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1화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 몸이 안정되어 거동하는 데 불편함이 없어진 성운은 공동파 안에서 제법 큰 곤욕을 치러야 했다.
구십이 넘어 보이고 움직이는 데조차 많은 불편을 느껴 잠시 앉아 있는 것도 힘들어했던 그가, 불과 몇 시진 만에 나이 육십이 넘는데도 불구하고 마흔 살 정도의 외모가 된 것도 모자라 건강해지기까지 했으니 모두의 눈이 휘둥그레졌음이다.
“이제야 설명이 다 끝났다.”
“수고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껍데기는 그냥 둘 것을 그랬구나.”
“아니! 이게 좋다. 절대 다시 외모를 늙게 하지 말아라. 그리하면 죽어서 귀신이 된 후에도 원망할 거다.”
“귀신이 되어서도 술이나 마시러 다닐 테지. 나에게 따지러 올 시간까지 있을까. 이 사이비 도사 놈아.”
“그것도 그렇긴 하네.”
기분 좋은 웃음을 흘리며 성운이 술잔을 들어 올렸다.
도사임에도 불구하고 워낙에 술을 좋아했던 터라 죽은 장문인조차 두 손 두 발을 들 정도였던 그는, 자신의 자리 앞에 천일영과 백유화의 술잔 이외에도 평소 술을 마시지 않았던 장문인을 위한 술까지 가득 채워 놓았다.
“네가 가져온 영약을 먹고 부상이 나았다는 거짓말은 제법 잘 먹혔다. 덕분에 공동파의 기대가 전부 나에게 또다시 쏠리는구나.”
“몸이 좋아졌으니 지금 당장 검을 뽑고 싶겠지만, 부탁하건대 지금은 술잔을 기울이기만 하여라.”
“현황우를 저대로 두라는 것이냐. 장문인의 사그라진 목숨을 외면하고 이대로 가만히 있으라는 그런 말이더냐.”
“모든 일에는 순서가 있는 법이다. 기다리는 것으로 훨씬 많은 것을 얻을 수 있게 될 터이니 다급함으로 일을 망치지 말라는 이야기다.”
천일영의 말을 듣자 장문인의 몫으로 놓아둔 술에 잠시 시선이 옮겨진 성운의 눈에 물기가 스며들었다.
마음이 앞서는 자신의 몸은 이미 검을 들어 현황우의 목을 날려 버리고 있어야 했다.
아무리 많은 것을 얻는다고 해도, 죽은 장문인에게 바친 눈앞의 술잔 속에 쌓인 원한이 가슴속에 속절없이 응어리지는 지금의 현실이 마땅치 않다.
“현황우의 일은 내가 처리한다. 너는 공동파의 재건에 모든 노력을 기울여라. 지금의 공동파에서 장문인이 될 사람은 너 하나뿐이 아니더냐. 네가 손에 피를 묻힌다 해도 바뀌는 것은 고작 장문인을 지키지 못한 것에 대한 죄스러운 마음 하나 사라지는 것뿐이다.”
“안다. 알고 있지만…….”
“네 마음을 내가 모르겠느냐. 그러나 억울함에 마음이 석연치 않아도 믿어 달라는 말만 할 수 있을 뿐이구나. 너의 마음이 달래질 만큼 내가 대신해 주겠다.”
천일영은 끓어오르는 속을 달래지 못하는 성운을 향해 웃음이 섞인 표정을 내보였다.
제법 사특한 생각이 가득해 보이는 표정 너머로 악당스러운 계략을 꾸미는 것이 성운의 눈에도 한눈에 알아차릴 정도다.
“그 표정만큼이나 흉악한 일을 저지를 모양이구나.”
“일단 하나 확인해 보건대, 공동파를 재건하는 데 들어가는 비용이 얼마나 되겠느냐.”
“불타 버린 전각과 장원 등을 비롯하여 현황우에게 빼앗긴 것들까지 모두 한다면 금화가 이천 냥도 넘게 들어갈 테지.”
“이천 냥쯤이면 그다지 힘들지는 않겠구나. 성운, 네 원수를 갚는 것은 물론이고, 그 돈까지 모두 충당하게 해 주지.”
“그것이 가능한 일이더냐?”
성운의 눈길이 말도 안 되는 다짐에 믿지 못할 마음이 절반, 친구의 말을 믿고 싶은 마음 절반으로 갈린다.
하지만 잠시 천일영을 바라보던 성운은 이내 고개를 가로저었다.
눈앞에 있는 이 사람은 친구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중원에서 가장 머리가 잘 돌아가는 사람이다.
“그 누구도 아닌 네가 하는 이야기이기에 믿으마. 허나 뱉은 말을 지키지 못하면 네놈의 엉덩이를 걷어차 주겠다.”
“누가 네 녀석한테 맞아 준다고 하더냐. 내공도 5갑자밖에 안 되는 놈이.”
“내공이 5갑자에 이르는데도 적다는 타박을 듣게 될 줄이야.”
챙그랑.
허공에서 성운과 천일영의 술잔이 마주쳤다.
그 술잔에는 성운의 아픈 마음과 천일영이 그동안 미루어 왔던 결심이 모두 들어 있었다.
이제부터 각자 품은 마음으로부터 마음껏 그것을 꺼내어 휘두를 것이니, 이제 천일영은 다시는 한 걸음 물러 상황을 관망만 하지 않을 것이었다.
* * *
백유화와 천일영은 공동산의 산 한 자락을 돌며 현황우가 있는 녹림의 산채를 바라보았다.
아직은 공사가 한창이라 지어지지 않은 부분도 있지만, 산채의 방어를 위한 부분은 모두 완성되어 외부로의 침입을 허용하지 않을 만큼의 방비가 되어 있다.
“저렇게 넓은 공터가 벼랑 끝에 있다니, 마치 처음부터 산채를 지으라고 있던 자리 같습니다. 오직 정문이 있는 한 방향을 제외하면 들어갈 수 없는 곳이네요.”
“저런 자리를 찾아냈다는 것은 현황우가 제법 머리가 돌아가는 사람이라는 것을 뜻하는 것이겠지. 그리고…….”
“왜 그러십니까?”
문득 가슴속을 휘젓는 위화감.
천일영은 공동산에 온 이후로 느껴지는 이상한 느낌에 뭔가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의구심을 떨칠 수 없었다.
“유화야, 분명 현황우가 녹림의 채주를 죽인 이후 공동파에 들어와서 생활한 것을 어찌 생각하느냐.”
“혹, 새로운 산채를 지을 돈이 모일 때까지 연기한 것은 아닐까요? 그리하면 녹림이 건재하다는 것을 숨기면서도 자금을 모으는 데 유리한 부분이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그래도 뭔가가 부족하구나.”
“마음에 걸리는 일이라도 있으신 것입니까?”
백유화의 질문에 천일영은 대답 대신 고개만을 끄덕이며 산채를 계속 바라보았다.
아마도 진흙탕과도 같은 끈적한 피가 흐르는 세상에서 죽도록 구르고 굴렀던 자신이 아니었으면 눈치채지 못했으리라.
그만큼 현황우가 벌인 일은 기괴함을 가지고 있었다.
“구해야 할 것은 전부 찾았느냐.”
“전부 구했습니다, 천마님. 이것으로 놈들에게 제법 크나큰 고통을 줄 수 있을 것입니다.”
“효과는 얼마나 지속되겠느냐.”
“말씀만 하십시오. 원하시는 만큼, 바라시는 정도의 고통을 줄 수 있습니다. 거의 죽기 직전으로 만들 수도 있지요. 꺄하하하학!”
오랜만에 듣는 백유화의 잔학한 웃음이 산줄기를 타고 사방으로 퍼진다.
천일영은 백유화의 머리를 한 번 쓰다듬고는 입꼬리를 올렸다.
“한 달이면 된다. 그동안은 일어서지 못하게 하거라.”
“겨우 그 정도면 되겠습니까? 저는 한 일 년 동안은 죽을 지경으로 만들 생각이었는데요.”
“그 정도까지는 안 해도 된다. 한 달 만이라고는 해도 이 중원에서 상대를 그리 만들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겠느냐. 오직 너뿐이다.”
“아쉬움은 남지만, 한 달만의 시간 동안만이라면 느낄 수 있는 고통은 전부 다 느끼게 해 주겠습니다. 제발 살려 달라는 말이 튀어나오도록 만들지요.”
백유화는 손에 들고 있는 약재를 봇짐 안에 넣었다.
응당 아픈 사람에게 쓰이는 효과가 좋은 약재이나, 풍기는 기운이 서늘함을 품고 있는 것은 왜인지.
백유화의 눈동자에 광기가 서리고, 천일영은 원래 그러했을 백유화의 눈을 보며 피식 웃음을 지었다.
“공동파의 밥은 맛이 없으니 일단 시장이라도 가자. 마침 갈아입을 옷도 필요하니 말이다.”
“하긴, 급하게 오느라 아무것도 가져오지 않았지요.”
“가는 김에 놈들의 동향도 조금 보도록 하지.”
천일영이 백유화를 번쩍 들어 안고 천지일축공으로 시장을 향했다.
그동안 백유화는 또다시 얼굴이 벌게진 채 뛰는 가슴을 진정시키느라 다른 생각을 머릿속에 떠올렸다.
‘기왕 약재가 원하는 만큼 전부 손에 들어왔으니, 공자님의 말씀보다 조금 더 앞으로 나가 볼까. 잘 견디지 못하면 정말로 죽기 직전까지 아슬아슬하게 가는 것도 나쁘지 않겠네. 꺄하하하학.’
백유화의 표정이 참아 내는 웃음으로 울룩불룩해졌다.
요즘 들어 너무 착하게 사느라 사람들을 도륙하지 못해서 욕구 불만이었기에 이번 참에 그동안 답답했던 가슴을 뚫어 볼 참이었다.
그 대상을 비록 자르지는 못하더라도 그에 상응하는 만큼의 고통을 줄 생각이었으니, 벌써 가슴속에는 상쾌한 바람이 부는 듯했다.
* * *
다음 날.
의실에 누워 있는 천량도사와 도철용은 꼼짝도 하지 못하고 온통 힘들어하는 기색으로 가득했다.
가히 만면수색(滿面愁色).
갑자기 빙글빙글 돌며 날아온 여인과 부딪힌 것만으로도 기괴하고 터무니없는 일이다.
그런데 그것도 모자라 여인의 몸에는 내공이 한가득 실려 있었으니, 초절정 고수 둘을 의실에 눕게 만드는 사람이 존재한다는 사실이야말로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아이고, 죽겠습니다. 온몸이 안 아픈 데가 없으니.”
“말도 말게나. 부러진 뼈가 아파서 밤에 잠도 이루지 못할 지경이네.”
천량도사는 여인을 받아 내기 위해 손을 뻗었다가 어깨뼈가 어긋나고, 구르는 동안 다리가 부러졌다.
하지만 부상이 도철용만 하지는 않았기에 그나마 다행이라면 다행이다.
“척추뼈가 어긋나고, 목뼈가 뒤틀려서 아픈 것이 정도를 넘었습니다. 그야말로 딱 죽을 만큼 아픕니다.”
“큰일일세. 공동파의 일을 알아보기 위해서 온 것인데 움직이지를 못하니, 우리가 이렇게 누워 있는 동안에도 현황우 그놈이 또 무슨 짓을 할지. 또한 인육을 파는 곳이 더 있을지도 모르니 하루빨리 막아야 하는데, 누워 있기만 하는 지금의 신세가 한탄이 나오는구먼.”
“그나마 내공이 있으니 다른 사람에 비하여 빨리 낫는 것을 다행으로 생각하시지요. 앞으로 삼사일 정도면 움직일 수 있을 것입니다.”
편치 않은 마음으로 마음속에 다급함이 가득해지는 것은 도철용도 마찬가지다.
일의 원인을 생각해 보면 참으로 어이없는 일이지만, 그렇다고 갑자기 날아온 여인에게 책임을 물리기도 힘든 상황.
여인은 그때 땅을 뒹굴고 난 이후에 정신을 잃고 지금까지도 눈을 뜨지 못한 채이다.
“약을 가져왔습니다.”
“허허, 갑자기 찾아온 우리 때문에 의원 양반이 고생이구먼.”
“환자야 언제나 갑자기 찾아오는 법입니다. 미리 아프다고 하고 오는 사람은 없으니 말입니다.”
천량도사가 상반신을 일으켜 의원에게 고맙고도 미안한 마음을 표정으로 드러내자, 의원은 침통을 꺼내어 곁에 두며 괜찮다는 듯한 표정을 짓는다.
의원이 대침과 장침을 꺼내어 손에 들었다.
“오늘은 어긋난 뼈를 맞추고, 부러진 다리가 빨리 나을 수 있도록 할 것입니다.”
“허허, 이렇게 신경을 써 주니 고맙기만 하네. 헌데, 의원께서는 어째 그리 땀을 흘리고 계시는가? 얼굴색도 좋지 않으니 우리보다 환자처럼 보일 정도네.”
“그것이…….”
의원의 얼굴에 어두운 기색이 감돌았다. 천량도사와 도철용은 의원의 행동에 이상함을 느끼며 동시에 입을 열었다.
“무슨 일이 있는 건가?”
“확실해지면 말씀을 드리려 했습니다만, 아무래도 미리 대처를 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다름이 아니라 어제 데리고 오신 여인이 병에 걸린 것 같습니다.”
“병에 걸렸다니? 무슨 병이란 말인가.”
“혹, 어제 여인을 데려오는 동안 땀을 많이 흘리고 있지 않았습니까? 몸에서 안 좋은 냄새도 많이 나고요.”
천량도사와 도철용의 눈알이 동시에 허공으로 향했다.
이리저리 눈알을 굴려 가며 기억을 되짚어 보는 순간.
“분명 땀을 흘리고 있었지. 몸 냄새도 의원의 말대로 지독했다네.”
“그렇다면 거의 십중팔구는 걱정해야 할 상황일 것입니다. 데려온 여인은 어제 즉시 격리하여 치료하는 중입니다.”
“격리?”
천량도사와 도철용의 목울대가 일렁이며 침이 넘어간다.
천량도사는 한껏 긴장한 표정을 숨기지 못하고 끝내 의원에게 질문을 던졌다.
“심각한 병인가? 혹, 옮는 병은 아니겠지?”
“아마도 호열자(虎列刺-콜레라)가 아닌가 합니다.”
“호열자!”
도철용과 천량도사의 심장이 ‘쿵’ 하고 떨어졌다.
호열자가 어떤 병인가.
한번 창궐하면 수십만 명의 사람이 죽는 병으로, 이 병에 걸리면 무공도 소용없이 목숨을 잃는 경우가 태반인 중병이다.
그리고 천량도사와 도철용이 걱정하고 있는 대로 이것은 빠르게 전염이 되는 돌림병이기도 했다.
그런데 호열자에 걸린 여인을 부축하여 제법 먼 길을 돌아 의원에게 왔으니, 어쩌면 이미 자신들도 병에 걸렸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식은땀이 흐르기 시작한다.
그때, 의원이 제법 환한 웃음을 지으며 환단 하나를 꺼내 천량도사와 도철용 앞에 놓았다.
“제 스승님께서 전수해 주신 호열자의 특효약입니다.”
“그런 약이 있다는 말인가!”
“장담하건대 이 약을 먹으면 최소한 호열자로 인해 죽지는 않을 것입니다.”
“허허, 명의를 만났구먼.”
천량도사가 안도의 표정과 함께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도철용은 조금 의심스럽다는 듯 의원을 바라보았다.
너무 형편 좋게 약이 나왔기 때문이었다.
호열자는 특효약이 없는 무서운 병이다. 그런데 때마침 튀어나온 특효약이라니?
“두고 갈 테니 드십시오. 저는 두 분의 치료가 끝난 후 빨리 약재를 사들이러 나가야 합니다. 혹시 호열자가 창궐이라도 하면 큰일이라 미리 약을 만들어야 합니다.”
“미리 만들어야 할 정도인가?”
“저 역시도 호열자에 걸릴 수 있으니 미리 약을 만들어 놔야 하지 않겠습니까.”
의원은 도철용 앞에 밀어 놓은 약을 거들떠보지도 않고 대침을 꽂아 치료를 시작했다.
그 모습이 안달하는 마음이 없는 것으로 보아 억지로 먹일 생각은 없는 듯하다.
도철용은 침을 꿀꺽 삼켰다.
‘이 약을 먹어야 하는 것인가. 아니면 그냥 무시해야 하는가.’
의심 많은 도철용의 이마에 고이던 식은땀이 ‘주룩’ 하고 흘러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