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4화
지휘에 따라 뿔뿔이 흩어져 있던 삼천 명의 금군.
이들이 북소리에 맞춰 일제히 포위망을 짜고 해적들을 몰아붙였다.
항주 땅에 있던 해적들은 금군에게 쫓기며 한군데로 몰려들었다.
원형의 포위망이 거의 완성되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금군이 만드는 포위망의 선봉에는 금채홍과 서하린, 건청과 월영, 그리고 차경철과 도철용이 있었다.
각기 도망친 해적들을 찾아 제거하다가 금군이 모여 포위진을 만들자 합류한 것이었다.
그들이 검 한 번을 휘두르면 해적들이 십수 명씩 날아가고.
비침을 날려 한꺼번에 수십 명씩 죽여 버리니.
금군만으로 해적을 상대하는 것보다 수십 배는 빠르게 해적들을 소탕하고 있었다.
다만 천량도사만은 포위망에서 빠져나간 해적들의 뒤를 쫓고 있었다.
잔당 소탕이었다.
그렇게 해적들을 포위하고 학살을 하는 동안.
어느새 마지막으로 남은 해적이 검과 도끼를 양손에 들고 여자를 인질로 잡아 시장의 상품대 위에 올라가서 고함을 지르고 있었다.
“X발, 그냥 보내 주면 이 여자는 풀어 준다고! 이 새끼들아. 그러니까 이 포위망을 풀어! 안 그러면 당장 여자를 죽일 거다.”
“이미 지은 죄가 크지 않더냐. 여자를 풀어 주면 참작하여 죄를 조금 가볍게 해 주겠다. 그러니 어서 항복해라!”
“웃기지 마! 너희들은 항상 그렇게 말하고 항복하면 딴소리하잖아! 이 X새끼들아!”
금군은 난감했다.
마지막에 와서 인질을 잡고 있었다는 것은 처음부터 저 여인을 끌고 다녔다는 것이었다.
‘그만큼 저 여인이 받은 충격이 대단하겠지.’
빨리 구해 주고 싶었다.
하지만 딱히 방법도 없어서 움직이지 못하고 있을 때.
금채홍이 앞으로 나섰다.
“나를 인질로 대신 잡아. 그 여자분은 풀어 주고.”
“개소리! 네년, 피를 뒤집어쓰고 있잖아. 너 무인이지!”
금채홍은 해적과 말을 하는 동안 슬그머니 강선을 풀어 해적의 몸에 감았다.
“내가 무인인 것이 걱정된다면 검도 버리고 인질이 되어 주지. 이러면 안심이지?”
“가…… 가까이 오지 마! 진짜 죽여 버릴 거야!”
해적이 두려움 끝에 도끼를 들어 올리는 순간.
금채홍은 강선을 잡아당겼다.
휘리리리릭!
순식간에 해적이 들고 있는 도끼가 허공에 멈추고 여인의 목에 들이대고 있는 검이 앞으로 당겨졌다.
촤라라라락!
“크학!”
양손이 모두 강선에 묶인 해적의 신형이 금채홍의 앞으로 튀어나왔다.
금채홍은 무표정하게 검을 휘둘렀다.
이제는 너무도 많은 사람을 죽여서 아무런 감정도 생기지 않았다.
휘이이잉. 촤아아악.
순간 해적의 양팔이 허공으로 떠올랐다.
해적은 자신을 덮쳐 오는 수십의 금군을 보며 울부짖었다.
“내 팔! 아아악. 저리 가. 아무도 다가오지 마! 나는 여기에서 죽을 사람이 아니야! 반드시 내 팔을 저렇게 만든 저년한테 복수하기 전에 난 못 죽어! 크아아아악!”
“복수 같은 소리 하고 있네. 너는 특별히 오늘을 넘기기 전에 목을 칠 거다.”
마지막 남은 해적이 비참하게 끌려 나가자, 나머지 금군들도 혹 남아 있을지 모를 잔당을 소탕하기 위하여 사방으로 흩어졌다.
‘이제 모두 끝났나.’
금채홍은 노을을 반사하는 햇빛에 눈을 찡그렸다.
새벽부터 시작된 싸움은 노을이 깔리며 해 질 무렵인 지금에서나 끝나고 있었다.
덜덜덜덜.
인질이 되었다가 풀려났는데도 움직이지 못하고 떨고만 있는 여인.
금채홍은 상품대에 올라서 여인을 일으켜 세우려고 했다.
그런데 얼굴이며 몸까지 피가 흐르지 않는 곳이 없는 금채홍에게 너무나 놀랐는지.
“꺄아아악. 저리 가. 사람 살려!”
“…….”
금채홍을 밀치며 급히 달려서 골목길로 들어갔다.
여인을 향했던 손길이 갈 길을 잃었다.
금채홍은 자신의 피가 묻은 손을 내려다보았다.
‘하긴, 내 몰골이 지금 엉망이니까 무서울 만도 하지. 정신적인 충격이 너무 강해서 그랬을 거야. 그래…… 분명히 그랬을 거야…….’
잠시 멍하니 상품대 위에 서 있기를 일각.
금채홍은 상품대에서 내려와서.
비척거리며 천천히 별유천지를 향해 걸어갔다.
* * *
다음 날 늦은 밤.
혈천회의 주인 하은월은 조금 기묘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강소성과 절강성, 그리고 복건성을 육만의 해적과 왜구로 공격했다. 각 지역에 심어 둔 세작(細作)들이 군항과 지리적인 약점을 잘 파악했더구나. 또한 약탈한 재물이 이번 공격에 들어간 돈을 메우고도 남았다.”
“그러하옵니다.”
“그런데 단 한 곳, 항주만은 어찌 된 일이냐.”
보고를 올리던 남자가 무릎을 꿇고.
눈을 내리깐 채 고개를 깊숙이 숙였다.
“아뢰옵기 황송하오나 저희도 정확하게 모르옵니다. 어찌 눈치를 챘는지 세작까지 전부 발각되어 처형당했다는 것밖엔…….”
“재미있군. 세작을 심은 지 일 년이나 되었는데 발각되었다니 말이다.”
하은월이 자리에서 일어나 고개 숙인 남자의 앞에서 자세를 낮추며 귓가에 조용히 말했다.
“알아내라. 항주에 무엇이 있는지. 왜 그곳만 해적들이 힘을 못 썼는지. 항주는 중요한 곳이라 다른 곳보다 훨씬 많은 일만 이천의 해적을 보냈다. 그런데 단 한 명도 돌아온 자가 없구나. 이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잘 알고 있겠지?”
하은월의 낮은 속삭임에 고개 숙인 남자는 몸을 떨었다.
낮아진 목소리는 하은월이 정말로 화가 났다는 것을 의미했기에.
그는 떨리는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대답했다.
“시간을 주시옵소서. 지금은 공격을 받은 곳의 경계가 심하옵니다. 외부인이 함부로 얼굴을 들이밀 수 있지 못하옵니다.”
“육십 일. 그 안에 모든 것을 알아내라.”
“알겠사옵니다, 천자(天子)님.”
고개 숙인 남자가 하은월을 천자라고 불렀다.
하늘이 내린 아들.
황제의 별칭으로 불린 하은월이 몸을 일으키고 의자에 앉았다.
황제가 앉을 법한 의자다.
하은월이 방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 말했다.
“이번 공격에 성공한 해적들과 왜구들에게 상을 내리고, 오늘은 술과 고기를 마음껏 먹여라. 그리고 그들이 가져온 정보를 분석하여 앞으로의 일에 실패가 없도록 하라.”
“알겠사옵니다.”
사람들이 물러서자.
텅 빈 방 안에서 하은월은 눈을 감았다.
‘항주에 유명한 무림 문파가 있는 것도 아니다. 하물며 유명한 무인이 있다는 이야기도 들은 적이 없다. 그런데 일만 이천 명이 증발이라도 하듯 모두 죽었다.’
육십 일의 시간을 주었지만, 과연 항주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아낼 수 있을까.
‘아마 힘들겠지. 저놈들의 실력을 믿느니 지천번회에 부탁하는 편이 나을 것 같군.’
하은월은 적임자로 남궁무애의 얼굴을 떠올렸다가.
이내 인상을 쓰고 고개를 저었다.
‘요즘 이상하게 연락이 안 된다. 며칠 전에도 급한 일로 몇 번의 전서구를 날렸는데 한 번을 답장이 없고. 멍하게 있기는 해도 게을렀던 적은 없는 사람인데.’
아무래도 이상한 기분이 마음을 들쑤신다.
직접 확인하는 편이 낫다고 생각한 하은월은 문밖에 있는 신하에게 큰 목소리를 내었다.
“밖에 누구 없느냐.”
“말씀하시옵소서, 천자님.”
“잠시 나갔다 오겠다. 이틀 정도의 일정이다.”
“호위를 준비하겠사옵니다.”
“친구를 만나는 길이다. 호위는 필요 없다.”
적당히 눈에 안 띄는 옷으로 갈아입으면서 하은월은 생각했다.
‘답신이 안 오는 이유만이라도 알아야겠다. 설마 그럴 일은 없겠지만 배신하면 제일 골치 아픈 것이 남궁무애다.’
부디 이 검을 쓸 일이 없기를 바라면서.
하은월은 어용지천참대검을 허리에 차고 남궁무애가 있는 흑룡강성으로 향했다.
* * *
다급하게 날린 전서구가 천일영에게 도착한 것은 하루하고도 반나절이 지나서였다.
‘윤의강이 또 투덜대면서 보낸 편지인가.’
편지를 펼쳐 보니 장문의 글이 쓰여 있었다.
천일영은 편지를 읽다가.
끝내 마지막 글자까지 읽지 못하고 떨리는 손으로 종이를 접었다.
“아무래도 잠시 집에 다녀와야겠다.”
“무슨 일이 생겼어?”
바닷가에서 남궁무애가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항주에 집이 있는데 해적들의 공격을 받았다고 하는구나. 다들 무사하다고는 하는데 아무래도 걱정이다.”
“항주? 공자의 집이 항주였어?”
남궁무애가 큰 눈을 더욱 크게 떴다.
‘혈천회에서 절강성을 공격한다고 하더니 그것이 항주였나.’
하필이면 그곳이 집이라니.
눈앞에서 급히 등을 돌리는 공자의 모습에.
남궁무애는 흔들리는 눈동자로 잠시 망설이다가.
급히 손으로 천일영의 옷깃을 잡았다.
“나도 같이 가!”
“항주까지 말이냐.”
“응, 내가 뭔가 도울 일이 있을지도 모르잖아. 할 수 있는 일이 있으면 도울게. 공자의 가족이 안심할 수 있도록 보초라도 설까 하는데…….”
말끝을 흐린다.
사실 만난 지 며칠 되지도 않은 사람의 집까지 같이 간다니.
‘조금 억지인가.’
그래도 남궁무애는 당당하게 천일영을 바라봤다.
“고맙다. 같이 있어 준다면 든든할 것 같구나.”
“정말? 지금 출발할 거지?”
천일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안아도 될까?”
“응? 왜?”
반문하면서도 남궁무애는 천일영의 손길을 거부하지 않았다.
“하루 만에 항주에 가려면 이 방법뿐이다. 미안하다.”
“하루 만에?”
파앙!
천지일축공으로 달려 나가자.
남궁무애는 빠르게 변하는 풍경을 보며 생각했다.
‘어쩐지 조금 눈치채고 있었지만 역시 공자는 초절정 고수가 아니구나. 그보다 높은 경지. 아마도 나와 같은 경지일까.’
아끼는 조개들이 다녀올 때까지 무사할까 잠시 걱정이 되기는 했지만.
지금은 항주로 동행하는 것을 허락한 이 공자가 더 소중했기에.
남궁무애는 편안한 표정으로 항주로 가는 풍경을 만끽하기 시작했다.
* * *
다음 날 아침.
끼익.
예고도 하지 않고 남궁무애가 사는 장원의 문을 연 하은월은 인기척이 없는 것을 느꼈다.
‘방 안에 들어가지도 않고 툇마루에서 잠이 들곤 했는데.’
텅 빈 툇마루에는 새벽이슬이 고스란히 덮여 있었고.
남궁무애가 툇마루에 밤사이 없었다는 것을 그 흔적으로 알려 주었다.
드르르륵.
방문을 열었다.
‘여기에도 없는 것인가. 이불을 보니 밤에 아예 들어오지도 않은 것 같은데.’
냄새가 없었다.
잠을 자고 일찍 나갔다면 체취가 남아 있어야 했는데.
‘집에 들어오지 않았다는 말이군. 여태 이런 적은 한 번도 없었는데. 잠깐, 그러고 보니…….’
하은월은 언젠가 남궁무애가 했던 조개 이야기가 생각났다.
어디에 있는지 알려 주지 않겠다고 고집스러운 눈으로 말했던 바닷가.
그곳이 너무 좋아서 매일같이 간다고 했다.
하루를 온전히 그곳에서 보낸다고도 했다.
‘이 바보가 조개에 미쳐서 집도 안 들어온다고?’
장소를 이야기해 주지는 않았지만, 어디인지는 안다.
서후량에게서 이미 들었으니까.
하은월은 기억을 더듬어 빠르게 바닷가로 갔다.
그리고 도착한 바닷가.
하지만 바닷가는 비린 냄새만을 흩날리며 아무도 없는 적막함만이 남아 있었다.
‘여기에도 없다고? 분명 전서구는 편지통이 비워진 채 돌아왔다. 전부 편지를 받았는데! 답장도 없고 사라졌다니.’
잠시 당황하며 생각에 잠기는 사이.
하은월의 눈에 모래사장이 보였다.
발자국.
‘하나만 있어야 할 발자국이 두 개? 심지어 하나는 남자의 것이군.’
오십 년의 세월 동안 자신을 제외하고.
남궁천조차 가족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서후량만을 부하로 생각한 채 일절 모든 사람과 연관되지 않으려는 것이 남궁무애였다.
그런데 마지막으로 금존청을 같이 마신 것이 며칠이나 되었다고 그새 누군가를 만났을 리가.
‘게다가 가장 소중한 가족이라고 하던 이 조개들을 두고 갔다고?’
움직이지 않을 것 같은 조개는 의외로 항상 여기저기로 이동했다.
아마 매일같이 남궁무애는 조금씩 움직이며 제자리를 떠난 조개들을 다시 한자리로 모았을 터.
그것으로 가족이라는 모양을 애써 유지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미 제 갈 길을 가기 시작한 조개들은.
벌써 남궁무애의 품을 떠나기 시작했다.
하은월은 황망한 시선으로 투명한 바닷속의 조개를 보았다.
있을 수 없는 일에 대한 믿을 수 없는 눈길이었다.
왜냐하면 남궁무애는 일백 년 전.
한 명의 동생과 어머니를 제외하고.
자신의 아버지와 오빠, 그리고 언니들까지 전부 직접 죽여 버리고 난 이후.
다시는 가족을 버리지 않겠다고 맹세했었기 때문이었다.