 뜨는 유향설이 눈에 띄었다.
“거기 서세요.”
“네넵?”
재미있는 싸움을 기대하던 유향설의 목울대로 침이 넘어간다.
“유향설 소저? 요즘 찐 거 알죠?”
“꺄아아악! 제발 그 말만은!”
“날이 갈수록 동글동글해지고 있어요. 이러다간 조만간 돼지하고 친구가 될 거예요. 지금 당장 연무장으로 가서 이십 바퀴 달리세요. 안 그러면 술은 모두 압수예요.”
“하지만!”
“오호? 지금 말대답하는 건가요?”
“아니…….”
“지금 당장 움직이세요. 눈 한 번 깜박일 때까지도 여기에 그대로 있으면 가만두지 않겠어요.”
“네!”
유향설은 잽싸게 신형을 날렸다.
그리고 달리고 또 달렸다.
정말로 무서웠으니까.
유향설은 연무장으로 뛰어 올라가 천이영의 명령대로 이십 바퀴를 뛸 준비를 했다.
그때, 제갈현을 걷어차고 한참을 쥐어박은 백유화가 유향설의 곁으로 왔다.
“어째서인지 천이영 여주인이 말을 하면 거역을 못 하겠어. 무공을 배운 사람도 아닌데.”
“그러게. 여주인은 뭔가 무서워. 가끔은 천마님보다 더 무서워서 꿈에도 나와. 괜히 그 사람의 눈 밖에 나면 안 될 것 같달까. 뭔가 반항을 하면 큰일이 날 것 같은 느낌이랄까. 그 순간 끝장이 날 것 같달까.”
두 사람은 소름이 올라오는 팔을 가렸다.
침도 꿀꺽 삼켰다.
천하제일 객잔 별유천지에는 괴물이 산다.
그것도 천마보다 더 무서운 괴물이.
백유화와 유향설은 서로의 얼굴을 보며 고개를 가로젓고, 이내 천이영이 시킨 것을 하기 위해 걸음을 옮겼다.
* * *
다음 날 이른 아침.
금채홍은 어제 있었던 일을 떠올리며 마음의 답답함을 느꼈다.
두 명의 여인이 싸움을 일으키는 데 자신은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는 생각에 침울해지는 마음을 견디기 힘들다.
금채홍은 별유천지로 잠시 돌아와 지내는 동안 매일 아침 빼먹지 않고 빗자루질을 했지만, 오늘만큼은 자신의 무공이 강하지 못하다는 현실을 머리에서 지우기 위해 더욱 열심히 비질했다.
금채홍은 우울한 마음을 지우고 시무룩한 얼굴을 보이지 않으려고 일부러 콧노래를 불렀다.
“으흥흥~ 좋아 깨끗하다. 오늘은 이 정도면 될까. 에헤헤.”
금채홍은 빗자루를 있던 자리에 넣어 놓고 객잔으로 들어갔다. 그때였다.
“네 이년! 도대체 이 가슴은 어떻게 된 거야! 으아아아아!”
단옥이 금채홍의 가슴을 뒤에서 움켜잡으며 울부짖었다.
불과 일 년 전만 해도 아무것도 없는 평지였는데 어느새 커다란 황산 두 개가 자리를 잡고 있다.
또한 단옥이 보기에 얼굴도 전보다 더 예뻐지고, 피부도 백옥이라는 말이 딱 어울릴 만큼 고와졌다.
단옥의 입장에서 보면 억울하기만 한 상황.
그러나 금채홍이 보기에는 단옥도 엄청나게 예뻐져 있었다.
단옥도 공자님이 가르쳐 준 운동을 빼먹지 않고 매일같이 하는데, 불과 일 년 만에 예전의 얼굴은 온데간데없고 그 미모에 물이 오르는 것이었다.
“이 가슴은 불공평해! 이 얼굴에 이 가슴은 절대 안 된다고! 이건 너무 불공평해!”
“하지만 단옥아, 너도 엄청나게 예뻐졌어. 솔직히 항주에서 단옥이 너보다 예쁜 사람이 몇이나 되겠어?”
순간 두 사람의 손이 허공에서 맞잡아지며 깍지를 끼고 흔든다.
즐거운 웃음소리도 여전하다.
“역시 우리는 친구지.”
“그렇고말고. 우리는 절대로 친구야.”
천일영은 단옥과 금채홍의 대화를 들으며 피식 웃음을 지었다.
무림맹과 사천당문의 일이 끝나고 객잔에서 여자들의 웃음을 듣자니 왠지 이제야 돌아온 느낌이 든다.
‘이제야 백수의 길로 한 발 들인 기분이구나. 이제 완전한 백수가 되어야 하는데.’
헌데 느긋한 천일영의 표정과는 달리 건청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곁에 앉았다.
“공자님, 요즘 괴담이 돌고 있습니다.”
“괴담?”
“네, 근데 그것이 좀…….”
“뜸 들이지 말고 말해 보거라.”
“그…… 예전에 채홍이가 별유천지 공사도 하고, 또 한동안 객잔에 찾아오는 이상한 사람들을 쫓아내고 했잖습니까? 그때 그…… 저기…… 채홍이가 가슴이 없어서 많은 사람이 안타까워했었습니다. 천하에 이름을 알릴 만한 미인인데 그…… 흠이 있다고요.”
“흠이라니! 가슴이 작은 게 어찌 흠이냐. 암튼 계속 말해 보아라.”
“근데 채홍이가 근 일 년 사이에 급격하게 성장을 하지 않았습니까. 그러다 보니 소문이 나돌기를, 채홍이가 아침마다 가슴팍에 만두를 가득 넣고 울면서 빗자루질한다는 소문이 돕니다.”
“만두?”
“근데 그 정도면 말을 안 합니다. 가슴이 작은 게 한이 맺혀서 만두를 넣은 가슴을 보고 울다가 실성한 듯이 웃고, 빗자루로 뭔가 이상한 글을 바닥에 쓰면서 가슴 큰 여자를 저주하는 주문을 외우고 혼잣말을 한다고…….”
“건청아.”
“네.”
“그거 절대 채홍이한테 말하지 말거라.”
“누가 눈치 없이 채홍이한테 말할까 봐 무섭습니다.”
그때였다.
금채홍이 타 준 차를 마시던 단옥이 문득 생각났다는 듯 말을 꺼낸다.
“채홍아, 너 괴담이 돌고 있는 거 아니?”
“괴담?”
슈우우욱!
금채홍이 이성을 잃었을 때 얼마나 무서운지 잘 알고 있는 건청은 순간 할 수 있는 최고의 속도로 경공술을 발휘하여 밖으로 몸을 피신했다.
그리고 천일영도 불똥이 튀기 전에 예랑을 안고 슬그머니 밖으로 나왔다.
천일영은 금채홍이 매일 아침 콧노래를 부르며 비질하는 모습을 떠올렸다.
“참으로 그 녀석다운 일이군. 허나 이 일로 축 처지지나 말아야 하는데. 어제 백유화와 서하린의 싸움을 말리지 못해서 꽤나 풀이 죽었다고 들었으니.”
천일영은 금채홍이 무공에 욕심을 내고 있다고 생각하면서도 그것이 나쁘다고는 생각지 않았다.
이십 대 초반의 나이로 일류 고수 끝자락이면 지나칠 정도로 빠른 무공의 성취다.
하지만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워낙에 고수다 보니 금채홍은 자신도 모르게 조급해하고 있는 것이었다.
“오늘 밤에는 채홍이의 무공을 어찌할지 고민해 봐야겠구나.”
천일영은 금채홍에게 오늘 밤 연무장으로 오라는 말을 하기 위해 발걸음을 돌렸다.
아니, 화가 가라앉을 때까지 기다리기로 마음을 고쳐먹었다.
천하의 천일영도 화가 난 금채홍은 무섭다.
* * *
금채홍은 천일영과 해시(亥時)에 만나기로 했지만, 한 시진이나 이른 술시(戌時)인 지금 금룡참월하검을 껴안고 연무장 구석에 앉았다.
‘온종일 우울하기만 하네. 어제의 일도 그렇지만 그 망할 괴담은 또 뭐람.’
잊으려고 해도 종일 머리에서 떠나지 않는다.
금채홍은 금룡참월하검을 들어 올려 달빛에 비췄다.
세상의 그 누구나 탐내는 명검.
그러나 공자와 같이 있지 않으면 다른 사람에게 목숨을 잃고 빼앗길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문득 들었다.
‘나에게 부족한 것이 무엇일까. 어찌하면 더욱 빠르게 강해질까.’
금채홍은 금룡참월하검을 내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때, 등 뒤에서 풀 밟는 소리가 들려와 금채홍은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양동이와 빗자루를 들고 있는 백유화가 서 있었다.
“어째서 연무장에 와 있는 것이니? 듣기에 공자님과 약속한 시각은 한참 남은 것 같다만.”
“아……. 그게 저기, 생각할 게 있어서요. 그런데 그 양동이와 빗자루는 왜 들고 계신가요?”
“망할 제갈 놈이 오늘 또 토해서……. 여주인은 무섭더라. 혼나지 않으려면 깨끗이 치워야지.”
백유화는 우울한 목소리를 내는 금채홍을 의아하게 바라보다 빗자루를 내려놓고 곁에 앉았다.
“어제는 미안했다.”
“아니에요. 백유화 님께서 죄송할 게 뭐가 있다고요.”
“나 때문에 우울한 거 아니니?”
“그냥 여러 가지로 마음이 조금 그래요.”
금채홍은 몸을 동글게 말은 후, 무릎 위로 얼굴을 파묻고 입을 다물었다.
백유화는 시무룩해진 금채홍의 곁에서 기지개를 켜며 달을 바라보았다.
“난 말이다. 내가 원한 것도 아닌데 태어날 때부터 이 모습이었다.”
“네? 모습이요?”
“태어났을 때부터 작았다. 나이가 조금 들었을 때도 다른 아이들에 비해 반 정도밖에 안 되는 키였다. 그래서 어렸을 때 아버지가 나를 대할 때는 유독 엄하셨어. 가끔은 웃어 주기도 하셨지만, 보통은 매일같이 혼쭐이 나는 나날이었다. 하지만 나쁘지 않은 삶이었지.”
“행복하게 사셨던 것 같아요.”
“그래, 열두 살 때까지는.”
백유화는 금채홍처럼 몸을 둥글게 말고 머리를 무릎에 대고는 고개만 돌려 금채홍을 바라봤다.
“우리 집은 새외무림이라고도 하고 마교랑도 비슷한 집안이었다. 그게 무림맹에서는 거슬렸던 모양이다. 어느 날 정파 무인 수십이 쳐들어와 집을 태우고 부모님을 죽였지. 어머니는 죽기 전에 겁탈을 당하고, 죽어서도 겁탈을 당했다. 나는 부모님이 죽기 전에 숨겨서 목숨만은 건졌지만.”
“백유화 님…….”
“하지만 말이다? 목숨은 건졌지만 열두 살의 여자애가 길거리로 나앉으면 무슨 일이 생기는 줄 아니?”
“설마……?”
“하루하루가 지옥이었다. 특히나 내 몸에 손을 대는 놈들은 대부분 정파 나부랭이라는 놈들이었어. 놈들은 나를 산이고 집으로 끌고 가서 밥도 안 주고 괴롭혔거든? 처음에는 반항도 했지만 돌아오는 것은 죽을 정도로 아픈 구타뿐이었다. 그래서 다음부터는 눈을 감고 이때가 지나기를 기다리기만 했어. 이틀이고 삼 일이고 죽도록 놈들에게 괴롭힘을 당하면 싫증이 났는지 다시 길거리에 버려졌거든. 그리고 또 다른 놈에게 끌려가고. 그게 몇 달이고 매일같이 계속됐다.”
“어…… 어떻게 그런 일이! 그 무슨 악독한 짓들을!”
금채홍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러나 백유화의 입에서는 오히려 담담한 목소리가 계속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