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0화
하늘 높이 날아가는 참매의 뒷모습을 보면서 백유화는 천일영의 소매 끝을 잡았다.
“이걸로 서하린 소저는 눈을 뜰 겁니다. 애영이와 화영이가 곁에 있으니 편지를 받는 대로 즉시 조치하겠지요. 그러니 걱정은 이제 그만하셔도 될 것입니다.”
“이번에도 네 도움이 컸구나. 나 혼자였다면 분명 방법을 알지 못한 채 서하린은 내공을 잃고 정신 또한 돌아오지 않았겠지. 유화야, 고맙구나. 항상 곁에 있어 줘서.”
“아…… 아닙니다.”
다정한 표정. 그리고 진심이 가득한 말.
백유화는 하마터면 넘쳐흐를 뻔한 눈물을 겨우 참았다.
가슴이 아리고 쪼개질 듯 아파져 왔다.
그동안 그토록 듣고 싶었던 말.
‘고맙구나.’
그 말을 듣는 순간, 울컥거리는 마음을 주체하기 힘들었다.
백유화는 천일영이 보지 못하도록 수풀이 우거진 나무 사이를 바라보며 억지로 괜찮은 척 목소리를 내었다.
“참매의 다리에 묶은 편지에 글이 제법 많았습니다.”
“아무래도 여기에 너와 온다는 말을 남기지 않고 오지 않았더냐. 그러니 항주에 있는 사람들이 걱정할까 하여 목적지를 알린 것뿐이다. 그리고 건청에게는 조금의 부탁을 했다.”
“건청에게요?”
“항주 인근에 아무래도 화약을 다루는 산적들이 있는 모양이니 각별히 조심하라는 내용하고, 별유천지 분점과 호북성을 연결하는 공사가 막바지에 이르고 있으니 거두어들인 산적 삼백 명에게 무공을 가르치라는 부탁이다. 내가 만든 검법 일백칠십 초식 중에서 두목 송여악에게 오십 초식씩, 나머지 산적들에게 삼십 초식씩을 가르치면 쓸 만해지겠지.”
“쓸 만해지다니요. 공자님의 검법은 지나치게 위험한 무공입니다. 그 끝을 알기 힘들 정도로 강해지는 무공이니, 삼십 초식씩만으로도 대단한 위력을 낼 것입니다.”
“괜찮다. 급료도 줄 것이고, 산적이 아닌 오히려 마을과 산을 지키는 목적으로 쓸 것이다. 게다가 화약을 가지고 산꼭대기를 부수는 사악하고 못된 놈이 있는데 이쪽도 대응책이 있어야 할 것 아니냐.”
“그건 그렇지요. 그나저나 참 못된 놈입니다. 산을 부숴서 사람들을 매장하다니. 악독한 놈.”
“그러게나 말이다. 세상에는 그런 못된 놈도 있구나.”
천일영은 기지개를 켜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참매가 가지고 간 편지에는 방금 말한 내용 외에도 여러 가지가 적혀 있었다. 그 때문에 편지는 항주가 아닌 귀천명의 윤의강에게로 날아갔다. 그가 분배해서 각각 전서구를 날릴 테니까.
“사천당문의 당강용에게 공동파의 지원을 부탁했다. 그리고 안과 혜에게는 이번 사건에 남궁천이 관련이 있는지의 조사도 명했지. 또한 세하월에게는 황실에 마을의 몰살을 부탁한 자를 찾으라 했다. 가만히 두지 않을 것이니 말이다.”
“천마님, 설마하니 이제는 정면으로 놈들을 대하실 생각이십니까.”
“그럴 생각이구나. 놈들은 내가 소중하게 여기는 사람을 건드렸다. 그동안은 놈들의 발목을 묶는 정도로만 대응했다만, 이제는 이쪽에서 먼저 움직일 것이다.”
“제법 위험이 따를 수도 있는 일입니다. 언제까지 그리하실 생각이십니까.”
“놈들이 침묵할 때까지다.”
천일영은 말을 하면서도 딱히 기운을 흘리지는 않았지만, 오히려 그 평온한 모습이야말로 진정 화가 났을 때라는 것을 백유화는 잘 알고 있었다.
게다가 상대가 침묵할 때까지라니,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가.
‘모두 죽을 때까지라는 말이군. 이런 천마님은 꽤 오랜만인걸.’
백유화는 소매 끝을 잡고 있을 손을 떼어 천일영의 손을 꼭 잡았다.
따스한 온기가 연결된 손을 타고 온몸으로 전해진다.
“제가 했던 말을 잊지 마십시오. 혼자서 피 값을 짊어지는 것은 아니 됩니다. 제가 항상 곁에 있으며, 피의 무게를 같이 짊어질 것입니다.”
“미안하구나.”
우당당탕.
그때 공동파의 반쯤 불타 버린 정문에서 커다란 소리가 울려왔다.
그것은 패악에 가까운 찢어질 듯한 목소리와 함께 거대한 내공이 울리는 것으로, 천일영과 백유화는 그 존재를 다시 느끼게 된 것만으로도 눈살을 찌푸렸다.
“야! 나와! 여기에 있는 거 다 안다.”
“누구시오! 이곳은 공동파이오. 함부로 행패를 부려도 되는 곳이 아니란 말이오!”
“시끄러워. 전부 다 죽고 싶어? 엉? 당장 안에 있는 기생오라비 같은 놈더러 나오라고 해. 아니면 내가 쳐들어간다!”
“어허! 여기가 감히 어디라고!”
퍼지는 악에 받친 목소리에, 정문을 지키고 있던 공동파의 무인은 큰소리를 치면서도 가까이 다가가지도 못하고 있었다.
그만큼 상대방의 기운이 거대했으니, 일류고수의 실력으로도 정문을 지키는 무인은 근처조차 가지 못하는 것이었다.
천일영은 고개를 가로젓고 한숨을 길게 내쉰 다음, 백유화와 함께 공동파의 정문을 향했다.
그곳에는 다름 아닌 천일영이 집어 던져 버린 요소령이 너덜너덜해진 옷차림으로 거친 숨을 몰아쉬고 있었으니.
“꽤 멀리 날려 보냈는데 벌써 돌아온 것이냐.”
“헉헉, 이 망할 놈아. 사람을 그렇게 집어 던지고도 네놈이 마음 편히 살 수 있을 거로 생각했느냐. 하늘에서 떨어질 때 죽을 뻔했단 말이다. 내가 무공이 강하지 않았으면 어쩔 뻔했느냐.”
“잘 살아 있으니 된 것 아니냐. 딱히 다친 곳도 없어 보이는군.”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하냐?! 이 개놈의 새끼. 지금 당장 네 몸의 목을 뜯어 버리겠다.”
“정말로 귀찮구나.”
파앙!
순간 천일영의 신형이 튀어 나갔다. 요소령은 금나수를 날리며 천일영의 목을 노렸다.
다른 곳으로는 그 분노가 풀리지 않는다는 듯이.
파바바밧!
그러나 천일영은 빠르게 요소령의 뱀 같은 손길을 잡아채며 팔째 꺾어 등 뒤로 접어 버렸다.
뚜두두둑!
“끄아아악. 개놈아! 이거 안 놓아?”
“손을 놓으면 내 목을 뜯어 버리는 것 아니었나?”
천일영이 말을 하는 사이, 요소령은 눈을 번뜩이며 왼손을 뒤로하여 천일영의 옆구리로 날렸다.
휘이잉.
유연하기가 실로 대단하여, 공격을 당할 것이라고는 생각도 못 할 위치로 손을 날리는 신위다.
요소령의 눈이 실낱같이 휘어지며 웃음이 배어 나왔다. 이번만큼은 분명 예상치 못한 경로로 날아가는 만큼 성공을 확신한 것이었다.
파가가각!
“……!”
그러나 요소령의 손길은 천일영에게 닿지 못했다.
무려 등 뒤로 꺾은 손을, 잡은 오른손의 위치만을 변경하여 한 손으로 요소령의 두 팔을 전부 잡아 버린 것이었다.
천일영이 두 팔을 완전히 제압하자 요소령은 식은땀을 흘리기 시작했다.
설마 이렇게나 빨리 제압을 당할 줄 몰랐다는 표정이다.
“젠장, 방심했구나. 이것을 빨리 놓아라. 그렇다면 목숨만은 살려 주마.”
“그러지.”
파밧.
순간 천일영이 양손을 풀어 주자 요소령의 얼굴에 얼떨떨함이 묻어난다.
놓으라고 해서 진짜로 놓아주는 경우가 있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다.
‘아……. 놓으라고 해서 저놈이 놓아줬는데 왜 이렇게 창피한 거지?’
요소령은 얼굴이 새빨개지다 못해 터져 나갈 것처럼 붉어졌다.
그러나 그녀가 어떠한 사람인가.
장강에서도 그 무공 하나로 강자들을 모두 죽이고 정상의 자리에 오른 불세출의 여장부가 아닌가.
요소령은 즉시 태도를 바꾸고는 뻔뻔하면서도 거만한 목소리를 흘렸다.
“오호호호. 역시 장강수로채 주인의 무서움을 네 녀석이 깨달은 모양이구나.”
“대충 그런 거로 해 두지.”
“응?”
순간 요소령은 천일영의 목소리에 온몸에서 소름이 돋아 올랐다. 평범한 말이다.
그런데 문제는 어찌하여 그 목소리가 등 뒤에서 들리는 것인가.
덥석.
요소령은 자신의 뒷덜미가 잡히는 것을 느끼는 순간 식은땀이 이마에서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겨우 고개를 돌려 천일영과 눈이 마주치는 순간.
요소령은 놀랍게도 자연스럽게 앞으로의 미래가 눈앞에 그려졌다.
“서…… 설마? 또?”
“잘 가라.”
부우우웅.
“꺄아아아아아악.”
“이번에는 편하게 땅으로 내려오지 못하도록 조금 회전을 시켰다.”
탁. 탁.
손을 두 번 털어 낼 시간이면 충분했다. 요소령이 하늘에서 점이 되는 데 걸리는 시간으로는.
천일영은 빙글빙글 돌며 날아가는 요소령에게 이번에도 단정하고 경건한 표정으로 배웅의 인사를 했다.
“퉤.”
요소령으로부터 등을 돌리자 백유화가 환하게 웃으며 기다리고 있다.
천일영은 백유화의 손을 잡고 성운이 있는 방으로 향했다.
백유화의 얼굴이 다시금 조금 붉어진다.
그러나 지금 천일영이 잡은 손이 금채홍과는 다른 의미를 지님을 어찌 모르겠는가.
하지만 백유화는 결코 천일영의 손을 놓지 않았다.
아주 잠시뿐이지만 그것으로 충분했기에.
* * *
“아주 호된 꼴을 당했소이다.”
“크아아악, 이 망할 놈 같으니!”
산길을 오르는 천량도사와 도철용의 얼굴에는 어이없는 표정과 터지는 울화를 주체 못 하는 감정이 각각 엇갈렸다.
조금 전 정체를 알 수 없는 기생오라비 같은 놈이 백유화와 객잔을 나간 이후.
초절정 고수의 천량도사와 도철용은 객잔 안에 있는 산적들을 처리하는 데는 그다지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기껏해야 삼류 무인도 안 되는 산적들 열댓 명이라고 해 봐야 둘이 나설 것도 없이 한 명의 힘만으로도 눈 서너 번 깜박일 시간이면 처리하고도 남음이다.
그러나 급하게 밖으로 나간 천량도사와 도철용은 황망한 마음을 감추기 힘들었다.
“급히 밖으로 나갔는데도 이미 자리에 없을 줄은 몰랐습니다. 그놈 대체 정체가 무엇인지.”
“저 역시 전에 본 것 같은데 도무지 기억이 안 나는군요.”
천량도사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젊은 공자와 백유화가 사라지고 기감으로도 느껴지지 않자 결국은 객잔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던 것이었다.
뒤처리를 두고 그냥 갈 수는 없는 법이니까.
“설마 진짜 인육일 줄이야.”
“아직도 속이 뒤집힙니다. 우욱.”
천량도사는 원래 육식을 하지 않기에 소총반두부만 먹어 탈을 면했다.
그러나 도철용의 경우에는 포자 두 접시에 어향육사까지 먹었으니 지금까지도 울렁이는 속을 주체하지 못함은 어쩔 수 없는 일.
“놈들을 포박하고 주방의 문을 여는 순간 정말로 기절할 뻔했소이다. 내, 이 나이가 될 때까지 그토록 처참한 광경을 본 적도 없으니 말이오. 무량수불.”
“그러게나 말입니다. 그 객잔이 산적질을 하는 동안 죽인 시신을 감추기 위해 음식으로 만들어 파는 데다가, 심지어 돈이 있는 자가 객잔에 들어오면 그 자리에서 죽여 버렸다니 말입니다.”
객잔의 주방은 아주 깨끗했다.
피 냄새도 거의 나지 않을 정도였다.
게다가 얼마나 청결하게 인육을 씻고 관리했는지, 사람의 두개골이 몇십 개나 있는 것을 보지 않았다면 절대 믿지 않았을 법할 만한 주방이었다.
하지만 그것이 오히려 천량도사의 소름을 끼치게 했다.
그간 그곳에서 도무지 몇 명의 사람이 음식이 되어 팔렸는지 감도 잡히지 않고, 그 정도로 깨끗하게 관리를 했으니 먹은 사람도 눈치를 챈 자가 없음이다.
“현황우라는 자가 보통은 넘는 모양입니다. 시신을 처리하는 방법부터 남다르니 말입니다.”
“보통 산적들은 사람을 죽이지 않지요. 그런데 그 많은 사람을 죽였다는 게 뭔가 이상합니다. 보통 산적들은 표국의 표사에게 뒷돈을 받는 것만으로도 꽤 수입을 올리는데…….”
천량도사와 도철용은 결국 객잔에 있는 산적들을 현청에 넘기고, 뒷조사에 협력까지 하다가 천일영을 놓친 지 한참이 지난 지금에 와서야 산을 오르고 있었다.
“어서 올라갑시다. 공동파에서 일의 전모를 들어야 하니 말입니다. 객잔을 보니 현황우의 일이 보통을 넘어서는 시급을 요구하는 일인 듯합니다.”
“그러시지요.”
도철용과 천량도사의 발길이 더욱 빨라졌다.
그때 도철용과 천량도사의 눈이 동시에 가늘어졌다.
“뭔가 이상한 기운이 빠르게 달려오는군요.”
“경공이라고 하기에도 빠릅니다. 이 정도의 신위를 가진 자가 우리에게 오는 것입니까?”
도철용과 천량도사는 거대한 나무들이 우거진 숲길에서 신경을 곤두세웠다.
이만큼이나 빠르게 다가오는 사람이라면 비록 초절정 고수 두 명이라 할지라도, 상대를 감당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에.
산을 타고 내려오는 속도가 비록 가파른 경사로 인해 빠를 수밖에 없다고는 해도, 지나치게 빠른 속도에 천량도사와 도철용의 이마에 식은땀이 배어 나왔다.
“벌써 놈이 거의 다 왔소. 혹 현황우인가? 이렇게나 빠르게 온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건만!”
“만나 보면 알겠지요. 그런데 신기한 일이오. 왜 보이지 않는 것이지? 지금이라면 보이거나 발소리라도 들려야 하는데 말이오.”
그때 천량도사는 뒷골이 당기는 듯한 섬뜩함과 함께 고개를 쳐들었다.
기감으로 느껴지는 것이 아무래도 조금 위쪽인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순간.
“으헉!”
“아니, 이게 무슨!”
피할 겨를도 없었다. 아니, 피할 수 없다고 해야 할 터다.
콰아아아아앙!
순간 자신들을 덮치는 신형에 천량도사와 도철용은 이를 악물었다.
웬 여인의 신형 하나.
그것이 자신들의 몸을 들이받는 순간 뼈가 뒤틀리는 소리가 나고 눈알이 터질 것만 같은 충격이 느껴졌다.
“크헉!”
“크악!”
“까악!”
순간 천량도사와 도철용은 내공을 끌어모아 뒤로 밀리는 신형을 세우려 했다.
찌이이이이익!
미칠 일이었다.
얼마만큼의 내공이 담겨 있는 것인지 여인의 신형은 천량도사와 도철용을 밀어내기 시작했다.
파가가각. 쿠웅.
여인의 신형에 밀려 허공으로 자신들의 몸까지 떠오르자 천량도사와 도철용의 입가에 경련이 일었다.
머리에서 떠오르는 생각은 딱 하나.
‘죽거나 뼈가 부러지거나.’
도철용과 천량도사, 그리고 요소령은 한데 엮여 그 순간부터 하늘을 날다, 이내 땅으로 곤두박질쳐져 산 아래로 구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